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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 규격外
ISBN-10 : 8954670245
ISBN-13 : 9788954670241
지복의 성자 중고
저자 아룬다티 로이 | 역자 민승남 | 출판사 문학동네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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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3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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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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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그림자로 살다가 역사의 얼룩으로 스러지는
가장 비속하고 성스러운 이들에게 바치는 찬가 1997년 데뷔작 《작은 것들의 신》으로 단번에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장편소설 『지복의 성자』. 첫 작품 이후 인권운동가이자 환경운동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사회참여적인 에세이에 힘을 쏟아온 그가 무려 20년 만에 내놓은 두번째 소설이다. 소설가로서 긴 침묵 끝에 발표한 신작이었기에, 평단과 독자의 반응도 뜨거웠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작은 것들의 신』에 이어 이 작품 역시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

인도 델리와 카슈미르 지역을 주요 배경으로,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수십 년을 오가며 펼쳐지는 이 장대한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형태와 양상을 띤 삶과 죽음이 처절할 만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작가는 종교와 계급과 파벌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인도의 참혹한 현실을, 특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억압받고 배척당하는 이들의 고난을 강렬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작가가 분열로 고통받는 고국을 바라보는 눈길은 타자를 향한 대상화의 시선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이 담긴, 철저히 내부자적인 것이기에 혹독하면서도 애처롭고 애틋하다. 그 시선은 매일같이 수많은 이들의 삶이 무참하게 저무는 황폐한 땅 위에서 멎지 않고, 더 깊은 곳까지, 벌어진 상처 깊숙이 희망이 끝내 뿌리를 내리는 곳까지 가닿는다.

저자소개

저자 :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 Roy
1961년 인도의 메갈라야 실롱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으로 외가인 케랄라에서 지내다가 1977년 델리로 이주해 건축설계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국립도시계획연구소에서 일하던 중 독립영화 감독 프라디프 크리셴을 만나 영화 〈매시 사히브〉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크리셴과 결혼했다. 이후 영화 〈애니〉 〈전기 달〉, TV 시리즈 〈바르가드〉 등을 남편과 공동 작업하고, 영화 비평 「인도의 대단한 강간 트릭」을 발표했다.
1997년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1998년 「상상력의 종말」을 발표하며 사회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생존의 비용』 『권력의 정치학』 『전쟁 이야기』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 『제국 시대의 대중 권력』 『아룬다티 로이,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 등 인도 사회, 나아가 세계의 여러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라난 재단의 문화자유상, 시드니 평화상, 노먼 메일러 집필상을 수상했고,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작은 것들의 신』은 1997년 출간되어 〈뉴욕 타임스〉 ‘주목할 만한 책’으로, 〈인디펜던트〉 〈선데이 타임스〉 〈옵서버〉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출간 후 전 세계 4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6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17년, 첫 소설을 발표한 지 20년 만에 두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를 펴냈다. 이 책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맨부커상 후보와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워싱턴 포스트〉 〈커커스〉, 아마존, NPR 등에서 ‘올해의 책’ 으로 뽑혔다.

역자 : 민승남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옮긴 책으로 『시핑 뉴스』 『솔라』 『넛셸』 『사실들』 『빌리 린의 전쟁 같은 휴가』 『상승』 『사이더 하우스』 『한낮의 우울』 『완벽한 날들』 『빨강의 자서전』 『밤으로의 긴 여로』 『멀베이니 가족』 『아웃 오브 아프리카』 등이 있다

목차

1 . 늙은 새들은 어디에 가서 죽는가? _ 013
2 . 콰브가 _ 018
3 . 탄생 _ 131
4 .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 _ 170
5 . 느린 거위 쫓기 _ 182
6 . 훗날에 대한 몇 가지 의문들 _ 188
7 . 집주인 _ 191
8 . 세입자 _ 285
9 . 미스 제빈 1세의 때 이른 죽음 _ 409
10 . 지복의 성자 _ 521
11 . 집주인 _ 560
12 . 귀 키욤 _ 569

