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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못난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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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쪽 | A5
ISBN-10 : 8993119589
ISBN-13 : 9788993119589
조선의 못난 개항 중고
저자 문소영 | 출판사 역사의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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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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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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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과 일본의 개항기 풍경을 비교하다! 쇄신과 망국의 기로에 선 개항기 조선의 맨얼굴을 보다 『조선의 못난 개항』.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정치에 꾸준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140-50여 년 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함대에 의해 강제 개항을 시작했지만,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면서 단숨에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반면, 조선은 개항 이후 34년간 허송세월을 보내며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책은 이처럼 조선이 개항기에 허송세월을 한 이유와 원인을 낱낱이 규명한다. 그 과정을 통해 조선의 개항과 일본 개항의 차이를 밝히고, 나아가 조선은 국가개조에 왜 실패하였으며, 일본은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비교 분석한다. 저자는 ‘일본은 어떻게 내부의 갈등과 혼란을 뚫고 개혁성과를 내게 된 것일까?’라는 물음에 ‘지도력의 차이’라고 답하며, 고종과 그를 둘러싼 조선의 인재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저자소개

저자 : 문소영
저자 문소영은 여름 방학이면 자전거로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유럽의 대학생을 부러워하던 20대에는 젊음을 희생하고 맹렬하게 살면 20년 뒤쯤엔 세상이 바뀔 줄 알았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나의 생각도 변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으로 조선사와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신문에서 22년째 기자로 일한다. 국회 여당반장과 청와대 출입기자, 금융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문화부 학술·문화재 담당이다. 2005년 미국 듀크대학 아시아안보연구프로그램(PASS)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2010년 조선과 일본의 16~18세기를 비교한 대중역사서 《못난 조선》을 저술했다.

목차

들어가는 글
흥선군은 왜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나
최익현의 상소와 무위로 돌아간 흥선대원군의 개혁들
1차 아편전쟁에 위기를 감지한 일본, 허송세월한 조선
요시다 쇼인과 문하생들 VS. 박규수와 사랑방 손님들
조선과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 세계를 보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은 누구의 책임일까
외세를 등에 업은 고종과 고메이 천황의 저항
일본의 하급무사와 조선의 유림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한 일본 VS. 무능한 주류가 존속한 조선
김옥균은 왜 사카모토 료마가 되지 못했나
이완용은 왜 이토 히로부미가 되지 못했나
일본과 조선 개혁의 문화적·경제적 차이
글을 마치며 | 참고문헌

책 속으로

당대 지식인들의 고종에 대한 혹독한 평가와 달리,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덕수궁 앞에 수천 명의 백성들이 몰려와 곡을 했다.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더 격분한 이 백성들은 일제에게 나라를 넘겨주고도 9년이나 더 살았던 군왕의 부재가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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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지식인들의 고종에 대한 혹독한 평가와 달리,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덕수궁 앞에 수천 명의 백성들이 몰려와 곡을 했다.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더 격분한 이 백성들은 일제에게 나라를 넘겨주고도 9년이나 더 살았던 군왕의 부재가 그렇게 슬프고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왕은 ‘백성의 아버지’라는 유교적 관념의 영향으로 무능한 왕이더라도 살아서 여전히 백성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 든든하고 믿음직했던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고종이 죽자 못난 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백성들은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만세운동으로 결집했다. 고종은 죽음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역설을 남긴 것이 아닐까. _ 20쪽, 《흥선군은 왜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나》 중에서

결국 제1차 아편전쟁에서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조선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 필요성이 라는 것이 급박한 위기라기보다는 반석처럼 딛고 서 있던 중화주의적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고 감지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조선 대외정책의 진정한 변화는 제2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다시 20년이 흐른 1882년 《조선책략》의 도입으로부터 시작되니 말이다. _ 63쪽, 《1차 아편전쟁에 위기를 감지한 일본, 허송세월한 조선》 중에서

우리에게는 독자적으로 ‘조선의 길’을 제시해줄 만한 조선의 사상가가 부재했다. 개화의 필요성을 지식층인 양반과 선비들이 받아들이고, 선비와 양반들의 각성이 백성들에게 스며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이 만약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유럽과 미국을 주유했더라면, 최소한 1847년에 예정대로 중국에 사신으로 라도 다녀왔더라면, 그의 대외정책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하며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_ 113쪽, 《조선과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 세계를 보다》 중에서

개항기인 19세기 중엽부터 따져볼 때 조선 식민지화에 누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지 물어보면 책임자로 고종을 지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고종을 그 나름대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야욕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이 되기 위해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한 훌륭한 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고종에게 감히 ‘식민의 책임’을 어떻게 지우냐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국왕으로서 권리를 누리던 사람이 망국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맞는 거 아닐까? 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고종에게 책임을 묻는 데 주저하는 것일까. _ 120쪽,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은 누구의 책임일까》 중에서

막부와 존왕양이파의 충돌이 격화되는 시기에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계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기 시작한 하급무사들이 나타났다. 하급무사들 사이에서 ‘서양 따라잡기’ 식의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1860년부터 외국을 돌아본 인재들이 늘어난 덕분이다. (중략) 100번 들어도 한 번 본 것만 못하다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격언처럼 이들의 눈으로 목격한 서양의 발전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쇄국을 강조한 존왕양이론에서 개화론?개국론으로 사고를 전환했다. _ 171~73쪽, 《일본의 하급무사와 조선의 유림》 중에서

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고종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지 말고, 동학농민운동의 교조신원운동을 받아준다든지, 탐관오리의 학정을 척결하고 내정개혁에 매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500년 동안 가장 많은 수탈을 받아왔던 농민들이 주체가 돼서 조선의 개화가 진행되지 않았을까? 고종이 이들이 주장했던 ‘폐정개혁’에 손을 들어줬다면 동학농민군은 고종과 조선을 지키는 튼튼한 세력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여기에 김옥균이나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등 일본과 서양의 개화문명을 경험하고 학식이 있는 인재들의 방향성이 결합됐더라면 새로운 세계의 출구가 열렸을 텐데 말이다. _ 209쪽,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한 일본 VS. 무능한 주류가 존속한 조선》 중에서

왕을 중심에 놓고 개혁을 추진하려는 김옥균의 노력은 실패했다. 김옥균의 실패는 고종만 바라보고, 고종의 결단으로 대부분이 결정되는 왕조국가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고종이 변심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계산에 넣지 못했고, 힘으로 밀어붙일 만한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개혁당이라고는 하나 김옥균과 그를 따르는 세력은 권력 내부의 소수에 불과했다. 개화를 믿고 실행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부재했던 것은 시대적인 한계였다. _ 231쪽, 《김옥균은 왜 사카모토 료마가 되지 못했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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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쇄신과 망국의 기로에 선 개항기 조선의 맨얼굴을 보다! 격동의 시기, 조선과 일본의 개항 풍경을 비교하다 1876년 개항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34년간의 조선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하게 움직이며 좌충우돌했다. 망국을 향해 폭주하는 조...

