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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침묵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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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쪽 | A5
ISBN-10 : 8963705714
ISBN-13 : 9788963705712
윤휴와 침묵의 제국 중고
저자 이덕일 | 출판사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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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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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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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벗이 되고자 했던 시대의 개혁가, 윤휴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후 10년, 이덕일의 회심의 역작『윤휴와 침묵의 제국』.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조선 왕 독살 사건>의 저자 이덕일이 침묵 속에 숨겨져 있던 윤휴의 삶과 사상을 10여년에 걸친 연구 끝에 오롯이 되살렸다. 이 책은 1617년 대사헌 윤효전의 아들로 태어나 1680년에 사약을 받고 죽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윤휴의 삶을 추적하고, 송시열과 노론 추종 세력으로부터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철저하게 금기시된 윤휴의 삶과 사상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다. 조선 중후반기의 최대 라이벌이 였던 송시열과 윤휴의 이야기에서부터 윤휴의 죽음 이후, 침묵의 제국이 된 조선의 모습까지 모든 실상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저자소개

저자 : 이덕일
저자 이덕일은 1961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이덕일은 숭실대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에「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그는 역사학자로서의 사료에 대한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과, 대중과 호흡하는 집필가로서의 본능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체로 한국사에서 숨겨져 있고 뒤틀려 있는 가장 비밀한 부분을 건드려왔다. 그리고 언제나 발표하는 저술마다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역사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왔다. 그는 모든 권위와 기득권을 거부하며 주류 학계에 편입되지 않고, 그들이 무관심연하거나 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었고, 방송, 신문, 잡지의 기고 활동과 대중 강연 등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지식과 열정을 함께 나누는 데에 힘을 쏟았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조선 왕을 말하다』 『조선 왕 독살 사건』등은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목차

서문 5

1장 중원대란(中原大亂)과 북벌 포의(布衣) 신
포의(布衣) 신 일어나다 17
오삼계 거병하다 22
산해관 전역 28
삼번의 형성 36
윤휴, 북벌을 주장하다 43

2장 의리는 주자의 독점물이 아니다
윤휴의 가계 55
올리지 못한 상소문 63
독창적인 학설과 반발 69
1차 예송논쟁 - 왕위 계승의 정통성 논쟁 80
날아드는 절교장 98

3장 포의 신 윤휴, 조정에 들어가다
제2차 예송논쟁 117
소년 국왕 숙종, 즉위하다 130
윤휴, 출사하다 138

4장 정치의 전면에 서다
경연에 입시하다 149
북벌이 첫째 162
삼복 제거 음모 169
대비를 조관(照管)하소서 182
남인, 청남과 탁남으로 갈라지다 186

5장 대개혁의 시대
지패법 시행과 좌절 199
호포법 시행 주장과 좌절 213
서얼 허통 237

6장 북벌의 시대
번져가는 삼번의 난 247
끊이지 않는 북벌 상소 250
수레 제작을 주장하다 253
만인과(萬人科)를 실시하다 264
체부(體府) 설치를 주장하다 273

7장 마지막 끈을 잡고 281
바뀌는 사회 분위기 283
바뀌는 숙종의 마음 296
남인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다 307
금송 사건 316

8장 소현세자 후손 추대 사건
끝나가는 삼번의 난 327
강화도의 변서(變書)와 송상민의 상소 330

9장 금기가 된 이름
척신들의 공세 361
역모 사건으로 비화하다 377
시대의 우환 387
나라에서 유학자를 왜 죽이는가? 400
공작 정치의 나날들 408
윤휴의 빈자리 411

책 속으로

출판사 서평

가난한 이들의 벗이었던 시대의 개혁가, 조선이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길 꿈꾸던 국제정치가, 교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가, 윤휴! 송시열과 노론 추종 세력으로부터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철저하게 금기시된 윤휴의 삶과 사상이...

[출판사서평 더 보기]

가난한 이들의 벗이었던 시대의 개혁가,
조선이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길 꿈꾸던 국제정치가,
교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가, 윤휴!


