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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 | 151*210*19mm
ISBN-10 : 1160403880
ISBN-13 : 9791160403886
은희 중고
저자 박유리 |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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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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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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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명이 죽었는데, 아무도 잘못한 사람은 없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참혹한 진실을 파헤치는 아름다운 데뷔작 “누구에게나 그림자처럼 결코 자를 수 없는 기억이 있다.”
*
한 시대가 만들어낸 폐허와 고통,
그 속에서 사라져간 이들을 위한 문학적 전언

한국 현대사에서 최악의 인권유린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참혹한 진실을 파헤친 소설 《은희》가 출간되었다. 작가는 기자로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직접 취재하고 조사한 기록 위에, 18살 소녀 ‘은희’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사실과 허구적 이야기를 뒤섞어 《은희》라는 값진 소설적 진실을 만들어낸다. 군사정권 당시 벌어진 국가적 유괴와 강제 실종을 취재하며 생겨난 인간 존엄에 대한 질문은 그녀를 폴란드의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으로 이끌게 되고, 결국 ‘은희’의 죽음을 파고드는 장편소설 《은희》를 쓰게끔 한다. 소설을 가득 채운 단단한 문장과 담담한 서술, 깊이 있는 묘사와 고통을 모른 체하지 않는 용기 있는 목소리는 사실을 전하는 정직함과 책임감을 밀어 올리며 깊은 문학적 울림을 완성해낸다. 또한, 절망이 희망을 앞서고 끔찍함이 아름다움을 짓누르는 한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작가의 용기는 우리가 모든 겁과 비겁을 버리고 진실에서 눈 돌리지 않게 돕는다. 문학평론가 박혜진의 말처럼, 《은희》는 우리에게 불행을 선사하지만 이 불행에 동참함으로써 가까스로 30년 전과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한다.

술 먹고 취해 길에 뻗은 남자들, 여관비를 아끼려 기차역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 남루한 옷을 입고 떠도는 아이들. 내무부 훈령 410호가 잡아들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빈곤을 모아두면 풍요로워질 것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바퀴벌레와 쥐 퇴치 운동을 벌이듯이. 그렇게 우리는 청소됐다. _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저자 : 박유리
198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파괴되고 외로운 이들의 침묵을 듣는 일이 좋았다. 흙바닥에서 시가 되어버린 일기를 쓰는 시리아의 난민 소년, 헤어지는 날 우산을 내어준 영등포 집창촌의 여인, 매월 5만 원을 상납해야 주연배우의 풍경이 될 수 있었던 이름 없는 드라마 엑스트라, 4차 혁명 시대에 땅을 잃고 전국을 헤매는 화전민들에게서 살아낸다는 것의 치열함과 서글픔을 보았다. 가장 비루한 존재들의 아름답고 위대한 시간을 쓰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믿는다. 〈국민일보〉에 이어 〈한겨레〉에 이런 글을 썼다.

목차

1
2
3
4
5
6 은수의 기억
7
8
9 방인곤의 기억
10
11
12
13 1987년 1월 5일
14 미연의 기억
15 무열의 기억
16 방인곤의 기억
17
18
19
20
21
22
23
24
에필로그
은희의 기억
작가의 말
추천의 말

책 속으로

미연은 그날 일을 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던 은희가 죽을 만큼 맞던 그날 밤, 사람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 소리를 내며 진흙 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날, 누구도 왜 우리가 죽을 만큼 맞아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모든 일에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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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은 그날 일을 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던 은희가 죽을 만큼 맞던 그날 밤, 사람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 소리를 내며 진흙 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날, 누구도 왜 우리가 죽을 만큼 맞아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모든 일에 이유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왜 이곳에 기약 없이 갇혀야 하는지, 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_81쪽

그가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냉담하게 말할 때 미연은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빼앗긴 4년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다. 표백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 기억은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가위를 들고 들러붙은 그림자를 잘라내도 하루가 지나면 잘린 부위에서 새 그림자가 돋았다. _97쪽

사람들의 기억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어. 오늘 안에 어제가 있고, 미래 안에 지금이 있지. 내게는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마는 거지. 댐에 쌓아둬서 괴물이 되게 하느니, 그저 기억을 방류해버리는 거지. 그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기보다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살인자라는 말에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과거와 분리되어 나온 개체 같았다. _108~109쪽