[출판사서평 더 보기]

쇄신과 망국의 기로에 선
개항기 조선의 맨얼굴을 보다!

격동의 시기, 조선과 일본의 개항 풍경을 비교하다

1876년 개항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34년간의 조선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하게 움직이며 좌충우돌했다. 망국을 향해 폭주하는 조선이란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들은 마차를 끌던 마부라 기차를 어떻게 움직여가야 할지 몰랐다. 마부 수준의 기관사들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조선을 압박하는 중국·일본·러시아를 ‘활용’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또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고 혈안이었다. 그러다보니 기차는 더욱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과 일본의 역사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에 의해 강제 개항을 시작했지만, 하급무사와 지식인이 결합해 구체제를 해체하고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면서 단숨에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조선은 개항 이후 34년간 허송세월을 했으며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저자는 조선이 개항기에 허송세월을 한 이유와 원인을 낱낱이 규명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조선의 개항과 일본 개항의 차이를 밝히고, 나아가 조선은 국가개조에 왜 실패했고 일본은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비교 분석한다.

지도력의 차이가 개항기 조선과 일본의 명암을 가르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대내외적 혼란과 무질서 속에 좌충우돌했다. 조선이란 기차를 자국에 유리하게 몰고 가기 위해 일본과 청나라가 전쟁으로 충돌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군대를 상주시키고 간섭의 수위를 높여가던 종주국 청나라를 몰아냈는데도 러시아?프랑스ㆍ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자 1895년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853년 개항한 일본은 1867년에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대정봉환을 시작으로 판적봉환, 폐번치현, 폐도령과 질록처분 등의 봉건질서 해체 과정을 거쳐 기득권층인 무사들의 몰락, 1885년 내각제로 전환, 1889년 메이지 헌법 공포와 시행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개항 37년 만에 국체를 완전히 바꾸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득권을 빼앗아오는 일은 쉽지 않아, 일본도 개항 이후 40년은 극심한 내부 혼란을 겪었다. 막부파와 존왕양이파의 갈등이 심해 암살이 빈번했고, 메이지 천황의 왕정복고가 선언된 직후 메이지 정권과 막부 사이의 보신전쟁, 무사들의 칼 착용을 금지하는 폐도령에 반발한 게이신토의 난, 개화론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한 세이난 전쟁 등의 내란 발생으로 인해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는다.
개항기에 극심한 내부적 혼란과 사회적 동요를 겪은 것은 같지만 개항의 결과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과 동북아의 강국 부상한 일본으로 명암이 극명하게 갈렸다. 일본은 어떻게 내부의 갈등과 혼란을 뚫고 개혁성과를 내게 된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어떻게 국민의 역량을 통합해서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내느냐의 문제, 즉 지도력의 차이에서 찾는다. 일본은 대체 어떤 지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또 지도력을 가진 인재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그런 인재들은 조선의 인재와 어떤 차별성이 있었을까? 그리고 수백 년 동안 누적된 사회·경제·문화적인 기반과 환경은 어떻게 인재를 성장시키고 지도력의 차이를 가져왔을까?

개화기 조선에는 일본 하급무사처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개화파가 없었다
일본의 개화에는 하급무사 출신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구체제 해체의 주체로 지식인과 결합하여 무혈혁명으로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여 메이지 신정부를 40여 년간 운영한 하급무사들은 정치참여를 금지한 막부의 오랜 관행을 깨고 나왔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양이론의 세계관도 깨고 나왔다. 그리고 역시 하급무사 출신인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지식인들이 내놓은 개화사상과 만나 중세적 질서의 일본을 근대적 국가로 변화시켰다. 끊임없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자신의 한계를 깨고 나온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설계자라 불리는 사카모토 료마도, 안중근의 손에 죽은 이토 히로부미도 하급무사 출신이다.

고종은 1863년에 즉위해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이 빌미가 돼 퇴위하기 전까지 43년이나 조선을 통치했다. 똑똑한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회수한 스물한 살의 고종이 과연 국정을 잘 운영했는가? 친정체제로 돌아선 고종이 한 일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펼친 국내 개혁정책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개혁의 전면 부인이었다. 고종은 시기에 따라 친일파, 때론 친청파, 때론 친미파, 때론 친러파 대신들과 함께 행보했다. 개화적인 군주였다가 보수적 군주였고, 다시 개화적으로 변신했다가 또 다시 보수화됐다. 정책적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전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인재들의 씨를 말리곤 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와 홍영식은 바로 살해됐고, 고종은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에게는 대역부도죄인으로 능지처사를 선고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당시 한성에서 개화에 관심이 있었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위 직후부터 1873년까지 대원군 집권 시절을 빼도 33년의 길고 긴 세월 동안 집권한 고종이 그 시기를 현명하게 통치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온 힘을 쏟았더라면 상황은 다소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일제 식민지 기간이 짧아질 가능성도 있었다. 식민지 시절이 짧았더라면 조선의 지식인들이 훼절하고 부역하는 일도 적었을지 모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 세월 동안 대체 고종은 무엇을 한 것일까 하는 의문, 그리고 그를 둘러싼 조선의 인재들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 하는 안타까움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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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 심경보 님 2014.03.31

    김옥균은

  • 유태렬 님 2014.02.08

    고종은 이런 모든 개혁정책을 승인했다. 단발령만 해도 고종은 최초로 단발을 하고, 왕족들에게도 단발을 하도록 했다. 그러던 고종은 갑오 내각의 개혁정책 중 군주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내용이 보이자 곧바로 친러시아 행보를 시작했다.

