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쿠르 상을 두 차례 수상한 작가의 소설. 그는 테라스로 나와 다시 고독에 잠겼다. 물가로 밀려온 고래의 잔해, 사람의 발자국, 조분석으로 이루어진 섬들이 하늘과 흰빛을 다투고 있는 먼바다에 고깃배 같은 것들이 이따금 새롭게 눈에 띌 뿐, 모래 언덕, 바다, 모래 위에 죽어 있는 수많은 새들, 배 한 척, 녹슨 그물은 언제나 똑같았다...개중엔 아직 살아서 파득거리는 것들도 있었다.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야망과 열정의 인간이었으며, 꿈과 모험을 사랑했던 불세출의 작가 로맹 가리. 세기를 풍미한 거장의 진면목을 확인케 하는 열여섯 편의 기발하고 멋진 소설들은 '인간'이라고 하는 거대한 허영에 대한 신랄한 탄핵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기만에 대한 로맹 가리의 날카롭고 흥미진진한 적발과 풍자는 설명될 수 없는 삶의 영토를 늘 그 속에 품어냄으로써 쓸쓸하지만 심오한 성찰의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가슴을 뒤흔드는 여운을 잊지 못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에서, 인간의 그 오랜 분석(糞石) 위에 앉아 아직 오지 않은 '인간'을 기다리며 지금-이곳의 안타까운 인간의 얼굴을 발굴해내는 작가의 정교한 손길에 새삼 감탄을 금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 소개 로맹 가리 1980년 12월 2일 파리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로맹 가리는 1914년 모스크바에서 유태계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도 유명한 이 위대한 문학적 천재는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2차 대전에 로렌 비행중대 대위로 참전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참전 중에 쓴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1945년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일약 작가적 명성을 떨쳤다. 『하늘의 뿌리』로 1956년 공쿠르 상을 받은 데 이어, 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 상을 수상함으로써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생에 관하여,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여 결론을 내린다 한들, 언제나 규정된 정의, 확고한 신념, 불변의 진리는 존재...
생에 관하여,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여 결론을 내린다 한들, 언제나 규정된 정의, 확고한 신념,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이란 알듯 알듯 알수 없고, 잡힐듯 결코 잡혀지지 않는 거리로, 우리의 시간 위를 떠돌고 있는 무엇이기 때문에. 따라서 로맹가리의 소설처럼, 알듯알듯 알수없고, 이거다 이거다 하다가도 기막힌 반전에 허무해지는, 생이란 그런 것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거기 세상의 끝에는 죽음만이 존재하는 희망없는 땅. 아무런 해명이 없는 여자의 출현, 그렇게 낯선 희망이 찾아오려는 순간에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는 데는 그 무슨 이유가 있음을 알수 없듯이 희망도 잡힐 듯 잡힐 듯 그렇게 사라지고 만다. 착한 유태인은 독일인 하인에게 친절히 모든 것들 넘겨주고, 비밀스럽게 지하생활을 시작한다. 유태인에게는 현실은 들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가치있는 희망이지만, 그러나 진정한 현실은 희망의 결과가 전혀 도래하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이렇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10여편이 넘는 로맹가리의 단편집이다. 여기에는 그렇게 희망을 찬미하는 사람들과 절망의 생을 살고 있는 그들의 현실이 나란히 제시되고 있다. 모두 한결같이 단편이라기 보다 꽁뜨에 가깝도록 짧은데다가 기막힌 반전을 가지고 있어서 아하..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삶이란 그런 것임을 우연히, 우연히 발견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어쩐지 그렇게 되고 만다.
"자기 앞의 생"에 에밀 아자르가 있다면,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는 로맹가리가 있다. 둘은 같은 순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분명 존재했던 작가였다. '자기 앞의 생'이 치밀하고도 순수한 현실이라면,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그 자기 앞의 생에 관한 짧고도, 냉소적인 절망의 표현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더하고 더하여, "자기 앞의 생"을 완성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절망과 시니컬, 지독한 냉소 속에도 순수한 영혼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그랬으리라 나 또한 희망 하며....
<자기앞의 생>을 읽고 나서 꼬마 모모의 아픔이 너무도 절절하다는 생각을 했었다.그 작품을 쓴 사람이름이 에밀 아자...
<자기앞의 생>을 읽고 나서 꼬마 모모의 아픔이 너무도 절절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작품을 쓴 사람이름이 에밀 아자르였던가? 그런데 이 책을 쓴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한다. 로맹가리... 유태계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았으나 결국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 에밀 아자르 역시 그의 필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이름으로 모두 콩쿠르상을 수상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단다.
이 책속에는 16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나는 사실 이미 <자기앞의 생>에 매료되어 있었던 까닭에 무조건적인 느낌으로 이 책을 선택했었다. 그런데 너무 허무했다. 글의 색채가 너무 잿빛이었고, 너무 짧아 미처 찾아내지 못한 의미들 또한 불투명하게 다가왔다. 아름다웠던 문체와 여기 보란 듯이 풍경을 그려주던 여유로움과는 달리 글마다 녹아져 있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들은 너무 씁쓸했다.
'어떤 휴머니스트'나 '몰락'을 통해 보여주었던 인간의 저 밑바닥 모습은 정말 처절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감추는 팔색조같은 인간의 내면성. 그러면서도 글속에서 찾아내어지던 고독과의 싸움, 그리고 순수에로의 갈망. 또하나의 단편 '벽'을 통해 보여지던 인간의 고독은 너무도 가슴이 저리게 했다. 얇은 벽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남자와 여자의 자살은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대로 각인되어진 듯 보여지기도 했다. 말은 많으나 정작 주워담을 말은 없고,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가슴속에만 쌓아둔 채 차마 밖으로 뱉어내지 못하는 아이러니. 그런것들이 어쩌면 숨겨진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얇은 벽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로지 자신만이 겪고 있다고 느꼈을 고독과의 처절한 싸움이 하나의 그림처럼 보여지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까웠다.
우리는 흔히 비움의 철학에 대해 말하곤 한다. 자신을 비움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편에서 보여주었던 한 남자의 비열하기까지한 욕망의 끝자락. 순수를 갈망하면서도 그 순수의 의미조차 퇴색시켜버린 채 무너져내리던 남자의 헛됨. 그리고 그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순수에 대한 끈질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선 무인도로 들어가 혼자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모든 것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임을 그 남자는 모르고 있는 게다. 아니 어쩌면 모른척, 혹은 아닌 척 남에게 핑게를 대고 있는 게다.
책을 덮고나서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문득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생각이 났다. 그의 죽음과 작자의 죽음이 번져가는 물감처럼 그렇게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뭐였을까? 바람불어오는 텅 빈 놀이터에 나만 뎅그러니 남아 있는 듯한 그 느낌은.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