감사의 말 _ 575
옮긴이의 말 히즈라의 공동묘지 파라다이스 _ 581

책 속으로

늙은 새들은 어디에 가서 죽나요? 하늘에서 우리 머리 위로 돌처럼 떨어지나요? 길거리에서 새들의 시체가 우리 발부리에 걸리나요? 우리를 이 지구에 보낸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를 데려갈 적당한 방도를 마련해놓았을까요? 본문 16∼17쪽 중요한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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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새들은 어디에 가서 죽나요? 하늘에서 우리 머리 위로 돌처럼 떨어지나요? 길거리에서 새들의 시체가 우리 발부리에 걸리나요? 우리를 이 지구에 보낸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를 데려갈 적당한 방도를 마련해놓았을까요? 본문 16∼17쪽

중요한 건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한낱 낄낄거림으로라도 역사에 존재하는 건 부재하는 것, 완전히 누락되는 것과 천지 차이였다. 그 낄낄거림은 결국 미래라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오르는 하나의 발판이 되었으니까. 본문 76쪽

그는, 자신이 늘 옳다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늘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확실성으로 인해 축소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호성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본문 166쪽

우리의 세계에서 정상성은 삶은 달걀과 약간 비슷하다. 그 단조로운 껍질 속 중심부에 지독한 폭력성을 지닌 노른자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계속 공존하기 위한-계속 함께 살면서 서로를 참아내고, 그러다 이따금 서로를 살해하기 위한-규칙들을 정하는 건, 우리가 그 폭력성에 대해 늘 느끼는 불안감, 그것이 과거에 행한 일들에 대한 기억, 그것이 미래에 발현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중심부가 흔들리지 않는 한, 노른자가 흘러나오지 않는 한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본문 201쪽

결국 영원히 실현되지 못할 공연을 위해 연습을 하는 것, 어쩌면 그게 인생이 아닐까? 혹은 인생 대부분의 결말이 그런 식이 아닐까? 본문 202쪽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의 일부가 내 몸에서 걸어나가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본문 203쪽

우리는 서로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서로를 배신하고 죽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 본문 258쪽

안녕이라는 말로 우리 앞에 어떤 작별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본문 341쪽

희망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희망에 차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품위…… 본문 356쪽

모든 곳에 죽음이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이었다. 경력. 욕망. 꿈. 시. 사랑. 젊음 그 자체. 죽음은 또다른 방식의 삶이 되었다. 본문 415쪽

내가 확실히 아는 건 이것뿐이야. 우리 카슈미르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척하는 죽은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본문 452쪽

“몸만 가지고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어. 우리의 영혼도 함께 징집해야 해.” 본문 487쪽

산산조각이 난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서서히 모든 사람이 되어서. 아니. 서서히 모든 것이 되어서. 본문 570∼5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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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유일한 윤리적 행위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쓰고, 행동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_아룬다티 로이(〈이코노믹 타임스〉 인터뷰 중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지복의 성자』를 10년 동안 집필했다. 이야기의 씨앗을 품은 세계가 다...

[출판사서평 더 보기]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유일한 윤리적 행위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쓰고, 행동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_아룬다티 로이(〈이코노믹 타임스〉 인터뷰 중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지복의 성자』를 10년 동안 집필했다. 이야기의 씨앗을 품은 세계가 다가와 내면에 터를 잡고, 길을 닦고, 서서히 모양새를 갖출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그렇게 기나긴 숙고의 시간을 거쳐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쌓아올린 이 작품 속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 인물과 동식물뿐 아니라 사물과 공간까지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동감이 단순한 문학적 기교가 아니라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로이가 지향하는 문학은 그저 눈으로 감상하는 평면적인 풍경이 아니라 독자들이 직접 거닐며 체험할 수 있는 삼차원적인 공간이다.

작가는 실체적 진실이 힘을 잃어가는 시대에, 오직 소설만이 우리 사회의 본모습을 거짓 없이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복의 성자』가 정치적인 선언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소설은 현실을 다루어야 하지만, 나는 현실을 다루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그저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을 뿐”(〈보그〉 인터뷰 중에서)이라 반박했다. 물론 이 작품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한 이후 분쟁과 내전이 끊이지 않는 카슈미르의 현실과, 2002년 구자라트에서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벌어진 학살 등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작품 외적인 맥락 때문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처한 작품 내적인 현실로서 온전히 기능하기에 설득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럴 때에야, 소설이 소설로서 완전할 때에야 문학은 현실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로이는 2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직 훌륭한 문학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로 세상의 작은 존재들에게 진실한 애도와 사랑과 혁명의 시를 바친다.