회원리뷰

  • 문소영, 『조선의 못난 개항』, 역사의 아침  『조선의 못난 개항』은 “일본은 부국강병(富國强兵)했지만, 조선은 왜 ...
    문소영, 『조선의 못난 개항』, 역사의 아침

      『조선의 못난 개항』은 “일본은 부국강병(富國强兵)했지만, 조선은 왜 식민지로 전락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보통 원인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지만, 저자는 ‘내부적 요인’에서 원인을 찾는다. 이를 크게 네 가지 이유로 분류하면, ① ‘사회 경제적 역량 부족’, ② ‘지식인들의 역량 부족’ ③ ‘대안세력의 부재’, ④ ‘무능한 리더십’ 등으로 볼 수 있다.

      ① 사회 경제적 역량 부족. 제일 중요한 포인트다. 중국·일본에서는 공장제 가내수공업이 나타났지만 조선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공장제 가내수공업은 공장제 기계공업이 나타나기 이전의 ‘초보적 공업화’의 단계로 볼 수 있는데, 조선에서는 그게 없었던 것이다. 공업 발전은 기술 발전이 담보하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기술을 경시했다. 물론 태조-세조 대(代)만 하더라도, 기술을 중시했다. 특히 기록에 따르면 세조는 “의학, 산학과 같은 잡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관학파가 훈구파로 타락하고, 사림이 정권을 잡으면서 ‘기술 경시 풍조’가 만연하게 된다. 유학, 그 중에서도 주자학만을 제일로 여기고, 다른 종류의 유학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을 운운하며 매도하는 이들이 정권을 잡았는데, 다른 학문들이 발전할 턱이 없었다. 네덜란드와 교역을 통해 난학(蘭學)을 받아들이던 일본과는 상반된다. 시장 발달의 측면에서도 절망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시장에 유통되는 화폐량으로 봤을 때, 일본은 조선의 5.5배, 중국 복건성은 조선의 11배였다. 또한 도시화율을 보더라도 1만 명 이상의 대도시에 사는 인구 비율이 2.5%에 지나지 않았다. 유럽이 9%대에 이르던 것을 고려하면 턱 없이 낮은 수치다. 반면 일본의 경우, 18세기에 에도, 교토, 오사카 등지의 인구는 100만 명이 넘었는데, 이는 베이징 인구가 19세기가 되어서야 100만 명이 넘었던 것을 감안(위성도시 인구를 제외했을 때 수치다.)하더라도 대단한 수치였다. 전체인구를 보더라도 조선의 인구는 일본 인구의 1/2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종합해보았을 때, 애초에 조선의 사회 경제적 역량은 일본에 훨씬 못 미쳤기에, 개화(開花)에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② 지식인들의 역량 부족. 국가 발전에 있어서 지식인들 역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인식과 그것을 타파하고자 했던 노력을 봤을 때,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양란이 끝난 후, 조선은 소위,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갖게 됐다. 중국에 중화(中華)인 명(明)이 멸망하고, 오랑캐 왕조인 청(淸)이 들어섰으니, 조선이야말로 중화(中華)라는 의식이다. 주제 파악을 못하는 발상이었다. 청과 조선의 영토, 인구, 경제력, 군사력 모든 것을 비교해보아도 조선이 절대열위에 있는 것이 명약관화한데도 말이다. 조선에서는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명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현실성 없는 북벌론이나 논하고 있었다. 다만 북벌론이 현실성은 없을지라도, 그것을 명분 삼아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대대적인 개혁으로 연결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같은 명(明)에 대한 의리의 강조는 각 세력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활용되었다. 이는 ‘만동묘’와 ‘대보단’의 설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으로 만들어진 사당인데,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신종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파병했고, 의종은 명의 마지막 황제였는데, 이들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겠다고 사당을 세우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이 실질적으로 조공을 하는 나라는 청이었고, 만약 이게 청에 알려지면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신하들도 표면적으로는 ‘제후국에서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옳지 않고, 청에 알려지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에둘러 반대했지만, 송시열의 제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만동묘를 짓는다. 근데 진짜 문제는 여기부터다. 당시의 시대상을 보면 알겠지만, 숭명(崇明)은 곧 대의명분이었다. 그런데 임금도 아닌 신하들이 명 황제의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왕의 권위를 깎아 먹는 짓이었다. 이에 당시 왕이었던 숙종은 왕실 차원에서 명 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보단을 세웠다. 세워봤자 국익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청과의 갈등으로 손해를 볼 수 있는데, 이른바 ‘숭명(崇明) 이데올로기’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대다수 조선 지식인과 지배층의 인식 수준이었다.

      그나마 실용적인 북학론을 주장하던 연암 박지원의 후손인 박규수는 다수의 조선 사대부들 보다는 나았다. 그는 평양감사로 가있는 동안, ‘제너럴셔먼 호 사건’을 처리하며, 서양의 힘을 목격했다. 그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富國强兵)할 것을 주장했다. 훗날 개화파의 핵심 멤버들인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은 모두 그의 제자였다. 하지만 그런 박규수조차도 숭명의식과 소중화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조선의 의관을 전부 명의 의관으로 바꿔야 한다거나, 베트남과 일본을 오랑캐라며 야만시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후진적 의식은 개화사상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한계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벽위신편 평어』를 보면 언젠가는 동양의 문화적 우월성에 서양인들이 감화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해국도지』에서는 서양인들이 중국의 의관을 갖추고, 중국 서적을 번역한다면 스스로 동양에 감화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그가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봐야 동도서기(東道西器)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땠을까? 놀랍게도 일본도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중화주의가 있었다. 이는 17세기 중반에 유행하던 『조선정벌기』, 『정한록』 등에서도 잘 드러나고, 조선통신사나 네덜란드의 사절을 ‘조공사절’로 간주해 쇼군의 권위를 드높이려고 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정성공을 모델로 한 희곡이 유행하던 것도 ‘일본 중화주의’가 성행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적어도 인식의 지평만큼은 조선보다 훨씬 넓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들은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와 교역을 지속했고, 난학(蘭學)이 발달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로부터 일종의 해외 정보 문서인 『네덜란드 풍물서』를 받았는데, 총 220년 간, 네덜란드 상관장이 바뀔 때마다 받아왔다. 그리고 1811년에는 서양 서적 번역을 위한 ‘변서화해어용’을 설치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외에도 쓰시마를 통해서는 조선과, 홋카이도 마쓰마 번을 통해서는 중국 남부와, 사쓰마 번을 통해서는 류큐 왕국과 교역을 했다. 다소 중화주의적 사고가 있었을지라도, 냉정히 말해, 일본은 조선보다 훨씬 나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요시다 쇼인이 등장했다. 물론 그는 보수적인 존왕양이파였지만, 일본 메이지 유신들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모토 등은 모두 그의 문하생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서양을 배우고자 임했던 태도는 박규수 이상이었고, 그가 주장한 해외원정은 현실화됐다. 요시다 쇼인의 집안은 병학(兵學)을 가업으로 삼았는데, 1차 아편전쟁으로 동아시아가 혼란한 와중에 그는 이런 구식 병학으로 일본을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에도에서 사큐마 쇼잔에게 양학을 배우고, 1850년에는 서양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규슈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1853년에는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오자, 그 배에 밀항해 해외유학을 가고자 했으나, 페리의 거절로 실패한다. 당시 해금령으로 해외도항을 엄벌하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목숨을 건 행위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저서인 『유수론』에서 조선 정벌, 오호츠크 해 평정, 만주 할양, 타이완과 루손(필리핀) 등을 점령하고, 서양국가와의 불평등 조약으로 생긴 손해를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훗날 그가 말한 지역은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 점령지와 거의 일치한다. 그의 주장이 소위 ‘대동아 공영권’에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그런가 하면, 후쿠자와 유키치보다 4년 앞서 영어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분명 그의 침략사상은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서양을 배워 부국강병(富國强兵)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와 태도는 박규수보다 열정적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감각도 더 뛰어났다. (물론, 그의 정한론이 당시로서는 당장 실현하기에는 다소 현실성이 떨졌지만, 서양이 알아서 감화될 거라는 발언을 한 박규수보다는 현실감각이 뛰어났다.)

