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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회고록(상):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552쪽 | A5
ISBN-10 : 8991491715
ISBN-13 : 9788991491717
노태우 회고록(상):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양장] 중고
저자 노태우 | 출판사 조선뉴스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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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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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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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주역들과 6공화국의 비화를 담은 『노태우 회고록』 상권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이 책은 공수여단장 시절부터 10·26사건에서 12·12까지, 2·12총선, 장영자 사건, 6·29 선언 등 5공화국때 저자가 겪은 다양한 사건들과 인물들과의 이야기를 회고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등 현대사의 주역들과의 일화를 담고 있으며, 5공 청문회 등 정치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되돌아본다.

*본 상품은 초기 제작 부수가 많지 않아 배송에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오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자소개

목차

노태우 회고록 上 -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머리글

제1장 나의 어린 시절
제2장 陸士 생도 시절
제3장 국군 將校의 길
제4장 5ㆍ16혁명과 방첩대 생활
제5장 베트남 戰線
제6장 維新과 尹必鏞
제7장 空輸여단장 시절
제8장 경호실과 車智澈
제9장 9사단장
제10장 10ㆍ26사건에서 12ㆍ12까지
제11장 수도경비사령관-보안사령관 시절
제12장 서울올림픽 유치 지휘
제13장 2ㆍ12총선과 민정당 대표
제14장 6ㆍ29선언-모든 것을 건 승부
제15장 13代 대통령선거
제16장 취임 前後
제17장 서울올림픽-祖國이 가장 빛났던 순간
제18장 '5共 청산'?風
제19장 중간평가 유보
제20장 3당 合黨과 갈등
제21장 민자당 競選과 金泳三
제22장 중립내각으로 大選

책 속으로

출판사 서평

제6장 유신과 윤필용 사건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실언한 것을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이 잘못 전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두환 공수특전1여단장도 같은 생각을 했다. ▶강창성 개인적 복수심에서 하나회를 과장 발표, 여론 오도했다. 나중에 ...

[출판사서평 더 보기]

제6장 유신과 윤필용 사건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실언한 것을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이 잘못 전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두환 공수특전1여단장도 같은 생각을 했다.
▶강창성 개인적 복수심에서 하나회를 과장 발표, 여론 오도했다.
나중에 박 대통령도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유능한 장교들 희생시키는 것 알고 조사 중단시키고 보안사령관 직에서 해임시켰다.

제7장 공수여단장 시절

▶공중낙하 합동결혼식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멋진 행사가 있었다. 1975년 4월19일에 치러진 28쌍의 공중낙하 합동결혼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사관들 중에는 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아이까지 낳고 사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부모와 친인척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이 일어날 소지가 없지 않았다. 나는 ‘이들에게 떳떳한 가정을 만들어 주자. 그러기 위해서는 만인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을 올려 주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대대장들에게 “해당 인원을 파악하고 여단장이 직접 주례를 서는 훌륭한 결혼식을 올릴 터이니 이 같은 취지를 당사자와 부모들에게도 설명하고 동의(同意)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파악해 본 결과 새로운 신랑·신부를 합해 모두 28쌍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결혼식을 생각해 냈다. 결혼식장을 행주나루 백사장에 마련하고 주례인 나를 비롯한 신랑 28명 전원이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백사장에 꽃다발을 안고 서 있는 신부에게로 날아가는 시나리오였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하늘이 우리들을 축복해 주리라 믿었다.
이색(異色) 결혼식이라는 소문이 퍼져 TV를 비롯한 언론사 기자들이 몰려오고 이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아침엔 날씨가 잔뜩 찌푸려 걱정을 했는데 오전 10시가 지나면서부터 날씨가 화창하게 개고 바람도 잔잔해졌다. 우리는 함께 비행기를 타고 결혼식장을 멀리 한 바퀴 돈 후 나를 선두로 해서 결혼식장을 향해 뛰어내렸다. 알록달록한 낙하산 29개가 나비처럼 꽃다발을 안고 있는 신부 쪽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제8장 경호실과 차지철