규정될 수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낙원,
남성도 여성도 아닌 이가 지키고 있는 그곳에
어느 길 잃은 여인이 찾아온다.
절망이 낳았으나 끝내 희망으로 자라날 작은 생명을 안고.

소설은 크게 두 갈래의 이야기로 나뉘는데, 그중 한 축의 중심에는 ‘안줌’이라는 인물이 있다. 안줌은 1950년대 중반, 인도 델리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한몸에 지닌 채 태어났다. 안줌의 부모는 절망하는 한편 아이를 남성으로 키우고자 노력하지만, 안줌은 우연히 시장에서 여성의 옷을 입고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히즈라’(통념적인 남성이나 여성에 속하지 않는 제3의 성)를 보고 자신도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느낀다.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한 안줌은 결국 가족을 떠나 히즈라들이 모여 사는 공동 거주지 ‘콰브가’에서 살게 된다. 이제 그녀의 새로운 소망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사원 계단에 버려진 채 홀로 울고 있던 여자아이를 발견하면서 그 꿈은 현실이 된다. 안줌은 아이를 콰브가로 데려와 자이나브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극진한 사랑을 쏟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안줌은 이유 없이 온갖 병치레를 하는 자이나브의 건강을 빌러 다른 지역의 사원에 갔다가 구자라트를 경유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한 힌두 폭도들의 무차별적인 린치에 휘말린다. 히즈라를 죽이면 불운이 따른다는 이유로 목숨을 건진 안줌은 큰 충격을 받고 돌아온다. 그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로 인해 그녀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콰브가를 떠나 마을의 허름한 공동묘지로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는 안줌의 가족들과 신원을 알 수 없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묻혀 있다. 안줌은 그곳에 작고 볼품없는 집을 짓고 살아가기 시작한다. 새로운 터전에서 서서히 기운을 회복한 안줌은 거주지를 점점 확장해,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잔나트’, 즉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얼마 뒤 늘어난 식구들과 함께 또다른 사업도 시작하게 된다. 바로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시신을 염하고 간단한 장례를 치러 묻어주는 일이다. 그리하여 안줌이 건설한 새로운 둥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모두 의탁할 수 있는 기묘한 안식처가 된다.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을 담당하는 중심인물은 틸로, 무사, 비플랍, 나가라는 네 명의 동년배 친구들이다.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 대학에서다. 비플랍과 나가는 부유한 상류층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당시 역사학과 대학원생이었던 이들은 건축학부 학생인 틸로를 연극 연습에서 만나게 된다. 틸로의 곁에는 연인인 듯 형제인 듯 붙어 다니는 과묵한 청년 무사가 있다. 비플랍과 나가는 비밀스러운 과거와 남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틸로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졸업 이후 연락이 끊어진다. 세월이 흘러 비플랍은 인도 정보국의 고위 공무원이 되고 나가는 유명 신문기자가 된다. 카슈미르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고 있던 비플랍은, 어느 날 밤 전화 한 통을 받는다. 흉악한 이슬람 전사를 사살한 뒤 그와 함께 있던 수상한 여자를 잡아왔는데 비플랍에게 ‘가슨 호바트’라는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슨 호바트’는 대학 시절 연극에서 비플랍이 맡은 역할 이름이었고 그는 메시지를 듣자마자 잡혀온 여성이 틸로임을 알아챈다. 그러나 보안상 당장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던 비플랍은 카슈미르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나가를 대신 보내 그녀를 안전하게 데려온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틸로는 나가와 결혼한다.