권투 해보셨습니까. 나는 아마추어 권투선수 출신입니다. 여기서도 권투가 벌어집니다. 계급을 지키려고 피투성이 경기를 하죠. 그들이 서로를 다운시킬 때까지 저는 앉아서 심판만 보면 됩니다. 관리란 그런 겁니다. 이 얼마나 쉬운 방법입니까. 나만큼 인간의 마음을, 기득권의 욕망을, 사회질서 유지의 원리를 복지시설 운영에 훌륭하게 적용한 사람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네, 그렇지요. 획기적이고 창발적인 일이었습니다. 다른 시설들은 자빠지기도 했지만 내가 운영하는 형제의집은 수용자가 나날이 늘어나 한 해 3000명을 넘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거지가 득실거리는 더러운 부산 시내에서 거지가 사라져갔습니다. 모조리 다 잡아 가두었습니다. 숫자가 모자라면 거지라고 우겨서라도 잡아 가두었습니다. 거리가 거울처럼 환하고 깨끗해졌습니다. 청결한 질서가 생겼습니다. 누구도 구걸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 선진국의 도시처럼 말입니다. _118쪽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다. 치워져야 하는 인간 이하의 부랑인들을 개조하는 곳이 있다니, 얼마나 듣기 좋은 소식인가. 치워져야 할 인간들이 소각되는 게 아니라 개조된다고 하니, 사람들은 그들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거라고 말하겠지. 누구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들을 치워버릴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낙원이 되어야 한다. _184~185쪽

낮은 집들을 지나쳐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을 향해 걸었습니다. 형제의집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던 굴뚝이었습니다. 수용자들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시체가 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시체를 태우는 화장터가 아닌 목욕탕 굴뚝이었습니다. 목욕 바구니를 옆에 끼고서 아줌마 두 명이 걸어 나왔습니다. 평온한 얼굴의 거리, 우뚝 솟은 전봇대, 반쯤 찢긴 채 붙어 있는 벽보들, 전구가 깨진 가로등, 일정한 간격으로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는 사람들. 우리를 가둔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세상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려온 두 발을 내려다보며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향해 사죄하지 않는 세계, 내가 사라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세상의 평화로움이 소름 끼치게 무서웠습니다. 목욕탕 굴뚝 앞에서 느꼈던 무심한 평화로움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_219쪽

언젠가 진상규명이 시작되면 방 원장의 하수인으로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도 드러날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은 무리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걸 병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브레이크를 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진실은 드러날 것이고, 누군가는 아파하고 상처를 받으며 드러나는 게 진실이니까. 병호는 자신 또한 그렇게 상처를 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_230~231쪽

하루는 모텔방에서 스포츠 채널을 틀어놓고 컵라면을 먹었다. 역도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 때까지 선수는 역기를 들고 버텨야 한다. 삑 소리가 들리면 역기를 내던졌다. 자신에게도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어준다면. 기억을 던질 순간이 올까. _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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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이해할 수 없기에 겨우 가능한 이해 형제복지원은 일정한 거주지와 직업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선도한다는 목적으로 1975년 부산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부랑인 임시 보호소였다. 하지만, 부랑인들만 입소한 것은 아니었다. 크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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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기에 겨우 가능한 이해

형제복지원은 일정한 거주지와 직업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선도한다는 목적으로 1975년 부산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부랑인 임시 보호소였다. 하지만, 부랑인들만 입소한 것은 아니었다. 크게는 국가와 시의 명령하에, 작게는 시청 직원과 파출소 순경들, 그리고 몇몇 시민들의 묵인하에 돌아갈 집과 가족이 있는 보통 시민, 장애인,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끌려갔다. 《은희》에 나오는 은희, 미연, 은수가 모두 그렇게 잡혀 온 아이들이었으며, 소대장 무열과 병호의 아버지인 문 씨 또한 그런 식으로 청소된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모두 빼앗겨버린 상황에서도 사람은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해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내가 정말 인간이 맞는지’를 고민하고야 만다고 작가는 《은희》에서 말한다. 온몸이 텅 비워지고,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드는 공간에서 은희는 가장 인간적이고, 인간이고픈 존재였다. “왜 도망갔냐”는 물음에 “사람이 되려고”라고 답하는 은희의 모습은 그렇기에 더욱 슬프면서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하다.
엄마 ‘은희’를 찾아서 폴란드를 떠나와 한국 땅을 밟고도 여전히 은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입양아 준에게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미연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해란 건 사실 진짜 이해가 아니다. 우습게도 그것은 우리 또한 이 나라를 이해할 수 없기에 겨우 가능해진 이해이다.

