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작가 박완서의 5년만의 신작 산문집. 95년부터 올해 6월까지 쓴 23편의 산문을 모두 4부로 엮었다. 강한 개성과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물질만능과 속도에 눈먼 세태를 날카롭게 꼬집고 인간정신의 본향을 일깨우는 맛깔스런 산문들은 노년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 아차산에서 본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에 대한 아름다운 깨달음, 박완서 문학의 발원지인 개성 박적골 이야기, 박수근, 이영학 등 저자가 가까이서 지켜본 문인과 예술가의 고뇌와 삶의 자세 등등의 다양한 소재 속에 연륜이 더해진 지혜의 눈길로 동시대 모든 이들에게 소박한 감동을 건네고 있다.
저자소개
목차
1. 노년의 자유 ... 11 가족 / 두부 / 옛날 / ... / 구형예찬
2. 아치울 통신 ... 95 흔들리지 않는 전체 / 트럭 아저씨 / 봄의 환 / ... / 아치울 통신
3. 이야기의 고향 ... 159 개성사람 이야기 / 내 안의 언어사대주의 엿보기
4. 사로잡힌 영혼 ... 207 사로잡힌 영혼 / 그는 그 잔혹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나 / 모두모두 새가 되었네
작가 박완서의 신작 에쎄이집 {두부}는 멀게는 1995년부터 올 2002년 6월까지 써온 23편의 산문을 모두 4부로 엮었다. 강한 개성과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물질만능과 속도에 눈먼 세태를 날카롭게 꼬집으면서 인간정신의 본향(本鄕)을 일깨워온 그는 맛깔스런 산문들을 생산하는 몇 안되는 산문가이기도 하다. {어른노릇 사람노릇} 이후 5년 만인 이번 산문집의 주조는 제2부 '아치울 통신'에 묶인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과 생활의 아름다움이라고 하겠지만, 생활 주변의 세부 정경을 잡아 때로 꼬집고 때로 감싸안는 사색의 깊이와 예리함 또한 여전하다.
제1부 '노년의 자유'에는 저자의 나이든 고모부와의 유구한 가족사를 소재로 우리 시대의 가족이 가진 남다른 의미를 풀어낸 [가족], 전두환 전대통령의 퇴임후 행적과 그의 재위기간, 우리 사회의 뒷모습을 읽어낸 표제작 [두부], 저자가 꿈꿔온 귀향의 참모습을 그린 [옛날], 지병(持病)과 더불어 맞이한 노년과 사라져가는 것들의 애잔함을 그려낸 [노년], 안마당에 복원한 어린 시절의 정원을 보며 생명의 한계와 노경의 즐거움을 동시에 사색하는 [마음붙일 곳], 월드컵 기간의 에피쏘드를 곁들여 평등한 지구촌의 의미를 발견하는 [구형(球型) 예찬] 등이 묶여 있다.
제2부 '아치울 통신'은 아차산자락에 거처를 마련한 저자가 날마다 대하는 산과 사람, 꽃, 새, 나비 등을 소재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에 대한 아름다운 깨달음을 그린, 이번 산문집의 백미이다. 섬세한 눈길과 깊은 사색은 앞마당 살구나무의 한살이에서 자연에의 순명(順命)을 보고, 기르던 금붕어와 개의 죽음에서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반성하며 산자락에 지는 노을의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일깨운다.
제3부 '이야기의 고향'은 박완서 문학의 발원지인 개성 박적골과 그곳 사람들을 재현한 [개성사람 이야기]에서부터 소설가로서의 반생 내내 되물어온 '왜 쓰는가'와 '나의 문학은 무엇인가'에 답하는 글들이다. [내 안의 언어사대주의 엿보기]에는 식민지와 분단 시대를 헤쳐온 작가로서 모국어에 대한 저자의 사랑과 존중이 흠뻑 묻어난다.
제4부의 글들은 김윤식·박수근·이영학 등 저자가 가까이서 지켜봐온 문인과 예술가를 다루면서 진정한 예술가의 고뇌와 삶의 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연륜이 더해진 지혜의 눈길로 동시대 모든 이들에게 소박한 감동을 건네는 산문집이다.
수필 모음집이다. '두부'는 그중 하나의 제목이고.
다른 제목의 수필 모음집에서 이미 읽었던 단편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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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모음집이다. '두부'는 그중 하나의 제목이고.