그로부터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두 갈래의 이야기는 마침내 어느 혼잡한 거리에서 하나로 모인다. 늘 시위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델리의 광장에서 버려진 갓난아이가 발견된다. 시간이 지나도 부모가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아기를 경찰에 넘기자고 한다. 그런데 어디선가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이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 바로 시위를 구경하러 나왔던 안줌이다. 이내 아기를 경찰에 넘겨야 한다는 사람들과 안줌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혼란한 사이 아기는 사라진다. 아기를 데려간 사람은 틸로였고 그녀는 불가사의한 삶의 조류에 의해 그녀 앞에 도착한 이 작은 생명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그녀가 몰랐던 한 가지 사실은 그 불가사의한 삶의 조류를 타고 더 많은 가족이, 그리고 진정한 보금자리가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직 사랑으로 결속된 삶과 죽음의 공동체

소설의 제목이자 작품 속에서 ‘지복의 성자’로 언급되는 ‘하즈라트 사르마드’는 페르시아 출신의 성인(聖人)이다. 그는 일생의 사랑을 찾아 인도 델리로 온 뒤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힌두교인 소년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황제가 알라만이 유일신이라는 내용의 이슬람교 신앙 고백문을 암송하라고 명하자, 그는 영적 추구를 완성해 진정으로 알라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증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그는 처형되었고, 목이 잘린 뒤에도 그의 입에서는 신앙 고백문 대신 사랑의 시가 흘러나왔다. 그리하여 사르마드는 위로받지 못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들을 보살피는 성자가 되었다.

“산산조각이 난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서서히 모든 사람이 되어서. 아니. 서서히 모든 것이 되어서.” _본문 570∼571쪽

사르마드가 상징하는 종교적 포용력과 경계 없는 사랑은 소설의 핵심에 자리한 다양성이라는 가치와 맞닿아 있다. 작가는 다양한 언어와 종교와 삶의 방식이 혼재된 인도 사회의 다양성은 극복되고 정리되어야 할 혼란이 아니라 삶을 더 다채롭고 자유롭게 만드는 해방의 가치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별과 카스트와 종교 같은 세속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오로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결속된 안줌의 공동체는 사르마드의 가치가 고스란히 실현된 장소다. 그리고 무수한 갈래의 삶과 그 각각에 깃든 이야기들을 차별 없이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지복의 성자』역시 안줌의 파라다이스와 닮아 있다. 작가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배척의 기도문이 아닌 사랑의 시를 노래하는 사르마드의 마음으로 자신이 창조한 광대한 세계 곳곳에 공평한 빛을 비춘다. 그 순간 무수한 삶의 파편들은 제각기 다른 무한한 색채의 물결로 독자를 향해 깜빡인다. 그때 소설은 그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아니 모든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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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복의 성자 | dl**nsl | 2020.08.26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1997년 데뷔작 《작은 것들의 신》으로 단번에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장편소설 ...

    1997년 데뷔작 《작은 것들의 신》으로 단번에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장편소설 『지복의 성자』. 첫 작품 이후 인권운동가이자 환경운동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사회참여적인 에세이에 힘을 쏟아온 그가 무려 20년 만에 내놓은 두번째 소설이다. 소설가로서 긴 침묵 끝에 발표한 신작이었기에, 평단과 독자의 반응도 뜨거웠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작은 것들의 신』에 이어 이 작품 역시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

    인도 델리와 카슈미르 지역을 주요 배경으로,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수십 년을 오가며 펼쳐지는 이 장대한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형태와 양상을 띤 삶과 죽음이 처절할 만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작가는 종교와 계급과 파벌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인도의 참혹한 현실을, 특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억압받고 배척당하는 이들의 고난을 강렬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작가가 분열로 고통받는 고국을 바라보는 눈길은 타자를 향한 대상화의 시선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이 담긴, 철저히 내부자적인 것이기에 혹독하면서도 애처롭고 애틋하다. 그 시선은 매일같이 수많은 이들의 삶이 무참하게 저무는 황폐한 땅 위에서 멎지 않고, 더 깊은 곳까지, 벌어진 상처 깊숙이 희망이 끝내 뿌리를 내리는 곳까지 가닿는다