▶대통령 측근들
각 부처 장관이나 지방행정 책임자들이 보고하고 박 대통령이 지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 대통령은 조직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는 데다 18년간 국가를 통치해 온 관록이 있어서인지 보고자들보다 내용을 더 깊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부실(不實)한 보고는 용납될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의도를 제대로 받들고 인정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우수한 사람이 노력을 많이 해야 했다. 공무원 사회는 자연스레 엘리트 관료화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에 주도권을 잡았던 혁명주체들은 이제 2선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젊은 엘리트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제와 행정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다만 정치 분야에서는 전혀 그렇지를 않았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박 대통령을 만 1년간 모시면서 보니까, 국사(國事)를 야당 책임자와 만나 진지하게 논의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박 대통령을 받드는 사람들도 박 대통령이 야당 당수와 만난다는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단정하고 있었다. 야당을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 역시 야당이 박 대통령의 업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이 나라 발전에 온몸을 바쳐 불철주야(不撤晝夜) 노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존경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당시 박 대통령의 신념은 ‘먹지 못하는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를 한단 말인가? 우선 배불리 먹고 세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율을 모르는 민주주의란, 말만 민주주의이지 혼란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김일성이 원하는 대로 나라가 흘러가게 된다. 나라를 그 꼴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어느 수준까지는 다소 인권(人權)을 희생시키더라도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권력 측근에 있는 인물들의 자세와 행동이었다. 박 대통령의 신념(信念)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아 그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과 야당 속에 몸을 던져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거의 없어 보였다.
많은 측근인사들이 박 대통령 앞에서는 “각하가 아니면 이 나라를 이끌 사람이 절대로 없습니다. 각하야말로 민족의 태양이십니다. 백성은 우매하고 야당은 한결같이 비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야당이나 국민과의 거리를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박 대통령도 사람인 이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육군 소장의 계급, 또 경호실 작전차장보라는 직책으로 이런 생각들을 솔직히 말씀드릴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박 대통령이 추구한 정책 가운데 이 새마을운동만은 당리당략(黨利黨略)이라는 차원을 떠난 온 국민의 합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정치적인 이해득실(利害得失)로 따지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순수성을 의심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강한 집념은 순수한 애국심 그 자체였다.

제9장 9사단장

▶自由路 발상
원래 이 도로의 아이디어는 1979년에 내가 건의한 것이다. 군단장과 군사령관에게 보고해 동의(同意)까지 얻었었다. 문제는 예산이었는데 길을 지금 만들어진 것보다 강 쪽으로 400~500m 안쪽으로 들어가게 하면 많은 한강 둔치를 조성할 수 있어 그것을 팔아 공사비를 충분히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군에서는 나의 건의를 관계 부처에 넘겼다고 했는데 정부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 확인해 보니 이 건의서가 건설부에서 잠자고 있었다. 즉시 건설부 장관에게 검토를 시켜 타당성을 보고 받았다. 그래서 내 대통령 임기 중에 거의 완성된 것이다. 사단장 때의 아이디어가 대통령이 되어 실현된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自由路)를 칭찬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제10장 10·26사건에서 12·12까지
▶부대 출동 명령
간단하게 정리하면 12·12사태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가 일어난 돌발사고였다. 만일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서든지 들어본 적이 없다. 역사상 어느 쿠데타도 병력을 동원하는 부대장이 부대를 이탈해 지휘할 수 없는 곳에 가 있은 예는 없었다. 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제11장 수도경비사령관-보안사령관 시절

▶세 金씨
나는 계엄분소장으로 있으면서 유관기관장뿐만 아니라 언론계 간부와 교수·학자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김종필(金鍾泌) 씨= 정치적인 감각과 국가경영의 관록 등은 누구보다 잘 갖추고 있다는 평이었다. 그는 두 가지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제3공화국의 주요 국정(國政)책임자로서 유신(維新)과 장기집권에 대한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유신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유신을 반대했다고 변명하고 나선 자세였다.
그가 단호하게 ‘제3공화국과 관련해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다. 나는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잘잘못은 국민들의 심판에 따르겠다’는 자세를 보였다면 역사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군인의 입장에서 몹시 안타깝고 아쉽게 생각했다.
◇김영삼(金泳三) 씨= 장래를 내다볼 수 있는 인물로 손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언론계에서 기대를 거는 편이었다. 그러나 국가안보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고 군에 대한 친근감이나 인맥(人脈)이 두텁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대중(金大中) 씨= 군 내부의 평가는 한마디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념적 정체성이 불분명하며 통일정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김일성과 맥(脈)을 같이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언론계·학계에서의 의견도 비슷한 편이었다. 국가에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가 배후인물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실제로 그에게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선동적이었다.

