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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 A5
ISBN-10 : 8901061252
ISBN-13 : 9788901061252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중고
저자 김용규 |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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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3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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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세기의 문학을 읽는 철학! 철학과 문학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을 철학하게 하는 독특한 철학 교양서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세기의 문학 13편 속에서 주옥같은 철학적 담론을 꺼내 함께 소통하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시각과 폭넓은 삶의 이치를 제공하고자 했다. 저자는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음악이나 미술 이야기, 때론 커피숍 창가에서 바라보는 정경을 이야기하며 철학과 문학의 만남을 주선한다.

이 책은 문학에 철학자의 사유와 철학적 해석을 담아내고 있다. 만남, 사랑, 성장, 자기실현과 같은 개인의 물음에서 시작하여 유토피아, 인간공학, 사회공학 등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다양한 문제들까지 살펴본다. 문학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과 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빌려, 실존 철학이나 낭만주의와 같은 철학의 흐름, 종교적 구원이나 가정의 의미와 같은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하는 책이다.

저자소개

저자 : 김용규
저자 김용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예쁜 벽돌집에서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호기심 많은 딸과 살고 있다. 요즘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에서 향을 피우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문학 작품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는 인문학과 철학의 풍부한 재료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 《다니》에서는 ‘지식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주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에서는 독특하고 다양한 맛을 내는 지식의 조리장으로, 《영화관 옆 철학카페》《데칼로그》《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영화를 철학과 신학으로 해석하는 감독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번에 그는 깊고 은은한 철학의 맛과 부드러운 문학의 향기가 절묘하게 블렌딩된 다양한 메뉴를 가지고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의 바리스타로 변신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기초지식부터 인문학의 안팎을 넘나드는 풍부한 교양까지 듬뿍 들어 있는 이 책을 통해 철학의 색다른 맛과 향기를 즐겨보기를 권한다.

목차

책머리에ㅣ카페라테 혹은 에스프레소?

신은 누구를 구원하는가?
괴테의 <파우스트>1부 : '자기 체념'에 대하여

악마마저 이겨낸 남자
괴테의 <파우스트>2부 : '자기 실현'에 대하여

질풍노도를 잠재우는 법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 '성장'에 관하여

관계의 미학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 '만남'의 의미

사랑과 질투의 함수관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 '질투'에 관하여

가족에 관한 냉혹한 진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 '가정'의 의미

참을 수 없는 일상과의 결별
사르트르의 <구토> : '일상'에 대하여

텅 빈 무대의 대본 없는 배우, 인간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 '권태'의 의미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 '반항'의 의미

그 섬은 어디에 있을까?
최인훈의 <광장> : '유토피아'에 대하여

당신들의 유토피아, 우리들의 디스토피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 '디스토피아'에 대하여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 '인간공학'에 관하여

빅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 : '사회공학'에 관하여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회상'의 의미

책 속으로

출판사 서평

철학 교양서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있다. 철학의 영역과 무관한 듯 보이는 역사, 영화, 미술, 연극 등 다양한 분야와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 교양서들의 다양한 변주는 고상한 취미 정도로만 여겼던 문학과 예술을 인문교양의 영역으로 확...

[출판사서평 더 보기]

철학 교양서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있다. 철학의 영역과 무관한 듯 보이는 역사, 영화, 미술, 연극 등 다양한 분야와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 교양서들의 다양한 변주는 고상한 취미 정도로만 여겼던 문학과 예술을 인문교양의 영역으로 확대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상아탑에 갇힌 학문으로만 치부되던 철학이 대중과 소통의 창구를 만들어내려는 참신한 시도이다.
여기 철학이 세기의 문학과 만나 우리의 삶을 ‘철학’하게 하는 독특한 철학 교양서가 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지식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독특한 철학 담론을 펼쳤던 저자 김용규는 세기의 문학 13편 속에서 주옥같은 철학적 담론을 꺼내 독자와 소통하고자 했다. 《오셀로》에서 ‘사랑과 질투’의 함수관계를, 《구토》에서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파우스트》에서는 ‘신과 구원’의 문제를 건져올리는 등 만남, 사랑, 성장, 자기실현과 같은 개인의 물음에서 시작하여 유토피아, 인간공학, 사회공학 등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다양한 문제까지 아우르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명사가 읽은 고전 OO선’과 같은 책들이 고전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는 반면 이 책은 문학에 철학자의 사유와 철학적 해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철학자 김용규는 문학 속의 주인공들을 일상의 무대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민을 통해 독자들에게 우리 자신과 주변의 삶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며, 결국은 독자 스스로가 세상을 향한 자기 이해와 자기실현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때론 원작보다 흥미롭고 때론 깊이 있는 철학을 맛보게 하는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는 고전을 읽는 새로운 시각과 폭넓은 삶의 이치를 제공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 바람난 철학, 문학에 빠지다!
세상을 이해하고 삶을 꾸려나가는 데에 철학만큼 좋은 안내자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쉽게 풀어썼다 해도 우리 일상과 별 연관이 없어 보이는 철학 입문서들을 읽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에 문학은 난해하게만 느껴지는 철학을 내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화제 같은 구실을 한다. 이성적인 철학과 감성적인 문학의 만남.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문학을 통해 철학을 배워왔다. 청소년기에 《데미안》을 읽으며 삶의 방향을 고민하고, 《구토》를 읽으며 ‘삶의 무의미성’과 ‘아찔한 의식의 순간’을 경험했다면, 이미 우리의 마음에는 ‘철학’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는 문학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과 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빌려, 실존 철학이나 낭만주의와 같은 철학의 흐름이나, 종교적 구원이나 가정의 의미와 같은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한다.
《어린 왕자》에서 만남은 ‘길들이기’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저자는 이를 통해 만남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나-너 관계맺기’라는 개념을 자연스레 풀어낸다(p.72~, 관계의 미학).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이야기하면서는 카뮈의 《이방인》과 《시지프의 신화》를 거론하며, 그의 작품 속에는 ‘부조리’와 ‘삶의 무의미성’이라는 의식이 깊게 흐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페스트》를 읽을 때 ‘페스트’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부조리’나 ‘삶의 무의미성’을 바꿔 넣어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된다고 이야기하며 ‘일상’의 의미를 짚는다(p.183~,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현대 철학의 첨예한 논쟁들도 이 책 속에 녹아 있다. 《멋진 신세계》에서 저자는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인간 사육’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독일의 전 언론과 하버마스와 같은 대가들이 격렬하게 반대 의견을 냈던 이 논쟁의 핵심은, 오늘날 모든 휴머니즘 문화는 동물이었던 인간을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가축으로 ‘사육’하는 문화였으며, 그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은 그 다음 대목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길들이는 새로운 도구를 찾아야 하는데,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선별하고 사육할 수 있도록 ‘유전공학’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p. 257~,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 외에도 독일 낭만주의 전통에서 탄생한 《파우스트》와 《데미안》, 자연주의 철학에서 눈여겨보는 《오셀로》, 실존주의 철학의 정수를 담은《페스트》와 《고도를 기다리며》등 이 책에서 만나는 문학은 우리 삶의 문제들을 짚어주는 훌륭한 텍스트이다.


■ ‘지식 소설’을 연 철학자 김용규의 새로운 철학 교양서
우리나라에서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와 같은 철학서를 꼽으라면 단연 이 책의 저자 김용규의 《다니》와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꼽는 사람이 많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저자는 두 책을 통해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논쟁적인 철학 담론들을 풀어내는 ‘지식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 바 있다.
이후로도 그는 철학을 엄숙한 학문이 아닌, 우리의 삶을 새롭고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여기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철학 교양서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에서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입맛에 맞게 철학을 조리해내고, 《영화관 옆 철학카페》《데칼로그》와 같은 작품에서는 철학을 영화에 접목시키며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을 만큼의 경쾌함과 성인들의 지적 유희까지를 절묘하게 아우르고 있는 이 책은 가장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저자 김용규는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책 곳곳에서 음악이나 미술 이야기, 때론 커피숍 창가에서 바라보는 정경을 이야기하며 철학과 문학의 만남을 주선한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이야기하며 실존인물이었던 파우스트의 삶을 들여다보거나, 《어린 왕자》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진정한 ‘만남’을 갈구하던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이 책의 한 켠을 장식하기도 한다. 또한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가 끈질기게 캐물었던 ‘실존’의 문제를 우리의 일상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때론 무소륵스키의 가곡이나 신경림의 <사막>과 같은 시, 살바도르 달리의 <시간의 지속>과 같은 작품을 끌어들이며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 문학에 대해 항상 궁금했지만, 감히 철학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는 문학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를 바꿔, 문학 작품이 던지는 질문 에 주목해보라고 제안한다. 단지 문학을 읽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찾는 ‘철학적 해석’을 시도해보라고 주문한다. 문학 작품을 읽으며 항상 궁금했지만, 쉽게 해답을 찾기 어려웠던 질문들은 바로 우리들의 삶의 변화시키는 열쇠라는 의미이다.
부조리 연극의 대명사 《고도를 기다리며》는 변하지 않는 시공간과 성격 없는 인물을 내세워 ‘권태’라는 문제 제기를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궁금증을 자아내는 질문은 ‘도대체 고도는 누구이며, 왜 그를 기다리는 것일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권태’의 의미를 짚으며 ‘시간 죽이기’에 몰두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실존의 의미를 찾으라는 대답을 제시한다(p.162~, 텅 빈 무대의 대본 없는 배우, 인간).
수많은 성장 소설의 전범이 되는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의 꿈에 나타난 양성적인 신 아프락사스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는 헤르만 헤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조로아스터교와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에서 해답을 찾는다. 진정한 성장의 의미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라는 극단에서 자신의 중심의 찾을 때 이뤄진다는 것이다(p.53~, 질풍노도를 잠재우는 법). 왜 이청준은 책 제목을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라 ‘당신들의 천국’이라고 했을까?” 와 같은 질문도 가능하다. 이에 대한 답은 계몽주의 시대에 내놓은 유토피아 공학의 한계와 제3의 길 모색이라는 답을 들을 수 있다(p.233~, 당신들의 유토피아, 우리들의 디스토피아).
이렇듯《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는 문학의 깊은 매력에 빠져 있는 독자들에게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책이다. 또한 고전이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문학작품의 의미를 파악해가며 즐겁게 철학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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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 구희일 님 2012.11.16

    알고 보면, 사랑이란 '하는 것'이지 '갖는 것'이 아니며, 그 대상은 '행위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 구희일 님 2012.11.16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성적 욕구는 비례하고, 성적 소유는 더 내면적인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를 갖게 한다고 합니다. 먼저 육체를 소유한 다음에는 마음과 영혼까지 빼앗으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집요한 소유욕의 바탕에는 상대가 자기를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소유하는 것만이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는 거지요.