  •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의 온갖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변명을 해보자면, 이전 작 &l...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의 온갖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변명을 해보자면, 이전 작 <작은 것들의 신>이 97년도에 출간되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알기엔 너무 어렸다. 인도에 관한 편견이 작품에 도달하는 일을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하는 그곳은 너무 혼란스럽고, 불쾌한 경험으로 가득했다. 가본 적도 없는 장소를 멋대로 규정하고, 무시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무수한 매력을 놓쳐버릴 수 있음을 알만큼 성장했다. 이런 깨달음은 중국에서 잠깐의 교환학생 생활로 얻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인도에 대해 그랬듯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비하했다. 두려움을 안고 내가 진짜 그곳으로 갔을 때, 나는 더 이상 그 무엇에도 선입견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은 고유의 매력으로 빛났고, 외국인인 나에게 한없이 관대했다. 한국과 달리 타인의 시선에 덜 신경을 써서 일종의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나는 찰나의 경험을 통해 쓸데없는 편견을 버릴 수 있었고, 오늘 <지복의 성자>가 보여주려는 인도의 불완전한 면을 어떤 과장도 없이 직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룬다티 로이가 보여준 인도는 한국의 과거와 닮아있다. 사람들을 감금시키고, 고문하는 '시라즈 영화관'의 존재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지복의 성자>를 읽는다는 건, 한국이 가진 아픔을 찬찬히 훑어보는 일이다. 더 나아가, '위로받지 못한 이들에게' 바쳐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전 세계에 놓인 고립된 자들을 이젠 외면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지복의 성자>에 등장하는 '안줌'은 트랜스젠더다. 그가 가진 '여성'이라는 성에 관한 자연스러운 끌림과 어떤 열의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숱하게 약자의 위치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계에서도 <이제야 언니에게>, <82년생 김지영>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이 견뎌야만 하는 차별과 폭력을 토로했다. 인도는 한국보다도 더 여성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국가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자살하는 여성 중 약 40%가 인도인이라는 보고까지 있다(주요 원인으로 조혼과 가정폭력이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줌'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훨씬 큰 축복이라고 말한다. 분쟁과 내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남성은 종종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폭력에 가담하도록 요구되는 탓이다. 그들은 이유 없이 잠재적인 혁명가로 분류되어 처단당하기도 한다.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이 처한 우월성을 짚어내면서도, 아룬다티 로이는 여전히 피해자에 속하는 여성의 서사를 다룬다. 가난한 부모에 의해 경제적 도구로 전락하고, 어김없이 가정폭력이 등장한다. "여자들은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문장 앞에, 어떤 행위가 삽입되더라도 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무덤 가까이 가는 게, (한국에서는 흔히) 제사를 지내는 게. 여자들은 특별한 근거 없이 여러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한편으로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안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엄마'의 자격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신체적인 문제로 '안줌'은 아이를 가질 수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생명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싶어 한다. '안줌'의 반대편에 나름의 이유로 생명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립적인 두 집단을 통해 우리는 생명에 대한 간절함이 '엄마'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피가 섞이지 않더라도, 공동체를 이루고 충만한 삶을 영위해나가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와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이번 소설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 특히 카슈미르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과 학살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러 캐릭터와 서사는 인도의 불온전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안줌'은 세상의 변두리에 서서 낮은 시선으로 상처 입은 영혼들의 삶을 관찰한다. 또,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라는 캐릭터의 글을 통해 작가의 의도는 정점에 달한다. 인도의 잘잘못을 무자비하게 쏟아내고,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오랜 다툼 속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지복의 성자>를 탄생시켰다. 계급 간의 끔찍한 차별과 종교적 이념 차이로 인한 살육은 그러나, 사회적 갈등과 역사적 관점에서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개인적인 경험을 돌아봐도, 우리는 그저 시험을 위한 역사만을 다뤄왔을 뿐, 모든 죽음을 기억하고, 기리지 못했다. 때로는 무고한 생명의 죽음에도 우선순위를 매기며 살아왔는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저자는 인도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이에게 숙고하고 반성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피해자보다 그가 찍힌 사진의 저작권 싸움을 더 오래도록 기억했다.

    TV 카메라와 미디어는 선택적이고, 편집된 보도로 무자비한 전쟁에 가담했다. 억울한 이들의 고립된 슬픔을 외면하고, 대중이 냉소적이 되도록 부추겼다. 올바른 질서 확립을 위해 나서고, 국민의 편에 서야 할 정부와 경찰은 인도 전역에서 모여든 온갖 피해자의 요구와 꿈을 묵살한다. 이처럼 모두가 무관심할 때, 미디어의 기록은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공권력을 고발하고, 대중의 관심을 필요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회의 흥망성쇠에 있어 언론은 적지 않은 몫을 차지한다.