▶金大中 사형 만류
1981년 1월23일 내란음모죄로 재판을 받아온 김대중(金大中) 씨의 사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자 군 내부에서는 법대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나는 국내외적으로 볼 때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독재란 무엇인가. 정적(政敵)을 죽이고 장기집권을 하면 독재라는 레테르가 붙게 되는 것이다. 만일 김대중 씨를 사형집행한다면 내 동기(同期)이자 친구인 전 대통령의 손에 피를 묻히게 되고 독재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전 대통령은 7년 단임으로 그만둘 사람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그에게 독재자라는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전 대통령에게 했더니 그 역시 공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12장 서울올림픽 유치 지휘

▶올림픽 유치 건의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하기로 정부가 결정한 것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이었다.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주역(主役)이었던 대한사격연맹회장 박종규(朴鐘圭) 의원(전 경호실장)이 1979년 박(朴)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를 건의했다. 사회의 선진화, 남북관계에서의 우위(優位), 공산권 진출을 위한 국가 대전략으로서 올림픽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대통령 서거 직전인 1979년 10월8일 서울시가 올림픽 유치 계획을 공식선언했다. IOC(국제올림픽 위원회)에 유치신청서를 낸 것은 그로부터 1년 5개월 후인 1981년 2월26일이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선언하고 공식신청서까지 제출했으면서도 정부는 본격적인 유치활동을 벌이지 않고 있었다. 유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유치한다 해도 우리의 경제력이 이를 뒷받침하기 어렵다는 것이 정부 관계기관의 지배적인 판단이었다. 그 사이 국가적 위기와 경제 불황(不況)이 겹쳐 아무도 올림픽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럴 때 내가 올림픽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내가 박종규(朴鐘圭) 씨, 노재원(盧載源) 대사 등으로부터 올림픽 유치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올림픽은 꼭 유치해야 하므로 대통령께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건의서를 올린 것은 9월2일이었다. 개최지 결정일을 28일 앞둔 날이었다.

제13장 2·12총선과 민정당 대표

▶청와대 ‘쓰리 許’
제5공화국 시절, 세간에서는 이들이 청와대 비서진들을 주무를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권력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이야기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실보다 과장된 점이 없지 않았다.

▶張玲子 사건
이 사건이 있고 난 후 스리 허에 대한 전(全) 대통령의 불신과 경계심은 갑작스레 커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서도 허화평(許和平) 씨에 대한 불신이 더욱 심했다.

제14장 6·29선언―모든 것을 건 승부

▶두가지 지침: 직선제와 金大中 사면
1987년 6월 17일 안가 만찬,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후보,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 이춘구(李春九) 민정당 사무총장, 이치호(李致浩)·현경대(玄敬大) 의원, 박영수(朴英秀) 비서실장, 안현태(安賢泰) 경호실장, 김윤환(金潤煥) 정무1장관, 이종률(李鍾律) 공보 수석비서관 등
전두환: “우리가 지금 밀려가고 있는데, 나는 카드를 다 썼어요. 이제 없어. 정부에서 뭘 연구하더라도 이제는 전부 노(盧) 대표를 중심으로 해야 된다는 얘기야. 그래서 내가 안기부장을 오라고 한 것은 비서실과 긴밀히 협조해서 뭔가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나는 그날(6월 17일) 밤 연희동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언론에서 하자는 대로 해야겠지. 그게 바로 국민들의 뜻일 테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리드할게” 하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말을 받아 ‘노 후보가 시국수습의 전면에 주도적으로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나는 이날 밤 박철언(朴哲彦) 특보를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심을 했다. 직선제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에 관한 모든 준비를 해달라”며 초안을 만들라고 했다.
그때 준 지침은 두 가지였다. 직선제를 한다는 것과 김대중 씨를 사면복권한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박 특보가 몇 명의 참모들과 함께 초안을 잡으면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직선제 해도 이기지 않겠소?”
6월24일 오후 7시쯤 전(全)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로 올라갔다. 전 대통령이 내 천거(薦擧)에 따라 각계 인사들을 만난 직후였다. 서쪽 별관에서 만났는데 영식(令息)인 재국(宰國)군도 동석했다. 화제는 시국(時局)문제에서부터 시작되어 당내(黨內)문제, 특히 당의 단결과 국민의 신뢰 등으로 옮겨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전 대통령은 불쑥 “당의 신뢰도나 노(盧) 대표가 쌓아올린 이미지로 보아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소?”하고 내 의중을 떠보았다. 나는 속으로 ‘옳지! 내가 의도했던 대로 일이 잘 풀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전 대통령의 이야기는 이만섭 총재가 내게 한 말과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선뜻 수긍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 당원들을 데리고 국민들에게 내각제를 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다녔는데 갑자기 직선제로 바꾸면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반문(反問)했다. 전 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왔으므로 이번에도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 대통령의 생각을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생각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식으로 반어법(反語法)을 쓴 것인데, 후에 이 대목으로 해서 내가 직선제를 반대한 것으로 오해를 사게 된 듯하다.
여기서 잠시 덧붙이자면 이미 나의 지시를 받은 박철언(朴哲彦) 특보는 6월18일부터 직선제 수용 관련 선언문 기초 작업에 들어가, 20일과 22일 두 차례 보고를 하고 나의 보완 지시를 받아 수정 작업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6·29선언의 초안을 잡도록 지시한 후에도 박(朴) 특보를 비롯한 내 참모들은 ‘직선제’ 이야기가 나오면 “무슨 말이냐? 직선제 하면 나라 망한다. 올림픽을 치를 때까지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제18장 ‘5共 청산’이란 狂風