      ③ 대안세력의 부재. 조선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유림들은 위정척사파가 절대다수였고, 그나마 있던 개화파는 동도서기파와 문명개화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전자가 다수고, 후자가 소수였다. 그러나 이들을 다 합해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는 정세를 뒤집을 힘이 없었다. 특히 김옥균 중심의 문명개화파는 ‘세력’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들이 최후에는 ‘갑신정변’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애초에 세력이 없었으니, 일본군을 끌어들인 거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나이브함이다. 반청자주(反淸自主)는 분명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지만, 일본도 청나라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나라라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어쩌면 알면서도 최후의 방법을 쓴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성공했더라도 그것이 바람직한 선택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계는 그들의 개혁 안을 살펴보면, 민(民)의 적극적인 공감과 지지를 끌어낼 만 한 내용이 없었다는 점이다. 아래는 갑신정변 당시 ‘14개조 정강’이다.

    1.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안에 돌아오게 하고 청에 조공하는 허례의 행사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할 것.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를 뿌리 뽑고 백성의 곤란을 구제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가운데 재능이 있는 자는 등용할 것.
    5.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를 처벌할 것.
    6. 각 도의 환곡을 영구히 폐지할 것.
    7. 규장각을 폐지할 것.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막을 것.
    9. 혜상공국(보부상 조직)을 폐지할 것.
    10. 그 전에 유배, 금고된 사람들을 사정을 참작하여 석방할 것.
    11. 4영을 합쳐 1영으로 하고 영 중에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세자를 추대할 것.
    12. 재정을 모두 호조에서 관할케 하고 그 밖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13. 대신과 참찬은 합문 안의 의정부에서 회의·결정하고 정령을 공포해서 시행할 것.
    14. 정부는 6조 외의 불필요한 관청은 모두 없애고 대신과 참찬이 협의해서 처리케 할 것.

      다 좋은 내용이다. 특히 호조 중심의 재정일원화나 당시 세도정치의 기반이었던 규장각을 폐지한다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러나 당시 절실히 요구되던 토지 개혁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있다고 해야, 지조법의 개혁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세제 개편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상 나라 하나를 뒤집으려고 했으면서, 당시 절실히 요구되는 개혁 수요를 충족하지 못한 거다. 아니, 설령 토지개혁에 대한 내용이 있더라도, 지방 곳곳의 유림들이 여론을 주도해 민(民)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이 위정척사파들의 전반적인 인식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을 고려하면, 될까 말까 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이 체감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할 개혁 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들이 시대는 앞서 갔으나, 기층민의 현실상에 대해 잘 모르거나 외면했다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동학농민운동세력은 어떨까? 이들은 김옥균의 문명개화파와 달리 가히 ‘세력’이라고 할 만 했다. 아래는 그들이 제시한 ‘12개조 폐정 개혁안’이다.

    1. 동학도는 정부와 원한을 씻어 버리고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징벌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6.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랑갓은 없애 버릴 것.
    7. 청춘과부의 재가를 허락할 것.
    8. 규정 이외의 모든 세금을 폐지할 것.
    9. 관리의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적과 몰래 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돌릴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반봉건적이라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 하지만 대외인식은 위정척사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갑신정변 주도 세력과는 ‘다른 의미’로 현실감각이 없었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동학군을 자처하며 약탈을 자행하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반봉건적이고 세력화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이들의 한계는 분명했다.

      정리하자면, 개화당은 세력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데다 기층민의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동학농민운동세력은 반봉건적이었으나 대외인식 수준이 겨우 위정척사파 수준에 머물렀다. 이들 ‘비주류’는 결과적으로 정국을 뒤집지 못했고, 조선에서는 ‘무능한’ 주류들이 현실파악 못하고 당위적 가치나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나마 그들이 말하는 당위적 가치들이 시대적으로도 뒤떨어졌음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반면, 일본에서는 비주류가 주류를 뒤엎고, 개혁을 단행했다. 우선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당시 일본의 권력구조부터 파악해야 한다. 일본의 최고 통치자는 천황이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적인 거였고, 현실적인 통치자는 쇼군이었다. 쇼군은 막부를 다스렸고, 그 아래에는 각 번을 다스리는 다이묘들이 있고, 다이묘 아래에는 상급무사와 하급무사가 있었다. 무사 이상의 계급이 사(士)면, 그 아래는 농공상(農工商)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다이묘들이다. 다이묘라고 다 같은 다이묘는 아니고, 권력의 대소(大小)관계에 따라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로 나눌 수 있다. 신판 다이묘는 도쿠가와 가(家)와 혈연관계고, 후다이 다이묘는 도쿠가와 가(家)의 측근, 도자마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家)와 척을 진 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지정학적으로 신판 다이묘나 후다이 다이묘의 번들이 에도 부근, 군사적 요충지들에 있었다면 도자마 다이묘의 번들은 변방에 있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해 시간을 벌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막부로서는 이들을 완벽히 감시하기 힘들었다. 도자마 다이묘의 번들 중에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힘을 기른 번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있다.