송시열과 노론 추종 세력으로부터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철저하게 금기시된 윤휴의 삶과 사상이 역사가 이덕일의 10여 년에 걸친 열정적인 연구 끝에 오롯이 되살아났다.

금기가 된 이름, 윤휴는 누구인가?
윤휴는 1617년(광해군 9년)에 대사헌 윤효전의 아들로 태어나 1680년(숙종 6년)에 사약을 받고 죽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산림(山林)에 있었으나 숙종의 거듭된 요청으로 조정에 들어가 북벌과 사회 개혁의 꿈을 펼치려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비운의 정치가이자 유학자였다.

정치적으로 윤휴는 남인-청남의 영수로, 허목, 윤선도와 더불어 이른바 1차 예송논쟁에선 자의대비에게 3년복을, 2차 예송논쟁에서 1년복을 입힐 것을 주장하여 송시열 등이 이끄는 서인들과 대립하였다. 또한 서인들이 북벌에 소극적이거나 실제로는 북벌을 반대한 데에 비해, 실질적인 북벌을 실현시켜 청나라에 복수하고 춘추시대의 제나라 환공과 같은 동아시아의 맹주로 자리 잡길 원했다. 윤휴가 출사할 무렵의 강희제 시절 청나라는 “삼번의 난”과 대만의 정성공 정경 부자의 반란 등으로 한창 어지러웠다. 그는 이때를 잘 이용하면 북벌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먼저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 것은 국내 정치와 사회 구조의 개혁이었다. 신분마다 다른 재질로 만들어 차고 다니는 호패법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들이 종이에 신분을 적어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지패법을 실시하여 신분의 차별을 없애려 하였다. 또한 양반에게도 군포를 걷어 재정을 충당하고, 백골과 아약에게 거두던 군포를 폐지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다. 그리고 만인과를 설치하여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시도했다.

한편 송시열 등에 의해 주자학이 교조주의화되던 분위기에 반발하여,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을 하고자 하였다. “어찌 천하의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주자가 다시 살아온다면 내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공자는 동의할 것이다.”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윤휴는 도그마에 얽매어 있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학문 자세는 당색을 넘어 칭송을 받았으나, 송시열 등에 의해 심하게 배척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그의 개혁 시도는 서인 세력의 반발과 숙종의 변심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끝내는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려 1680년(숙종 6년)에 사사되고 만다.

조선 중후반기의 최대 라이벌, 송시열과 윤휴
송시열과 윤휴는 모든 면에서 라이벌이었다. 송시열이 주자학 유일주의를 주장하고 기틀을 세웠다면, 윤휴는 공자와 맹자의 원전으로 돌아가 자유롭고 독창적인 학문을 모색했다. 송시열이 송자(宋子인)라고 불리기까지 한 거유(巨儒)라고 한다면, 윤휴는 천문, 지리, 병법, 역사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송시열이 1,2차 예송논쟁에서 양반 사대부 기득권 세력의 입장을 대변했다면, 윤휴는 왕권의 정통성을 지지하며 양반 사대부보다 일반 백성을 위하는 입장을 택했다. 송시열이 북벌에 대해 내용상의 반대를 한 반면에, 윤휴는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짜 북벌을 실행하려 하였다. 제도 개혁의 측면에서도 송시열과 윤휴는 정반대의 입장을 유지했다. 송시열이 서인-노론의 영수로서 세상을 주무른 권력자였다면, 윤휴는 개혁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 정치가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조선 중후반기에 송시열과 윤휴는 정치적, 사회적, 학문적인 최대 라이벌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기에 송시열이 윤휴를 끝까지 배척하고 증오하며 사문난적으로 규정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윤휴 이후, 조선은 침묵의 제국이 되었다
윤휴가 이룩한 유학적 성과와 정치 사회 개혁은 실학자들과 같은 후배들에게 이어졌으나, 그의 죽음 이후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여 개혁을 주장하는 유학자와 정치가는 조정에 거의 나타나지 못했다. 윤휴의 죽음 이후 붕당 정치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노론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윤휴는 송시열과 노론 세력에 의해 배척당하고 금기시되었기에, 그 누구도 쉽게 그의 이름과 업적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수옥문답』이라는 책에서는 윤휴의 행적과 사상을 전하지만, 끝내 지은이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못했다. 1927년에 이르러서야 윤휴의 문집이 진주 용강서당에서 발간될 정도로 윤휴는 철저하게 금기시되고 숨겨진 인물로 남았다.