  • 구희일 님 2012.11.16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떤 것이 소중한 것은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회원리뷰

  •   인간소외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을 말하지요.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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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소외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을 말하지요.
    그런데 카프카의 <변신>이 상징하고 있는 현대인의 인간소외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레고르의 가족들의 태도가 돌변한 것, 어린 자식이나 늙은 부모를 내다
    버리는 것에도 알고 보면 모든 가치를 오직 하나의 가치, 곧 경제적 가치로 바꾸어 계산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는 말이지요. 

    자본주의의 본질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개인의 이기심과 체계적인 이윤 추구의 정당화'입니다.
    인류 역사를 두고 자본주의 사회, 특히 그것이 전지구화(globalization)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제외하면 개인의 이기심과 이윤 추구가 이처럼 정당하게 인정받은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든 이기심은 지탄의 대상이었고,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돈을 세었지요.
    그런데 이들을 밝은 빛으로 끌어내어, 그 몸에 홍포를 입히고 그 머리에 황금관을 씌워준 것이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 '프란츠 카프카_변신 page 125'  해석 본문 中

     

     

    우리가 한 번쯤 접해 읽었을 세기의 문학작품들에게 철학적 해석을 붙인 독특하고 흥미로운 책이다.
    문학에 접근하는 철학적 방법이 이렇게 삶의 본질을 재해석 해준다는 사실을 느끼자 새삼
    철학이 아름다운 학문이란 생각마져 든다. 

     

    지난 세월동안 읽었던 문학작품들을 내 마음대로 규정짓고 이해한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동안 나는 문학 작품의 줄거리 해석과 저자의 의도에도 집중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의 김용규씨는 문학 작품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을 들어보라고 권한다.
    바라보는 시선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제라도 줄거리만 이해하는 협소한 지식에서 벗어나야 겠다.

     

    저자가 선정한 문학들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던진 주제들은 다양하면서도 의미가 깊다.
    우리가 인생이란 큰 바다에 항해하며 외롭게 던졌던 개인의 질문들로 시작해 사회라는 조직과
    국가에서 살면서 의미있게 바라보며 살아야 할 철학적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
    이 책은 목차대로 개인 -> 가족 -> 조직 -> 사회 -> 국가로 범위를 넓혀 사유를 던지고 있다.

     

    살면서 가장 많이 하게되는 개인적 철학적 사유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청소년시절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의외로 많이 했던 것 같다.  정말 착하게만 살면 죽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성당을 열심히 다니다 한 주라도 빠지면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다 '데미안'과 '파우스트'를 읽었고 슬그머니 성당의 발길을 끊었다. 핑계가 생긴 것이다.
    이제와 저자의 철학적 해석을 읽어보니 웃음이 나온다. 철없는 독서시절 결론이었던 책속의 내용은,
    단지 18, 19세기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에서 파생된 창조물 이었다니.
    하지만 그럼에도 '낭만주의'의 매력은 '추상적 개인'에서 '구체적 인간'의 발견이란 점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어린왕자'와 '오셀로'의 저자의 해석은 만남과 사랑에 대한 고찰이다.
    '길들여 진다'의 글귀로 유명한 '어린왕자'에서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자는 인간과 세계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관계'로 정의했다. 혼자서는 발전되지 않는 '나-너'의 관계.  우리는 매일
    낯선이들과 거리에서 직장에서 만나지만 모두가 관계를 맺지 않는다.  '진정한 만남'의 의미해석이
    좋았다.  별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답다 말하는 내가 별과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오셀로'에서 상대의 소유욕구는 불안과 집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는 다시금 상기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이란 '하는 것'이지 '갖는 것'이 아니며, 그 대상은
    '행위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니란 것.

     

    현대인의 고독, 소외, 가난한 이의 고립감, 무가치.. 이런 현실적인 냉혹한 고민을 다룬 작품들은
    19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서구의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이후 나오기 시작한다.
    저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존재감이 사라진 세태의 문학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 나는 '변신'이란 책소개가 오래 남는다.(위 인용문 참조)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존재감'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자본주의'의 등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이 경제적인 가치로 계산하게 되면서, 개인의 이기심과 기업의 이윤추구가 정당화 되면서
    개인의 존재감은 형태가 흐려져 간다.  가족의 부양하던 그레고르가 어느날 갑자기 흉측한 벌레로
    변신하자 가족들에겐 '기생자'로 탈바꿈되었고, 결국 가족들의 냉대와 폭력, 증오 속에서 고독하게
    죽는다는 내용은 현대인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줄거리다.  보험금을 타내려고 가족을 버리는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소외는 자본주의 본질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저자의 '영화 - 집으로' 의 거론은 시의적절했다. 인간은 인간이기 위해서는 '가족적'이어야 한다.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해석해 준 '샤르트르- 구토',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카뮈-페스트' 등
    기억에서 정리되지 않은 문학작품에 저자의 철학적 해석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가정조차 하기 싫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들까지..


    저자의 교양공유에 감사함을 느끼며 마무리 한다. 
    많은 분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당신의 기억 속 문학작품의 재정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철학이 쉬워지는 시간 | gu**l347 | 2013.10.17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철학'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고 있어보여서 꼭 접하고 싶은 학문이지만, 막상 '철학'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을...
     
    '철학'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고 있어보여서 꼭 접하고 싶은 학문이지만, 막상 '철학'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을 읽으려고 하면 혹시 어렵지는 않을까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싶어서 멈칫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서문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내가 철학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고있다는 생각도 들지않을 정도로 철학이 쉽게 느껴진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읽었는데 수십 권의 책들을 읽고 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한 권의 책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파우스트>부터 시작해서 <어린왕자>, <페스트>를 거쳐 <1984년>까지 여러 권의 책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 나오는 책들 중 대부분은 읽은 책들이었는데 내가 읽었다고 생각한 것은 정말 책을 읽은 것이지 제대로 된 해석은 아니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1차적 해석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책 속의 이야기만 보았지 그 속에 담긴 철학, 작가의 생각, 사상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여러 책들을 2차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읽어보지 못한 책들까지도 꼭 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자의 해석이 너무나 쉬우면서도 재밌어서 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다양한 사상들에 대해 나오는데도 읽는 내내 즐거웠다. 많은 것을 배우고 알 수 있다는 데 대한 즐거움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정말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라는 책은 철학이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바꿔준 책이다.
  • 철학적 담론을 글로 옮길 때에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글을 이어가다 보면 내 일천한 철학적 지식이 금세 바닥을 드러낼 것만 같...
    철학적 담론을 글로 옮길 때에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글을 이어가다 보면 내 일천한 철학적 지식이 금세 바닥을 드러낼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불안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맘 먹었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에 심취했던 '실존주의' 철학이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나는 고교 시절 야스퍼스, 하이데거, 키르케고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카프카 등으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철학자와 작가의 작품에 열광했었다.  조숙했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나이 때의 청소년들에게 실존주의 철학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위로가 되는 사상임은 분명해 보인다.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전환되는 그 시점에 자신도 모르게 찾아드는 삶의 비의와 원인도 알 수 없는 우울을 조용히 위로하고 토닥여 주는 듯한 느낌을 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서 여러 번 느꼈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리뷰를 쓰고자 하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게 만든 것처럼 이 책의 저자인 김용규의 풍부한 교양과 인문학적 소양 이면에는 철학에 대한 독자들의 흥미를 일시에 불러 모을 것만 같은 마력이 숨어 있다.  어쩌면 한두 번쯤 발을 빼거나 망설였을 법한 독자라 할지라도 일단 책장을 넘기는 순간 빠져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책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역작인 <파우스트>로 시작된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빠진 파우스트, 파우스트를 사랑하는 그레트헨의 이야기를 통하여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설'을 설명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한 그레트헨의 '최고의 자기부정', '무한한 자기 체념'은 그녀가 이미 종교적 단계에 도달했다는 증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파우스트 2부>에 대한 설명에서 작가는 괴테의 실존주의 이전의 낭만주의 철학에 기인한 파우스트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다.  실러의 '최고의 자기 긍정' 내지 '무한한 자기 실현'은 파우스트가 이상적인 인간에 도달하는 기반이었음을 말해준다.  놀랍지 않은가.  어떤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읽었던 <파우스트>가 새로운 인물로 재창조되는 느낌이었다.
     
    <파우스트>가 인간의 구원과 내적 성장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데미안>은 인간의 내적 성장에 집중하는 책이다.  잘 아는 것처럼 싱클레어가 만나는 에바 부인은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자기실현의 완성체이며 싱클레어가 깨닫고 경험하는 모든 과정은 자아실현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는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전 인류의 문제이며 모든 삶과 사색의 문제라는 것을 싱클레어를 통하여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일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뱀이 허물을 벗고 성장하듯' 몇 번이고 주어진 자기를 부수고 죽을 것 같은 절망과 고통을 견디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싱클레어도 그러한 절망과 고통을 통해 비로소 자기실현을 완성해냈던 거지요.  헤세는 그렇다고 이러한 성장과 자기실현을 두려워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위로도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절망을 보내는 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이다.""    (p.70-p.71)
     
    저자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통하여 관계의 중요성과 '관계를 맺는 법' 또는 '사랑하는 법'을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인상깊었던 것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통하여 사랑과 질투를 철학적으로 관찰하는 대목이었다.  여기에는 권지예의 단편 소설 <꽃게 무덤>이 함께 등장한다.  나는 저자의 작품 선택에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오셀로>가 자신이 이미 소유한 대상에 대한 불안심리와 그에 기인한 질투였다면 <꽃게 무덤>은 가질 수 없는 영혼을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 또는 쓸쓸함에서 비롯된 질투였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질투란 오셀로가 가졌던 진화심리학적 질투든, <꽃게 무덤>에 나타난 존재론적 질투든 분명 일종의 신경증 증상입니다.  일종의 심리적 질환이라는 말이지요.  프롬의 관점에서는, 질투는 사랑의 다른 얼굴이 아니라 소유욕의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 곧 '질투 없는 사랑이 있을까,사랑 없는 질투가 있을까?'에 대해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질투 없는 사랑이 진정 사랑이라고!  그리고 질투에는 아예 사랑이 없는 거라고!"    (p.114)
     
    저자는 이제 카프카의 <변신>에서 가족의 의미를 발견한다.  이 부분에서는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과 영화 <집으로>가 함께 등장한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저자도 이 책에서 '삶의 무의미성'과 일상의 갑작스러운 낯섦, 또는 '아찔한 의식의 순간'을 말한다.  일상에 대한 연장선으로 선택한 작품이겠지만 사뮈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우리는 <구토>에서 마저 듣지 못한 일상의 권태를 듣게 된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 비롯된 삶의 부조리와 무의미성, 또는 이에 저항하는 인간의 '반항' 또는 '무의미에의 의미 주기'가 인간 개개인의 문제였다면 이제 그범위를 넓혀 이상사회 또는 유토피아의 문제로 넘어간다.  최인훈의 <광장>을 통하여 이념의 대립이나 갈등이 해결된 이상사회의 모색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통하여 약간의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살펴보고 잇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이르러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년>을 거론한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인간 사육’ 논쟁과 더불어 이상사회의 목적만을 강조하는 것, 그로 인한 전체주의화와 인간성 말살과 폭력 및 억압의 문제, 그리고 유전공학의 발달과 생물학적 결정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지막이라는 약간의 아쉬움과 철학적 양념으로서 거론된 듯하다.  
     
