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이후 격동했던 한국사회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배경으로 젊은 두 남녀의 파란 많은 삶과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가 황석영의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상 권. 작가의 방북사건 이후의 독일 체류와 귀국 후 옥중생활 속에서 구상된 이 작품은 일간지에 연재되기도 하였다.
70년대 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항쟁 이후 수배가 되자 기약없는 도피생활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은거를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갈뫼의 외딴 마을에 있는 '오래된 정원'에서 3개월 동안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과 모여 투쟁의 길로 나서는 과정에서 검거되고 만다. 18년의 옥중 생활을 마치고 나온 그는 한윤희를 찾아가지만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소설은 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혁을 꿈꾸고 투쟁해왔던 이들의 삶과 사랑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자가 특유의 세련되고 힘있는 문장이 돋보인다. 일반적인 서사구조를 바탕으로, 회상과 편지글, 비망록과 기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두 주인공 오현우와 한윤희의 삶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며, 교차적 서술방식을 사용해 주인공의 심리와 애틋한 사랑을 보다 섬세하고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 : 이 책은 지진희ㆍ염정아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영화는 2007년 1월 개봉예정이다.
80년대 이후 격동했던 한국사회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배경으로 젊은 두 남녀의 파란많은 삶과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작가가 『무기의 그늘』(1988) 이후 12년 만에 내놓는 역작으로서 그 미학적 성취와 튼실한 사회성을 통해 한국 소설문학의 새 자산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작품은 기본 서사구조에서 회상과 편지글, 비망록과 기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두 주인공 오현우와 한윤희의 교차적 서술방식을 통해 박진감 넘치면서도 서정적으로 전개된다.
70년대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항쟁 이후 수배가 되자 기약없는 도피생활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은거를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갈뫼의 외딴 마을에서 3개월여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로 나서는 과정에서 검거되고 만다. 그는 지하조직의 수괴로 몰려 무기형을 선고받고 18년이란 오랜 세월을 장기수로 지내며 옥중의 투쟁을 거듭하는 한편 신산한 여러 인생사와 맞물리며 내면적으로 성숙해간다.
만기출옥 이후 전해진 한윤희의 편지를 통해서 오현우는 그녀가 불치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다. 오현우는 한윤희에 대한 추억을 찾아 과거에 둘이 함께 지냈던 갈뫼의 `오래된 정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한윤희가 남긴 기록을 통해 험난했던 80년대 이후를 뜨겁게 살아온 그녀의 삶과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오래된 정원`은 한편으로는 오현우와 한윤희가 달콤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지냈던 갈뫼의 시골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혁명가들의 이상향인 동시에 남성 위주의 물량적 혁명주의 대신 모성의 따뜻한 인간애가 넘치는 새로운 가치가 잉태 발현하는 모태이기도 하다. 오현우가 이곳에 내려와 자기 반평생의 역정을 돌아보며 새출발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은 한윤희의 자취를 더듬는 과정에서 이러한 새로운 각성을 얻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혁을 꿈꾸고 투쟁해왔던 이들의 삶과 사랑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황석영 특유의 세련되고 힘있는 문장이 뿜어내는 재미를 갖추고 있다. 특히 헌신적인 운동가들의 정서 심층에 잠재된 사랑의 음영, 계절과 시각에 따른 자연풍광의 미묘한 변화를 이처럼 절묘하게 포착한 소설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며,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는 감옥생활이나 한윤희가 독일 유학중에 체험하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대한 묘사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살아 있다. 진중하고도 묵직한 주제를 깔면서도 세월을 뛰어넘는 두 남녀의 애절하고 순수한 사랑이 잘 그려진 이 작품은 거대한 역사의 물결을 헤엄쳐가는 가냘픈 개인의 눈을 통해 시대의 영광과 상처를 조명함으로써 앞으로 새롭게 전개될 황석영 문학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준다.
이 작품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 시대를 헤쳐온 작가 황석영이 다양한 기법과 섬세한 문체로 작성한 지난 20년간의 문학적 연대기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북한방문과 해외망명 등을 통해 더욱 넓어진 시야와 옥중생활 동안 예민하게 다듬어진 감각,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사색적 깊이가 녹아들어 있다. 「객지」「삼포 가는 길」「한씨연대기」『장길산』『무기의 그늘』에서 맛본 감동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잊어서는 안될 한 시대의 진실을 작가 황석영의 녹슬지 않은 솜씨와 함께 만나는 보람은 한층 각별하다.
