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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세계문학전집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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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쪽 | 규격外
ISBN-10 : 8954655033
ISBN-13 : 9788954655033
야만인을 기다리며(세계문학전집 174) 중고
저자 J. M. 쿳시 | 역자 왕은철 | 출판사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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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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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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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간의 잔혹 행위와 불평등에 대한 초현실적인 우화!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J. M. 쿳시의 대표작 『야만인을 기다리며』. 저자의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세계의 정수가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걸작이다. 어느 제국의 변경 도시를 통치하는 치안판사인 ‘나’의 자기고백적 서사를 통해 제국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제국에 공모하는 개인의 허위를 폭로하는 대작이다.

어느 제국의 평화로운 변경 도시에 수도의 제3국 소속 경찰들이 파견되어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을 잡아들이고 잔인하게 고문하는 일이 벌어진다. 변경을 통치하는 치안판사인 ‘나’는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젊은 야만인 여자에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끌리고, 그로 인해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생각지도 못한 치욕을 겪게 되는데…….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시적인 문장으로 담아낸 이 작품은 치밀하게 짜인 서사를 통해 식민주의가 자행하는 억압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과 폭력의 사슬에 주목하고 목소리를 내온 저자는 이 작품에서 특별히 남아프리카라는 특정 공간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식민주의로 인해 생겨나는 폭력과 억압의 사슬이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국한된 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일임을 강조한다.

저자소개

저자 : J. M. 쿳시
194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케이프타운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스틴 텍사스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부터 약 3년 동안 뉴욕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존스홉킨스, 하버드, 스탠퍼드, 시카고 대학에서도 강의했다. 1972년 고국으로 돌아가 케이프타운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1년 정년퇴임했다.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애들레이드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1974년 『어둠의 땅』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한 쿳시는 두 번째 소설 『나라의 심장부에서』로 남아프리카 최고의 문학상인 CNA상을 받았고, 『야만인을 기다리며』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마이클 K』와 『추락』으로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는다는 전례를 깨고 부커상을 두 차례 수상했으며, 에트랑제 페미나 상, 예루살렘상, 아이리스 타임스 국제소설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리고 2003년 “정교한 구성과 풍부한 대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서구문명의 도덕적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는 평과 함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 『포』 『철의 시대』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슬로우 맨』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자전소설 3부작 『소년 시절』 『청년 시절』 『서머타임』 등이 있고, 다수의 에세이와 연구서를 집필했다.

역자 : 왕은철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으며 유영번역상, 전숙희문학상, 한국영어영문학회학술상, 생명의신비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전북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피의 꽃잎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연을 쫓는 아이』 등 40여 권의 역서가 있으며, 『문학의 거장들』 『J. M. 쿳시의 대화적 소설』 『애도 예찬』 『타자의 정치학과 문학』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 등의 저서가 있다.

목차

야만인을 기다리며 _7
해설 | 종달새처럼 솟구쳐 독수리처럼 내려다보는 상상력 _257
J. M. 쿳시 연보 _267

책 속으로

이 여자한테는 몸속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이리저리 들어갈 곳을 찾아 헤매는 표면만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게 그녀를 고문했던 자들이 비밀을, 그들이 그게 무어라 생각했든 간에, 추궁하며 느꼈던 걸까? 처음으로 나는 그들에게 메마른 동정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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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한테는 몸속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이리저리 들어갈 곳을 찾아 헤매는 표면만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게 그녀를 고문했던 자들이 비밀을, 그들이 그게 무어라 생각했든 간에, 추궁하며 느꼈던 걸까? 처음으로 나는 그들에게 메마른 동정심을 느낀다. 몸을 지지고 찢고 베어서 다른 사람의 은밀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얼마나 자연스러운 착각인가! 여자는 내 침대에 누워 있다. 하지만 굳이 침대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연인처럼 행동한다. 나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몸을 씻겨주며, 그녀를 어루만지고, 그녀 곁에서 잠든다. 하지만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그녀를 의자에 묶고 두들겨팰 수도 있다. 그렇다고 덜 친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_74쪽

왜 내 몸의 한 부분이 불합리한 욕구와 잘못된 기대감과 더불어, 욕망의 통로로서 다른 어느 부분보다 우선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때때로 성기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기생해 살면서 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내 살에 달라붙어 사는 우둔한 동물인 것 같았다. 나는 물었다. 내가 왜 너를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데리고 다녀야 하지? 네가 다리 없이 태어나서 그러냐? 네가 나 대신 개나 고양이한테 뿌리를 박고 산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_78쪽