    원작의 적절한 인용과 저자의 감칠맛 나는 설명은 철학에 대한 기존 통념을 한순간에 바꿔 놓았다.  철학도 읽는 사람의 기본지식과 인문학적 소양에 따라 재미와 가독력에 크나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철학을 이해할 것이냐 아니면 그저 바라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 책을 읽었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기준에 의해 나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과장일까? 
     
    다만 내가 개인적으로 아쉽게 느꼈던 점은 이러한 철학적 설명이나 분석이 유익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자신의 감성에만 의지하여 체계적 분석을 방치한 채 '무작정 읽기'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독자들이 문학 작품을 일정한 분석 틀을 동원하여 딱딱하게 읽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에 짓눌리거나 이전의 감성과 순수성이 철학과 논리에 의해 훼손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권의 소설을 읽으며 영문도 없이 눈물을 찔끔거리거나 맘에 드는 시 한 편을 읽으며 먼 기억의 회상에 잠길 수 았는 순수성을 말이다. 그것이 나만의 기우라면 다행이겠지만. 
  • 던져 버리다. | wf**ever | 2012.11.15 | 5점 만점에 1점 | 추천:0
      그동안 또 시간이 없다는 핑계. 시간이 없다는 말은 정말 핑계 밖에 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여유는 없...
      그동안 또 시간이 없다는 핑계. 시간이 없다는 말은 정말 핑계 밖에 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여유는 없었다. 물리적인 시간적 여유가 아닌 마음의 여유. 여유롭게 살기를 그렇게 바라고 원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

      나의 성격이 문제인듯 하다. 성질이 못됐다. 극단적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싫은 것도 싫은 거다. 좋고 싫고가 꽤 분명하다. 선을 그어 양쪽으로 대립시킨다. 어느 한 쪽씩, 양쪽에 걸치는 건 못한다. 빌어먹을. 그래서 피곤한 건 나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새실 내가 옳은 건지도 불확실 하지만 말이다.) 해도, 옳지 못한 사람들도 잘만 살아간다.

      또 사설이 길었다. 오랜만에 읽은 책이 하필 이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다.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재밌는 책 한 권이 여유를 되찾아 주곤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반대였다. 여유가 없어 심란한 내 마음을 더 흔들어 놓았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것들을 많이 던져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랬으면 재미는 있었을 것이다. 철저하게 재미없고, 지루하다. 흔히들 철학은 따분하고 졸립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읽었던 철학 관련 서적 중에서는 상당한 재미를 주었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따분하고 지루하다.

      이 책은 문학작품들을 철학적 담론으로 풀어내고 있다. 모두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 보았을 문학작품들이다. 소개된 문학작품들을 내가 읽었는 가가 이 책을 읽는 재미와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내가 읽었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든 아니든, 일관되게 재미없고 지루하다. 예전에 <명작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형식이 비슷하다. 유명한 문학작품들을 소개하며 자신의 글을 이어 나간다. 그 책 역시 지루하고 따분했었다. 그 책에서 소개되는 문학작품들을 읽었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재미없었다.

      다 읽고선, '휴~ 다 읽었다'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런 마음으로 무슨 독서가 되었겠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읽기 연습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잘못된 습관인줄 알면서도 나의 독서방법은 쉬이 고쳐지지 않는다. 재미없는 독서는 끝이 났다. 이젠 재밌는 독서가 이어질 차례다.
  •     주말에 원래 계획대로라면 철학 한입 (열린 책들)을 읽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
     
     
    주말에 원래 계획대로라면
    철학 한입 (열린 책들)을 읽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책이 도착하지 않는 거다.
    읽고 싶어 좀이 쑤시던 책이라 상실감이 찾아왔다.
     
    어디 그뿐인가?
    날씨는 비까지 쭈루룩,,,,아,,,
    우울해지려는 거다.
     
    그런데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가 생각이 났다.
    뜬금없이,,,,참,,,뜬금없다.
     
    에라이 하는 맘으로 이 책이나 다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홧김에(?) 이 책을 다시 잡고 읽기 시작했다.
     
    와,,,그러고 보니 이 책을 처음 읽은 지 벌써 3년이 지났네?
    그때랑 좀 다르게 읽히는 부분도 읽고
    여전히 같은 생각,,마음으로 읽히기도 하고 그렇더라.
     
    그러다가 그 책을 읽고 서평을 써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찾아보니 2009년 10월 15일이었다.
    감상에 젖었다.
    그때 내 나름 이 책을 읽고 감동했니 어쩌니 하던 내 모습도 떠오르면서,,,,,
     
     
    그때 써두었던 서평과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생각에 잠기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아!! 손때가 덕지덕지 붙은 저 얼룩을 보라!
    사랑스럽다. 내가 이상한가?
     
    어쩌다 보니 다른 사람의 독서기록을 연거푸 훔쳐보게 되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과 사유의 결과물이라면
    김용규의 철학 카페에서 문학읽기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저자가 지닌 지식과 생각의 깊이에 무한한 존경심을 보냈다.
    내 생각이 아닌 너와 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와 비교해 볼 때 개인적으로
    김용규의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가 1,000배는 더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 내가 서평을 쓴다면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는 둥 하는 비교로
     서평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때의 내 오만이 창피하다.
    3년의 세월이 그래도 그냥 헛되이 흘러간 것만은 아닌가 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알아간다는 것,,,,
     
     
     
     
    본문 30
     
    파우스트에서 그레트헨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키에로케고르식 해석으로 보자면
    심미적 단계(순결의 상태)에 있던 그렌트헨이 자기반성을 통한
    종교적 단계를 성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종교적 단계는 어떻게 다다를 수 있는가?
    무한한 자기체념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무신론자인 나에게
    무한한 자기체념이란 과연 가능한 일인가?
     
    파우스트의 2부를 보면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한 파우스트마저 구원받는다.
    파우스가 받은 구원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기실현이다.
    자기실현을 통한 인간적 구원 말이다.
     
     
    자기 실현이라,,,
    나는 3년 전보다 얼마나 자기 실현을 하면서 성숙해 왔을까?
    무한한 자기체념을 통한 자기 실현이라,,,,,
    나에게 무한한 자기체념은 이루지 못한 꿈같은 것이다.
    사실은,,,고백하자면,,
    시간이 갈수록 더 나를 놓지 못하겠다.
    이젠 인간적 구원이니 하는 거창한(?) 것엔
    미련도 없다.
     
    그냥 하루만이라도 제대로 살아내고 싶은
    맘이 더 간절해 지고 있을 뿐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밤에 자신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면서
    잠자리에 들수만 있다면,,,,
     
    단 하루 만이라도!!!
     
     
     
     
     
    본문 113
     
    오셀로가 비극적인 사랑을 하게 된 이유는
    그의 사랑이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동사를 두고
    고귀한 자기희생의 실천이니 어쩌고 하는 것도 웃기지만
    상대의 모든 것-정신이나 육체 모두-을 내 것과 동일시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하는 짓이다.
     
     
    나는 우리나라 말 중에서
    부부는 일심 동체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혐오한다.
     
    내가 다른 누군가가가 될 수 없듯
    상대도 마찬가지로 내가 될 수는 없다.
     
    상대가 좀 더 나은 삶을 사는데 도움을 주고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지속시키려 노력하는 것
    이런 것이 사랑이라 믿는다.
     
    사랑은 명사로 존재할 때는 의미가 없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동사를 실천할 때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때의 나랑 별로 변화가 없다.
    나는 지금도 사랑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더 신뢰한다.
     
    그리고
    사랑은 받는 것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다는
    그 말을
    시간이 갈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사랑은 명사보다
    동사로 존재할 때가 나는 더 좋아!
     
     
     
    본문 147
     
     
     
    샤르트르의 구토를 이런 시각으로도 볼 수 있는거구나,,.
    구토의 원인을 수평화의 안락 속에서 경험하는 단독자의 자기 부정으로 보다니,,
    나는 예전에 책을 읽으며 주인공 로카탱의 잦은 구토의 원인을
    실존과 본질을 구분이 모호한 세상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권태로운 삶 때문으로 보았다.
     
     
    음,, 아무튼,,
    개별성, 실존, 본성이 혼돈되고 헷갈리기 시작할 때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것들에 저항한다.
    로카탱에게 그것은 구토로 나타나고
    나는 신경성 우울증으로 찾아온다.
     
     
     
    신경성 우울증?
    내가 이런 것도 앓았나?
    허세구만,,,또 허세를 떨었네,,,
     
    그냥  가끔,,,아주 가끔,,
    바람 부는 날 미친 척(?) 하며 돌아다니는 버릇은 있지만,,,
    (물론 이 습관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이 정도로 뭘,,,,
     
    이젠 이런 가벼운 우울 증상 쯤이야
    내가 제대로 가지고 노는 법을 배우고 있지.
     
    그러나
    실존과 본질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만큼은 더 불확실해 졌다.
    여전히 혼란스럽다.
    실은 더 모르겠다.
     
     
    하지만
    권태로운 삶에는 새로운 활기를 채워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일단 이 정도에서 타협하고 살아가고 있다.
     
     
     
     
     
    본문 181
     
     
     
    나는 모르겠다.
    하이데거의 주장대로 기획투사를 한다고 가정해 본들
    미래의 내 삶이 현재의 그것과 뭐 그리 다를까 싶기도 하고
    그 시도만으로도 내 본성이 구원받고 내 존재가 삶의 가치를 더 부여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블라다미르나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에
    우리가 아무리 온갖 의미를 변형해서 붙인다고 한들
    그 행위 자체가 본성을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기 위안은 아닌지,,,
     
     
    기획투사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았다.
     