다른 제목의 수필 모음집에서 이미 읽었던 단편도 보인다.
[발췌]
*히딩크가 승리에 굶주렸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동안 정치가의 페어플레이에 굶주렸다. 오죽해야 차범근이 히바우두가 결승전에서 첫골을 터뜨렸을 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한 말, 스타는 가만히 있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폭풍처럼 상대방의 조직을 한꺼번에 허물어버리고 경기를 활기 넘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한다는 찬탄을 빌려다가 우리도 어디서 새로운 정치지도자가 혜성처럼 나타나지 않는 한 차곡차곡 누적된 부정과 부패의 관행을 새로운 국면으로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고 비관하는 소리까지 나왔겠는가.
*언젠가는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에 시달릴 때나, 정말로 글을 쓰게 되고 나서나,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버릇은 여전했다. 살아 있는 동안 글을 못 쓰게 되는 게 더 괴로울까, 남의 글을 못 읽게 되는 게 더 괴로울까. 자문해본 적이 있는데 대답은 늘 후자 쪽이다. 몸을 비스듬히 될 수 있는 대로 편안하게 하고, 재미있는 책에 푹 빠져들기도 하고 왜 썼는지 모르겠는 재미없는 책은 휙 던져버리기도 하는 맛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지루할까. 지금은 순전히 재미있으려고 하는 독서지만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을 전후해서는 내 글도 과연 활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도 남의 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은 어떻게 쓰나 또 나라 밖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를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공부삼아 한 독서였다.
*내가 말문이 열리고 또 어느만큼은 뻔뻔스러워지기도 해서 엉터리 영어로나마 미군들과 된소리 안된소리 수작을 걸 수 있게 되어 차츰 그림주문이 늘어나자 나는 화가들에게 방자하게 굴기 시작했다. 내 덕에 그들이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는 교만한 마음과, 양갓집 처녀에다 서울대학생인 내가 기껏 간판장이들이나 먹여살리려고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자기모멸이 뒤범벅이 되어 얼마나 싸가지없이 굴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우습게 알고 함부로 대한 간판장이들 중에 진짜 화가가 있었다는 건 나에겐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몸시 부끄러웠고, 그동안 열중해 있던 불행감에서 깨어나 정신이 드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의 능멸을 말없이 견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내가 막돼가는 모습을 그가 얼마나 연민에 찬 시선으로 지켜보아주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박완서에 대한 첫 기억은 중학교 때, 마트에서(서점이 아니라 마트였다 분명) 박완서의 책을 집어든 엄마가 ...
박완서에 대한 첫 기억은 중학교 때, 마트에서(서점이 아니라 마트였다 분명) 박완서의 책을 집어든 엄마가 "참 글 잘쓰는 작가야."라고 말 했던 것.
그 때 집으로 사 온 책은 '오래된 농담'이었다. 어린 내가 읽기에는 요상했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단숨에 빨려들 듯 읽었지만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바람을 피우는 주인공, 이혼하고도 생명력이 넘치게 요요하게 살아가는 여인, 여성생활의 부조리 등등... 어리니까 이해못하는 깊이였다.
그렇지만 박완서라는 이름은 머릿속에 깊게 남았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게 마련인데,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작가라니.
엄마는 박완서 책을 볼 때 마다 옳지, 하며 사주셨다. 그래서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도 읽었고 MBC 인기프로그램이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서 선정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도 읽었다. 싱아를 읽으면서 비로소 눈에 하트를 달기 시작했던 것 같아. 완전완전 재밌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싱아의 후속작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은 건 고등학생 때 였다. 그 땐 이미 싱아도 두 번 읽었다. 국어 교과서엔 '그 여자네 집'이 나와서 마음을 소복하게 적셨고, 우리학교에서 쓰던 문학교과서엔 박완서의 등단작인 '나목'이 실렸다. 나목을 공부할 때 절로 신나서 국어 선생님 말씀을 눈에 불 켜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무엇보다도 박완서가 해 주는 옛날얘기에 쏙 빠져 버렸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이지만 나에게도 지워지지 않을 6.25 이야기도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한 건 개성 이야기다. 박적골에서 살던 어린 박완서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분단이 되어 그 곳에 더는 가 볼 수도 없고, 분단이 되지 않았다 해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기 때문에 더 절절하게 재미있었는지도 몰라.