      이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시점은 1833년 대기근에 대한 대처에서부터였다. 당시 대기근으로 농민반란이 속출하는 가운데 막부의 개혁은 실패를 거듭했다. 특히 18세기 이래, 일본 내의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있는데, 막부는 여전히 농본지향적인 연공징수체제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고자 했다. 경제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데 이에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고 있다가, 이것이 쌓이고 쌓여 1833년 대기근 때 타격을 받은 거다. 반면, 이런 시대상의 변화에 따른 경제개혁은 막부만의 과제가 아니라 각 번들의 과제이기도 했는데,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이에 성공적으로 대응한다.

      사쓰마 번은 자신들의 지리적 특성을 잘 활용했다. 그들은 일본의 남서쪽, 규슈 남부 지방을 관할했는데, 위치 상 서양 세력들과 교역을 하기 좋은 곳이었다. 실제로도 서양 세력들과 빈번히 교류를 했고, 대외무역도 활발히 이뤄졌다. 조·일 전쟁 때는 조선인 도공들을 납치해서 도자기 산업을 발달시켰다. 1609년에는 막부의 명에 따라 류큐 왕국 정벌도 성공적으로 단행해 연공 77만 석의 웅번으로 발전했다. 1838년에는 상업경제 발달로 인한 부채 증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쇼 히로사토를 등용해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류큐를 매개로 청과의 밀무역을 추진하는가 하면, 류큐에서 생산된 흑설탕을 전매해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보기도 했다. 이는 훗날 사쓰마 번이 발휘할 정치력과 군사력의 경제적 기반이 된다.
    조슈 번은 도쿠가와 막부가 집권했을 때 상당수의 영지를 빼앗겼다. 여기서 오는 고질적인 재정난의 해결을 위해 특산물 생산과 전매제 실시 등을 통해 개혁을 시도했다. 중간에 전매제에 대한 반발로 개혁이 중단되었으나, 1834년에 새로 조슈 번의 번주가 무라타 세이후를 기용해 번정개혁을 재시도했다. 무라타 세이후는 실력 본위의 인재선발, 난학(蘭學)의 장려, 서양식 군비체제 정비 노력(이는 훗날 메이지 유신의 무력적 기반이 된다.), 부채청산을 통한 예산절감과 각종 식산흥업 정책 등의 개혁을 했다. 그런가 하면, 시모노세키 항으로 들어오는 선박들의 화물을 저당 잡아 막대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나중에 메이지 유신의 동반자가 되지만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쓰마 번은 원래 대외무역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개국(開國)을 지지했으나(적어도 무리한 양이운동만큼은 자제하고자 했다.), 조슈 번은 개국을 반대했다. 이런 이유로 사쓰마 번은 한 때, 막부의 조슈 번 정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쓰마 번은 막부의 무능함을 알고 돌아섰고, 조슈 번은 서양 배를 포격했다가 되레 군사보복을 당해, 현실을 절감하고 양이운동을 포기했다.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개국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삿초 동맹’을 성립, 막부를 뒤집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다.

      앞서 말한 조선의 사례와 비교하면 극명히 대비된다. 조선의 개화당은 ‘세력’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미약했지만, 일본은 정국을 뒤집을만한 ‘세력’이 있었고, 동학농민운동 세력은 양이(洋夷)적 시각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조슈 번은 이를 극복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차이는 통합을 했느냐 못했느냐의 차이다. 양반들은 동학농민운동 세력을 도적 무리라고 부르며, 청일전쟁 당시 민보군을 조직해 일본군과의 협력으로 토벌하는가 하면, 개화당의 잔존성원들이 설립한 독립협회도 동학농민운동 세력을 단순한 ‘폭도’로만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동학농민운동 과정에 있어서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들의 반봉건 가치는 개화 세력의 가치와 교집합을 가졌음에는 틀림없었다. 설령, 다른 부분에 있어서 그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한다고 할지언정,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처럼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들과 연합하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한 때 전쟁까지 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들이 동학농민운동 세력을 단순히 폭도로만 보고, 적극적으로 포섭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무능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④ ‘무능한 리더십’. 일부 학계 인물들은 고종을 개화군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 근거는 각 열강들 가운데 세력균형을 시도하는 동시에 광무개혁으로 식산흥업을 하고자 했다는 것인데, 애초에 그가 여러 노선을 갈지(之)자로 왔다 갔다 한 것을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세력균형도 국력이 일정 정도 받쳐줘야 할 수 있는 거다. 단순히 이 나라에 섰다 저 나라에 섰다 하는 건 세력균형이 아니다. 그저 기회주의적인 양다리 걸치기에 불과하다. 러일전쟁 때, 조선의 중립선언이 아무 효과도 없었다는 점은 일부 학자들이 말하는 ‘세력균형’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방증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고종은 때에 따라 진보적이기도 하고, 보수적이기도 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서만 움직였을 뿐이다. 갑신정변 이전에는 친일파(나라 팔아먹은 친일파와는 다른 의미다. ‘원론적인 의미’에서 ‘친’일파다.)인 김옥균을 가까이 하고 그의 개혁을 지지했지만, 갑신정변 후에는 친청사대 노선으로 다시 돌아선다. 미국, 영국, 독일 등의 서양 국가들과 조약을 맺을 때, 조선은 청의 속방이라는 내용의 ‘속방조회문’을 돌렸다. 이 노선은 1894년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1894년에는 김홍집 내각의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다시 이를 전면 지지한다. 그러나 개혁 내용 중 왕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보이자, 친일노선을 버리고, 친러노선을 취한다.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고종의 노선은 거의 10년을 주기로 바뀐다. 그리고 그 노선이 바뀔 때마다 인재들을 죽였다. 갑신정변 이후에는 홍종우를 자객으로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는가 하면, 아관파천을 단행한 뒤에는 친일관료들을 죽일 것을 명령한다. 이 때 김홍집과 어윤중이 죽는다. 특히 김홍집은 죽기 전에 그를 만류하는 유길준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상을 알현해 마음을 돌리도록 할 작정이오. 여의치 않으면 죽음으로써 이 한 몸 나라에 바칠 생각이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천명일 것이오. 다른 사람의 손에 구출되는 것은 오히려 떳떳치 못한 일이오.”