미연은 그날 일을 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던 은희가 죽을 만큼 맞던 그날 밤, 사람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 소리를 내며 진흙 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날, 누구도 왜 우리가 죽을 만큼 맞아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모든 일에 이유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왜 이곳에 기약 없이 갇혀야 하는지, 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_본문 중에서

가짜 노숙인까지 만들었던 나라를, 그들을 개조했다고 국정을 홍보했던 나라를 준이 이해할 수 있을까. _본문 중에서

준과 은희가 경남 양산의 한 요양원에 있는 형제의집 원장 방인곤을 방문하고, 가짜 검안서를 쓴 의사 조병국을 찾아 경북에 위치한 병원에 가고, 방인곤 원장을 수사했던 검사 주태석을 만나러 무덤 마을에 가는 내내 은희의 대답과 함께 건네진 ‘인간됨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깊은 그림자가 되어 우리의 발걸음을 따라다닌다. 은희가 그랬듯이 우리 또한 인간으로 남기 위해선 무언가로부터 도망해야 하는 걸까? 아니, 그런데 은희는 도망간 게 맞는 걸까? 자신의 삶을 걸고 다른 이들의 삶을 구하려던 건 아니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은 깊은 우물이 되어 진실에 목마른 우리 앞에 멈춰 선다.

2015년 가을,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을까?

말들은 쇳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찢겨나갔다. 언어가 아닌 목소리로, 울 것 같은 얼굴로, 부들거리는 어깨로 준은 그들의 이야기를 짐작할 뿐이었다. 마이크를 쥔 남자는 몇 마디 말을 하고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1987년 그때의 아이처럼. 말들은 바람에 날렸고 사람들은 바닥에 떨어진 울음을 밟고 지나갔다. 밟힌 울음은 소리를 내지 못했다. _본문 중에서

소설은 박인근 원장의 구속으로 뒤늦게 사건이 드러나게 된 1987년과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를 앞두고 있던 2015년 가을을 실제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2020년 현재, 900일이 넘게 노숙 농성을 이어간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의 땀과 눈물로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소설 속 병호도 현실에서처럼 특별법 통과를 이뤄냈을까? 은희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기 위한 준과 미연의 동행은 잘 끝났을까? 준과 미연은 진실의 끝에 결국 닿았을까? 수많은 질문 속에서 그래도 다행인 건 ‘만약 이번 국회에서도 법이 통과되지 못했다면, 피해 생존자와 그 가족들이 앞으로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까?’라는 질문만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은희》는 형제복지원에 엮인 실존 인물들의 삶에 소설적 상상력을 더한, 문제적이며 치밀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기억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살아낼 수 없는 생존자들과 기억을 잃었다는 박인근 원장 사이의 아이러니는 소설의 모티프가 되며, 은희의 캐릭터는 형제복지원에서 도망치다 붙잡혀 매맞아 숨진 김계원의 죽음에서 기인하며, 그런 김계원에게 안티프라민을 발라주었다는 윤우택의 짧은 진술은 미연의 일부분이 된다. 박인근 원장을 위해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한 문용기의 글과 복지정책의 우수성을 알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설문, 그리고 MBC 드라마 〈탄생〉의 제작 일화 등 부랑인 청소가 사회적으로 납득되고 용인되었던 시대 배경들도 소설 여기저기에 작은 조각들로 들어가 있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건 결코 재현이 아니다. 결코 드라마가 아니다. 군사정권 시대가 만들어낸 폐허와 고통 위에서 한낱 위기로만 존재 가능했던 인간의 모습이,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사회적 묵인이, 정말 지금은 없느냐고 은희와 미연 그리고 준을 통해 끊임없이 되물을 뿐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소대장 무열을 지나, 가짜 의사 조태석을 지나, 원장 방인곤을 지나 결국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난 매일 머릿속을 청소해. 쓸데없는 것들을 매일 쓸어 폐기처분하는 거지. 난 병자가 아냐. 환자가 아니라고. 쓸데없는 걸 잊어가는 건 합리적인 거야. 아주 합리적인 증상인 거지. (…) 일상생활에 지장이 되는 건 없어. 지나간 시간 가운데 버리고 싶은 것들을 자동폐기하는 장치가 내 머리에 생긴 거뿐이지. _본문 중에서

형제복지원이 운영되었던 당시 전국에는 36곳의 부랑인 시설이 있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을 제외한 35곳의 시설에서 벌어진 유괴와 감금, 인권유린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바퀴벌레와 쥐를 청소하듯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던 그 기억들을 모두 잊은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기억을 잃어버린 건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지 알 수 없는 방인곤 원장의 모습은 정말 다른 걸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를 원한다면, 길을 가다가 아무 이유도 없이 사라져도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던 그 빛 없는 시대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매일 머릿속을 청소하는 대신, 쓸데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쓸어 처분하는 대신 버려지고 은폐된 것들을 기억하고 찾아낸다면, 《은희》를 읽으며 우리의 진심이 고운 봄날 실내에 드는 햇볕처럼 한데 모인다면,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빛도, 어떤 이름 없이도,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목소리를 은희에게 되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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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회원리뷰

  • 은희 | cu**sj | 2020.06.23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한 사람의 삶을 글로 읽어 내려가는데 이렇게 온 몸이 긴장돼 힘이 들고 마음이 지칠 수가 없었다.  일평생을 알지 ...