박완서가 마흔이 넘어 등단했다는 이야기는 엄마에게 들었다. 박완서가 꽤 나이가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6.25를 겪었다면 우리 할머니와 비슷한 연배임이 분명한데도 나는 박완서가 조금 젋다고 생각했다. 왜 그럴까나 생각해 보니까 그가 쓴 글에서 뿜어져 나오던 엄청난 생명력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 아주 꼬꼬마였을 때 조금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 초딩때 꿈은 거창하게도 선생님 + 동화작가 + 시인 또는 소설가 였다ㅋㅋㅋ 지금은 요 모양 요 꼴이지만, 이래뵈도 꼬마때는 문학어린이였거든ㅋ 책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었거든.
그런데 커 가면서 깨달은 건, 가슴에 아픔을 품고 사는 사람이여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픔과 응어리가 없다면 글을 쓸 수 없다. 어릴적, 행복한 작가가 되어 행복한 글을 쓸 수는 없을까 많이 고민했다. 그렇지만 슬픈 사람이 글을 쓰는 것 보다 행복한 사람이 글을 쓰는 게 훨씬 어려울 것 같았다. 마음 따뜻하고 행복한 글 조차도 아픈 일들을 감동적으로 바꿔 쓰는 거니까 말야. 난 그 아픔을 다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박완서 자신도 이렇게 말한다.
땅속으로 파고들지 못한 씨는 봄이 와도 싹트지 못할 것이다. 고독의 밑바닥을 치지 않고는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그건 슬픈 일이다. 글쓰는 일에 사로잡히게 될까봐 점점 더 몸을 사리게 되는 것도 그 고독하고 처절한 암중모색을 견딜 만한 힘이 나에게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남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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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이지만 힘이 넘치는 글을 쓰는 작가의 변.
두부를 읽으면서 박완서가 얼마나 늙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나 자신과는 별개라는 것, 그래서 나이가 들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나이다. 일을 하거나 음식을 먹어도 몸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나이이다. 도시를 버리고 시골로, 자연으로 다시 가고 싶고 고향생각에 언제나 사로잡혀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실향민'의 모습이다. 손자들이 장성한 할머니다.
그녀에게 얼마나 아픔이 많았을지 다시금 깨달았다. 6.25와 그 후의 처참한 이념싸움(어느 한국문학에서나 참 가슴 찢어지게 그려지는)을 직접 겪었을 뿐 아니라 남편과 아들을 앞서 보냈다. 이 모든 것들이 잊혀지지 않고 놓여지지 않아 글을 썼다고 말하는 작가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작가의 숙명은 왜 그런 것일까?
또한, 박완서가 얼마나 빛나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많아도 누구보다 빛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박사학위 따면서 공부하고 거들먹거리는 그런 공부를 하지 않았을텐데도 그는 세상을 꿰뚫어 않다.
여기 수록된 산문 중에서 박완서의 통찰력이 가장 빛나는 글은 '구형예찬'이다. 2002년 월드컵 이후에 쓴 글이다. 여기 박완서가 스포츠가 인간을 끓어오르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쓴 부분이 있는데, 그건 내가 지난 학기에 스포츠사회학에서 줄창 배웠던 부분이었다. 학자가 아니지만 학자보다도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어놓았다. 조금 감동했다.
계속 읽어나가다보니 축구에서 정치로, 정치에서 지구로 연결되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수필은 무형식이 형식이다'라는 말이 떠오르면서, 축구가 정치가 되고 정치가 지구에 대한 사랑이 되는 어떻게보면 혼란스러울수도 억지스러울수도 있는 흐름에 감탄하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로 관통시킨 것은 작가의 능력일 것이다. 외경심을 가지며 묘한 기분으로 책장을 잠시 덮었던 기억이 난다.
구형예찬도 재미있었으나 역시 나에게 가장 재미있던 것은 '개성사람 이야기'였다.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던 옛날 얘기에 사로잡혀 지내던 박완서와 같이, 나도 옛날얘기들을 무진장 좋아하나보다. 나에게 할머니 뻘인 늙은 작가가 해주는 옛날 이야기는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할머니 무릎에 누워 옛날 얘기를 조르던 시절이 떠오른다.
지금 내 세대에선 개성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지도 않는다. 태어나기 전 부터 나라는 분단되어 있었으니 개성사람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그러나 박완서가 어릴 때만 해도 서울 사람들이 개성사람을 짜다고 욕했다고 한다. 돈 계산에 밝고 확실한 모습이 야박해 보였나봐.