▶우리 민족의 슬픈 특성?
청산이라는 용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정부나 여당에서 한 것으로는 기억되지 않는다. 나는 ‘5공(共) 청산’이라는 말 자체가 5공화국을 말끔히 정리한다는 뜻이므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청산이라기보다 역사의 진전이라고 해야 옳다고 본다.

▶마녀 사냥
5공(共) 청문회도 그랬다. 정치재판, 여론재판, 사법재판 등이 뒤범벅되어 버렸다. 정부로서도 홍수처럼 흐르는 물줄기를 다스리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규제에 묶여 있던 여러 분야가 ‘민주화’라는 역사적 명제(命題) 속에서 일시에 해방됨으로써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안 되겠다고 해서 다시 누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가만히 두게 되면 격렬한 왕복작용을 하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동적으로 멈춰져 자율이라는 규범 속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위정자(爲政者)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떠올리며 용수철이 서서히 멈추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대통령 친인척에게 공직을 맡기는 데 문제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민족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고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支柱)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나는 전경환(全敬煥) 씨를 새마을운동 본부장에 앉혀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까지는 고려될 수 있을지 몰라도 회장을 맡게 한 것은 잘못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전(全) 전 대통령의 장인인 이규동(李圭東) 옹에게 대한노인회 회장을 맡긴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이(李) 옹을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은 고결한 인품과 온유한 성품을 지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이었다. 우리 정규 육사 출신들은 그분을 존경했다. 그런 분에게 노인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하니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런 말 저런 말을 하고, 급기야 순진한 분이 나라 일에 대해 이 걱정 저 걱정을 다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자신이 전혀 모르는 가운데 이상한 권력이 형성되고 말았다.
어쨌든 전(全) 대통령이 권좌(權座)에서 물러나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일어나는 험악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친인척과 측근들을 비난하더니 급기야는 포위망을 압축시켜 비난의 화살을 전(全) 전 대통령에게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백담사行
국민들은 나의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무슨 변화의 돌파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항간에서는 “얼마간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원조(李源祚) 의원에게 전(全) 전 대통령 내외가 국내의 조용한 곳에 거처를 정해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 있는 것이 어떤가 하는 권유의 뜻을 전(全) 전 대통령 및 그의 참모들과 진지하게 논의해 보라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신변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한데 “해외로 도피하시오”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변화된 시대상황은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이해시켜 최선의 방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직접 나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수십 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상황에서 내가 앞장서서 설득하려고 했을 때 정치권과 국민들은 “둘이서 야합한다”고 나올 것이 뻔했다.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전(全) 전 대통령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데 당시 상황은 아닌 말로 폭동이 날 판이었다. 그래서 참모들과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했다. 참모들 역시 “우리가 살기 위해 저쪽을 일방적으로 죽일 수는 없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러던 중 전(全) 전 대통령과 참모들은 여러 날 논의를 거쳐 설악산(雪嶽山)에 있는 백담사(百潭寺)를 은둔처로 정했다고 알려왔다.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 등 몇 곳의 사찰을 검토했으나 이왕 국민들에게 속죄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서는 외지고 험준한 곳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이렇게 고통스러운지를 그토록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前夜의 전화
떠나기 전날 밤 전(全) 전 대통령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백담사 은둔에 대한 내 생각을 물었다. 자신이 백담사에 가는 것을 대통령인 나도 동의하는지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전임자의 신변을 안전하게 해주지 못해 부끄럽다. 그러나 현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잠시 동안 고생스럽더라도 그곳에서 참고 견디면 조속한 시일 내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상으로 회복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 뜻을 확인하고 싶었다면서 “6공화국에 도움이 된다면 더 큰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보고에 따르면 그들 내외가 기거할 백담사는 설악산의 중허리에 위치해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전깃불은 물론 화장실·목욕실도 없는 아주 초라한 곳이라고 했다. 나는 관계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야 없지 않느냐. 최소한의 불편은 덜어줘야 하지 않느냐”고 질책했다. 관계자들은 “불편을 덜기 위해 보수(補修)공사를 하면 기자들이 ‘편하게 지낸다’, ‘화려하다’는 등의 기사를 써댈 텐데 그러면 국민감정을 좋지 않게 할 염려가 있으므로 조금도 손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참겠다는 것이 그분들의 뜻”이라고 했다.