나는 생각한다. ‘혹은 어쩌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내 입술이 움직인다. 소리 없이 말을 만들고 다시 만든다. ‘혹은 어쩌면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오직 살아내야 하는 건지 모른다.’ _108쪽

나는 소금 지대를 터벅터벅 걸으며, 내가 그처럼 먼 곳에서 온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낯익은 곳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내 침대에서 죽어, 옛친구들의 조문을 받으며 무덤으로 가는 것뿐이리라. _125~126쪽

나는 처음 감방에 들어와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건 큰 고통이 아닌 듯했다. 생각과 기억을 갖고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_142쪽

지금 이 순간 군중으로부터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해진 건, 막 일어나려고 하는 잔혹행위에 내가 오염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가해자들의 무기력한 증오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 없다. 그러니 나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 일에 대해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자. _172쪽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고통의 정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육체 속에서, 육체로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내게 보여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쥐어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넣어지고, 그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토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싶을 정도로 빠르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육체로서 말이다. _190쪽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하오? 나는 이 질문을 하고 싶소. 이건 사형집행인들이나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늘 물어보고 싶었던 거요. _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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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야만인이 없다면 제국은 어찌될 것인가? 폭력과 억압의 사슬로 드러나는 제국주의의 모순과 허구 종달새처럼 솟구쳐 독수리처럼 내려다보는 상상력을 지닌 작가. _네이딘 고디머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J. M. 쿳시의 대표작 『야만인을 ...

[출판사서평 더 보기]

야만인이 없다면 제국은 어찌될 것인가?
폭력과 억압의 사슬로 드러나는 제국주의의 모순과 허구
종달새처럼 솟구쳐 독수리처럼 내려다보는 상상력을 지닌 작가. _네이딘 고디머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J. M. 쿳시의 대표작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번으로 출간되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어느 제국의 변경 도시를 통치하는 치안판사인 ‘나’의 자기고백적 서사를 통해 제국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제국에 공모하는 개인의 허위를 폭로하는 대작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시적인 문장으로 통렬하게 드러내는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후기식민주의 문학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거장 J. M. 쿳시의 문학세계가 집약된 역작

J. M. 쿳시는 소설과 에세이,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다재다능한 작가다. “현재 생존해 있는 영어권 소설가 중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유명하며 수상 이력이 많은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문학상과 더불어 영연방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맨부커상의 전신)을 최초로 두 차례 수상했고, 200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쿳시 작품세계의 정수가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걸작이다. 어느 제국의 평화로운 변경 도시에 수도의 제3국 소속 경찰들이 파견되어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을 잡아들이고 잔인하게 고문하는 일이 벌어진다. 변경을 통치하는 치안판사인 ‘나’는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젊은 야만인 여자에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끌리고, 그로 인해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생각지도 못한 치욕을 겪게 된다. 치밀하게 짜인 서사를 통해 식민주의가 자행하는 억압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걸작이다.
콘스탄틴 카바피Constantine Cavafy의 시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제목과 모티프를 빌려온 이 소설은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불분명한 무대를 전면에 내세운다.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과 폭력의 사슬에 주목하고 목소리를 내온 쿳시는 이 작품에서 특별히 남아프리카라는 특정 공간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식민주의로 인해 생겨나는 폭력과 억압의 사슬이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국한된 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일임을 강조한다. 이 소설의 제국주의자들이 ‘야만인들’에게 가하는 고통과 폭력과 그들이 조장하는 불안과 애국심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해묵은 것이다. 카프카와 포크너를 강하게 환기하는 이 작품은 인종 간의 잔혹 행위와 불평등에 대한 초현실적인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조지프 콘래드의 전통을 잇는 정치 스릴러. _스웨덴 한림원