    사물 또는 다른 인간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인간은 끊임없이 미래를 향하여 어떤 계획을 하고,
    자신의 몸을 앞으로 내던진다. 신(神)이 없으므로
    인간은 그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하이데거는 말했지만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내던져진 존재만은 아니다.
    인간은 앞을 향하여 던지기도 하는 존재이다.
    그때 앞을 향해 던지는 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또는 하고자 하는 어떤 계획, 혹은 기도(企圖)이다.
    따라서 독일어의 Entwurfen과 프랑스어의 projet는 우리말로 투기(投企),
    즉 기도를 앞으로 투사한다는 조어가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이처럼 내던져진 동시에 앞으로 던지는 존재이다.
    하이데거의 피투적 투기(被投的 投企, geworfener Entwurf)라는 어려운 용어가 바로 그것이다.
    던져져있음이 과거의 필연성이라면 내던짐은 미래의 가능성이다.
    던져졌다는 과거의 필연성에 떼밀려 아무런 계획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진정한 실존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일상적 자기와 본래적 자기를 구분한다.
    우리가 공동세계 속에서 만나는 타인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사는
    「나」는 모두 본래의 자기가 아니라
    일상적인 자기, 평균적인 세상사람에 불과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마치 신들린 듯이 스포츠나 오락,
    또는 음주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뭔가 잊으려고 애쓰는 것 같다.
    그들이 도취의 상태에서 도피하는것, 애써 생각지 않으려는 그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본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이면서 또한 유한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누가 무엇때문에 나를 내던졌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출생 이전도 무(無)지만 죽음 이후도 무이다.
    우리의 인생은 무 위에 떠있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서 이 불안감은 숙명적이며, 도저히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일상생활속에서 스포츠나 음주, 오락, 또는 일에 몰두하여 우리는 그것을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근원적인 불안에서 벗어나거나 그것을 극복, 또는 초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성 속에 매몰되어
    근원적인 인간의 조건을 망각하는 것, 이것이 일상적 자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적 자기가 아니며, 참된 실존에서부터 전락한 상태이다.
    우리는 참된 자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를 연상한다.
    그러나 참된 자기에 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르다.
    키에르케고르에서는 최종적으로 신에 귀의 하는 것이 참된 자기를 되찾는 것이었지만,
    하이데거에서는 죽음의 불안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실존을 되찾는 길이 된다.
    죽음을 앉아 기다리거나, 그 불안에 허덕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앞질러 죽음을 떠맡음으로써
    죽음의 불안」은 오히려 「죽음에의 자유」가 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불안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존재의 근거가 무(無)임을 인정하고,
    이런 유한성의 자각을 토대로 자신의 기획을 앞으로 투사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죽음도 기획투사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르트르와 다른 점이다.
    사르트르는, 출생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인간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사실성(事實性, facticit ) 이므로,
    죽음은 우리의 기획투사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본문 325
     
     
     
     
    시간과 공간의 병치라,,,
    호기심이 생긴다.
    지식의 힘을 빌려보자.
     
    병치 倂置/
     
    [명사]두 가지 이상한곳나란히 두거나 설치함.
     
     
    베르그송 철학에서 심리자아: 존재론
    0. 실마리
     
     
     
    존재에 대해 지각하는 것을 도식화(체계화가 아니다.)하는 작업은
    일반적으로 알려진귀납. 연역. 유추. 귀류법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보다
    이마쥬(image)의 견고한 작업 즉 이마쥬 생산(상상작업, imagimation)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마쥬 생산은 존재의 발생적 근원과 심리(생명, 상징)의 발생적 기원과 동일한 근거
    자연(본성)에 근거를 두고있다.
    그 진행과정은 생산적 과정, 생명현상의 확장적 과정, 상징의 극대화(amplification)과정에
    동일한 방향(상향성)을 취한다.
    이러한 방향성은 심리의 기본적(일차적)경향성이며, 생명의 진화 경향성이며,
    인간 운명에 대한 조심스러운 개척일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목적성에 근거한 원리나 결과물에 대한 예측을 하는 법칙들이
    이미 주어진 구성된 혹은 구조화된
    체계에서 출발하는 유일 신앙적 사유에서가 아니라,
    어떤 질료성에 의해서 어떤 원인성에 의해서 당연하게 혹은 필연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귀납도 연역도 일반화의 오류나 선결문제를 전제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고
    유추의 논리는 증명되지 않는 혹은 증명될 수 없는 사태를 연쇄고리의 하나로
    혹은 새로운 연결고리로서 자의적으로 인정하고 싶어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고,
    귀류법에도 모순과 불합리 로 귀결된다고 해서 그 사태 자체를 반박한 것이 아니라
    반박된 자료가 자기 한계 내에서 성립하나
    다른 한계에로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반박자료도 자기 완결성의 체계를 갖기보다는
    혹은 증명되기보다는 경계선을 확장할 필요를 제시하거나
    다른 차원의 새로운 개념형성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이에 비하여 이마쥬 생산은 흩어져있는 듯이 보이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는 사태들,
    어둠 속에 있는 듯하며 혹은 흐릿하게 느껴지는 사태들 속에
    제 모습을 뚜렷하게 내보이게 하는 과정 속에 형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상상 작용은 요소적 자료들을 임의적으로 구성하는
    공상작용 혹은 칸트가 말하는 이미 주어진인식범주 속에
    그 범주작용에 맞는 요소들을 조립 연합하는 정신의 화학작용과는 다르다.
     
    생명현상이 원시생명체에서 현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제 모습을 끊임없이 변형시키고 발전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 여기서 어떤 생명체의 보편적 개념은
    우리가 현시점에서 표면적으로 받은 인상들을 일반적 모습 (보통명사)으로 구조화한 것 일 뿐인데 -
    이 상상적 작용인, 심리현상 즉 의식현상도, 원본적 의식으로부터 현재의식에로 이행과정에서
    자기 본래모습을 실현시키려는 의도에서,
    현재의 모습으로도 인위적 구조물으로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현상이 원초적 심리로부터 현재까지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은
    그 심리현상 자체의 복잡성이나 체계의 점진적 완전성에로 향하는 도정 때문이라기보다,
    심리현상이 알 수 없는 혹은 무정형적 모습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없다고 하는 것, 그것은 전혀 알 수 없다거나
    혹은 인간능력으로 알 수 있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보다,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인류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인간적 노력으로는
    저 거대하고 광활한 자연현상에서
    인간의 경험(실증적 자료)은 이직 미흡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고,
    무정형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가 지적체계로서 구성하거나
    구조화한 것도 정형의 틀이 있어 보이는 듯하지만
    끊임없이 발전하는 인식능력의 확장 속에서 확실성보다 개연성이 더 많이 있다는 측면에서이다.
     
    누구에게나 인간의 모습은 이미 정형화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현상의 진화과정에서 보면 이모습도 또한 일련의 과정의 한 단면일 뿐이다.
    다른 한편 인간은 인간자신 혹은 주체에 대해 알고있다고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아는 것은 `알고 있는 것` 만큼만 알고있을 뿐이지 다른 부분은
    항상 어둠과 그림자로 저멀리 던져버렸던것을
    정신사적 문명사적 담론에서 언제 어디서든지 찾아볼 수 있다.
     
     
     
     
    왜 우리는 존재론에서부터 출발하는가?
    이 존재론이, 감성: 감각 감정 정서 감동의 차원도 아니고,
    오성: 관념 추리 판단 체계에서도 아니고,
    의지: 습관 본성 자유 욕망에서도 아니라,
    대부분 비유나 상징(우화 Allegorie)에 의한 진술로 표현 설명 해석 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존재론을 다룰 수밖에 없는가에 대하여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론이라고 하는 존재의 근원을 다룰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심리적 어떤 경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모든 생명체에도 이 심리적(영혼적) 경향성이 있고,
    이 경향성은 외적 대상과 더불어 존재방식을 드러낸다.
    어쩌면 무기물 속에서도 이 경향성은 잠재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존재론이란 인간의 인식방식(감성 오성 이성)에서 혹은
    실천적 방식(습관 의욕 의지)에서 의미연관을 갖기
    이전에 - 기표(signifiant)의 대상이전에 -, 존재 그 자체가 무한한 다질적 내용으로
    - 기의(signifie)의 실재성으로서
    -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을 뿐인 것을 음미하는 것이 존재론일 것이다.
     
    존재에 관한 이론(학설)이란 존재자에 관해서가 아니라, 존재에 관해서 이다.
    전자가 개별과학의 성립을 기초 지운다면,
     후자는 개별과학 성립의 근거 조건 근원을 탐구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이를 메타학문이라 부른다.
    메타학문에 양의성이 있다는 것은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우선, 메타학문이 지도적 형이상학(즉 형상형이상학)이 있을 수 있고,
    생성적 형이상학(즉 질료 형이상학)이 있을 수 있다고 만 언급하자.
    그리고 이 두 상학은 사유의 양 극단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사실상으로 보다 권리상으로 담론의 대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어느 인간도 이 양 극한에 위치해 살아가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 대부분의 학문들은,
    이 양자 논리 사이에 긴 계열 선상 위의 어느 한 점에
    즉 타협점(modus vivendi)에 서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존재자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메타학문)이라 부른 것은
    이 학문의 단초 혹은 기본단위의 설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학문들에는 학적 체계가 있고 그 체계에는 그에 맞는 정합성이 있다고들 한다.
    그 정합성은 학문 각각이 먼저 설정한 원리 위에서 성립하며
    그 원리 자체에 의문을 달지않고 자명한 것으로 본다.
    이 자명성이 그 학문을 유지해 주고 있다.
    그리고 자명한 체계는 그가 미리 설정한 단위로부터 시작한다.
    이 단위 설정 양식에는 일반적으로 3가지 차원이 있다:
     
    성질, 형상, 작용, 다른 말로 하면, 존재, 인식, 실천의 의미에서이다.
     
     
    존재가 3가지 양태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현상적이며, 언어적 습관의 구조에 닮았다.
    그런데, 존재가 3가지 양태로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운동과 변화의 측면이다.
    말하자면, 내재적으로 스스로 자기변화를 질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면서,
    또 타자를 포섭하면서 제 모습을 끊임없이 드러내려 하고 있고,
    그리고 자신과 더불어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위상도 변전(transformer)시키고 있다.
    이러한 3가지의 운동측면이 존재 자체에서 나온다고 보면, 현상적인 모습에서 보다
    본체적인(본질적인)내용의 탐구에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이 본질적 내용 즉 실재성에 관한 물음이 자연의 본질 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와
    동일 근원상(공연성 coextensif)에 있음을 간파한 것이 베르그송의 첫 작품 DI이다.
     