제19장 중간평가 유보

▶헌법 위반 소지, 유보
김종필 총재와 나는 “중간평가로 인해 정국(政局)이 극한 상황으로 치닫지 않게 노력한다”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에서 김 총재가 중간평가를 할 것이냐고 물은 데 대해 나는 “국민들과의 약속이니까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김 총재는 “중간평가를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하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인데 대통령이 어떻게 헌법을 위반하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이전에는 중간평가에 대한 법률적 측면의 문제점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을 통해 그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국민 앞에 선서하는 첫째 항목이 헌법을 지키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어기게 되는 셈이어서 나는 “검토해서 하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김대중 총재와의 묵계설(默契說)과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까지 오갔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김 총재 측에서 위헌(違憲)이라고 하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뒷거래를 하겠는가.
중간평가를 하면 분명히 이긴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고, 나도 그런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헌(違憲)이라는 문제가 중간평가를 유보하기로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작용을 했다.

제20장 3당 合黨과 갈등

▶與小野大 타개의 필요성
정치지도자들의 성향으로 보아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는 보수성향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정·민주·공화 3당이 합당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김영삼 총재는 어려울 것이므로 공화당만이라도 합당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YS는 들어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예단(豫斷)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정책보좌관(후에 정무장관)이 내게 진언을 했다.
“각하, 상심하실 것 없습니다. 위기(여소야대)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에 보혁(保革)구도로 일대 개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민주세력을 대통합하고 각 당에 있는 급진 좌파세력을 분리해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 대통합을 하십시오. 그러려면 3김씨와의 통합을 꾀하는 큰 정치를 구상해야 합니다.”
나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잇따른 ‘정계개편, 보수통합’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던 터라 박철언 보좌관에게 “그러면 자네가 비밀리에 접촉해 보라. 특히 김영삼·김대중 두 총재의 의중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김종필(金鍾泌) 총재는 홍성철(洪性澈)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났는데, 예상대로 쉽게 동의해 주었다고 보고했다. 야당의 두 총재는 박 보좌관이 접촉했는데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할 듯 말 듯 애를 먹였고, 김대중(金大中) 총재는 여러 번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협조할 일은 할 테지만 통합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金大中, 合黨에 부정적 반응
정치지도자들의 성향으로 보아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는 보수성향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정·민주·공화 3당이 합당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김영삼 총재는 어려울 것이므로 공화당만이라도 합당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YS는 들어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예단(豫斷)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정책보좌관(후에 정무장관)이 내게 진언을 했다.
“각하, 상심하실 것 없습니다. 위기(여소야대)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에 보혁(保革)구도로 일대 개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민주세력을 대통합하고 각 당에 있는 급진 좌파세력을 분리해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 대통합을 하십시오. 그러려면 3김씨와의 통합을 꾀하는 큰 정치를 구상해야 합니다.”
나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잇따른 ‘정계개편, 보수통합’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던 터라 박철언 보좌관에게 “그러면 자네가 비밀리에 접촉해 보라. 특히 김영삼·김대중 두 총재의 의중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김종필(金鍾泌) 총재는 홍성철(洪性澈)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났는데, 예상대로 쉽게 동의해 주었다고 보고했다. 야당의 두 총재는 박 보좌관이 접촉했는데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할 듯 말 듯 애를 먹였고, 김대중(金大中) 총재는 여러 번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협조할 일은 할 테지만 통합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金泳三, ‘내각제 개헌’ 반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김영삼, 김종필 총재는 각각 자신들과만 합당(合黨)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통합 발표 2~3일 전에 이르러 박철언 정무장관이 김종필 총재에게 “내각제를 하려면 민주당에도 얘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운을 뗐다. 김영삼 총재에게도 “대통합을 하는 마당에 보수세력의 상징인 김종필 총재에게도 의견을 타진해 본인이 하겠다고 하면 끼워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고 의견을 묻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김영삼 총재가 “안 돼, 안 돼. JP를 넣으면 이미지가 나빠지므로 넣으면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박 장관의 끈질긴 설득에 “그러면 한번 이야기해 보고, 본인이 흔쾌히 하겠다고 하면 끼워 주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끼워 주는 것이지 주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양보했다고 한다.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김영삼 총재 측이 “며칠만 여유를 달라”면서 시간을 끌었다. “참모들에게 충분한 이야기가 안 됐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당 핵심 참모회의를 연 결과 ‘내각제 하면 큰일 난다’는 반대가 강하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초 내각제를 하게 되면 김영삼 총재가 총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각제를 하면 의석수에 비례해 장관자리를 나누게 되므로 사실상 의석수가 적은 민주계(民主系)로서는 총리 자리만 차지하고 나머지 요직은 전부 민정계(民正系)가 독식(獨食)하게 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김영삼 총재의 스타일이 총리보다는 대통령이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을 내걸면서 ‘내각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박 장관의 보고를 받고 “걱정하지 말라. 내가 대통령인데 김 총재가 약속을 해놓고 배신할 수 있겠는가”며 그대로 추진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나는 박 장관이 내 뜻을 잘 설명해 김영삼 총재를 설득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이제는 방향이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통합 원칙에 합의한 우리는 각각 민주당·공화당과 별도로 각서를 작성했다.