역사가 이덕일이 윤휴를 말하다
역사가 이덕일에 따르면, 윤휴를 말하는 것은 단지 오래 전에 잊힌 한 흥미로운 인물을 재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져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왜곡된 정치 현실과 역사를 바로잡는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가 이덕일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윤휴를 주목해왔다.

이덕일은 이 책의 서문에서 “윤휴가 사형당한 후 조선은 침묵의 제국이 되었다. 더 이상 그와 같은 생각은 허용되지 않았다. 윤휴와 같은 생각은, 특히 그런 생각을 표출하는 것은 사문난적으로 가는 초청장이고, 저승으로 가는 초청장이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만큼 조선 후기 사회는 다른 생각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아주 경직된 사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세도정치와 일제 강점기 하의 기득권 세력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정치계와 학계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윤휴는 현재 기득권 세력이 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치부를 건드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만큼 윤휴의 죽음은 조선 사회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덕일은 다시 서문에서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 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 그리고 실제 그렇게 죽여왔던 시대, 그런 증오의 시대의 유산은 이제 청산할 때가 됐다. 백호 윤휴의 인생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서 윤휴의 삶과 사상을 복원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음으로써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 이 책에서“과거에서 현재를 보고, 미래를 조망한다.”는 그의 역사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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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 오경수 님 2011.08.31

    윤휴가 어떤 인물인지 이 책을 통해 잘 알게되었지만, 내용은 같은 내용, 비슷한 내용의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였다. 과연 이 책을 단행본으로 만들만한 가치가 있는지, 꼭 읽으시려는 분들은 대강 일독해보시면 내가 왜 이런 글을 남기는지 이해하시리라. 저자의 노고는 알겠지만, 굳이 이래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글쎄...입니다.

회원리뷰

  •   한가람역사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책들은 책을 읽는 동안 흥미를 유지하면서 비교적 수월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는데,...

      한가람역사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책들은 책을 읽는 동안 흥미를 유지하면서 비교적 수월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는데,

    [[윤휴와 침묵의 제국]]은 흥미를 유지하면서 읽기보다는 약간 지루한 감마져 느끼면서 완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민생을 위한 법률 개정은 시행되지 않고 당리당략에 따라 정치적 대립만 일삼는 국회의 정치판이 자꾸 연상되어 일단 짜증마져 생기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세상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다 하는가 ?" 하는 부분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상태에서 윤휴가 살다 간 시대에 대한 이해도 거의 없는 가운데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이 그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유튜브를 통해 윤휴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익힌 다음에 다시 이 책을 읽어 보니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머리 속에 정리가 되었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라고 추앙받는 송시열에 버금가는 대학자이며 정치적으로는 주자학과 사대부 계급 이익을 추구하는