세상은 어디서나 살아가기란 모두들 힘이 들고 팍팍하답니다. 하지만 지내 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래도 즐거운 날도 있었고 여기까지 용케 왔구나 싶지요.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보아도 이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오희정 님 2007.04.11
너의 길을 걸어라. 세상이 어떻게 떠들든지......
오희정 님 2007.04.11
헌데 참, 사람의 관계란 쓸쓸한 일이죠. 유행가에도 늘 등장하지만 두 사람이 지니고 있던 온갖 감정과 느낌의 배경이 젖혀지고 나면 세상 속에 그들의 삶의 알몸이 드러나버리거든요. 종이인형에 갈아입힐 의상을 제 마음대로 색칠하고 디자인하고 가위로 오려내어 상자갑 안에 차곡차곡 쟁여두고는 하지요. 얼굴과 몸집만을 내놓고 그것들을 차례로 입혀보고 다시 벗기고. 그러고 시간이 지나 오랜 뒤에 그 상자를 열어보면 예전에 그린 색깔과 디자인은 초라하게 변해 있죠.
격동의 80년대에 벌어진 운동권 핵심인물의 여정을 통해 치열한 삶 속에 스며있는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준 섬세한 ...
격동의 80년대에 벌어진 운동권 핵심인물의 여정을 통해 치열한 삶 속에 스며있는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준 섬세한 소설이다. 격렬했던 80년대의 민주화 투쟁과 그 이면에 널부러진 끔찍한 고통, 번민을 통해 오현우와 한윤희라는 인간을 만나면 더불어 숙명적인 좌절과 수감, 이별을 맛볼 수 있다. 물론 은결이라는 희망적이고 재생적인 이미지가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2000년 5월의 어느 날, “한씨연대기”의 저자인 황석영 선생의 문학강연회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바로 “오래된 정원”의 출간기념으로 독자와의 만남 시간을 가진다는 소식이었는데……. 선생을 만나기 위해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달려갔던 그 시절이 지금은 아련하다. 지난 시절에 있었던 투쟁과 도피의 기억에 대해, 그리고 이 작품과 연관된 얘기들을 나지막한 어투로 말씀하시던 선생의 모습이 흐릿하게 기억난다. 하긴 열렬한 지지자의 돌발적인 구호 때문에 후반부가 생경해지긴 했지만…….
저자사인까지 받은 이 책을 이제야 읽게 된 것은 그 동안 업무와 다른 분야의 관심이 겹쳐 책 읽을 시간마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작가든 다 마찬가지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한쪽으로 향한 강렬함은 어느덧 누그러지고 한발짝 뒤로 물러서 평온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이 작품도 열렬한 활동가의 관점으로 본 게 아니라 그 활동가를 사랑한 여성의 시점으로 바라봤다는 것이 애틋한 이별의 순간까지 겹쳐 뭉클한 장면으로 남았다.
80년대의 격렬함, 90년대 베를린과 소비에트의 몰락 속에서 우연한 만남과 속절없는 남녀의 사랑은 시대의 아픔과 새로운 생명의 희망을 확인시켜준다. 이 책은 남녀 간의 섬세하고 풍부한 연애의 프리즘을 통해 다른 시선, 다른 각도로 시대의 아픔을 형상화 시켰다는 것이 강점일 것이다.
[발췌]
*차부: 버스정류장의 시골식 이름.
*화가의 재능이란 하나두 믿을 게 못 돼요. 무수...
[발췌]
*차부: 버스정류장의 시골식 이름.
*화가의 재능이란 하나두 믿을 게 못 돼요. 무수한 재능의 시체 가운데서 우연히 남은 거에요. 이런 시골학교에 와보면 대번에 알 수 있어요. 정말 깜짝 놀라도록 훌륭한 소질을 가진 애들이 한둘씩은 있으니까.