▶“내각제 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김영삼 총재 측이 “며칠만 여유를 달라”면서 시간을 끌었다. “참모들에게 충분한 이야기가 안 됐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당 핵심 참모회의를 연 결과 ‘내각제 하면 큰일 난다’는 반대가 강하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초 내각제를 하게 되면 김영삼 총재가 총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각제를 하면 의석수에 비례해 장관자리를 나누게 되므로 사실상 의석수가 적은 민주계(民主系)로서는 총리 자리만 차지하고 나머지 요직은 전부 민정계(民正系)가 독식(獨食)하게 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김영삼 총재의 스타일이 총리보다는 대통령이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을 내걸면서 ‘내각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박 장관의 보고를 받고 “걱정하지 말라. 내가 대통령인데 김 총재가 약속을 해놓고 배신할 수 있겠는가”며 그대로 추진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나는 박 장관이 내 뜻을 잘 설명해 김영삼 총재를 설득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이제는 방향이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통합 원칙에 합의한 우리는 각각 민주당·공화당과 별도로 각서를 작성했다.

▶金泳三과 朴哲彦의 訪蘇 갈등
박 장관은 귀국(歸國) 후 이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매우 흥분해 있었다. 합당 당시에는 김 최고위원의 장점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정국(政局) 전망을 밝게 보던 그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모든 희망을 접은 듯했다.
나는 그를 달래면서 자중(自重)하라고 일렀다. 그가 비록 사리(事理) 판단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경험과 관록이 부족한 단점이 있었다. 머리가 우수한데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남의 잘못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많은 경험을 겪고 나서야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아량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박 장관의 보고를 받고 김 최고위원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함께 갈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웬만한 것은 참고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당을 이끌어갈 수 있다. 이런 각오가 없다면 애당초 그와 합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인식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박 장관이 생각을 바꾸길 바랐다. 그에게 창당(創黨)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겸허한 자세로 처신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럼에도 박 장관은 내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귀국 후 김 최고위원이 박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고 박 장관이 김 최고위원을 비난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 불씨가 되어 김 최고위원이 청와대 당직자 회의에 불참하고 민정계(民正系)와 민주계(民主系)가 싸움을 벌일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박 장관의 사퇴로 결말 났지만, 그를 설득시키지 못한 나의 부덕(不德)함이 후회되는 한편, 그의 지나친 우월감과 부족한 자제력(自制力)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제21장 민자당 競選

▶全 대통령의 鄭周永 不信
이런 대화가 있은 지 한 달쯤 지나 전(全)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는 정(鄭) 회장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가 그 영감한테 크게 속았소. 그 사람 큰일 저지를 사람이야. 벌써 몇 개 기업이 그 사람으로 인해 넘어졌다고 하는군”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빨리 아셔서 다행입니다”하면서 그의 인간됨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민정당(民正黨) 대표위원이던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정(鄭) 회장을 만났더니 사공일(司空壹) 경제수석의 욕을 해댔다. 내가 알기로 사공(司空) 수석은 경제운영 및 실무에 밝은 우수한 참모임에도, 정 회장은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경제를 망치는 자’라고 매도했다.
국가경제가 정(鄭) 회장 개인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鄭) 회장은 이런 식으로 잦은 충돌이 일어나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정권을 잡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정치를 갑작스럽게 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라 박(朴) 대통령 말기부터 준비를 해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가 이끄는 통일국민당은 1992년 1월10일 발기인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아무리 내가 대통령이라고 해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참모들이 건의한 ‘정주영(鄭周永) 씨 정계진출 저지 방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런 공작은 민주적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정(鄭) 회장의 정계(政界)투신이 적잖은 혼란과 불안을 야기할 것이라는 걱정은 들었다.
나는 측근 가운데서 정(鄭) 회장과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을 불러 “인간적인 입장에서 정(鄭) 회장의 정계투신을 막는 것이 좋겠다”뜻을 밝혔다. 그 측근은 나름대로 알아본 후 “정(鄭) 회장의 뜻을 돌리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습니다”라고 보고했다.