    보수론자, 서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대치점에 있는 자주적인 유학자이며 민생론자, 개혁주의자인 남인(청남) 윤휴, 이 두 사람의 가장 극명한 차이점은 명분으로서 북벌을 주장하는 가면을 쓴 송시열과 실제로 북벌을 행동으로 옮기려한 윤휴라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합일점에 도달할 수 없는 극명한 대치가 결국 윤휴의 죽음과 이로 인한 조선의 자주성 상실로 이어져 조선이 침묵의 제국이 되었다는 것이 이 책 [[윤휴와 침묵의 제국]]을 저술한 이덕일 소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이 존재한다면, 만약에 북벌 의지를 드높이던 효종 임금 생존 시에 송시열이 왕권을 압박하는 도구로 명분상 이용한 북벌론을 실제적으로 추진하여 후일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삼번의 난이라는 天時에 호응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 ? 윤휴를 등용한 숙종 때 삼번의 난이라는 외부적 호기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군사적 역량을 확보하고 실제로 요동 정벌로 이어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 아니면 적어도 윤휴의 개혁 정책들(지폐법, 호포법, 오가작통법, 서얼 허통 등)이 제대로 시행되었다면 조선 후기의 사회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 이러한 생각을 해 보면서 명나라의 황제를 자신들의 임금으로 여기고 조선의 국왕은 명 황실의 일개 번국왕으로 바라보았던 서인 노론 사대부들이 철두철미한 당파, 계급 이익을 지키는 차원에서 임금을 허수아비처럼 여기며 조선 말까지 장기 집권하게 된 조선의 운명이 너무나 안타깝게 떠올랐다. 

    이 리뷰는 리뷰 마블 이벤트 응모작 입니다

  • 윤휴는 사문난적인가? | tr**pink | 2013.08.13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라는 책을 읽었다. http://heiwan.blog.me/20193327369교과서에는 노...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라는 책을 읽었다. http://heiwan.blog.me/20193327369
    교과서에는 노론의 영수이자 주자학의 대가인 송시열이 삼전도의 치욕과 명나라에 대한 예의를 위해
    인종의 뒤를 이은 효종과 함께 북벌을 주장한 것으로 나온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송시열이 북벌을 주장한 것은 맞지만
    겉으로만 주장했을 뿐 그를 비롯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계 인사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정한 북벌론자는 바로 이름도 생소한 "윤휴"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배척해야 하나
     
    송시열은 서인이었다. 서인은 율곡 이이의 학풍을, 동인은 퇴계 이황의 학풍을 이은 사람들이다.
    서인은 추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는데 북인은 인조반정 이후 완전히 숙청 당한다.
    인조가 돌아 간 효종 때에 서인에게 있어서 북벌은 당의 선명성을 과시하는 구도였다.
    실제로는 앞서 말한 바대로 북벌 반대가 서인의 당론이었다.
     
    말로만 북별을 내세워 효종을 압박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군림하는 것이 서인의 당략이었다.
    그런데 남인인 윤휴가 북벌 대의소를 올리자 정지회가 "이런 상소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서인의 이중성을 들어 냈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명황제에게 칭신한 것은 명과 공존하기 위한 외교 정책일 뿐이었다.
    왕위 세습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장되고, 국왕에게 인사권과 군사권, 외교권이 있는 나라가 속국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광해군이 명황제에게 불충을 저질렀다며 쿠테타를 일으켜 인조를 왕으로 세운 당이기 때문이다.
     
    조선 왕실을 절대적인 왕실로 인정하는 남인들과 조선을 명 황실의 신하로 인정하는 서인들의 견해가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불거진 예송논쟁을 계기로 충돌하였다.
    이 문제는 현종 15년 현종의 모후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여전히 살아 있던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2차 예송논쟁이 발생했고,
    그 결과로 서인에 대한 불신이 생긴 현종을 윤휴를 조정에 들어오게 하여 정치 지형을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꾸게 된다.
     
    1차 예송 때 송시열, 송길준 등은 내심으로는 효종에게 사대부가의 예법을 적용해 기년복(1년 복상)으로 의정해 놓고,
    현종에게는 장자와 차자의 구별이 없는 <경국대전>에 따라 기년복으로 의정한 것이라고 보고 했다.
    인조 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은 명나라 황실만이 제질이고, 조선 왕실은 제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 왕실은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가의 예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효종을 둘째 아들로 대접해 기년복을 주장하면서 그렇게 주장할 수 없으니까
    장차남 구별이 없는 <경국대전>을 인용해 속마음을 감춘것이다.
    이런 서인들의 속내를 거첨 없이 비판했던 윤선도는 해남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런 서인 세력의 대항마로 윤휴가 등장한다.
    그는 송시열과도 친분이 있었으나 주자학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을 송시열이 비판하자
    주자학에 대한 해석을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대적하여 돌아서기도 했다.
    주자학에 대해서는 서인인 송시열과 대적할 만큼의 학식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 외에도 병법이나 다른 학문에도 관심이 많아 깊이있게 연구한 인물로 당시에는 송시열 버금가는 학자로 칭송되는 분이었다.
     