    그 작품이 영역으로 번역되면서 시간과 자유의지라 했는데,
    이 의미는 존재 그 자체가 시간이며 자유라는 것이지,
    개체인 인간의 자유 혹은 정신(신적 영혼)의 자유 의지의 자유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덱거의 존재와 시간도 존재자의 성격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곧 시간임을 알리는 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존재가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존재자의 측면이 아닐 때,
    존재자 속에 내재하는 어떤 것 즉 스피노자의 자연 즉 신의 생산적 능력과 같고,
    게다가 두 속성의 생산적 능력에도 그대로 전수되어 표출된다.
    라이프니츠에서 단자가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는
    스피노자의 두번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내재적인 어떤 것이 스스로 만들어 나아가는 과정으로 간주될 때,
    그 자체가 힘(에너지)을 갖고있다고 본다.
    이 힘을, 초기 스토아학파의 (혼)불에, 플로티누스의 태양에,
     스피노자의 생명에 관련 지울 수 있듯이,
    이름 지울 수 있다면, 심리(psyche)라고 할 때,
    베르그송 철학의 첫번째 자아와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심리적 자아가 베르그송 철학의 단초 혹은 기본단위인가?
    그리고 이 자아의 성격 특성은 무엇인가?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심리라는 개념이 대상적 성격이 아니라, 주체적 특질을 갖는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넘어가자.
    그리고 이 심리가, 유명론자들이 말하는 이름뿐인 것처럼, 빈 대상으로 생각 될 수도 있었다.
    이름 뿐 이라고 하는 혹은 무의미하다고들 하는 심리 혹은 심리적(심층적) 자아가
    2500년 서양 철학사에서 어떻게 배제되었으며, 무화 되었으며,
    부정(혼돈 혹은 어둠)이 되었는가를 우리는 이미 철학적 문제제기에서 보았다.
    다른 한편 고대철학의 류적(보편 혹은 일반 )개념 속에 혹은
    근세 철학의 법칙 속에서, 비하되고 결핍되고 결함있는 것으로
    혹은 경험적 자료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고 이성(좁은 의미)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서,
    철학적 사유의 주변에 맴돌거나 혹은 비이성 비합리라는 이름으로 소외(alienation)되었고,
    비정상 혹은 저주받은 심지어는 사탄이나 마녀적 사유로
    (유일 신앙의 반대로서 무신론으로)변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았다.
    Bergson은, 이 심리의 소외현상이나 존재근원의 배재현상을 Idee(관념)의 협의성 때문에
    혹은 철학적 작업의 정확성이 미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I. 1. 심리적 자아 의 길 - 존재론 - 질적 운동.
     
     
     
    넓은 의미에서 심리 혹은 심리적 자아도 관념(Idee)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념 그 자체는 존재자라기 보다 존재이다.
    이 존재는 어떤 윤곽을 형성하고자 한다.
    단순히 인간 혹은 생명체에서도 윤곽의 형성양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 사물에도 그리고 무기물에도 그 양식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윤곽형성체는 자기에 의해 자신을 위해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이 양식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 자체로서 보면 자족적 존재이다.
    이 자족적 존재가 왜 타 존재와 연관에 의해서,
    혹은 타자를 위하여 혹은 타존재가 자신을 위하여 존속한다고 보는가?
    이 물음을 존재 문제라기보다 존재의 생존방식 존속방식의 물음이기에 다음 차원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단지 존재 자체에 대해
    즉 존재의 질적 운동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는 것으로만 한정하자.
    무기물의 존재, 타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의미에 들어가기 보다,
    우리는 우선 스스로를 무매개적으로 느끼고 지각하는 자신,
    인간으로서 느끼는 인간, 즉 실체적 자아에만 한정해 보고자 한다.
     
     
     
     
    심리는 우선 심리적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심리적 사실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대상의 차원에서 의식이 느끼고 지각하는 것에 대한 측면과
    표상의 차원에서 의식이 개념 혹은 관념의 형성에 대한 측면이 있다.
    이 두 측면은 경험론적 측면에서 경험적 사실과
    합리론적 측면에서 의식적 사실로서 구분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두 측면이 데카르트의 연장 실체나 사유 실체의 이분법에 해당하는 것이라기보다,
    혹은 스피노자의 두 속성 측면이라기보다,
    인간(심리적 자아)에게 무매개적으로 주어진것을 피상적으로 외면화시키는
    대상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방식으로 보면, 생명속성의 여러 상태에 가깝다.
    이런 심리적 사실들은 항상 자기 생성의 방식이 있고 자기 현상화 방식이 있다.
    우리는 이 방식들로부터 나타난 현상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심리 내적 운동은 일반적으로 그 결과에 의해 알려지기 때문이며,
    그 결과들을 분석함으로써 원인을 알게 되든지 혹은 그 성질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I. 2. 1. 심리 자아의 단초 설정을 위하여 - 존재적 자아
     
     
     
    심리적 사실들의 상태는 감각 감정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진다고 한다.
    감관에 의해 알려진상태들은 서로 구별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촉각. 청각. 시각 등에 의해 외적 대상들로부터 받은
    인상들이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사물들이 성질을 가지고 있고 그 성질들은 제 1 성질과 제 2 성질로 나눈다.
    길이, 견고성, 저항성 등은 제 1 성질에, 색깔, 맛, 소리 등은 제 2 성질로 분류한다.
    제 1 성질에서 사물들을 외연적으로 구분을 하는 기준을 얻고,
    제 2 성질에서 감관을 통하여 대상과 감각적 사실과의 연관을 본다.
     
    그런데 사물들과 관계하는 우리의 감정은 위와 같은 분류의 제 2 성질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제 1성질은 사물 제체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익숙해 있다.
    이런 구분이 물리학적 견해와 생리학적 견해의 구분에서 이루어진것은 아닌지
    그리고 심리학적 구분은 다른 차원에 둔 것은 아닌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물리학적(신체적) 견해와 상관 있는 촉각에서부터 출발해 보자.
    우리들 내부에 영향을 가장 적게 미치는 촉각의 길이는 순수한 표상적 감각으로 받아들여진다.
    물체(혹은 생명체)에 너비(l'etendu)가 있다는 것은 구체적 자료이다.
    이 자료는 외적 대상으로부터 즉 외적 원인에 의해 측정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촉각에 부드러움 혹은 거침에 대한 것을 느끼면서,
    사람들의 대상에 대한 감정을 달리한다.
    여기서 표상적 감각인 너비와 너비를 가지는 물체에 대한 느낌은
    양적 차이와 질적 차이에 해당된다.
    사물에 대한 감각은 어쩌면 결과의 질적 차이에 원인의 양적 차이를 연합하면서,
    우리의 감각을 수적으로 양으로 측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촉각뿐만 아니라 청각, 시각, 미각, 후각에서도 위와 같은 차이가 있는데,
    이 또한 계산 가능한 측정 방식을 통하여 우리의 감각을 요소별로 구별하여
    그 수를 헤아림으로써 수치를 측정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측정도 또한 감각의 내용이나 질적인 의미보다 물리적 현상을 크기나 너비로서 표시하며,
    어떤 감각은 다른 감각보다 더 크다 혹은 더 많다라고 말하면서,
    질적인 비교가 아니라 양적인 비교로 감정의 차이를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구분하는 이 차이가 분명하게 감각적 현상에 있다 하더라도,
    이 차이는 감각된 대상의 표면을 구분하는 것이지 감각들 자체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감각들 사이에 내포적(intensif)차이가 있다.
    여기서 물리학적 견해는 감각 속에 이미 표상 (외연적 양)을 투여했고,
    혹은 결과의 질 속에 원인의 양을 [측정과 예측을 위하여] 미리 넣어 둔 것이다.
    이러한 논의 방식은 제1성질과 제2성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외적 사물과 내적 사물사이에서 구별이 물리적 혹은 생리적 차원과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 물리적 생리적 요소에 의한 수적 차이에서는 '보다 크다'를 설명할 수 있으나,
    심리적 사실에서는 보다 내포적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르그송이 양의 두 종류를 외연적extensif과 강도적intensif 혹은
    너비적etendu과 비너비적inetendu으로 나누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별첨1)]
     
     
     
     
    물리학적(신체적)인 것보다 더 깊은 생리학적(애정적)인 것으로 나아가 보자.
    촉각에 의해 기분 좋게 부드러움을 느끼며 좋아하기도 하고 찔리는
    아픔과 거친 감촉에 의한 불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유쾌 불유쾌를 넘어서, 기쁨과 슬픔에 이르는 감정이 있다.
    이런 감정을 연속적 단계로 말하자면 사소한 기쁨,
    작은 기쁨, 보다 큰 기쁨, 대단히 큰 기쁨, 등으로
    감정 상태를 단계적으로 양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양적 측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에는
    이 기쁨의 대상 혹은 기쁨의 원인이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보거나 그 원인을 받아들이는 주체가 더 많은 힘을 보태었거나,
    혹은 근육적 노력의 양(근육표면 넓이의 양)을 점점 더 넓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근육의 노력은 외관상으로 관찰 할 수 있는 범위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쁨 슬픔 등에 내재하는 감정은 단순히 생리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심리적 욕망이 함께 있다.
    이 욕망이 서서히 밖으로 드러나면서 이 감정은 생리적으로 표출된다.
    이때 욕망은 희망이다. 미래에 대해 소신껏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함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감각에 관한 논의에서 보았듯이
    원인에 대한 이해보다 결과의 측정에 더 중점을 둔
    생리학적 견해를 보는 것과 동시에
    현재 의식 상태를 미래의 반작용의 지표로서 가능한 다수의 형식을 상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기쁨이 크다는 것은 미래에 행위 가능한 지표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미래 지표들은 사실상으로 보면 아직 오지 않았기에 알 수 없는 것인데도
    수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자극에 의한 심리적 번역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가능성은 실재성이 가지는 실현 가능적 힘이 아니고,
    과거에 발생했던 실현된 것들을,
    다가올 지도 모를 여러 경향성 중이 하나인 현실성의 한 양식에, 대입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리적 상태들은 애정적 상태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즉 고통과 쾌락같은 애정적 상태는 단순한 생리적 현상들보다 더 복잡하다.
    말하자면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보는 자는 그와 비슷한 고통을 느낀다.
    이 고통은 신체적 아픔과 생리적 아픔과도 다른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에는 외적 대상이나 혹은 신체적 요소들의 상태에서 얻어지는 경험과
    다른 경험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적으로나 양적으로 나타낼 수도 없다.
    즉 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이 두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러한 애정적 감정들은 내포적 차이가 아니라 본성의 차이가 내재해 있다고 하겠다.
    베르그송에서 물리학적 생리학적 원인들에 대한 비판은
    양의 우열에 의한 계산(측정)이 심리적 사실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Weber에서 Fechner에 이르는
    정신 물리학의 비판, Bain의 관념연합 심리학과 Wundt의 실험 심리학의 비판에서도 볼 수 있다.
     