▶大選 후보 3원칙
나는 다음 대선(大選) 후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정한 원칙을 비공개적으로나마 밝혀놓고 있었다.
첫째, 군(軍) 출신은 대권(大權) 후보가 될 수 없다.
둘째, 내 친인척 중에서도 대권(大權) 후보가 나올 수 없다.
셋째, 여당 후보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자유로운 경선을 통해 결정된다.
이러한 나의 뜻은 1987년 대선(大選) 당시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바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었다. 정무수석은 이런 나의 원칙을 토대로 수개월에 걸쳐 민자당 내의 예상후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했다. 이 작업에는 많은 전문 인력이 동원됐으며, 여론조사 등 다양한 검증작업이 동반됐다.

▶金泳三의 돌출 행동과 李鍾贊의 반발
김 대표가 서둘러 후보경선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것은 경선(競選)을 조기 과열화시킬 뿐, 그에게 특별히 유리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면 아래 있던 민정·민주계 갈등이 표면화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가능한 한 대립을 피하고 원만한 타협을 통해 경선 절차에 따라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던 내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정한 원칙들은 적어도 그에게는 유리한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치고 나온 것이었다. 나는 몹시 당혹스럽고 화가 났다. 이 일로 인해 당내(黨內)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대통령인 내가 1년 반 동안에 걸쳐 그를 믿고 정성을 다해 지도해왔는데 이렇게 당돌할 수 있는가. 대통령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청와대 비서진들도 “이럴 수 있느냐”면서 몹시 흥분했다. 과거 야당에 몸담고 있을 때처럼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치고 나와 기선(機先)을 제압하는 방법이 체질화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억지 이해를 하면서도 그냥 넘기기가 힘들었다. 대통령이 총재로 있는 여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김 대표가 선언을 한 다음날 이종찬(李鍾贊) 의원이 긴급 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저는 각하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으니 승낙해 주십시오’하는 승인을 받으려고 뵙는 것이 아닙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후보 경선에 나섭니다’ 하고 통보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후배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YS가 제멋대로 치고 나오는데 난들 왜 못하겠느냐’는 배짱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나무랄 말을 찾지 못했다.

▶李漢東, 朴泰俊의 경우
박 최고위원이 대안(代案)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여러 검토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그 이유를 정리하면 이러했다.
첫째, 그는 유능하지만 군 출신이다.
둘째, 민정계(民正系)의 이종찬·이한동을 끌어안지 못했다.
셋째, 그가 나설 경우 이종찬 쪽에서는 그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점들이 얽혀 있는 상태에서 그를 후보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浦鐵의 명성을 보존하시기를”
나는 박(朴) 최고위원에게 “출마하지 마십시오”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말이 많았다. 내가 이중 플레이를 한다느니, 결단력이 약하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원래 남의 의견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내 의견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 객관적인 상황을 인식시켜 상대방 스스로가 결론을 내리게 한다. 나는 박(朴) 최고위원에게 “박 선배께서는 포철(浦鐵)을 성공시킴으로써 우리나라 근대화에 이바지해 신화적인 명성(名聲)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경쟁자들이 온갖 약점을 과장해 상처를 입히려 할 텐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했다. 그는 ‘나름대로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민정계에서 단일후보가 나오지 않고 여러 명이 난립한다면 모양이 참으로 안 좋지 않습니까? 이한동은 몰라도 이종찬은 결코 물러설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박(朴) 최고위원도 이들을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란 점을 시인했다.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우니 잘 생각해 보세요. 박 선배에게 꼭 한 가지 바라는 것은, 쌓아올린 명예가 어떤 경우에든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나는 이 정도로 내 뜻을 이야기하면 그가 적당한 명분을 찾아 후보 출마를 철회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보고를 받고 보니 철회는커녕 그대로 밀고 나갈 태세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무수석 비서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를 시켰다. 결과는 나의 원래 생각과 다름이 없었다.
여당 내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일어나 온갖 추태가 벌어지고 결국에는 박(朴) 최고위원이 치명상을 입게 된다는 결론이었다. 이 문제를 정리해야만 애써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 나는 박(朴) 최고위원을 다시 만나려 했으나 마침 남부지방에 행사가 계획되어 있어 그냥 전화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박(朴) 최고위원에게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내 참모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시고 결정해 주십시오”하고 말한 후 그 참모에게 “그분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올바른 결심을 할 수 있게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지방에 있는 동안 전화 보고가 있었다. “그분에 관계되는 자료를 정리해 사실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그분이 심사숙고한 끝에 후보 철회를 결심했다”는 내용이었다.