    한 사람의 삶을 글로 읽어 내려가는데 이렇게 온 몸이 긴장돼 힘이 들고 마음이 지칠 수가 없었다.

     일평생을 알지 못하고 살아온 어떤 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고 입술을 꽉 깨물게 할 일인가.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단순한 사실 속에 감추어진 수많은 사건, 기억, 억울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준이라는 태생부터가 아픔 덩어리인 이 사람의 마음이 더이상 상하지 않기를, 슬픔이 대를 이어 삶이 망가지지 않기를, 그의 설명할 수 없는 삶을 읽으며 기도했다. 

     

     한 사람의 탄생과 한 사람의 죽음이 타인에게는 그저 매일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일 테지만, 

    ‘준이의 탄생’, 그리고 ‘은희의 죽음’은 그들을 둘러싼 미연, 병호, 주태석 검사 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글을 읽으며, 진실을 함께 파헤치고, 그 아픔과 파장을 같이 감내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과 슬픔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책을 다 읽고도 이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준이가 진실을 다 아는 것이 과연 그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일까. 약 13년 전 내 소중한 친구의 부모를 찾으러 한국의 입양기관을 돌며 경험한 그 때의 절실함이 나에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되돌아 보면 보통의 삶을 살고자 했을 텐데 괜히 알아 버린 사실들이 남은 생에 피할 수 없는 부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은희의 기억에서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 곳으로 떠나서 한 여자와 사랑하고 사랑으로 아이를 낳은 한 남자가 되기를. 네가 문 젖꼭지의 촉감과 살결, 냄새를 기억하지 않기를, 너를 낳은 여자와 네가 잉태된 그 날이 기억되지 않기를" 바랐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말이다. 그를 지금까지 키워준 부모 밑에서 그저 남들만큼 보통의 가족처럼 살기를 바라는 게 그의 인생에는 더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은희와 513명의 이름 모를 은희의 슬픔이 가실 때까지... 준이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여 건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보통 사람처럼 살게 될 때까지...  

    이 책을 안고 위로하고 싶다...

  • 뒤집어진 타일 조각 | es**028 | 2020.06.22 | 5점 만점에 4점 | 추천:0
      뒤집어진 타일 조각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부산에서 살았는데, 부끄럽게도 모르고 있었다...

     

    뒤집어진 타일 조각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부산에서 살았는데, 부끄럽게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일부러 모르는 척 했을지도. 걸인 이야기는 이제 흥미가 없으니까. (29면) 애써 모른 척하려 했던 것일 테지. 12년 동안 500명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는데도,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았을 테지. 『은희』 는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등장하는 인물에게 동화시켜 풀어나가며, 그 추악하고 더러운 진실들을 파헤친다.

      한 여자가 새로운 생명을 가졌다. 원해서 가진 아이가 아니면서도 그 가녀린 몸에 꼭 품는다. 끔찍한 고통이 짓누를 때도, 배 속 아이를 생각하며 견뎌낸다. 그리곤 아주 찬란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아들을 안는다. (235면)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지만, 아이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나를 기억하지 말기를.

      소설은 어둠을 보여주지만, 때때로 희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밀고가 일상인 형제의 집에서 은희가 미연의 주머니에 넣어준 눈깔사탕이 그러하고, 다시 일장으로 돌아와 새로운 가정을 이룩한 미연이 그러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모두 깨지고 만다. 희망이라는 게, 환상처럼 산산 조각나 깨부숴지는 거다. 검정 물감과 흰 물감을 섞어도, 어느 순간 까맣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은희는 미연의 손을 빌려 스스로 죽었다. 수용소 안, 이미 죽어버린 영혼들 가운데 흔적 없이 흩어졌다. 누가 은희를 죽게 했을까. 왜 죽고 싶다고 애원해야만 벗어날 수 있었던 걸까. 수백 명이 이렇게 죽어갔는데도, 사과하는 이 하나 없다.

      왕으로 군림하다 늙어 기억을 잃어버린 원장, 검안서를 위조해 마지막 가는 길까지 모욕한 의사, 죽어도 용서가 안 되는 소대장. 상황과 그들이 처한 배경이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죽음이 눈앞에 닥치니 없는 기억을 만들어 울부짖는 남루한 인간은 자멸할 권리도 없는데, 영영 고통받아도 모자라는데. 이해해서는 안 되고, 연민의 감정이 단 한 톨만큼도, 조그만 부스러기만큼도 안 든다. 누군가에 의해 괴물이 되었다는 것, 그것만 알겠다. 그 고리를 끊어내지 않고 계속 몸을 불렸다는 것도 확실히 알겠다. 아주 원하지 않았더라도, 속죄하지 않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더럽고 추악하다.