    그는 진정한 북별론자였다. 중국의 정세에도 밝아 현종에게 끊임없이 북벌을 건의하고 준비하였으나
    같은 남인임에도 서인에 더 가까운 허적 등의 지원을 받지도 못했고, 정계의 주요 요직은 왕의 외척과 서인들이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메아리일 뿐이었다. 종국에는 현종 마저도 그에게 돌아서 버리게 된다.
    결국 그는 서인들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찍히게 되고 그러면서 그는
    "국가가 유학자가 필요가 없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왜 죽이느냐?"는 야사에 전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사약을 먹고 돌아가게 된다.
    잠시나마 잡았던 남인의 조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
     
    숙종 때 임술고변(숙종 8년 김환과 김중하는 남인 허새, 혀영, 민암, 유명건 등이 복평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하는 고변)이
    김석주, 김익훈 등 현종의 척신이 사주한 무고로 드러나자 젊은 서인들이 반발했다.
    이 파문을 가라 앉히기 위해 숙종은 사람의 세 유현, 송시열 윤증, 박세채를 조정으로 불러 들였고,
    젊은 서인들은 송시열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오히려 송시열이 김익훈 등을 옹호하자 이탈해 나갔다.
     
    아무리 다른 당파라도 공작 정치로 무고한 남인들을 죽음으로 몬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윤증 중심의 소론이 되고,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중진들은 노론이 된 것이다.
    이후에도 노론들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가진 국왕 경종을 독살하고, 사도세자를 뒤조에 가두어 죽이는 등 정치 공작을 자행했다.
     
    너나 잘 하세요
     
    송시열, 윤휴 두 분다 훌륭한 학자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책에서 소개되는 그 분들의 공부에 대한 열정과 식견으로도 정말 대단한 분들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두 분다 남의 말은 잘 듣지 않았다.
     
    송시열은 자신의 당파와 생각이 나른 사람들을 죽이고 배척하는데 자신의 학식을 썼다.
    윤휴는 북벌만 외치고 국왕과 다른 대신들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
    누가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이 책을 읽고 내가 느낀점은 바로 이것이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현실 정치하는 분들과 별단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 상대의 허점과 논리싸움만 할 때는
    정말 "너나 잘 하시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기 전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니....
    과연 나는 그런 말 할 만큼 잘 하고 있는건가?
  • 모두가 '네'라고 대답할 때 '아니요'라고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한마디 말로 개인의 생과 죽음이 갈리...
    모두가 '네'라고 대답할 때 '아니요'라고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한마디 말로 개인의 생과 죽음이 갈리는 살신지화는 물론 삼대가 멸하는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었던 조선 시기에는 용기의 차원을 넘어 지조와 절개가 필요했다. 그래서 옛말에 "군자의 말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한다"거나 "선한 사람의 말은 적다"고 한 것이다. 17세기 조선에서 주자학은 종교처럼 떠받들여진 지배이데올로기였다. 주자학에 반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리던 시대에 주자 학설에 반대하고 독창적인 해석을 제기한 학자가 바로 윤휴다. 윤휴(1617-1680)의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윤휴의 일생은 학문의 추구, 북벌대의의 실천과 백성들의 각종 폐단 제거로 점철된다. 
     