     
     
     
    심리적 사실들 중에 우리의 의지 혹은 내재적 힘의 분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들은
    앞의 두 사실들과 다른 차원에 있다.
    말하자면 감성적 감정(Les sentiments esthetiques) 이라고 이름 붙인 경우인데,
    3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종교적 감정, 미적 감정, 도덕적 감정 등이 있다.
    먼저 은총(Grace)의 감정을 보자.
    이 감정은 우선 외적 용이함을 지각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예견할 정도로 더 높은 정도의 용이함을 얻는다.
    이러한 움직임의 용이함을 느끼는 것은
    어느 정도 시간 진행의 정지와 현재 속에 미래의 전개를 즐긴다.
    게다가 거기에는 '리듬과 박자'라는 세번째 요소도 개입한다.
    우리는 이 은총의 감정에서 우리에게 향하는 가능한 운동의 지표 또는
    잠재적 혹은 생겨나는 공감 지표를 보게 된다.
    이러한 점진적 지표를 크기변화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나,
    베르그송은 이러한 해석은 언어가 행한 잘못이라고 보고 이 정서의 증가는 질적 진보라고 한다.
     
    음악, 시, 조형예술, 건축 등과 같은 예술적 아름다음의 감정에도 '리듬'이 내포되어 있다.
    (B는 조형예술에서만 리듬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지각능력이 일상생활에서
    우리 인격의 의식(심리상태) 쪽으로 이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반복의 효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의 목적이 우리 인격의 활동적이고 오히려 저항하는 이 권능을 잠재우고
    또 우리가 예술로서 표현된 감정과 동화하는 완전한 순화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상이다.
    여기에는 최면적 상태와 유사한 절차가 있다.
    그런데 예술은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감정을 우리 속에 각인 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예술처럼 자연도 암시에 의해 진행하지만 어쩌면 자연이
    - 마치 마술 혹은 마나(mana)처럼 - 오랜 동료의식에 의해 예술을 보충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 공감적 의식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이 감동에는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자의 삶을 되살아나게 한다.
    이러한 인격성의 심층의 동화는 우리 속에 도래한 심리상태의 변화이다.
    이 변화는 양적으로 확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질적인 변화이다.
     
    도덕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불행한 자에 대해 동정을 느끼고
    그리고 그 삶에 자신을 위치시키면서 인간적 고뇌를 겪으며,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두려운, 공포를 느낀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연민의 본질은 스스로 겸손해지려는 욕구이며,
    내려가려는 열망(l'aspiration)이라고 보았다.
    이 힘든 열망 속에서 자신의 평가를 높이고, 감각적 선보다 높은 것을 느끼게 되면서
    사람들은 열망에 대한 매력을 가지게 된다.
    결국 동정의 증가하는 강도는 불쾌감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공감으로 공감에서 겸손으로 나아가는 질적 변화 과정이다.
    질적 변이는 양적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차이 즉 본성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1. 2. 2. 의식 자아의 단초 설정을 위하여 - 심층적 자아
     
     
     
    DI 제2장에서 의식적 상태의 다수성에 대하여 쓰고 있다.
    여기서는 의식 상태가 단위로서 설정될 수 있느냐를 먼저 문제 삼는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일자와 다자 사이의 구분이 어떻게 설정되었느냐로 나아간다.
    단위설정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규정적(definitive) 단위와 임시적(provisoire) 단위 (DI 60),
    이미 형성된 수와 형성과정에 있는 수 (DI 62), 불연속의 수와 환원될 수 없는 단위 (DI 62),
    단위를 셀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형성된 단위를 이상적 공간 [절대 공간] 위에 병치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별첨2)]
    여기서 보태기가 가능하고 총합의 계산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수들이 객관적으로 공간 위에 나열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근거한다.
    이러한 수적 다수성은
    물질성 자체 보다 물체라는 대상들이 같은 자리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면
    불가침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말하는 단위란, 수로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그 단위(모든 단위)는 하나이다.
    즉 그 단위는 정신의 단순하고 불가분적인 직관에 의해서 그 단위의 총체성 속에서 표상된다.
    말하자면, 영혼과 같은 심리 상태에서는
     심리적 사실들이 공간 속에 기호적으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히 질적인 다양성, 즉 질적 다수성이 있다.
     
    그러면 수적 다수성이 나열하는 공간과 질적 다양성이 성립하는 공간은 같은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수적 다수성의 공간은 등질적 공간이며
    질적 다양성의 공간은 이질적 공간이다.
     
    전자에 대해 생득론자건 경험론자건 공간을 의식의 표상으로 간주하고,
    공존적이 되기 위하여 정신의 작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칸트는 공간을 선험적 감성과 형식으로 만든다. 즉 절대 공간으로 추상화한다.
    동물이 지각하는 장소나 우리가 감각 감정 등
    심리적 경험을 통해 가지는 장소는 빈 공간이 아니라 이질적 공간이다.
    즉 삶의 공간이다. 여기에서 연속적 사실들은 상호침투, 연대성, 요소들의 내재적 조직화가 있다.
    말하자면 리듬과 박자뿐 만 아니라, '멜로디'도 있다.
    그러나, 공간의 사유 속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
    빈 공간과 달리 무한정한(indifini)장소로서 시간이 그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동질성의 이중 형식이 된다.
    무한정한 장소에 동시에 병치와 나열이 있다.
     
    이러한 공간(시간)속에서 연속적 질서는 가역적이며,
    앞선 사실로부터 차후의 사실을 예견할 수 있으며,
    결과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왜냐하면 순서는 이미 동시적으로 나열되어 있기에 앞뒤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생각은 시간 개념을 빈 공간 위에 위치시킨 것이고,
    따라서 시간을 공간의 표상으로 대치한 것에 불과하다.
     
     
     
    이와 반대로,
     
    베르그송은 삶의 현실(실재), 심리적 사실 그리고 영혼의 상태에서 질적 변화의 과정은
    순수 지속으로 보고 있다.
    이 질적 변화들은 서로 융합하고 서로 침투하며 정확한 윤곽도 없고
    서로 서로 외재화하는 경향도 없고 수와는 어떤 유사성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 순수 지속은 순수 이질성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 심리적 자아에 의해 지각된 순수 지속은 의식적 사실을 서로 겹치면서 혼합되게 하고,
    자아를 더욱 더 풍부하게 한다.
    그러면 이 지속은 측정 가능한가?
    그 답은 불가능하다 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지속을 측정한다고 하는가?
    의식의 지속을 시간의 변화로 보고 그 시간을 공간화 하거나 혹은 의식의 흐름을 운동으로 보고
    외적 대상이 움직이는 것을 측정하듯이 측정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운동은 측정 가능한가? 시간은 측정 가능한가?
    시간의 측정은 바늘의 움직임 진자의 왕복 운동에서
    혹은 천문학자가 하늘에서 별의 운행을 측정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본다.
    진자의 운동은 동질적 내적 지속의 관념들
    각각의 계기는 서로 침투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어진다.
    이는 공간 속에 배열되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 우리 의식이 조직화한 추억 속에 한꺼번에 보존되고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공간의 4차원이라 부를 수 있는 동질적 시간이다.
    여기서 진자의 운동은 무한정으로 병치될 수 있다.
    이리하여 운동은 진행과정인 진보가 아니라 사물화 되고,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인 정신적 종합
    즉 심리적 과정이 아니라, 공간을 점유하는 흔적이 되고
    동질적이고 가분할 수 있는 것으로 환원된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종합이란 질적 종합이며,
    서로 서로 연속적이 되는 감각들의 점진적 조직화이며
    멜로디의 한 국면과 닮은 통일성이다.)
     
    결국 베르그송에 따르면 운동을 보는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지나간 공간과 공간을 통과하는 작용, 동시적으로 놓인 연속적 위치와 위치들의 종합.
    전자의 경우들은 의식밖에 과거를 현재와 공존적으로 놓는 것,
    즉 의식 속에 진보(progres)과정을 외적으로 위치화 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의 운동 부정: 아킬레스와 거북이 경주에서 나타났고
    그리고 근세 과학의 등속 운동과 가속운동에서도 분명하다.
    후자의 통속적 유물론이 가지는 메커니즘은
    시간을 동시성으로 운동자체를 부동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운동과 시간의 분석에서 지속에 대한 다른 두 개의 평가가 있듯이,
    다수성의 의미에도 다른 두 형식: 질적 다수성과 양적 다수성도 있다.
    또한 이질자(l'autre)와 동일자(le meme)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자는 잠재성 (아리스토텔레스 의미에서)으로 이질성이 다수이고,
    후자는 공간 속에 외재화하는 동질성의 다수이다.
    달리 말하면 후자는 외적 현상의 지각 속에서 쉽게 나타나며,
    단위들이 동질적 공간 속에 배열하는 조건에서 고려된다면,
    전자는 두 단위 사이에 제3의 단위가 덧보태지면서 본성과 측면을 변모시키고,
    현실적 입장과 앞선 입장(우리의 기억)사이에 우리의 의식이 작용한 종합에 의해
    이마쥬들이 상호 침투하면서, 서로 서로를 완전화에로 이끌며, 지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으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동질적 공간에 전개되는 피상적 심리적 삶과 의식의 깊은 곳에까지 침투하는
    (기억을 되돌릴 수 있는)
    내적 자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상적 자아와 심층적 자아는 하나의 동일한 인격이다.
     
    이들이 겉보기에는 동일한 방식으로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외연적 기호로 표시되는 동질적 자아 밑에,
    혹은 매우 잘 규정된 자아 밑에는, 이질적 계기들이 서로 침투하는 지속이 있고,
    혼융과 조직화를 함축하는 연속된 자아가 있다.
     
    대부분의 자아는 심층에서는 내재적 혹은 살아있는 심리적 사실들이 있으나,
    표면에서 동질적 공간에 고정화되어 나타난다.
    이런 양태는 이미 감각, 감정, 정서의 분석에서 보았듯이, 심층에서는 어렴풋(obscure)하고,
    무한히 동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비해,
    표면에서 이미 정확화되고(간소화되고 고정되고)
    비인격적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심층 자아가 표면 자아에 가리어서 잘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를 베르그송은 두 가지로 꼽고 있다.
    하나는 고대철학 이후로 관념과 개념이 사태(사실)에서 공통점을 찾아서 언어로 고정시킨 것
    혹은 고정된 방식으로 받아들인 것에서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상 감정 정서를 관념연합의 방식으로 결합화하는 잘못에서이다.
    이 후자는 칸트의 구성설도 포함시킬 수 있다.
    베르그송은 수의 임의적 고정화, 운동의 과정을 운동의 자취로 보는 경우,
    시간을 공간화 시키는 경우 등을 비판하면서,
    앞선 의식과 다음 의식사이의 관계(원인에 대하여)를 넘어서
    과거(기억)가 현재 속에 미치는 의미를 재검토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심층의식과 피상의식의 관계에서 실재성이 가능성보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처럼, 더 근원적임을 암시하며
    즉 존재의 권능의 세계에서 한 모습(단면)이 현실적 세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베르그송에 의해 제기된 문제 원인과 결과, 전체와 부분, 실재와 가능,
    과거와 현재, 권능과 현실사이의 관계에 관련된 문제가 물체(통속적 유물론의 물질)와
    의식(관념론이 말하는 사유)사이의 관계를 혹은 각각의 논의(담론)가 가지는
    철학적 배경을 분석함으로써 보다 분명해지리라고 본다.
     