      쓰레기 처리라는 명목하에 만들어진 법은 한 집안의 가장을, 소중한 아들과 딸을, 패기 넘치는 청년들을 데려가 감금하고 폭행했다. 착취하고 유린했다. 그 누구도 잘못된 일이라고 하지 않았고, 관심 가지지 않았다. 그동안 꽃들은 무참히 꺾였으며 작은 바람에도 스러져갔다. 쓰레기 정화라는 이면에서 또 다른 쓰레기만이 생겨났다. 인간 사이에서의 먹이 사슬이 날 것 없이 드러나, 올라오는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 펼쳐야 했다. 진정할라치면 불쑥 찾아오는 아픔이 나를 찌르고 사라졌다. 숨을 고를 틈 없이 쏟아지고 내리치기를 반복했다.

      잘 짜인 순서로, 깔끔하게 사건의 진상만을 훑는 전개에 읽어내리는 자체는 수월했다. 특히 227면부터는 병호의 시선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정확히 짚어주어 전개 방식이 색다르다고 느꼈다. 어두운 고통의 순간을 담담히 서술해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어서, 마치 새벽에 틀어놓은 흑백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미연과 지훈의 마지막 대화가 그랬다. 또, 급박하고 긴장되는 상황들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히 묘사되어 더욱 현실감 있게 읽혔던 것 같다.

      이토록 간절히 소설이 소설이기를 바란 적이 없었는데. 소설이 소설 같지 않아 분통할 뿐이다. 인생이 뒤집어진 타일 조각 같다. 하나가 전체를 거스르게 하고, 똑바르지 못하게 하는. 비슷한데, 아무래도 잘 못 된. 그런데 바로 고치기엔 늦은. 은희의 기억은 내 기억 속에도 오래 남아, 잊히면 또 꺼내 보고 또 기억될 듯하다. 고통은 반 박자 늦게 온다. 나도 반 박자 늦게 울었다. 낮은 목소리로 울먹이는 은희를 달랠 길이 없어, 그저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잘 읽었습니다.

     

      2020.6.21. 임서연 씀.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연히 접하게 된...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연히 접하게 된 '형제복지원 사건'은 우리나라가 가진 비극적인 과거사 중의 하나이다.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 거리의 노숙자, 고아 등을 불법감금하고 강제 노역 시키며 구타, 암매장 등의 끔찍한 일들을 자행했던 사건이다. 1975년부터 87년까지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과 삶을 빼앗기고 인간답지 못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가해자인 박인근 이사장은 업무상 횡령 혐의 등만 인정되고 징역 2년6개월이라는 말도 안 되는 처벌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사망자만 500명이 넘는다는 그곳의 어두운 진실은 탈출한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지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가진 것 없고 힘 없던 그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무서운 곳이 아닐까 싶다.

    알린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가 버리고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 버리는 걸.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유리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그곳에서 삶을 빼앗긴 사람들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그들의 삶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마치 소설 속 미연이 증언을 하듯 작가가 대리 증언자가 되어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진실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형제 복지원에 잡혀갔던 은희와 미연 그리고 은희의 아들 준

    이야기는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흘러간다.

    형제복지원의 소대장인 무열에게 폭행을 당하고 강간으로 아이를 출산하게 된 은희와 은희의 인간다운 삶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미연

    그리고

    폴란드 입양아이자 엄마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서울로 온 은희의 아들 준

    미연과 준은 수십년 전 형제복지원에서 수많은 인권 유린을 자행한 인물과 그들을 도와주었던 인물들을 찾아 나서며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정을 함께 한다.

    사건에 과련된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야기가 전달되고 서사가 전개되는 점에서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처럼 사회 사건을 소재로 한 다른 소설 작품이 떠오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 차라리 소설 속 이야기이거나 꾸며진 거짓이기를 바라게 된다. 사람이 가장 무섭고 잔인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끔찍했던 이야기들 때문에 읽으면서 기분이 무척이나 무겁고 어두워지기도 했다.

    국가의 잘못된 인식 아래 희생된 수 많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은희처럼 평벙함 이름을 갖고 평범한 삶을 살았어야 할 그들은 이름과 삶을 빼앗기고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세상에서 잊혀져 갔다.

    무엇이 그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누가 쓰레기 같은 가해자들의 죄를 덜어주었을까? 그런 질문들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리고 이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그들의 과거는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앗아간 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잊히지 않도록 누군가는 계속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두운 과거는 덮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꺼내 놓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는 같은 사건이 되풀이 되지 못하도록 두 눈을 크게 뜨고 감시를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 박유리,<<은희>>서평 | s5**5 | 2020.06.21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문학이란 무엇인가? 인식적 가치, 정서적 가치, 미학적 가치 등 사람에 따라 많은 답이 나올 것이다. 그...