    17세기 중반 숙종 때의 조선은 정통 주자학과 수정주의와의 논쟁이 격화되고 서인과 남인간 당쟁의 피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정통 주자학의 화신이라면, 남인 윤휴는 수정주의의 대표라 할 수 있다. 당색을 보면 윤휴는 허목과 함께 현종 때 출사를 거부한 청남(淸南)의 영수로, 허적 중심의 탁남(濁南)과 입장을 완연히 달리했다. 노론이 집권하는 동안,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린 윤휴의 저작은 금서가 되었다.1660년 효종의 국상 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기간을 두고 제1차 예송이 일어난다. 서인은 기년복(1년복)을 주장하고 남인은 참최복(3년복)을 주장했다. 기해예송의 승리는 서인에게 돌아갔다. 그후 15년간 윤휴는 내려지는 벼슬을 사양하며 은거하다 청나라에서 오삼계에 의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에게 '대의소'를 올려 급진적인 북벌을 주장한다. 1674년 효종의 부인 인선왕후 장씨가 돌아가면서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 남인이 정권을 잡는다. 윤휴는 성균관 사업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치다 우찬성에 오르지만 경신환국으로 실각하여 갑산으로 유배된 뒤 허견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된다. 1689년 기사환국후 권력을 잡은 남인은 이 사건이 무옥임을 주장하고 윤휴는 이때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된다.
     
    북벌을 구현하기 위해선 민생을 살리고 국부를 증가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에 윤휴는 지패법·오가통법·호포법 같이 양반의 특권을 폐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신분의 구별을 나타내는 호패 대신 신분 구별 없이 모두 종이로 만든 지패를 차게 하는 지패법, 반상의 구별 없이 모든 호가 병역세를 내게 하는 호포법, 신분 구별 없이 이웃 다섯 집을 묶어 한 통으로 만드는 오가통법은 신분제의 차별을 없애는 윤휴의 급진적 개혁성을 보여준다. 이외에 서얼허통, 신분에 관계없이 무신등용하는 만과 등도 제시했다. 하지만 양반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계급적 특혜를 포기할 리 없었다. 예컨대 《숙종실록》은 윤휴의 개혁안에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한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이덕일은 사관이 말하는 '백성들의 원성'이라도 때에 따라서는 '양반 사대부들의 원성'으로 바꾸어 해독할 필요가 있음을 깨우쳐준다. 서인에 의해 집필된 《숙종실록》은 윤휴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난 것처럼 읽힌다. 지패법과 오가통이 현장에서 탐관과 아전들이 백성들을 옭아매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오가통과 지패법이 원래 호포법과 함께 시행되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호포제는 빼놓은 채 오가통과 지패법만을 시행했기에 그런 폐단이 벌어진 것이다. 윤휴가 제시한 대부분의 혁신안은 좌절되었다. 윤휴는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 국왕보다 스승이 중시되는 시대,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가 중시되는 시대를 개탄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미 유학자들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성현의 말씀을 달고 살지만 행동은 성현의 말씀과 정반대로 사는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떤 지탄을 받아도 계급적 특권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언행일치와 지행합일을 추구하던 윤휴 같은 사대부는 소수였다."(236-7쪽)
     
    앞서도 언급했듯이 윤휴는 개혁정치가 이전에 대학자였다. 저자를 알 수 없는 《수옥문답》에서도 "선생의 문자를 보건대 학문을 논한 것이 제일 많고, 다음은 대의, 다음은 민폐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윤휴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작인 《독서기》 서문에서 학문에서 자득과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서기》는 다양한 유교 경서들에 대한 윤휴의 독자적 해석을 담은 책이다.
     
    "산속의 좁은 길은 잠깐 사용할 때는 길을 이루다가, 또 잠깐 사용하지 않으면 띠풀이 가득 차게 된다. 어찌 산속의 좁은 길만 그러하겠는가. 학자는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을 하면 얻어지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 생각이 있으면 기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록을 하면 남게 되고 기록하지 않으면 없어지게 된다."   
  • 윤휴와 침묵의 제국 | cu**t | 2011.09.08 | 5점 만점에 4점 | 추천:0
    작년. 이덕일 작가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었다. 그 안에서 송시열과 서인들이 말하던 북벌이 얼마나 구호만...
    작년. 이덕일 작가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었다. 그 안에서 송시열과 서인들이 말하던 북벌이 얼마나
    구호만 요란한 것인지를 알았다.
     