    <지복의 성자>는 슬픔으로 시작해 절정으로 치닫다가 희망으로 막을 내린다. 배제되고 차별받은 사람들끼리 결합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나간다. 무엇보다도 '미스 우다야 제빈'이라는 미래 세대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외로운 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 인도를 자멸로부터 구해낼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손에서 새로운 씨앗이 피어난다는 사실은 어쩐지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까지 끌어안는 진정한 포용의 미학을 보여준다.

    작품 속 인도뿐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에도 "희망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희망에 차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품위"라는 것을 잊지 않고, 더 큰 '아자디(자유)'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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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이 소설은 초상화다.

     시인 장석주는 <은유의 힘>이라는 책에서, ‘의미를 맺지 못한 채 떠도는 소리들. 말이 소리의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은 항상 무언가의 이름들로 온다. 이름은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특이점을 조형하고, 본질을 외시해내는 효과가 있다.’고 썼다. 보이지 않고 떠도는 것들을 가시화하고, 익명의 무형자를 기명의 명료한 존재로 전환시키는 것이 이름이라면,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오늘날 인도에게 ‘안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인도의 영혼에 [지복의 성자]라는 육체를 지어 입혔다.

     

     [지복의 성자]는 600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소설이다. [작은 것들의 신]을 쓰고 부커상 수상을 비롯하여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아룬다티 로이가 10년 동안 쓰고 2017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도 델리와 카슈미르를 주요 배경으로 두 주인공들의 서사를 정밀하게 엮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함께 지니고 태어나 여성으로서의 삶을 택하지만 현실에서 비참한 생을 살다 묘지로 거처를 옮기는 안줌은 이 소설 전반부의,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건축학도로 자라지만 카슈미르에 부는 분쟁과 내전의 바람에 휩쓸려 그 중심부로 들어가게 된 틸로는 후반부 서사의 축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델리와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몸, 지금 인도의 상태를 아주 면밀하게 해부한다. 인도의 뼈와 관절과 근육과 췌장과 폐, 간, 심장 따위의 장기와 그 모두를 연결하는 동맥과 실핏줄과 그 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세포들과 피, 혐오와 선동의 핏방울들. 부패한 정치꾼과 비정한 자본주의자들이 흘려보내는 돈이라는 혈청, 그 혈청에 실려 온 몸속을, 온갖 작은 존재들의 사이와 내부를 독하게 파고드는 권력이라는 독. 천년고도인 델리가 자본주의에 물들어 창녀가 되고, 오래된 계급(카스트)에 짓눌린 사람들은 미디어의 밥이 되거나, 미디어가 주는 밥을 먹으며 비참하게 연명한다. 카슈미르는 또 어떤가? 종교와 파벌 그리고 그 명백한 단층선을 악랄하게 이용하는 정부는 카슈미르의 젊은이들의 시체 위에 지옥을 지어놓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외국인이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그 내밀한 신음을, 아룬다티 로이는 철저하게 해체하여 수많은 피와 눈물로 조직된, 만신창이 인도의 육체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꼭 보라고, 이것을 봐야 한다고. 

     

    1. 절대 질서와 종교 분쟁 아래 땜질된 몸으로 살아가는 안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생식도 할 수 없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내면에는 두 파벌의 싸움, 이 둘이 싸우는 듯 두 개의 목소리가 나는 안줌은 그 자체로 인도다.
     여성의 성기를 꿰맸다가 나중에 다시 풀고 남성의 성기를 제거한 안줌은 그와 같은 ‘히즈라(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성)’들의 공간인 콰브가에서 살았다. 콰브가는 기득권들의 질서, 상식, 규범, 문화와 관습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나 그 기득권의 그늘에 기생하듯 살아가는 공간이다. 안줌은 땜질된 몸을 가지고 꿈은 일부만 실현된 상태로 콰브가에서 삼십 년 넘게 살았다(책 47쪽). 살기 위해서 창녀가 되고 행복을 꿈꿨으나 쉽지 않았던 안줌의 운명은 수퍼 파워들의 국제사회 속에서 절대 권력과 천박한 자본주의에 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던 인도가 걸어온 근현대사와 겹쳐 보인다. 안줌이 사상 최악의 종교 폭동인 ‘구자라트 폭동’을 당하고 목숨을 건지게 된 이유 역시 의미심장하다. 안줌을 살려두는 게 학살자들에게는 저주와 불운을 피하는 일이었기에, 안줌에게는 그녀 자신의 생존이 미칠 것 같은 치욕이요 수모였다. 이 치욕과 수모는 고스란히 자기 혐오(작품 속에서는 비탄)로 이어져 안줌은 트라우마의 구덩이에 빠진다. 그런 그녀에게 콰브가는 땜질된 몸과 구자라트 폭동의 트라우마로부터의 구원처가 아니었다.

