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0회 나오키상 수상작품이자, [냉정과 열정사이]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집. 저자가 2003년에 쓴 단편 12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책은 저자 특유의 냉철함과 상처 입은 삶에 대한 쿨한 마이너리티 정서의 세련된 표현이 도드라진 작품이다.
슬픔을 통과할 때, 그 슬픔이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도 그 사람은 이미 울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하는 에쿠니 가오리는,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의 노력 과정을 이미 지나쳐 버리고 관계의 끝이라는 부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들을 이 단편집 곳곳에 그려놓았다. 현실의 본질적인 고독과 결핍,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랑에 갇힌 사람들이 슬픔으로 젖어들게 한다.
저자소개
저자 : 에쿠니 가오리 저자 에쿠니 가오리(Kaori Ekuni)는 1964년 동경에서 태어나 미국 델라웨어 대학을 졸업하고 1989년 『409래드클리프』로 페미나 상을 수상했다. 동화적 작품에서 연애소설, 에세이까지 폭넓은 집필 활동을 해나가면서 언제나 참신한 감각과 세련미를 겸비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1992)으로 무라사키시키부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나의 작은 새』(1998)로 로보우노이시 문학상을 받았고, 그 외 저서로 『제비꽃 설탕 절임』 『장미나무 비파나무 영 몽 나무』 『수박 향기』 『모모코』 『웨하스 의자』 등이 있다. 『냉정과 열정사이, Rosso』와 『반짝반짝 빛나는』 『호텔선인장』 『낙하하는 저녁』으로 이미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은 바 있는 에쿠니 가오리는 '여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작가로 불린다.
역자 : 김난주 역자 김난주는 1958년에 태어나 경희대학교에서 우리 문학을 공부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문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며 역서로는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사이, Rosso』와 『반짝반짝 빛나는』 『낙하하는 저녁』, 시게마츠 키요시의 『비타민F』 등 다수가 있다.
목차
전진, 또는 전진이라 여겨지는 것 - 9 뒤죽박죽 비스킷 - 25 열대야 - 41 담배 나누어 주는 여자 - 57 골 - 73 생쥐 마누라 - 91 요이치도 왔으면 좋았을 걸 - 107 주택가 - 125 그 어느 곳도 아닌 장소 - 141 손 - 159 울 준비는 되어 있다 - 173 잃다 - 191 작가 후기 - 208 역자 후기 - 210
책 속으로
"이렇게 같이 있잖아."
우리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라고 아키미가 눈으로 말한다. 당당하고 반듯하게.
내가 기뻐하며 웃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이렇게 같이 있잖아."
우리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라고 아키미가 눈으로 말한다. 당당하고 반듯하게.
내가 기뻐하며 웃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눈빛을 따라 웃고 만다.
─ 「열대야」 중에서
우리 한때는 서로 사랑했는데, 참 이상하지. 이제 아무 느낌도 없어."
시호가 말했다.
"당신, 그거 어떻게 생각해?"
─ 「골」 중에서
루이와 헤어진 지 반년이다. 상실감은 나츠메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표면적으로나마 아무 탈 없이 생활하는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루이와의 정사가 나츠메에게 남긴 것은 봇물이 쏟아진 듯 무수한 기억이었다. 자신이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한때의, 사랑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인생을 꾸려 나갔던 한때의, 본질적인 기억이었다.
그러나, 정사는 끝나고 말았다. 더구나 나츠메가 그것을 끝내기 전에, 모든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나는 혼자 사는 여자처럼 자유롭고, 결혼한 여자처럼 고독하다.
─ 「요이치도 왔으면 좋았을걸」 중에서
모든 것이 내 마음 같지 않다.
조심하고 주의하고, 그래봐야 어리석은 짓이다.
당연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면 주의 따위 내던지고, 흥분하고 들떠서 영원이니 운명이니 이 세상에 없는 온갖 것을 믿으면서 당장에 동거든 결혼이든 임신이든 해버리는 것이 좋다.
─ 「손」 중에서
나는 다카시의 친절함을 저주하고
성실함을 저주하고 아름다움을 저주하고
특별함을 저주하고 약함과 강함을 저주했다.
그리고 다카시를 정말 사랑하는
나 자신의 약함과 강함을 그 백 배는 저주했다.
─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중에서
■농후한 연애와 절망,그리고 에쿠니식 회복에 대해 따뜻하게, 때로는 신랄하게 하나하나 손을 놓지 않고 표현한 단편집.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별이란, 그 동기가 사랑에 있든 우정에 있든, 그 깊이가 설혹 차이가 나더라도 누구에게나 아쉬움과 슬픔을 안겨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인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며 조급한 심정으로 상대방을 구속하고, 친구와 멀어질까봐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이번에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은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의 노력과정을 이미 지나쳐버리고 관계의 끝이라는 부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들을 백지 위에 그려놓았다. 전체적 구도는 서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엮였던 인연의 줄이 어느 순간 이유없이 뚝 끊겨버리거나 오랫동안 쥐가 갉아먹은 듯 어느새 느슨해진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는 마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하고 물었던 '봄날은 간다'식의 물음표를 주인공들이 던진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미 그 질문이 단절이란 상황의 재확인일 뿐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은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끊임없이 남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는 감당치 못할 슬픔이기 때문이다. 절망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공감하는 우리도 결국은 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잃음에 대한 두려움이 시작된 아주 처음부터....