      그렇게 고종은 일본과 청의 근대문물을 시찰하기 위해 수신사와 영선사로 갔다 온, 급진개화파(김옥균)와 온건개화파(김홍집, 어윤중)의 핵심 인물들을 죽였다. 근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재들을 죽게 한 것이다. 훗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단행할 때, 고종 주위에 남은 인재들은 거의 없었다. 그저 집안 배경이 없어서 고종의 총애를 받아야만 출세할 수 있는 간신배들이 때때로 고종과 영합했을 뿐이다. 대표적으로 몰락양반가의 홍종우, 서자출신 안경수, 그리고 궁내참서와 영선사장을 맡은 이인순과 최병주 등이 이에 해당했다. 특히 이인순과 최병주는 “신통력이 있어 주문을 외면 군함도 박살낸다.”는 헛소리를 하고 다니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자취를 감췄다.

      세력균형 시도의 경우도 그 동안 고종이 해왔던 것을 보면 진정성에 의문이 든다. 그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대외정책을 썼을 뿐이다.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군사가 부족하자 조정 내부에서 때를 보아 한양의 2만 군사를 동원해 진압하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고종은 청이 태평천국 운동 당시 영국군을 개입시킨 전례를 들며, 청군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신하들의 상당수가 반대하자, 물러나는 태도를 취하다가 뒤로는 박제순을 통해 위안스카이에게 청군의 개입을 요청했다. 청군이 개입하자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자연스레 개입하고 이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진다.
    러일전쟁 전후의 과정을 살펴봐도, 고종은 러시아를 이용하려고 했는데, 러시아는 조선의 이권을 가져가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과 1896년에는 ‘위베르-고무라 각서’와 ‘로마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하는데, 전자는 러·일 양국의 한반도 주둔을 상호인정하는 내용이고, 후자는 39도선 분할안이었다. 물론 후자의 경우 러시아의 거부로 최종적으로 승인되지 않았지만, 이뤄졌다면 분단이 50년 빨리 이뤄졌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접근은 되레 영국을 자극해 영일동맹 형성에 영향을 줬다.

      이건 결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라고 할 수 없다. 정말 제대로 된 세력균형 정책을 펼치려고 한다면 최소한의 내적 역량이 있어야 하고, 각국 간의 관계를 이용해 상호견제를 유도하려고 해도 그것이 주권침해의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고종이 폈던 대외전략을 보면 이 두 가지 요건 중 어떤 것도 충족하지 못한다.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이고자 했던 그의 동기는 ‘국가적 전략’이었다기보다는 ‘자신의 기득권 유지’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인다.

      이상 일본과 달리 조선은 왜 개화에 실패하고, 종국에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물론 이는 내적 요인에만 의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외적 요인들이 있더라도 그것들이 내적 요인과 ‘상호작용’을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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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못난 개항 | fa**er24 | 2014.05.06 | 5점 만점에 4점 | 추천:1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점 중에서 가장 현대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사가 근대사의 중심이 되는 19~20...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점 중에서 가장 현대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사가 근대사의 중심이 되는 19~20세기 초반이 아닐까 싶다. 
    이 시기는 한국이나 중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변모를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며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화에 따른 개방과 개혁이 뒤따르는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쉽게 말해 이 시기를 잘 겪은 나라들은 변화에 순응하며 부강한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고다고 보여진다.
     
    저자는 책의 부제인 '일본은 어떻게 개항에 성공하고 조선은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 서두에서 언급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개방을 늦췄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저자의 말처럼 우리의 지식인들도 그다지 선진 문물에 대해 수용을 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화주의와 존주론으로 대표할 수 있는 조선왕실과 사대부들의 사상은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기엔 역부족이라 보여진다.
    반면 일본은 하급무사들인 사무라이들이 외국의 문물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의 노력이 있었다. 에도막부는 쇄국기간에 서양의 종교와 철학, 인문학은 배척하였지만 과학, 천문, 역학, 의학, 생물학, 병학, 미술 등의 유입으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만들었다.
     
    사실 이 책이 말하고 싶은 요지는 이것이 전부다.
    하지만 분명 이 얘기를 하기 위해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럼 이 책은 왜 지금 나왔을까?
    아마도 아래의 인용구에서 보는 우려 부분이 이 책이 나온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2013년은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에 새로운 정부가 활발하게 활동할 시기다. 동아시아에 공교롭게도 모두 보수적인 정권들, 국익을 최우선에 두는 정부들이 들어섰다. 이런 점을 보면 110년 전 개항기를 떠올리게 한다. 개항기에 제국주의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고 빼앗았기 때문이다.<286쪽>
    물리적 전쟁만이 세상을 바꾸고 자국을 보호하는 시대는 아니라고 본다.
    FTA와 같은 정책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과 자국을 보호하는 담을 허물어 뜨리고 있는 이 때에 무엇이 우리를 위하는 길일지 고민할 수 있는 숙제를 던져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역사/문화] 조선의 못난 개항
    문소영 | 역사의아침
    2013.02.28
  • '조선의 못난 개항'이라는 제목이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다. 개항을 전후...
    '조선의 못난 개항'이라는 제목이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다. 개항을 전후로 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 아쉬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일본은 성공했는데 왜  우리는 성공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해답은 이미 수 십년전
    국사 시간에 배웠던 것 같다. 알고 있었다. 왜 우리는 성공해 내지 못했는지.
     
    이미 알고 있던 실패의 개화기 역사를 다시 한 번 신랄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 아닐까?
    저자는 신문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과 기자의 글쓰기 정신에 충실하다.
     
    고루하지 않다. 딱 부러진다. 마치 신문 기사를 읽는 것 같다.
     
    이슈에 대한 언론의 접근 방법처럼 우리나라와 일본의 개화기 전후 상황을 기사로 써 내려 가고 있다.
     
    대권군 집권, 실각,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러일전쟁, 을사녹약, 대한민국합병..
    숨가쁘게 흘러간 19세기말 20세기초의 혼란스러웠던 한반도 상황이 소설처럼 흘러간다.
     