     
     
     
    괴테 "오, 시간이여! 날기를 멈추어다오.
    " 인간은 시간을 멈출 수 있는가? 일이 많은 시간은 빨리 지나가지만,
    지루한 시간은 더 길다. 왜냐하면 지루한 시간에는 순수시간만 남아 있고
    우리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루하다는 것은 순수시간(temps pur)을 느끼는 것이다.
    시간이 제거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체적 연장(l'etendue)의 틀인 공간을 제거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공간은 남아있다.

    1. 공간, 시간, 인간조건
    1) 공간과 시간 내에 있는 나의 우연적인 상황
    내가 여기 지금(hic et nunc)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모순율 A ≠ non-A, 또는 배중율, A=A ou(이거나) A=non-A 이지, A=A et(이면서 동시에) A=non-A 일 수 없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 주유가 "하늘은 나를 낳고 왜 공명을 낳았는가?"
    앞의 두 문장에서 두 사건들 각각은 별개의 사건으로 존재의 우발성(accident)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서 우연적(contingent) 존재이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과 공간의 무한함을 파스칼(1632-1662)은 '공포(l'effroi)',
    우나무노(1864-1936)는 '잔인한 폭군(le cruel tyran)라 생각하고,
    라뇨(1851-1894)은 '공간은 내 능력의 형식이며,
    시간은 내 무력함(mon impuissance)의 형식'이라고 한다.

    2) 시간에 대한 나의 무력함(impuissance)
    공간은 가역적이지만 시간은 불가역적(irreversible)이다.
    인간은 시간의 불가역성을 피하려해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의 불가역성에 반항하는 인간 심성을 나타내는 것은 많다.
    헤라클레이토스(BC 576- 480)는 우주의 지속적인 변화를 느끼며
    "인간은 한번 발을 담근 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 얼마나 많은 시인과 현자들이 시간의 가차없음을 말했는가? 황후 장상도 문디 거지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것이고
    우리가 항상 예를 들어 왔던 화두 '니는 안죽나?'도 같은 경우이다.
    종교에서도 영원에로 회귀는 인류자신의 해체(죽음)에 대한 저항이며,
    변화의 가역성을 거슬려 영원히 지위와 행복을 누리려는 소망충족의 표현이다.
    이 소망충족의 표현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다르지 않다.>
    영원회귀의 신화로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수 천년을 주기로 하여
    우주의 대 혼란이 오고, 시간의 흐름은 동일한 변전을 다시 시작한다고 한다.

    프로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이든 주인공이 몇 년을 고독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저녁 사교 모임에 나갔고,
     거기에서 옛날에 알았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변하여 가면 무도회에 와 있다는 착각을 한다.
    왈츠를 잘 추는 금발아가씨는 둔하고 돈 많은 노파로 변장하였고,
    씩씩한 중위는 금줄을 두른 옷을 입고 백발의 뚱뚱한 대령으로 변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오래 전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모습들은 축제가 끝나고 세수를 하더라도 벗겨지지 않는다" 인
    생극장의 가면은 한 번 덧 씌워지고 나면, 벗겨지는 가면이 아니다.

    인간시간의 불가역성과 자연 시간의 피상적 가역성을 대비하면서
    "나는 점점 늙어가지만 봄은 해마다 다시 온다."
    플라톤(Platon)의 『티마이오스』에세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 영원의 움직이는 모상"이라 했으나, 시간의 본질은 불가역성이다.
     
    과거의 고통만큼이나 미래에 대한 기다림의 고통이 있다.
    후회의 고통은 과거에 대한 나의 무력함의 표현이다. 삶의 과거의 단축성을 쟝켈레비치(Jankelevitch)는
    "이렇게 짧은 일년이 어떻게 긴 하루들로 만들어지는가?"라고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미래는 인간을 불안하게 한다. 하이덱거(Heidegger)는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죽을 수 있는 만큼 충분하게 늙어 있다"라고 말한다.

    3) 공간에 대한 나의 능력
    나는 시간 속에서는 무력하지만 공간에 대해서는 행동할 수 있다.
    마르셀(G. Marcel)은 "시간에서 존재동사를(je suis le temps), 공간에는 소유동사(j'ai l'espace)를 쓴다"고 한다.
    시간은 실존적 불가사의(mystere)이지만 공간은 객관적 문제(probleme 던져짐)이다.
    문제란 그리이스어로 problema이며, 라틴어로 ob-jectum이며, 앞에 던져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간은 내 앞에 존재하는 것으로 분할 기능하고 측정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과학은 경험재료를 공간화하여 표현한다.
    무게는 저울 눈금으로, 열은 온도계로, 전기의 전류는 전류계로 눈금을 표시한다.
    시간도 공간영역으로 이전시켜 지배할 수 있는가?

    사회적으로 공간의 영역의 대소는 권력의 행사에 비례한다. 공간은 권능을 표현한다.
    그래서 제국주의자의 망상은 언제나 생활 공간의 요구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정복자가 실패하면 공간의 감소라는 벌을 받는다.
    나폴레옹은 실패하자 센트-헬레나의 작은 공간(섬)으로 유배를 겪는다.

    4) 시간의 공간화 <공간: 동일성-(배중율)-모순율>
    일상적으로 시간을 공간화하여 표현한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종각까지는
    5분 거리이거나 300미터정도 이라고 한다.
    시간의 측정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고
    가정된 운동체가 통과하는 공간을 측정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은
    공간에 의해 측정되는 추상적이고 규칙적인 시간(le temps)은
    실재하는 시간, 의식에 의해서 체험되는 지속(la duree)을 왜곡시킨다.
    공간과 시간의 사생아적 개념은 시계에 순응된 시간이다.
     
    베르그송은
    "공간 속에 무한히 병치 할 수 있는 시간 즉 동질적 시간을 공간의 4차원이라 부른다(DI, 81-82)"
     
    이 시간은 체험적 지속과 다르다.
     
    "순수지속은 우리들의 자아가 살아갈 때, 현재의 상태와 이전의 상태를 분리시키지 않을 때,
    우리 의식상태의 연속이 취하는 형태이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감각이나 관념에 완전하게 몰입하는 것은 아니다
    <무아경(extase)이 아니라 몰아경(entase)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몰입하면 오히려 지속은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전 상태를 잊어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 상태들을 상기하면서도 한점을 다른 점과 중첩시키는 것처럼
    이전 상태들을 현재 상태와 중첩시키지 않고,
    마치 한 멜로디의 여러 음표를 기억할 때처럼,
    즉 용해되어서 이루어진 전체처럼 이전 상태들과 현재상태를 유기적으로 조직하기만 하면된다.(DI 74-75)"
     
    그러나 우리 지성은 기하학적 공간에 집착하게되고.
    "이 기하학적 공간을 우리도 자신도 모르게 순수 연속의 표상 속으로 도입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 상태들이 상호 포함되어 있는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의식 하나 하나를 따로 따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의식의 상태를 병렬시킨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시간을 공간 속에 투영하며, 지속을 길이로 표현하며,
    그래서 우리들의 눈에는 연속은 그 부분들이 서로 침투되지 않고,
    접촉해 있는 하나의 연속선이나 연쇄고리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DI 75)...
    순수지속은 명확한 윤곽도 없고,
    수와도 유사서이 없는, 상호 용해돼고 침투된 질적인 변화들의 연속일 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이질성이다. ... 지속에게 조금이라도 동질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암암리에 공간을 도입시키는 것이다(DI 77).

    베르그송은 통과된 공간을 따라서 운동을 고찰하면 운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제논(Zenon d'Elee)은 4가지 역설,
    이분법, 아킬레스와 거북이이 경주, 날아가는 화살, 스타디움, 을 통하여 운동의 불가능성을 제시한다.
    베르그송은 제논이 구체적 지속 중에서 체험하는 운동을 공간의 궤적과 혼동하고 있다고 보았다.
    베르그송은 운동체의 운동과 그궤적을 구분한다.
    "간단히 말하면 운동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통과된 공간과 공간을 통과하는 행위, 연속되는 지점들과 이 지점들의 종합이다.
    첫 번째 요소는 동질적 양이며, 둘째 요소는 일종의 질(qualite) 또는 강도(intensite)이다(DI
    83)." <제논과 베르그송 둘 다 단위의 불가분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전자는 단위가 시간 없는 전체인데 반하여, 후자는 변화하는 전체이다.
    말하자면 불가분성의 개념을 통하여 전자는 절대 공간을 후자는 순수지속을 설명하고 있다.>

    5) 연역적 지성과 구체적 지속
    지성은 분석적이고 연역적이다.
    지성은 체험적 질적 이질적 구체적 지속을 파악할 수 없다.
    메이에르송(Meyerson)이 말하듯이 지성은 결과를 원인으로 환원하고
    결과를 원인과 완전하게 일치시킴으로써,
    시간적인 불가역성을 피해보려는 것이다.
    연역적 지성에서 설명하는 것은 동일화하는 것이다.
    즉 시간을 공간으로 환원하려하고는 연역은 시간의 부정이다.
    결국 결과를 원인으로 과학화한다는 것은 연속적인 사건들을 모두 동일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l'Etre)는 일자에 희생된다.
    이 세계는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는 세계(l'acosmisme)이다.
    천문학에서 시간성을 단번에 주어진 공간으로 환원하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존(l'existence)은 새로움의 계속적인 분출이며, 지속이다.
    이 세계의 시간적인 존재값을 전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에너지 보존법칙에서 생명현상은 열의 저하법칙에 상충되고, 생명의 진화는 비가역적이며,
    개체의 발생과정도 비가역적이다. 베르그송은 "지성의 특징은 생명에 대한 본래적인 몰이해"라고 말한다.
    동어 반복적 분석을 넘어서는 변증법적 논리가 있다.
    변증법은 사물들과 개념들의 상호 연관성, 이것들의 상호작용,
    상호작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이것들의
    수정, 발생, 발전, 쇠퇴를 통해서 고찰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사유는 동일한 것으로부터 동일한 것으로 진행하지 않고,
    정립에서 반정립으로 그리고 종합으로 진행한다.
    이 세 단계도 변화 속에서 동일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6) 의식의 지배를 받는 시간
    인간은 시간 앞에서 무능함의 형식을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완전한 생성의 노예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시간을 따라 흘러가면서 시간을 되돌아 볼 수 있다.
    브랑슈비크(Brunschvicg)는 "시간에 대한 판단은 시간밖에 있는 판단이다."고 한다.
    시간 속에 있는 의식인 동시에 시간에 대한 의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생성 속에 있으면서
    생성을 벗어나고 생성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존재인 나는 하이덱거말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다.
    합리론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정신이 시간성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반성과 이성의 차원을 인간속에
    구현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비가역적>시간이자 동시에 <판단하는>시간을 소유한다.
    그래서 나는 반성하는 자유, 즉 나의 반응을
    바꾸는 자유를 소유한다. 결국 사람은 변화<지속>하면서도 이 변화들을 하나의 동일한
    "나(je)"라는 통일성에 귀속시키려한다

    시간의식을 살펴보면, 시간의 여러 순간들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현재 행위는 과거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고, 미래에 대한 인간의 계획도 있다.
    심리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 관련지어보면,
    불안과 회한, 안도와 자유, 성숙과 성취의 시간도 있다.
    시간은 진보의 차원이기 때문에 나의 무력함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교훈을 끌어 낼 수 있듯이,
    흘러감에 무력함은 교훈을 통하여 자유로 변한다. 말하자면,
    최소한 과거의 흐름과는 다른 흐름을 만들 수 있다.
    그 흐름또한 필연적인 시간의 흐름이라 할 지라도.