      문학이란 무엇인가? 인식적 가치, 정서적 가치, 미학적 가치 등 사람에 따라 많은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사르트르의 답을 빌리고 싶다.

     

    "시대를 넘어서는 추상적인 인간에 대해서나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시대의 모든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동시대인을 위해서 써야 하는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P.210

     

      《은희》는 사르트르가 말한 모든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동시대인을 위해서 쓰인 바로 그 소설이다. 《은희》는 한국이 아닌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에서 시작된다. 어린 시절 폴란드로 입양된 ‘준’에게 그의 입양 서류와 그의 친어머니의 검안서, 사망과 관련된 수사 요약 보고서, 그리고 복지시설 입소 카드를 포함한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충격적인 자신의 출생 비밀에 대해 알게 된 준은 머릿속에 켜진 뜨거운 불을 끄기 위해 한국으로 향한다. 그는 폭행을 당해 숨이 끊어져가는 어머니의 가슴에 안티프라민을 발라준 미연을 찾아간다. 미연에게 어머니가 이유 없이 끌려간 ‘형제복지원’에 대한 진실을 듣는다. 국가에 의해 묵인된 끔찍한 폭력과 폭력에 희생당한 선량한 사람들의 삶을 알게 된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입법을 위해 노력하는 병호와 수용소를 만든 방인곤, 수용소 소대장이었던 무열의 입을 거쳐 준은 어머니의 삶의 진실에 점점 가까워진다.

      ‘형제복지원사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거리의 부랑자들을 형제복지원에 감금 한 사건이다. 국가권력은 1988년에 개최될 올림픽을 위해 ‘거지들을 쓸어 담아서 건강하고 명랑한 사회를 만들자’는 참혹한 목표를 복지국가, 사회적 약자, 시대정신과 같은 그럴싸한 이야기로 둔갑시켜 길거리를 청소했다.

     

    "술 먹고 취해 길에 뻗는 남자들, 여관비를 아끼려 기차역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 남루한 옷을 입고 떠도는 아이들. 내무부 훈령 410호가 잡아들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빈곤을 모아두면 풍요로워질 것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바퀴벌레와 쥐 퇴치 운동을 벌이듯이. 그렇게 우리는 청소됐다."

    -박유리, 『은희』, 한겨레출판, p.73

     

     1987년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탈출함으로써 내부에서 일어난 인권유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소설 속 은희와 미연이다. 그들이 정말 부랑자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숙인이 필요하니까 거리에 옷차림이 남루한 사람들을 잡아 가뒀고 그들에게 무임금 노동을 시켰고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했다. 믿기 힘들지만 정말 그 시대에 그런 일이 있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513명이 죽었는데 그들을 죽인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들의 죽음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원장은 구속됐지만 외환관리법 위반, 횡령 등과 같은 죄에 대한 처벌을 받았을 뿐이다. 끔찍한 폭력에서 탈출한 미연 본인조차 분노의 대상을 누구로 잡아야 할지 알지 못한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지는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은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방에서 과도를 꺼내 손에 쥐었지만 누구를 찔러야 할지 막막했다. 국가, 사법부, 원장, 소대장, 조장, 아니면 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거지를 치워 깨끗한 사회를 조성하려고 했던 보통 사람들, 1년 남짓 소대장 아래서 다른 수용자들을 감시하고 밀고한 자신. 그 누구를 죽여야 할까.”

    -박유리, 『은희』, 한겨레출판, p.101

      34년이 지난 끔찍한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다시 소설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에 재밌는 소설, 감동을 주는 소설, 교훈을 주는 소설들이 많은데 왜 굳이 고통을 주는 소설을 읽어야 하냐고 질문할 수 있다. 언제까지 과거에 집착할 거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의 유통기한을 짧았다."