*먼 세상을 지나 여기 다시 돌아왔지만 갈뫼는 사라졌다. 집을 고치기로 작정하다. 선반 위에서 나의 옛 편지를 발견하고 오랫동안 다시 읽었다. 유치하고 꿈도 많기도 해라. 아궁이에 쑤셔넣으려다가 다시 간직하기로 한다. 그들 두 남녀는 스쳐서 지나간 계절풍처럼 오늘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여기에 오던 밤에 나는 뺑끼통 위에 올라서서 먼 어둠속 허공에 몇점씩 빛나는 별을 보았소. 별인 줄 알았다가 산동네 가난한 창에서 보내는 불빛임을 이튿날에사 알아보았소. 초저녁에는 산허리에 불빛이 가득하더니 밤이 깊고 새벽이 가까울수록 한점 두점 사라져 저만 큼 하나, 다시 저어만큼 하나씩. 그제사 창이 다시 별이 되는 연유를 새겨봅니다. 잠들지 못한 마음 별이 되는 지금, 내 것도 저기서는 별이 되겠지요.
*어째서 당신 말대로 고전적인 활동가들에게서는 폐병쟁이나 문학 퇴물 비슷한 냄새가 나는 걸까요. 이를테면 실무적으로 엔지니어 비슷해 보인다거나 무슨 전문가나 의사 비슷해 보이면 안되는지. 아, 미안해요. 당신을 비아냥거릴 뜻은 없었어요. 그렇듯 당신에게서 친밀감을 느꼈다는 표현이지요.
*읍내에 나가서 여러가지 취사도구도 사오고 장을 보아 와서 우리가 마주앉아 밥을 먹던 기억이 나는군요. 당신과 살로 친해지지 않고 어떻게 아버지의 얘기를 할 수가 있겠어요. 학생 때에 어느 친구가 해주던 말이 생각나요. 남자와 함부로 밥 같이 먹지 마라. 둘이서 밥먹으면 정 생긴다구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려서는 아버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커서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군사독재에 대하여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은 나의 자책이었을까. 나는 닥치는 대로 그 방면의 책들만 읽었죠. 그런데 어느날 당신이 나타난 거에요.
*우리 외에도 그런 동아리들은 수없이 많았다. 제일 먼저는 심야에 광주 미문화원의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들어내고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른 농민운동 현장 친구들이 있었고. 나중에 부산 미문화원을 항의 방화한 현상이는 그때 서울과 영남 지역에서 끈질긴 피작업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모두들 광주에서의 무자비한 양민학살을 보고 들었고 그것이 불의 시대였던 팔십년대의 시작이었다. 이전처럼 어중간한 생각이나 행태로는 막강한 폭력을 이겨낼 수가 없고 민중에 의한 권력의 장악은 한 세대가 지나도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모두들 혁명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노동대중의 힘에 대하여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혁명의 전위를 키워가기 위한 사상학습으로 치달았다. 급진적인 경향은 절망과 치욕감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바람에 불려 대기가 젖는다. 내가 봄비라고 이름짓는다.
*봄비, 그러나 감자밭을 적시기엔 아직 적다.
*꾀꼬리가 일본에선 호오호께꾜라구 한다지요. 가만히 들어보면 꾀꼬리는 꾀꼴 꾀꼴 하고 울지 않아요. 정말 호오 호께꾜라고 울더라니까. 무슨 기적처럼 진노랑색 손수건 같은 것이 비 그친 뒤의 숲 사이에서 펄렁 하면서 휘날려가는 거 있죠. 호오 하면서 조금 망설이는 듯이 끌었다가 호께의 께에서 옥타브가 맑게 올라가요.
*우리야 뭐 잘 지내구 있어. 실은 나 이번에 미국 가기루 했어요. 거긴 가서 뭘 할라구 그래. 결국은 배가 좀 부른 종노릇일 텐데.
*이념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니? 부자들이나 독재자에게도. 나는 다만 자유라든가 사람의 기본권이라든가 생존의 존엄성 등등을 존중하는 세상이었으면 해.
*방금 떨리던 나뭇가지의 여운은 날고 있는 새의 가슴속에 있다. 산 위에 서 있는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만 떨어져간 나뭇잎들엔 깃이 닿은 온기가 남아 있다.