나이든 치안판사인 ‘나’의 통솔하에 있는 평화로운 변경 도시에 야만인들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공포가 고조됨에 따라 수도에서 파견된 제3국 소속 졸 대령이 제국 수호의 최전선인 이 정착지를 시찰한다. ‘나’는 속마음으로는 제3국의 행보에 매우 비판적인데, 이 모든 소문이 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 때문에 생겨난 가짜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러한 꿈들은 너무 편해서 생겨난다. 내게 야만인들의 군대를 보여준다면야, 나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제3국은 민심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이 사라지거나 식료품이 없어지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야만인들이 몰래 다녀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공포에 떤다. 어느 소녀가 강간을 당하는 일이 생기자, 그녀의 친구들은 야만인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다. 범인이 갈대밭 속으로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는데, 못생긴 얼굴이 야만인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제3국은 “야만인들이 당신의 불알을 구워서 먹을 거요” 따위의 말로 사람들의 공포를 부채질할 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야만인들을 향한 미움의 근거가 식사 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사실 말고는 전무하다고 주장하는 치안판사의 말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국가의 수호자들이며 폭동 전문가들이고 진실의 신봉자들이며 취조 전문가들”인 졸 대령의 부대는 야만인들을 진압하러 출정한다. 그들은 성문 밖에서 물고기를 잡아 근근이 살아가는 힘없는 부족을 엉뚱하게 잡아들여 돌아와서는 시민들에게 야만인들은 실재하는 적임을 눈으로 확인시켜준다. 제3국은 계속해서 야만인들을 찾는답시고 소탕작전을 벌이지만, 제국에 위협을 주는 진짜 야만인은 단 한 명도 없고 국경 너머 힘없는 민간인들만 고문당하고 짓밟힐 뿐이다. ‘야만인’이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야만인’은 내부 문제의 원인을 상상의 외부인에게 돌리려는 국가의 손쉬운 해결책인 것이다. 쿳시는 이러한 제국의 속성을 시적인 문장으로 명료하게 포착해낸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제국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219~220쪽)

미약한 속죄, 그리고 허위와 공모

졸 대령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다가 눈이 반쯤 먼 야만인 여자를 발견한 ‘나’는 그녀에게서 설명하기 힘든 매혹을 느낀다. 집안일을 해달라는 명분으로 그녀를 자신의 거처로 들이고는, 매일 밤 그녀의 몸을 씻겨주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에 몰두한다. 비누로 거품을 내어 발가벗은 그녀의 몸을 씻기고, 물기를 닦아준 후에는 몸에 아몬드 오일을 발라 마사지한다. ‘나’는 그녀의 몸을 문지르는 동작의 리듬에 정신없이 빠져들고, 시간 밖에 존재하는 듯한 텅 빈 황홀감을 느낀다.
‘나’의 행동은 야만인 여자의 몸에 새겨진 제국의 폭력을 지워주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속죄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으나, 쿳시는 ‘나’와 같은 온정적 제국주의자의 허위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야만인’ ‘미개인’ 들에 대한 혐오가 편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고 있고 제3국이 자행하는 끔찍한 고문에 반대하다가 “국가의 적”으로 몰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제국에 봉사하는 ‘나’는 야만인 여자를 고문했던 자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며 제국의 폭력성에 일정 부분 공모하고 있다. 야만인 여자를 목욕시키는 일에 빠져든 저의도 완전히 순수하지 않음을 그 스스로도 느낀다. “내가 그녀에게 끌린 건 그녀의 몸에 난 상처 때문이었는데, 그 상처가 충분히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실망했던 걸까?” ‘나’는 여자의 몸을 씻기며 상처를 지우려는 자신의 모습에서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부당한 만족감을 느꼈던 건 아닐까. 고문을 당했던 정황을 낱낱이 캐묻는 ‘나’의 질문에 “얘기하는 데 지쳤어요”라며 대답을 고사하는 야만인 여자는 ‘나’의 허위성을 진작 느꼈던 것이다.

그녀가 내 침대에서보다 채소의 껍질을 벗기면서 더 행복해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가 막사 정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을 조여오는 허위의 독기를 느낀 게 틀림없다. 욕망으로 가장한 질투심과 동정심과 잔인성의 허위 말이다. (…) 그녀는 처음부터 내가 허위적인 유혹자라는 걸 알았다. (222쪽)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선악의 단순한 이분구조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제국주의 폭력의 여러 면모를 다층적으로 살피는 위대한 작품이다. ‘나’는 “단 한 명의 의로운 사람”이 아니며,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달콤한 거짓말일 뿐이다. 졸 대령과 나는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와 졸 대령의 제국이 ‘야만인’에게 가하는 잔인한 폭력을 마주한 독자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야만인’은 누구인가? 그들과 우리 중 누가 야만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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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회원리뷰

  • 불안한 하루가 또 그렇게 아슬아슬한 시간 속으로 사라집니다. 문명의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적과 아군, 문명...