    이번 '윤휴와 침묵의 제국'은 구호에 그쳤던 북벌을 실질화 하려했으며, 그와 함께 필연적으로 송시열과 서인의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었던 윤휴를 조명한다.
     
    6년이 채 되지 않는시간동안 대의와 왕가, 평민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백호 윤휴가 조명되고,
    남인으로 서인을 대변하여 윤휴를 저지하는 허적의 허망한 삶. 서인들과 그 뒤에 송시열. 마지막으로 왕위 존립에만
    급급했던 숙종의 모습이 좀 더 극명히 드러난다.
     
    진정한 선비로서 왕실과 국가를 위한 이의 실패한 정치사(政治史)- 지패법, 오가작통법, 만인과. 그리고 그의 실패로
    밀려버린 조선의 발전이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 윤휴, 그는 누구일까? 광해군대부터 숙종대까지 조선중기를 살아냈던 사람..  이괄의 난과 정묘, 병자호란을 피해 어머...
    윤휴, 그는 누구일까? 광해군대부터 숙종대까지 조선중기를 살아냈던 사람..  이괄의 난과 정묘, 병자호란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피난을 다녔다. 주로 젊은 시절을 여주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에 외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기는 했으나 거의 독학하다시피 자신의 학문을 정진했다. 열아홉살때 십년이나 연장자였던 당대의 석학 송시열로부터 자신의 독서가 부끄럽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보고 그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가 오기 전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던 그가 중국에서 오삼계의 반청(反淸)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숙종대에 관직에 오른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를 불러들였던 숙종의 속마음을.. 숙종에게는 송시열을 견제하기 위한 인물이 바로 윤휴였음을.. 숙종이 누구인가? 교묘하게 당쟁의 힘을 이용하며 왕권을 다졌던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대부분의 일생을 포의(布衣-여기서 포의는 베옷이다.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입는 옷이기도 하고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로서 보내어 정치적인 면보다도 학문적인 업적이 더 많다는 사람이 윤휴다. 원래 당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예송논쟁으로 서인측과 틈이 벌어지자 남인으로 활약했다. 기해예송때는 벼슬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워 송시열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빗대어 지적하였고, 갑인예송때도 같은 기준으로 서인측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던 까닭이다. 예송논쟁... 정말 하릴없이 무의미하게 보내야 했던 시절을 대표적으로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송시열이라는 이름 석자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이긴자가 쓴다 했고,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예송논쟁이라는 말이 나오면 당연하게 뒤따라 나오는 이름이 바로 송시열이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그다지 의롭지 않은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동안 그사람에 대한 평을 어떻게 들어야 했는가를 곰곰히 따져볼 일이다. 북벌론조차도 그의 의견이 아니었음을 이제 알만 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정치현황과 지금의 정치현황은 판박이다. 그러니 당연하다.
     