    2. 고전적 문제: 시간과 공간의 실재성과 관념성
    공간과 시간은 사물 속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순히 인간 정신이 세게를 표상하는 주관적 양태인가?
    즉 이들은 실재하는가? 아니면 관념인가?

    1) 고전적 실재론 <플라톤 전통>

    데카르트는 실재론자이다.
    "나는 물질의 연장, 즉 물질이 공간을 차지하는 속성을 우연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물질의 참된 형상과 물질의 본성이라고 이해한다.
    (데카르트는 공간을 실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우주에는 진공이 없다.)

    뉴톤도 실재론자 이지만 데카르트와 다르다.
    (데카르트는 공간의 학문인 기하학과 물질의 학문인 물리학을 동일시 하지만, 뉴톤은 구별한다)
    뉴톤은 공간과 시간은 실재적이고 절대적인 틀이다.
    뉴톤에서 모든 운동은 가속이 붙거나 감속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일정한 등속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또 그럴 가능성이 없다 할지라도,
    절대 시간의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
    역학 방정식에서 사용하는 매개변수 t는 일정하고 이상적인 시간이다.
    뉴톤에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은 신이 세계를 담아 놓기 위하여 준비한 틀 이상의 것이다.

    2) 관념론 <기독교 영향>
    a) 라이프니츠의 경우: 공간과 시간은 사물이 아니라 순수 관계이다.
    그는 데카르트를 반박하여 길이는 실체일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길이는 무한하게 분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에서 실체는 일자이며, 길이는 순수한 다수이다.
    다른 한편 뉴톤의 제자 클라크와 서신논쟁에서 그는
    절대 시간과 절대공간과 같은 무한한 그릇(receptacle)을 거부하면서,
    " 한 마리의 작은 파리를 위하여 거대한 동물 우리를 상상할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은 항상 충족이유율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런데 세계와 독립적인 공간적 시간적 절대의 틀이 존재한다면 충족이유율이 성립하지 않는다.
    "만일 시간이 지속하는 사물들과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면, 신은 왜 이 순간에 창조하였고
    다른 순간에 창조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창조순간의 선택에 충분이유가 없다."
    그러나 신은 세계를 창조하였고, 창조 이후로 공간과
    시간은 단지 사물들 사이의 질서와 관계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공간은 가능한 공존의 질서이고, 시간은 가능한 연속들의 질서이다."
    그의 신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를 창조하였다.

    b) 칸트의 경우: 공간과 시간은 우리 지각의 선천적 틀.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 실재라면 첫 번째 이율 배반에서 제시된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
    즉,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정립도
    그 한계를 부인하는 반정립도 모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이 난점을 피하기 위하여 공간과 시간을 물자체라고 생각하기를 중지하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들의 지각의 선천적 틀, 세계에 대한 나의 표상의 주관적 조건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간과 공간이 우리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틀과 조건이 필연성과 보편성의 특성을 지닌다.
    공간과 시간의 본질적 특성은 선험적 관념성(idealite transcendantale)이다.
    내 지각의 주관적 형식일 뿐이기 때문에 관념성이며,
    모든 지식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선천적 조건
    (condition a priori)이기 때문에 선험적 관념성이다.

    나아가 칸트에게서 공간은 외적 감각의 형식이고, 시간은 내적 감각의 형식이다.
    이 시간과 공간은 선험적 관념성이라는 특징이외에도 경험적인 실재성의 모습을 나타낸다.
    공간과 시간은 지식의 형식인 동시에 경험적인 재료이다.
    그러나 오성에 의해서 구성된 추상 개념은 아니다.
    결국 칸트의 공간의 특징은 유클리트의 공간이나 뉴톤의 공간의 특징과 같다.
    즉 칸트는 뉴톤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신의 감각기관으로부터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3) 결론
    공간과 시간은 의식 밖에 존재하는 실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시간과 공간의 관념, 그 구조는 우리가 만든 기능이다라는 주관론에 어떤 진실이 있다.
     
    그리고 칸트 견해는 과학 발전상의 개념이며,
    이 개념은 원초적 직관도 아니고 지식의 최종적인 재료도 아닐 것이다.
     
     
    a)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표상의 원초적이고 주관적인 형식들
    인간들에게 구체적이고 이질적인 체험공간과 체험된 지속이 존재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시간과 공간의 대립 즉 개념화한 기하적 공간과 직관적이고
    무매개적인 심리학적 지속의 대립은 약간은 인위적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생활세계는 기하학적 거리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나 이해관계에 의해서 정의된다.
    원시인에게 공간 구역은 그 공간 내에 점유하고 있는 사물들을 분리시키지 않는
    복잡한 전체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다라고 레엔하르트(Leenhardt)는 분석한다.

    어린아이에서 공간개념의 점진적 형성과정을 연구한 삐아제는
    어린아이에게 처음에는 공간 개념의 통일성이 없다가 나중에 공간개념을 통일하게 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체험된 공간에서 합리적 공간을 구성하듯이,
    시간의 경우에도 독자적 개성을 갖는 시간에서 출발하여 객관적인 개념을 구성하려 노력한다.

    b) 공간과 시간에 대한 합리적 개념 <과학적 개념은 발전한다.>
    유클리트의 동질적 3차원의 공간과 뉴튼의 절대적 시간은 과학이 생산한 결과물이다.
    마이켈슨(Michelson)과 모올리(Morley)의 실험은 빛의 상대속도를 부정한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뉴톤의 절대공간 개념을 부정하고
    공간과 시간은 물체의 운동에 밀접하게 의존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일반 상대성은 공간의 기하학적 특성과 중력장의 관계를 확립한다.
    아인슈타인의 개념의 성립은 과거개념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유클리트 공간개념과 뉴튼의 시간 개념을 수정되어야한다는 것이다.

    Resume
    공간과 시간의 공통점이라면 둘 다 선천적 틀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선험적(transcendantaux)라고 말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이 틀 속에서 이루어 진다.
    나는 상상에 의해서 방 속에 있는 모든 책이나 가구를 없앨 수 있다.
    그러나 상상에 의해서 조차도 나는 공간자체를 없앨 수 없다.
    공간은 모든 지각의 필수조건(condition sine qua non)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모든 사건의 시간을 비울 수 있다.
    나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시간 자체를 없앨 수 없다. 시간에게 "날기를 멈추어달라"고 간청하는 시인에게
     
    철학자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얼마 동안이나 시간은 날기를 멈출 것인가?"
     
    공간과 시간의 차이점이라면, 공간은 가역적이지만,
    (나는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갈 수 있고, 그 다음 B 지점에서 A지점으로 돌아 올 수 있다. 시간은 불가역적이다.
     이전과 이후는 일방통행이다.
    나는 태어난 시간으로부터 죽음으로 가고 있으며 되돌아 갈 수 없다.

    공간을 생각하기는 쉽다. 왜냐하면, 공간은 내 앞에 있는 대상이며
    내가 분할할 수도 있고 측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나는 자동차로 달려온 공간을 시간으로 측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속은 나의 존재와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인 듯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나는 현재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엄정하게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현재는 수학적인 한 순간일 뿐이고, 직전과 직후로 분해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두 개의 무로 분해되는 하나의 존재라고 말한다:
    존재했었던 무와 존재하게 될 무.

    그러나 시간은 내 전체를 싣고 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나는 많이 변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시간 속에 있는 변화를
    시간을 신비스럽게 지배하는 '주체'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내가 시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식은 내가 시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정성이다.
    (이것 비꼬는 것 절대 아님)
    최소한 말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열정은 더 대단했던 것같다.
     대체 이런 정성이 어디서 나온거야?
    참,,그때의 너는 부지런했구나!
     
    그래,,,그래,,,
    어리석으면 열심히 검색이라도 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지.
     
     
     
     
     
     
    저자 소개
    저 : 김용규 헤르메스 김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책은 철학과 인문학을 맛깔스럽게 버무려내어,
    현대인의 삶과 인문학이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지식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알도와 떠도는 사원』과 『다니』는 철학과 사회 사상, 과학지식, 진화론, 인류학 등
    다양한 지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이러한 소설은 그에게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그 외에도 독특하고 다양한 맛의 지식을 철학과 함께 버무려낸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
    문학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을 빌려 철학의 이해를 이끈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영화를 철학과 신학을 통해 해석한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십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데칼로그』,
    말과 글을 단련해 설득력을 키우는 도구로서의 논리학을 풀어낸
    『설득의 논리학』,자기계발 팩션『기적의 양피지 캅베드』등의 저서가 있다.
     
    목차
    신은 누구를 구원하는가?
     
     
    괴테의 《파우스트》 1부 - ‘자기 체념’에 대하여
     
    악마마저 이겨낸 남자
    괴테의 《파우스트》 2부 - ‘자기실현’에 대하여
     
    질풍노도를 잠재우는 법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 ‘성장’에 관하여
     
    관계의 미학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 ‘만남’의 의미
     
    사랑과 질투의 함수관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질투’에 관하여
     
    가족에 관한 냉혹한 진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가정’의 의미
     
    참을 수 없는 일상과의 결별
    사르트르의 《구토》 - ‘일상’에 대하여
     
    텅 빈 무대의 대본 없는 배우, 인간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 ‘권태’의 의미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반항’의 의미
     
    그 섬은 어디에 있을까?
    최인훈의 《광장》- ‘유토피아’에 대하여
     
    당신들의 유토피아, 우리들의 디스토피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디스토피아’에 대하여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인간공학’에 관하여
     
    빅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 ‘사회공학’에 관하여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회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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