이제 그 슬픔을 넘어가즌 실마리를 찾아야 할 때임을 씁쓸하게, 받아들여 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다카시의 친절함을 저주하고 성실함을 저주하고 아름다움을 저주하고 특별함을 저주하고 약함과 강함을 저주했다. 그리고 다카시를 정말 사랑하는 나 자신의 약함과 강함을 그 백 배는 저주했다. 저주하면서, 그러나 아직은 어린 나츠키가 언젠가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한다면, 더 강해 주기를 기도했다. 여행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한껏 사랑받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기를 기도했다. (p.189)
김수미 님 2011.03.05
조심하고 주의하고, 그래보야 어리석은 짓이다. 당연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면 조심 따위 내던지고, 흥분하고 들떠서 영원이니 운명이니 이 세상에 없는 온갖 것을 믿으면서 당장에 동거든 결혼이든 임신이든 해버리는 것이 좋다. (p.162)
*미요코의 부모님은 둘 다 이미 이 세상에 없다. 그 시절 이 백화점의 엘리베이터는 문이 이중이었다. 쇠로 된 주름식, 손님이 타면 유니폼을 입은 담당 직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서 그 문을 닫았다. 철컥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그 문이 미요코는 늘 겁났다. 하지만 미요코의 양 옆에는 부모님이 서 있었다. 양쪽에서 두 손을 꼭 잡고, 그래서 미요코는 안심하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구조는 달라졌지만 나는 그 시절처럼 아들과 딸의 손을 꼭 잡아주었는데, 그때의 기억보다 부모님과의 기억이 한결 선명하다. 보호한 기억은 늘 윤곽이 애매하고, 보호받았던 기억만이 가슴을 파고든다. 미요코 자신조차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다.
*도테라 : 기모노보다 길고 넉넉한 솜옷. 겨울용
*여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까닭은 우선 속옷 때문이었다. 다케시는 그때까지, 서랍 속 속옷을 차례대로, 마리코가 개서 넣은 대로 차례차례 꺼내 입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비교적 새 것을 골라 입는 날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요일이 많은 듯 했다. 그 다음은 볼펜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자 못 보던 볼펜을 쓰기 시작했고, 마리코의 의심은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설마 그렇게 무방비하지는 않을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휴대폰을 조사해 보니, 코맹맹이 소리로 녹음된 짧은 메시지가 두 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장소는 시리아였지만 상대는 일본 사람이었다고 한다. 직물을 수입하는 개인 사업자에 시리아를 무척 좋아하는 40대 독신–거짓말이겠지만,이라고 다츠코는 말했다-남자. 지난 반년 동안 나는 비 새는 천장과 불성실한 연인과 연인의 동생의 프로포즈와 아들의 건전한 성장과 어머니에게서 걸려오는 긴 전화와 잡다한 일상의 문제로 우왕좌왕했는데, 다츠코는 시리아에서 일하고 일이 끝나면 밤마다 개인 사업자를 만나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요상한 가게에서 물파이프란 것을 피우고 호텔에서 애욕에 빠졌다고 한다.
*나는 인심이라도 베풀 듯 묻는 것에만 짤막짤막하게 대답했다. 플로리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 긴 머리의 남자, 나는 스물 둘이었고, 상대는 스물아홈. 일본 사람. 그것은 전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말로 하는 순간, 네 사람이 둘러싸고 있는 테이블 위에 현실과는 전혀 다른 낭만적인 사건으로 되살아났다. 그 여행이 볼품없게도 디즈니랜드를 노린 졸업 여행이었고, 큰 키에 호리호리한 스물아홉 살의 남자가 지금은 호리호리하지도 않고 스물아홉 살도 아니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고, 내가 낳은 아이에게는 양육비조차 아까워 못 주는 그런 일들은, 내가 얘기한 여행지에서의 사랑과는 전혀 무관하고 하잘 것 없는 것이란 기분이 들었다. 어이없게도.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이 초등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정말 슬픈 일이었지만, 어머니를 묻고 나자 나는 이제 자유, 란 느낌이 들었다. 자유란, 더 잃을 것이 없는 고독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나는 소설을 쓴다. 소설을 쓰기 전에는 직업이 없었다. 대학을 중퇴한 지 십여 년, 나는 여행과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살았다. 틈틈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고, 합의하에 헤어지고, 합의 없이 어느 한쪽이 사라지고, 물도 안 나오는 냄새 나는 방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고, 그 방에서도 쫒겨나 밤 새워 거리를 헤맨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얻어맞은 일도 패댄 일도 있다. 자격증 하나 없으면서 짧은 기간에 뒤탈 없이 돈을 버는 데는 육체 노동이 좋은 방법이었다. 하기야 그 분야에서는 남녀의 능력차가 심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육체 노동은 웨이트리스나 공사 현장에서 교통 정리를 하거나 중국 음식점에서 이리저리 배달을 다니거나, 그 정도였지만.
*우리는 어제 이곳에 왔다. 도쿄에서 떠날 때는 눈이 부시도록 화창해서 하늘까지 우리의 앞길-여행이 아니라 앞으로의 인생-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열차는 비어 있고, 우리는 네 자리를 차지하고 마주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껍질째 매콤달콤하게 구운 새우와 쫀득쫀득하게 조린 삼치. 그런 도시락을 사 먹는다는 자체가 우리가 행복하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