*공권력은 나를 너무도 잘 다룬다. 그들은 시간의 덧없음을 알고 있다. 일제 때부터 해왔던 행형술은 그동안 전쟁과 정권교체와 세월의 변화를 통해서 수많은 경험을 쌓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카드가 있었다. 나는 예전에 읽었던 책의 자세한 내용들은 모두 까먹었다. 그리고 큰 선에서의 원칙들만 남게 되었다.
"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오래된 정원>, 하 308p
소설의 마지막에 당도해서 작가는 묻는다. 오래된 정원을 찾았느냐고? 소설의 제목이 가진 의미를 곱씹으며 소설을 읽었다. 그러나 명확히 그 `오래된 정원'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상 징하는 것인지 명확히 답할수는 없다. 단지 어림짐작으로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유토피아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냥 그려놓고 동경하는 곳이 유토피아가 아닌가. 그곳은 사람들이 가진 희망의 지향점이다. 도달할 순 없겠지만, 동경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다. 현실이 척박할수록.
황석영은 장편 소설 <장길산>, <무기의 그늘>이후, 15년만에 새롭게 이 작품을 세상에 내 놓 았다. 15년이란 세월동안 작가는 80년의 광주 이후의 풍경, 6.29 선언 이후의 한국의 민주화 과정,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구권의 사회주의 해체, 89년 방북과 오랜 감금, 그리고 9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의 거품과 파산을 지켜보았다. 황석영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은 `경험'을 바 탕으로 소설을 쓴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15년간의 체험이후 발표된 소설 <오래된 정원>은 이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거대한 역사의 파노라마와 같은 것일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 역사의 파노라마는 정치와 권력, 세계와 변혁에 맞춰진 거대담론을 큰틀로 하면서도 그 역사의 주체인 개인과 그 삶의 미세한 영역안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또 소설을 견고하게 받 침하고 있는 것은 개인 대 개인의 사랑과 연애의 감정이다. 그래서 소설의 독자는 시대의 치열 한 상황보다는 이들의 애절하고 안타까운 사랑에 더 가슴이 아프기 마련이다.
오현우, 70년대 말의 군사정권과 80년대 초의 광주 사건에 연루돼 수배자가 되어 유랑길에 오 른다. 갈뫼라는 시골에서 고등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만나 그의 보호아래, 수배생활을 이어가 며 그 둘은 사랑을 키운다. 그리고 오현우는 결국 구속되고 무기형을 선고받는다. 남겨진 것은 평범한 교사이자 여성에서 수배자의 보호자를 자청하며, 무기수의 약혼자가 돼 버렸고 이제는 은결이라는 그의 아이까지 가지게 된, 한윤희. 오현우가 독재권력에 맞서 이상적인 사회주의 를 꿈꾼 반체제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한윤희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오염되지 않는, 그 시대의 관찰자에 가깝다. 한윤희의 곁에는 물론 80년대 운동의 막바지에 헌신하는 친구, 송영태 가 있다. 그리고 또 송영태의 곁에는 대학생에서 노동현장의 투사로 그리고 결국에는 분신으로 생을 마감하는 최미경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이 모든 인물들을 엮고 있는 것은 시대적인 험난함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개인과 개인의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또한 그들을 묶고 있다. 그래서 약혼자인 윤희에 영태가 연애의 감정을 느낀다면 미경이란 대학 후배는 영태라는 투쟁가를 짝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본분에 충 실하다. 송영태가 결국엔 이상적인 사회를 갈망하는 과정에서 남쪽에서의 권력에 맞서 투쟁하다 결국 북한행을 이루고, 최미경이 자본주의 권력에 맞서 노동현장의 조직화와 노조결성에 헌신하 다 분신하는 것처럼, 그들은 마지막에는 개인보다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에 자신을 사용한 다.