▶李鍾贊의 경선 거부
하지만 나는 생애를 통해 운명을 건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여러 번 봉착할 때마다 생명을 아껴 물러선 적은 결코 없었다. 다른 사람은 물러서더라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옳은 길이라고 판단이 서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친구들은 “노태우는 부드럽게 보이지만 무서운 사람”이라는 평을 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가 내게 맡겨 준 과제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결단을 해야 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결단의 모습과는 반대로 비치는 것이어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참아야 하는 결단, 관용해야 하는 결단, 기다려야 하는 결단…. 그 내용에 있어서는 더 어렵고 무서운 결단이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비치곤 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기에 대통령이 이렇게 약하고 무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하고 화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그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칼자루는 쥐었겠다, 수 틀리면 누군들 혼을 내지 못할까!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는 것쯤이야 얼마나 쉬운 일인가! 명분이야 나라를 위하고 정의(正義)를 위한다고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다. 그렇게 나아갔을 때 대통령이 참으로 힘 있고 속 시원하게 잘한다는 평을 받을 수는 있겠지….’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할 경우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거북하고 싫더라도 또 인기가 없더라도 ‘참고, 용서하고, 기다려야’(참·용·기)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입장에서 결단력이 약하고 우유부단하다는 빈축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제22장 중립내각으로 大選 관리

▶金大中 총재의 감사 표시
10월5일 오전 나는 민자당 당사(黨舍)를 방문해 정식으로 탈당계를 제출했다.
이날 저녁 나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표와 만찬을 함께 하면서 중립내각 구성과 향후 정국 방향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김 대표는 나의 결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었다”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의 대통령 당선 여부를 떠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고마움을 영원히 간직하겠노라고 했다. 표정으로 보아 자신의 대통령 당선에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金宇中 출마 포기 설득
나는 김 회장에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김 회장 주변 사람들이 김 회장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김 회장을 보는 눈,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김 회장을 보는 눈과 같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회장이 국제감각에 익숙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참신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정주영 회장이 이번 선거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으로도 어려운 처지인데 김 회장까지 정치에 뛰어든다면 김 회장과 대우가족, 나아가 국민들의 불행만 초래할 것이 내게는 훤히 보입니다. 그래도 출마할 작정입니까?”
내 말에 김 회장은 멈칫하면서 당황해했다. 그는 자신이 출마하지는 않더라도 “새로운 참신한 사람(정치인)을 기르는 당(黨)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한 걸음 후퇴했다.
나는 “근본적으로 정치라는 것을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김(金) 회장을 결코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고 당신 또한 뿌리칠 수 없을 것이오. 내 이야기는 대통령의 권위를 앞세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인 김우중 회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선배로서 충고하는 것이오.”
그는 깔끔한 성미였다. 구질구질하지 않았다. “잘 알겠습니다. 저는 정치를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확실하게 밝혔다.
나는 “고맙소. 대우(大宇)를 훌륭하게 키워 세계의 대우로 성장해 나가기를 빕니다”라고 격려했다.

▶金大中의 당선 확신
김대중 후보는 선거 전인 10월5일 청와대에서 만찬 회동을 할 때에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취한 민자당 탈당과 중립내각 구성에 대해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내가 정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자신은 대통령의 탈당까지는 바라지 않고 중립내각만 구성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탈당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김 총재, 내가 6·29를 선언한 사람이 아닙니까? 김 총재를 비롯한 야권(野圈)에서 중립내각을 구성하라고 요구하는데 내가 당직을 가진 채 중립내각을 구성하면 그 결과에 대해 깨끗이 승복하겠습니까? 아마 승복하지 않았을 걸요. 그럼 중립내각의 의미는 사라지는 겁니다. 이왕 할 거면 깨끗이 하자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지켜온 정치철학이기도 합니다.”
그는 내 말에 매우 감동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승리를 확신하는 그의 표정을 읽으면서 나는 속으로 ‘그의 혜안에도 한계가 왔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로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대통령 재임 5년간 여러 차례 그를 만나 국정(國政) 전반에 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 취임 초에 회동했을 때는 ‘역시 이분은 우수한 두뇌, 풍부한 경험,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을 갖추고 있구나’하고 느꼈었다. 재임 중반, 그리고 후반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총명함이 많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0월5일에 만났을 때는 선거정국을 보는 판단력이 전과는 많이 달라져 나의 중립 자세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부가 중립을 지킬 경우 국민들의 수준과 성향으로 보아 14대(代) 대선(大選)에서는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었다. 나 또한 그렇게 확신했다.
이런 판단을 못할 리 없는 김(金) 총재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오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연민(憐愍)의 정(情)마저 일었다.
대통령이란 인간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 하늘이 정하는 일이므로 그의 선전(善戰)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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