    이 책의 재미는 역사에 있어 '만약'이라는, 의미없는, 금기시되는 접근 방법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대원군이 중국에 갔었더라면, 고종이 김옥균을 내치지 않았더라면, 러청일미... 4국 사이에서
    균형잡인 외교를 했더라면, ....
     
    이미 지나간 역사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다. 문제는 앞으로 아닌가?
    이미 21세기가 시작됐고 동북아의 상황은 19세기말 20세기초처럼 총칼만 겨누지 않았을 뿐
    그다지 평화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어보인다.
     
    그 중심에 북한이건, 남한이건 중국과 미국의 대립이건 간에
    수 많은 국가간의 국익을 둘러싼 스펙트럼 속에서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상황을 판단해 처신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인지 조용히 반문해야 할 것 같다.
     
    시작이 차이가 났고, 이미 제법 많은 세월을 앞서 나간 일본.
     
    지지 않으려면, 더 이상 지지 않으려면 지금 이 시간부터가 문제일텐데
    도무지 그러한 노력이 보여지지 않으니 정말 문제다.
     
    저자의 말처럼 책을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 우리나라의 문제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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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오늘이라는 것은 과거... 어제란 것이 축적이 되어서 현재가 된다...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은 과거가 원인이 되어 현재의 결과가 되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사는 우리는 조선이라는 과거의 나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민족의 치욕인 아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이후라 흔히 표현을 하는 시기를 거쳐...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되었음을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에 호령하는 대국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젠가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인기강사 김미경씨의 이야기가 귀전에 뱅뱅 돌게 한...
    이 책을 처음 접하는 순간 왜 그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듯... 지금 우리나라의 위치 역시도 과거에서 부터 시작이 된다...
    우리나라가 개항을 하던 시기가 이미 유럽은 열강의 각축이란 이름이 붙은...
    해외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시기가 지나도 한 참을 지난 뒤늦은 시기이고...
    더 이상 개척할 신대륙이 없어 아시아로 눈을 돌려 식민지를 개척할 시기라고 생각을 한다...
    만약 그 시기에 우리나라도 적극적으로 세계의 동향에 눈을 돌리고 연구를 하고...
    쇄국이란... 문을 꼭꼭 걸어잠그지 않고 적극적인 개항을 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한 나라의 역사가 개인의 욕심으로 좌지우지 되지를 않고...
    힘있는 자들이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급급하지 않았으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지식인을 비롯한 지도자층들이 생각이 깨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많이 남은 조선의 못난 개항이다...
    지난 일은 이미 지난 일이지만... 현재가 곧 과거가 될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먼 훗날에 후손들이 살게 된 나라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게 될까...?
    더 이상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이 여길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주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우리 모두가 머리 맞대고 고민하고 또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책소개 ;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개항기 풍경을 비교하다!

    쇄신과 망국의 기로에 선 개항기 조선의 맨얼굴을 보다 『조선의 못난 개항』.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정치에 꾸준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140-50여 년 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함대에 의해 강제 개항을 시작했지만,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면서 단숨에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반면, 조선은 개항 이후 34년간 허송세월을 보내며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책은 이처럼 조선이 개항기에 허송세월을 한 이유와 원인을 낱낱이 규명한다.
    그 과정을 통해 조선의 개항과 일본 개항의 차이를 밝히고,
    나아가 조선은 국가개조에 왜 실패하였으며, 일본은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비교 분석한다.
    저자는 ‘일본은 어떻게 내부의 갈등과 혼란을 뚫고 개혁성과를 내게 된 것일까?’라는 물음에
    ‘지도력의 차이’라고 답하며, 고종과 그를 둘러싼 조선의 인재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저자소개 ;
     
    저자 문소영은 여름 방학이면 자전거로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유럽의 대학생을 부러워하던 20대에는
    젊음을 희생하고 맹렬하게 살면 20년 뒤쯤엔 세상이 바뀔 줄 알았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나의 생각도 변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으로 조선사와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신문에서 22년째 기자로 일한다.
    국회 여당반장과 청와대 출입기자, 금융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문화부 학술·문화재 담당이다.
    2005년 미국 듀크대학 아시아안보연구프로그램(PASS)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2010년 조선과 일본의 16~18세기를 비교한 대중역사서 《못난 조선》을 저술했다.
     
     
     