소설의 시작은 무기형을 선고받은 오현우가 18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윤희와 자신의 거처인 갈뫼를 찾으면서 시작된다. 갈뫼는 변했고, 윤희는 암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곳을 윤희는 그대로 보존해놓고 있었다. 방 한켠을 차지하는 노트들을 뒤적이자, 윤희가 써내려간 18년간의 기록이 세세히 드러나고, 소설은 그 기록을 그대로 옮겨놓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투쟁의 전면 에서가 아니라 투쟁가의 곁에서 좌와 우로 치우지지 않는 균형적인 시각으로 그려낸 18년간의 기록은, 한편의 아름다운 연애소설이며 시대에 대한 헌신적인 기록이자, 그대로 20세기 말의 한 국 민주화 운동 과정을 그대로 담아 내고 있는 상징성을 갖는다.
그래서 작가는 21세기에 소설을 쓰며, 지난 20세기를 회상하고 있다. 오현우가 18년이란 세월을 캄캄한 벽에 유폐된채 자신의 이념과 투쟁하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밖의 세계는 변했다. 세상 에 되돌아와 밖의 세상을 살아냈을 윤희의 삶을 그려보며, 현우는 어떠한 감정에 휩싸이고 있을까? 18년간 정치범으로 단 한 차례의 면회도 허락받지 못했던 그 두 연인이었기에, 딸 은결이의 존재 도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와 오랜 시간 아버지를 알지 못했던 딸 아이와 마주앉은 그는 어떤 회한의 감정을 품고 있을까?
이 모두가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 내야 했던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같은 개인들의 반동적인 투쟁때문에 세상은 이만큼 변했고 이만큼 살기 나아졌다고 작가가 이야기 하 려 했다고 볼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민주화 운동의 아픈 기억은 이제는 아물어 버린 상처가 되 었다. 그 시절을 지나오면서 의식있는 개인들은 깨어있었고, 나름의 가치를 믿었기에 그들 각 자의 헌신은 의미가 있다. 작가가 첫장에 옮겨적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구는 이 인물들이 거 쳐온 시련이 헛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암시한다.
"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다. 장미가 그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았던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며 내가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세상의 이야기에 발언하는 것은 쑥스럽지만, 의미롭다. 과거 민주화 운동만큼 치열한 현실이 우리앞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 전히 한국사회에는 수많은 난제들이 놓여 있다. 오현우가 세상에 나와서 흘려보냈던 시간들에 대해 회한의 감정을 품는 것은, 과거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사회의 비전이 이 시대의 코드엔 전 혀 맞지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민의 종류가 달라졌을 뿐 여전히 세상엔 투쟁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직도 `오래된 정원'은 유토피아일 뿐이다.
오래된 정원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제작이 요즘 트렌드라서 그런 책도 있었구나 하면서 무심코 지나쳤다....
오래된 정원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제작이 요즘 트렌드라서 그런 책도 있었구나 하면서 무심코 지나쳤다. 우연히 원작을 읽게될 좋은 기회를 얻게되어 이렇게 리뷰까지 올리게 되었다.
80년대. 시위. 최루탄. 유신. 광주. 노조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80년대에 태어난 나에게는 교과서에서 만나볼수 있는 생소한 단어였다. 생소한 단어들이 나오기에 더욱 낯선 얘기였고 더욱 먼 얘기 같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려운 얘기였고 리뷰를 쓰는 지금도 너무나 조심스럽다.
이야기는 오현우가 감옥에서 출소되면서 시작한다. 18년동안 세상과 단절된 철창속에 같혀 살아온 그가 갈뫼라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한윤희와 6개월동안 은신생활을 했던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그곳에서 그녀가 남긴 기록들을 보며 지난 18년동안의 공백을 채워나간다. 담담한 그녀의 기록들과 오현우 자신의 회상이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암울했던 시대에 열정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앞에 놓인 문제를 피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부딪치며 해결하려 했다. 치열하게 싸우고 온몸으로 지키려 했다. 희망을 위해서 그와 그녀와 그들은 싸웠다.
책의 내용중에 오현우의 감옥생활을 상세히 묘사한 부분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작가도 감옥에 갇힌적이 있었다고 한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라 그런지 너무도 생생했다. 따뜻한 방에 누워 책을보고 있으면서도 차가운 시멘트바닥의 냉기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듯 했다.
책의 제목인 "오래된 정원"은 오현우가 윤희와 보냈던 갈뫼의 외딴집이자, 그가 그토록 바랬던 유토피아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가 오현우와 한윤희 그들이 그토록 바랬던 유토피아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