    불안한 하루가 또 그렇게 아슬아슬한 시간 속으로 사라집니다. 문명의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적과 아군,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뚜렷이 한다는 것이고, 그와 같은 경계를 높이 세울수록 우리 곁에서 평화는 멀어진다는 것이요, 생명에 대한 우리의 도덕성은 한없이 추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문명의 공간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위태로운 시간들을 함구한 채 비겁의 시간을 견뎌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2003년 노밸문학상 수상 작가인 J.M. 쿳시의 대표작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문명의 역사를 쓰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뒷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영어권 소설가 중 가장 유명한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쿳시는 그의 다른 작품 <추락>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품위와 야만성을 가장 밑바닥까지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때로는 그의 묘사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참혹한 것이어서 질끈 눈을 감고 싶을 때도 더러 있지만 작가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습니다.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지금은 야만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p.66)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어느 제국의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입니다.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 경작지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변경의 하급 관리를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법정업무를 주재하는 게 '나'의 주된 업무입니다.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살다 가는 것 이상을 바란 적 없는 소박한 야망의 소유자이기도 한 '나'는 야만인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변경의 치안판사로서 야만인들에 대한 경계보다는 상생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정의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는 '나'의 철학에 기초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가 누리던 평화는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야만인 부족들이 연합전선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징후와 함께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변경의 불안한 징후를 잠재우기 위해 수도에서 파견한 보안청 소속의 졸 대령과 경찰들은 변경의 유목민들이나 원부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특별한 죄목도 없이 고문을 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취조를 합니다. 졸 대령이 보고를 하기 위해 수도로 돌아간 후'나'는 졸 대령이 끌고 왔던 야만인 여자를 돌봐주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당해 눈이 멀고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비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나'는 야만인 여자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과 동정심, 남자로서의 성적 욕망을 동시에 느낍니다. 졸 대령이 수도로 떠난 후 겨울, '나'는 야만인 여자를 '나'의 숙소에 머물게 합니다. '나'는 예전처럼 고전을 읽고, 수집한 유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호숫가에서 영양을 사냥하는 등 평화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녀를 어루만지는 행위를 하다가 도끼로 찍힌 것처럼 잠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녀의 몸 위에 엎어진 채 망각 속으로 빠져들다가 한두 시간 후에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목이 마른 상태로 잠에서 깬다. 꿈조차 꾸지 않는 이 상태가 나에게는 죽음, 혹은 시간 밖에 존재하는 텅 빈 황홀경 같다." (p.54)

     

    변경에서 삼 년간의 복무연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을 대체할 징집병 파견부대가 도착을 했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나'는 야만인 여자를 그녀의 부족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두 명의 파견병과 사냥꾼 한 명을 대동하고 말이죠. 잔혹한 날씨와 험한 지형을 뚫고 마침내 '나'는 여자를 그녀의 부족에게 인계한 후 무사히 되돌아 옵니다. 그러나 보고도 없이 여러 날 자리를 비웠던 게 화근이 되어 '나'는 곧바로 수감됩니다.

     

    "나는 처음 감방에 들어와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건 큰 고통이 아닌 듯했다. 생각과 기억을 갖고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p.142)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나'는 잔인한 고문과 갖은 수모를 겪게 됩니다. 내가 수감되어 고초를 겪는 동안 졸 대령이 이끄는 정규 부대는 야만인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을 합니다. 마을에 남겨진 군인은 많지 않았습니다. 원정을 떠난 부대로부터는 연락이 없고 야만인들의 반격이 있은 후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게 됩니다.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농사를 망친 까닭에 사람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마을을 떠납니다. 간수들도 이제 '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떠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겨울을 대비합니다. '나'는 이제 치안 판사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야만인들에게 패한 후 졸 대령 일행이 초라한 모습으로 복귀하는데...

     

    "그들은 언젠가 자기들도 아버지처럼 강해지고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잘 낳을 것이며,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잘 살다가 늙어가리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 사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걸까?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p.219)

     

    문명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언제나 '야만인'이라는 가상의 적을 상정하곤 합니다. 가까운 과거의 기록을 보더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나 시리아 내전이 그러했고, 최근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총기 테러 사건이 그렇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남과 북 역시 각자의 마음 속에 가상의 야만인을 품은 채 서로에 대한 적대감만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쿳시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나'를 통해 말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이며, 정의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작가는 우리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역사의 바다에 저마다의 부표를 띄운 채 영역 밖 야만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역사의 바다를 항행하는 우리들의 불안한 하루가 아슬아슬한 시간 속으로 또 그렇게 무참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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