개성사람들은 돈을 나눌 때 우수리가 생기면 성냥 한 갑을 사서 나눠가질 정도로 확실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돈을 꿔줄 때는 정말 믿는 사람에게 받을 생각 없이 꿔주는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타지사람들은 개성사람들이 이렇듯 셈에 철저한 걸 인색한 것과 동일시하는 것 같은데 그건 절대로 아니다. 개성사람이 인색하다면 아마 그건 자신에게 대해서일 것이다. 자신에겐 박하고 남에겐 후한 거야말로 개성 인심의 진수이다. 후하다는 건 덮어놓고 뭘 많이 준다는 게 아니라 일단 도와줄 만해서 도와주면 그만이지 그걸 갖고 질질 끌며 생색을 내지 않는 깔끔함을 말한다. (중략) 타지사람들이 개성사람을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날 지독한 사람으로 여기는 게, 자신을 위해 아끼고, 베풀 만한 사람에게는 베풀되 나중에 그걸 가지고 절대로 떠벌리지 않는 결곡한 정신 때문이라면 흉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개성에는 소문난 몇몇 부잣집이 있는데 그들이 일제 때 소리소문없이 해외에 독립자금을 댄 건 개성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일제 때야 소리소문없이 할 수밖에 없었다 쳐도 해방후에는 그걸로 애국자연할 수도 있었으련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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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하면서도 집 안 만은 광이 나도록 닦고, 노는 땅을 보면 그 자리에서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그러면서도 음식은 맛깔나게 해 먹었던 개성사람들. 참 멋쟁이가 아닌가!
작가 자신도 말하지만, 공산주의하에서 지금 개성사람들은 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개성사람을 보고 싶구나. '그 시대'를 직접 살아본 노인들의 증언을 들을 때야말로 갈라진 채로 살고 있다는 게 극도로 안타까워진다.
이 외에도 아치울마을 이야기들도 재미있었고, 언어사대주의에 대한 글, 글을 쓰는 작가의 숙명에 대한 글도 즐거이 읽었다.
산문집을 찾아 읽는 건 여러 책 고루 읽기 운동(내 마음대로 운동ㅋ)의 일환인데 실은 산문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도서관 저 쪽 끝에 모여있는 산문집 코너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 권 빼서 읽는데, 거의 대부분 읽다가 후회하고 중간에 포기해버린다.
그런데 박완서의 이 책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다른 산문집도 찾아 읽어봐야겠다. 산문도 소설보다 더 재미있을 수 있구나! 수필의 매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나 보다.
박완서 할머니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31년생인 작가에게 박완서 작가라고 하기도, 박완서씨라고 하긴 더욱 더 곤란하다. 그래서 이런 독후감을 적을 때는 마치 내가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박완서 할머니라는 호칭을 쓰곤 한다.
인터넷 서점으로 주문을 했기 때문에, 그저 작가가 "박완서" 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단편소설집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도착한 책을 보니 단편소설이 아니라 가벼운 산문집이었다.
그러나, 산문집이 가볍다는 것 역시 또 하나의 편견이 아니었던가..
박완서 할머니의 책을 처음 만난 것은 몇년도인지 기억나지 않는, 옛 이상문학상 수상집에서 "엄마의 말뚝"이라는 단편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장편소설은 쉽게 읽지 못하는 게으른 성격탓에, 대표작 나목은 읽지 못하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와 "아주 오래된 농담",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읽었다.
작가는, 마흔이 넘어서 작품을 시작했고, 그래서 박완서할머니의 소설은 내가 미처 닿지 못한 세월들을 쓰다듬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주로 50대, 그리고 60대가 되기도 하고, 또 어린 시절 작가의 영혼이 투영되기도 한다.
이제 70대가 된 박완서할머니의 산문은, 지난 몇년동안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글을 모은 책인데,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나이의 배어있는 오래된 삶의 흔적들과 작가의 인생을 꿰뚫는 통찰력, 그리고 겸손함이 곳곳에 가득하고, 이제는 세상을 접을 때가 되었고, 또 잘 정리하고 싶다는 작가의 의연한 세월이 배어있다.
산문집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 선사했던 성숙한 작가의 산문이라면, 마치 할머니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해서 천천히 쉬어가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