     
    저자 문소영이 조선과 일본의 개항에 관하여 아프게 비교를 한 책이다...
    역사는 멈추지 않고 이 시간에도 흐르고 있고... 오늘이 모여 역사가 된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누군가 말을 했던가...? 아마 인도의 시성 타고르이지 싶은데... 흠...
    고요하다는 것은 정체 된 것이라고도 볼 수가 있는데...
    어쩌면 타고르가 그 당시의 우리나라 사정을 내다보고 했던 말일 것만 같았다...
    집권층... 기득권층들이 안일한 태도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좌시하고 있을 때...
    우리가 학창시절 역사책에서 배운 것처럼 이미 전세계 구석구석 식민지화가 되어 갔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점령하여 자원을 수탈하고 언어를 말살하고...
    그리하여 전해오던 고유의 전통과 국민정신이 사라지고 식민지 국민(?)들은 점점 피폐해지고...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 이미 침략자들에게 수탈을 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극을 재미나게 보는 편인데... 역사의 흐름에 대하여도 배울 수가 있고...
    사극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옷차림이며 장식등을 아주 유심히 보는 재미로 열심히 보곤 있지만...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경우가 더러 있어 재미나게 보면서도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렇게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인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물론이고...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마찬가지...
    특히나 예전에는 한말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아주 질색을 했었더랬다...
    임란이며 호란은 몇백 년이란 시차가 있어 느끼는 게 한말과는 또 달랐기 때문이다...
    흔히 구한말이라고 표현을 하는 한일병합 당시의 이야기들이 억장을 무너뜨리곤 했다...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당시의 집권층, 기득권층들이 지금과는 무엇 또 다를까 하는 노파심이 일기도 했고...
    아무튼... 지난 날을 비추어 오늘을 본다는 말이 있듯...
    과거를 거울 삼아서 오늘 날엔 또 다시 그때와 같은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조선의 못난 개항은 저자의 말처럼 우리의 역사를 좋은 면만 보려고 하면 화가 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도 우리의 멀잖은 선조들이 그리도 우매했는지에 열통이 터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멀잖은 과거의 선조처럼 하지 말란 법은 없지 싶다...
    지금의 우리들이 깨여있지 않으면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에게 욕을 할 것이 틀림없다...
    과거는 과거이고... 지금은 우리들은 과거의 우리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글을 마치며... 에서 처럼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영원히 빛나게 할 문제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자...
    언젠가는 우리나라 대한민국도 전세계를 리더 할... 그런 나라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하며...
    이 책... 조선의 못난 개항은... 다시 꼼꼼하게 정독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하고 싶게 만든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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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후쿠시마원전사고가 얼마 전 2주년을 맞았다. 인간의 망각 ...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후쿠시마원전사고가 얼마 전 2주년을 맞았다. 인간의 망각 능력은 실로 뛰어나 바로 이웃 나라에서 터진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다시 한 번 이를 떠올리니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무시하는 게 한국인이라는 말이 들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뛰어난 일본을 은근 얕잡아 보고픈 마음이 우리 안엔 늘 존재한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살아왔지만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일본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였다. 하지만 마냥 무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적으로부터도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겐 결국 득이 된다.
    잠시 시계의 태엽을 거꾸로 감아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일본과 우리가 접촉하게 되는 시점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 중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어느 한 시점에서부터 이번 글은 출발하면 적당할 듯하다. 저자가 택한 시대는 고종이 즉위한 시점부터 경술국치가 발생한 1910년경까지로, 이는 제국주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점이라 할 수 있는 1870년부터 20세기 초와 정확히 일치한다.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이 시기는 암울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 풍전등화(風前燈火)마냥 휘청거리던 조선은 마침내 스스로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나라 잃은 설움과 부끄러움에 가슴을 쳐야만 했던 이 시절만큼은 세상 모든 것을 지울 수 있는 지우개라도 구해 깨끗이 지워버리고만 싶다. 하지만 희망하고 가정한다 하여 불행했던 지난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왜 조선이 그와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다소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비교집단을 택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이 서구 사회에 문호를 개방한 것은 1853년, 미국의 페리 함대에 의한 강제개항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23년 후인 1876년 조선은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된다. 시기적으로 일본보다 늦은 개항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항 시점부터 살펴보았을 때, 모든 면에서 조선이 일본과 다른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그리고 갑오개혁까지, 개항 이후 조선은 참으로 어수선한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이 개항이었기에, 이후 이와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역사를 장식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바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혼란은 피할 수도 있었다. 망국이라는 끔찍한 역사의 책임을 어느 한 사람에게 씌울 수는 없겠지만, 고종을 향해 저자는 비판적인 시선을 드리운다. 고종이 무능했다? 최근 들어 많은 학자들이 고종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고종이 서구 문명의 우수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했으며,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으나 뜻을 미처 펴지 못했다고 평한다. 간신이 주변에 너무도 많았고, 명성황후 본인과 민씨척족이 혼란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왕실은 왕을 배제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예로부터 지니지 못했다고 저자는 본다. 오히려 고종 본인이 외세에 기대어 보겠다며 줏대 없이 일본을, 청나라를, 러시아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인 결과, 그러잖아도 허약하던 나라가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야 말았다며 호되게 비판한다. 그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키도 한다. 아들을 왕으로 세우면서 망나니 취급을 받던 그는 큰 영향력을 행사케 된다. 그가 펼친 쇄국정책이 시대착오적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발전이 뒤쳐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물론 이 말도 어느 정도는 옳다. 그러나 저자는 충분히 발전치 아니한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를 염두에 둔 듯 쇄국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은 살짝 미룬 채 그가 펼친 다양한 개혁정책들을 언급한다. 세도정치로 얼룩진 조선을 흥선대원군은 분명 뒤흔들었다. 곳곳에 만연해 민중들의 삶을 좀먹던 서원을 철폐한 것과 양반에게도 세금을 걷는 호포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짐을 덜어준 점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1873년 고종의 친정 선포로 인해 실각을 한 후 이전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한 흥선대원군이 혹 지속적으로 정권을 유지했다면 어땠을지를 상상해보게 된다. 물론 그가 유능했다 하여 변화하는 정세에 완벽히 적응하고, 나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수모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제까지 다소 인물론(?)에 치우쳤다면 이제는 일본과의 비교부분을 살펴볼까 한다. 일본 역시 우리 못지않게 개항으로 인한 혼란을 경험했다. 이제껏 권력을 주도하던 막부 집단이 몰락하고 천황이 새로이 떠오른 것을 고려하면 이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지배 집단이 평화롭게 바뀌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와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일본은 사실 그대로의 유럽과 미국을 접했다. 그 충격이 대단해서 이전까지 존왕양이를 주장하던 이들마저도 개화로 돌아섰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후 일본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반면 우리는 ‘유럽과 미국을 닮길 원하는’ 일본과 청나라를 접했다. 상대적으로 위기의식을 덜 느꼈을 것이고, 신하들은 보고픈 것만 보고 말하고픈 것만을 말했다.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이들은 세상은 변화시키지도 못한 채 정권 유지에 급급했던 고종에 의해 제거 당했다. 추후 결단력과 추진력을 발휘해가며 개화에 힘을 보탰어야 할 어느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고, 추풍낙엽과도 같이 스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김옥균의 갑신정변 실패 및 암살이라는 서글픈 결과를 낳았으며, 개혁적인 인사라는 평을 듣던 이완용으로 하여금 매국노의 길을 걷게끔 만들었다. 다시 한 번 고종의 실정에 대한 아쉬움이 싹트는 대목이다. 그가 일본의 고메이 천황처럼 저항할 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자꾸만 솟구친다.
    제국주의의 탈을 쓰고 다른 나라를 제 자본의 판매처로 만드는 것이 곧 성공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난날 일본이 걸은 길이 ‘옳다’고 평은 못 하겠다. 하지만 우리의 길 역시 옳지는 않다. 어느 누구도 제 나라가 폭삭 주저앉길 바라지 않는다.
    개항 그 시점에서 우린 분명 강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임진왜란 때 차라리 조선이 망했어야만 했다고 자조적인 평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일본이 우월했기에, 조선은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역사가 이런 방향으로 전개된 건 아니다.
    선택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된다. 하루하루 우리가 하는 선택이 우리의 역사를 좌지우지한다. 지난날 조선이 그러했던 것처럼 못난 역사를 다시 한 번 써서는 아니 된다. 우물 안 개구리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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