    -박유리, 『은희』, 한겨레출판, p.228

      소설 속 단숨에 읽기 힘들 정도로 잔인한 문장들 중에 가장 끔찍한 문장이었다. 진실의 유통기한은 짧고 사람들은 쉽게 잊으나 미연과 은수, 준은 아직 살아있다. 생존자 11명은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며 2014년 여의도 국회 앞에서 삭발을 했다. 이들에게 고통은 현재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를 같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형제복지원을 망각하는 순간, 형제복지원은 다른 모습을 하고 우리를 찾아온다. 2012년 1월 용산 4구역 철거 현장에서, 2014년 4월 진도 인근 해상에서, 그 후로도 거대 권력이 자행하고, 침묵하고, 은폐해온 인간성과 생명을 파괴한 인재들이 우리 사회에서 나타난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의 가장 끔찍한 점은 언제든지 내가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몰랐다”란 말이야말로 명문도 모른 채 자유를 억압당하고 모욕을 당한 이들에게 또 한 번의 폭력을 가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모른척하면 안된다. 이 모든 일이 우리와 상관없지 않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예술의 윤리는 규범을 만들고 권장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날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새롭게 얻어낸 희망을 세세연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 준다. 어떤 사람에게 현재는 눈앞에 보자기만 한 시간이겠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의 그 참혹함이, 유신시대의 압제가, 한국동란의 비극이, 식민지 시대의 몸부림이, 제 양심과 희망 때문에 고통당했던 모든 사람의 이력이, 모두 현재에 속한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

    (...)

    당신이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기억해야 하는 건 무엇인가.”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난다, 2013, p.204

      가해자 없이 놓인 피해자들. 살아남은 미연과 은수는 아직도 1987년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없고 그저 분노를 감춘 채 최선을 다해 망각할 뿐이다. 가족도, 소설을 읽는 우리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의 기억을 끊어내지 못한 채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살아간다.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억하는 일이다. 기억은 최소한의 윤리적 행위로 이어지고 이겨낼 방도가 없는 수마처럼 덮쳐온 어둠에 사라진 이들에게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이다.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소설은 준도, 미연도 아닌 병호가 보낸 편지에서부터 시작된다. 형제의 집에서 정문을 지키는 경비로 일한 아버지를 둔 병호는 ‘형제복지원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끝까지 기억하는 자다. 소설 속 병호는 마음이 가는 인물은 아니다. 언론과 사회의 관심을 받기 위해 허락 없이 미연을 언론에 노출시키고 그녀의 평온할 삶을 깨뜨린다. 끈질기게 준에게 연락하여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진실을 밝히는 자다. 대의를 위해 누군가에게 준 상처가 어쩔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게 밝혀지는 진실이란 판타지는 현실에 없다. 우리는 2014년 청와대 앞에서 자식을 잃고 울분을 쏟았던 이들을 통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에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내 그들을 순결하지 않은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순결해야 할 필요가 없다. 병호도 마찬가지다. 착하지 않아도 그들이 진실을 밝히기에 힘쓴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잃은 자들끼리 싸우도록 부추기는, 교묘히 싸움을 빠져나가는 가해자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나중에 발화하지만 ‘사건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임을 믿는다. 박유리 소설가가 먼저 응답했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해야 할 차례다. 진상 규명을 위한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2014년 7월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안전행정위원회에서 계류 중에 폐기되었다. 국회는 법을 만들고 ‘나’는 소설을 읽음이 남겨진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응답을 해야 한다.

  •   소설 《은희》는 12년의 기간 동안 513명의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국가와 기관의 합동 말살 정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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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은희》는 12년의 기간 동안 513명의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국가와 기관의 합동 말살 정책인 "형제복지원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이다. 유대인을 청소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내몰았던 나치 정책과 같이 국가는 사회를 깨끗하게 하며 걸인들에게 복지를 조성한다는 목표 아래 거리의 걸인, 깡패, 고아, 술 취한 자를 막론하고 실적을 올리기 위해 어느 누구나 잡아 감금하여 폭행과 구타를 일삼았던 최악의 인권 유린 사건이다. 소설 《은희》는 바르 그 중심에 죽음이 조작된 사건의 주인공 , 강간으로 아이 '준'을 낳고 구타로 목숨을 잃은 은희가 있다.


    《은희》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어 부모님을 따라 폴란드에서 살고 있는 청년 '준'이 한 통의 편지를 받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입양 서류와 어머니의 검안서,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된 수사 요약 보고서와 그 중심에 있는 형제의집 사건, 그리고 어머니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학생들과 함께 견학을 올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한 통의 편지로부터 알게 된 자신의 출생의 비밀. 축복 받은 탄생이 아닌 강간에 의해 태어난 자신의 출생 사실은 그에게 더욱 큰 혼란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온다는 박물관을 찾고 그 곳에서 미연을 만나게 된다.

    미연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재희를 사고로 잃었다. 남편의 요청으로 재희의 생일에 남편 지훈과 함께 딸이 있는 추모관으로 향한다. 매일 메마른 마음으로 살아가던 미연은 올해도 지훈과 함께 추모관에 가 딸의 죽음을 애도한다. 살아간다는 것보다 버티어 간다는 말이 어울리는 미연은 자신이 외면해 온 형제의 집 감금사건이 준이 자신의 엄마 김은희를 아냐는 질문 앞에 애쓰게 봉인해 온 자신의 불행했던 형제의집을 직면한다.