    예송논쟁이라는 것이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어째서 그 따위 논쟁에 허송세월을 해야만 했는지...모두가 제 잇속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속에 자신의 입지를 굳힌 송시열이었지만 효종이 급서한 뒤 장례절차를 시시콜콜 따졌던 것이 바로 예송논쟁이었다.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참최복(3년)으로 할 것이냐, 기년복(1년)으로 할 것이냐가 문제의 시초였다. 효종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소현세자의 아우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효종이 적장자냐 아니냐와 결부되어 있었기에 중요한 문제였다. 이를 두고 윤휴는<의례>에 근거하여“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고 말하며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할 뿐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의례> 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예외규정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의 자식을 이르는 칭호이기는 하지만,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두 사람의 주장을 듣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대신들이 <의례>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목이 또다시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할 것을 상소하고, 윤선도가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들 수 있다고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을 꺽지는 못했다. 그 문제로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지만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다. 윤선도를 포함한 남인들이 유배되거나 축출된 것을 보면.. 그러다가 효종비의 상으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또다시 불거진다. 서인들은 송시열의 주장대로 대공복(9개월복)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유생 도신징의 상소로 인하여 기년복으로 번복되고 말았다. 그 일로 인하여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사실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에 근거를 두기는 하였지만 대체적으로 왕가의 예나 당시 양반계급의 예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말해 둘째아들이라는 효종의 출생순서만을 중히 여겼다는 말이된다. 이 책속에서도 그런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글쓴이의 분석이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결국 파직되는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윤휴와 송시열에 대해 다시한번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다. 내가 배웠던 바로는 효종의 북벌론을 도왔던 사람이 송시열이었다. (검색해보면 지금도 그렇게 나온다) 그런데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론은 동상이몽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인 북벌보다는 이념적인 북벌만을 강조했던 게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에게는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대의명분이었다는 말이다.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유교적 명분을 내세워 신분차별에 더욱더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었던 것도 송시열이었다. 책에 따르면 그가 주장했던 성리학 역시 살짝 변형되어져 원래의 주자학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당시 송시열의 오만함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효종이 죽음으로써 잠잠했던 북벌론이 윤휴의 등장으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고, 윤휴가 내세우는 북벌론이 실제적인 북벌론이다보니 당시의 서인에게는 발등의 불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실제적인 북벌론을 외쳤던 윤휴의 업적을 따져보자면 이렇다. 도체찰사부를 설치하고 무관인 만과를 실행하여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려 하였다. 또한 전차나 화차를 개발, 보급하고자 했던 것도 윤휴였다. 군권통합을 요구했던 도체찰사부의 설치가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원인이 되기는 했지만 책을 통해 보여지는 윤휴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보게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호패법을 지패법으로 바꾸어 신분차별을 약화시키려 노력했다. 끝내 실행되지 못했던 것은 백성을 부리고 싶어했던 양반계급의 반대때문이었다. 윤휴는 숙종에게 오가작통을 주장, 실행하기도 했다.  농경을 서로 돕고, 어려움을 서로 이겨낼 수 있다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각종 조세의 납부를 독려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던 게 오가작통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휴는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던 사람인 듯 하다. 오직 북벌만을 생각하며 관직에 올랐던 그였기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고문을 당하고 유배길에 오른 그에게 피맺힌 버선을 갈아신으라고 권유하던 자식에게 돌아가는 형국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자신이 반면교사가 되기를 원한다며 갈아신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교사라는 의미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이라는 걸 생각해본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느꼈을 후회가 내게도 전해져오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사문난적(斯文亂賊)..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다. 유교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사문난적이라고 말한다. 유교를 반대하는 사람.. 다시말해 송시열에게 반기를 든 사람이라는 말도 될 것이다. 성리학, 즉 우리나라만의 유교학을 정립시킨 것이 바로 송시열이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유교의 교리자체를 반대했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끝없는 당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이 그를 버리기로 작정했던 이유가 바로 당쟁으로 인한 왕권의 흔들림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윤휴의 죽음은 반란의 중심에 있었다거나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것까지는 없었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울림이 크다. 책을 덮으며 이덕일이라는 글쓴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소개글을 찾아 읽어본다. 색다른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을 몇 번 읽어보았는데 그 때마다 이채롭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던 것도 사실이고, 큰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는 것도 솔직한 말일게다. 판에 박힌 역사관은 아닌 듯 싶어 그의 이름이 보이면 다시한번 시선을 두게 된다. 그의 역사관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사람이 있어 고마움을 느끼게도 된다. 그가 보여준 이 작품속에서 당시의 상황과 결부되었던 많은 사건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 일전에 논산여행길에 둘러보았던 돈암서원과 윤증고택이 떠오른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되새긴다.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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