    《은희》는 은희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의 회고와 함께 사건을 재구성해가지만 작가는 사실이 존재했던 과거가 아닌 이 생존자들이 살고 있는 현재에 더 집중한다. 진상규명위원회인 병호는 형제의집 생존자 중 가장 반듯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미연에게 증언해 줄 것을 부탁하며 질문을 던진다.


    형제의집에서 나온 사람들, 다 어렵고 불행하게 살아요.

    배우지 못했고 괜찮은 직업 가진 사람도 없고요,

    매일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죠.

    당신을 제외하면요.


    병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명문 한국외고 영어교사이자 결혼까지 한 미연이 버젓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미연은 이 형제의집 사건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이 가장 버젓하게 살고 있다던 미연의 삶이 결코 1987년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미연 뿐만 아닌 다른 피해자들 모두 그들의 삶이 형제의집 감금 시절에서 멈춰 있음을 강조한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세월은 그들에게 다른 벌을 주었다.

    한 사람에게는 잊어가는 벌은, 또 한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벌을.


    형제의집 원장이자 이 사건의 원흉인 방인곤 원장은 치매 질환으로 자신의 과거를 잊어간다. 미연과 다른 인물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고통을 선사했다면 방인곤 원장은 자신의 기억을 지워나가는 축복을 선사받았다. 자신의 악업도, 자신에게 가해진 비난도, 손가락질도 모두 지워지는 걸 저자는 세월이 주는 벌이라고 하지만 이 책에서는 신이 이 죄인 방인곤 원장에게 준 하나의 축복처럼 느껴지며 남겨진 자들의 비참함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제 가해자인 방인곤의 치매 앞에 그에게 지난 잘못을 사죄하라고 외칠 수도 없는 이 현실은 영화 <밀양>을 떠올리게 한다.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은 여주인공에게 살인범은 자신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의 구원을 말하며 평온한 얼굴을 짓는 살인범의 표정 앞에 여주인공은 소리친다. 피해자인 자신이 용서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냐고 외치는 영화 속 모습과 치매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원장의 모습과 과거의 고통으로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미연의 절규의 모습이 겹쳐진다.


    인간이 아닌 바퀴벌레보다 못한 취급 속에서 강간에 의한 임신은 결코 상상할 수 없이 비참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점점 중심에 다가갈수록 한 생명을 품고 그 강간의 흔적인 한 생명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아이를 품은 은희를 보여준다. 인간이 인간일 수 없는 곳, 희망도, 왜라는 질문도 없는 곳, 살아남기만을 바라는 곳, 그 곳에서 어린 나이에 성폭행을 당한 흔적을 어떻게 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엄마인 나이지만 은희의 결정은 놀라웠다.

    하지만 작가는 은희의 죽음을 통해 그 이유를 말해주는 듯하다. 사랑이 없는,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는 형제의집에서 자신에게 찾아온 아이를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 살아남고자 했던 하나의 몸부림이였음이 느껴졌다. 절망과 원망보다는 끝까지 보호하고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그 의지로 구타 속에서도 아이를 지켜냈고 아이가 입양되는 날까지 젖을 물리며 사랑을 주었다.


    이 소설 속에서 자신이 성폭행범에 의해 태어난 존재라는 걸 안 '준'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소설 마지막 끝까지 사랑하기를 선택한 은희의 기억으로 '준'이 예전처럼 마음의 벽을 쌓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양부모님과의 거리나 타인과의 거리가 갑자기 좁혀지지 않겠지만 자신의 존재가 끝까지 희망을 선택한 엄마의 존재라면 준 또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마지막에 살기를 선택한 미연과 같이...


    고통스러운 이름 《은희》는 그렇게 고통의 존재에서 희망의 존재로 느껴졌다. 인간임을 잊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처럼 남겨졌다. 그리고 이 형제의집 사건이 피해자들의 시계 단추를 여전히 멈추고 있는 한 이 일이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은희》를 통해 더욱 드러낸다. 소설 속 미연에게 부모님이 다 지나간 거라고, 다 잊을 거라고 말하며 봉인해 버리지만 이 봉인 된 시간 속에 여전히 고통이 진행 중임을 미연과 준의 삶을 통해 작가는 말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쉽게 읽어나갈 수 없었다. 문장마다 이 인물들의 고통과 감정이 물이 스폰지에 흡수되듯 내게도 그들의 고통이 내게 전염되는 듯했다. 이 형제의집 사건의 피해자들의 현재 속에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노고가 문장에서 느껴져 몇 번이나 곱씹듯 천천히 읽어야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고통받는 이 끔찍한 사건들이 더 이상 없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도 음지에서 힘들어 할 많은 은희들에게 나 또한 작가의 마음처럼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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