     

    “여기서(콰브가) 누가 행복한데? 전부 가짜고 속임수야. (중략)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책 39쪽, 님모의 말)

     아룬다티 로이는 히즈라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와 같았던 콰브가를 떠나는 안줌을 빗대어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은 진짜인가? 소외된 자들의 공동 거처였던 콰브가조차, 그곳에서 누린 잠시의 즐거움과 만족조차 안주할 수 없는 가짜임을 깨달은 안줌은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고 콰브가를 떠나 묘지로 간다. 묘지는 음부, 죽은 것들이 모인다. 안줌이 누운 묘지는 그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계급과 종교와 성별의 잣대에 의하여 거부당하고 소외당한 자들이 모이는 묘지다. 기득권을 부리거나, 기득권에 편승하거나 기생하며 살아있는 것들의 세상이 현실이라면 그곳은 초현실, 현실 밖, 언어 밖의 세계다.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 우리가 보금자리로 삼은 이곳은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야. 여긴 하키라트(현실)가 없어.”
    책 117쪽

     

     안줌을 낳은 엄마는, 안줌에게 두 개의 성기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후 ‘언어 바깥에서 사는 게 가능할까?(책 19쪽)’라고 자문한다. 언어의 세계는 오직 남성과 여성만이 있는 세계다. 계급과 종교, 성性이 초월될 수 없고 초월되어서도 안되며 그를 초월한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는 세계 곧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은 언어로 지어진다. 언어로 말해지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존재해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이곳에 앉아 있고, 정부는 이 철제 난간 사이로 우리에게 쓸모없는 희망의 부스러기를 먹여줍니다. 살아가기엔 충분치 않지만 우리가 죽는 걸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양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언론인을 보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짐이 가벼워집니다. 이것이 정부가 우리를 통제하는 방식입니다. (중략)
     그들이 지어놓은 새 화장실이 보이십니까? 우리를 위해서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신사용과 숙녀용이 따로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거기 있는 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책 179쪽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의 호소문 중에서)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통제를 당한다. 이 통제의 도구 역시 말, 언어다. ‘우리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그들, 우리가 비통함을 잠시 해소할 수 있게 말하도록 해주는 그들, 우리의 말을 실어 나르고 또 그들의 말을 쏟아 부어 결국 우리의 생각과 의식까지 통제하는 그들. 땀과 피와 똥과 온갖 저주로 곤죽이 된 우리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래서 두려울 수밖에 없다. 두려운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이 비명마저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돈은 세상의 공기, 돈은 정치라는 파장으로 세상을 잠식한다. 누군가는 이 소설이 너무나 정치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마치 그것이 이 작품의 단점이라는 것처럼. 그러나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목소리를 입을 수 없기에, 결국 이 소설은 정치적이어야 했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이고, 처절하고 노골적으로 고발하고 고함을 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세상에 나올 수가 없는 소설이었다. 아마도 저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하여. 어떤 타협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보고 듣고 뼛속 깊이 응전하며 버텨온 인도의 공기란 이런 것이었으니.

     

     언어 밖의 세계로, 초현실의 그곳으로 안줌을 보낸 일 역시 작가의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3살 때에 사원에서 데려온 자이나브라는 딸이 있었음에도 안줌은 어떻게든 엄마가 되고자 했다. 여성의 생식기를 통하여 자신의 아이를 얻기를 바랐다. 그러나 안줌은 결코 잉태도, 출산도 할 수 없었다. 제3의 성은 무성, 즉 불구다. 생식도, 번식도 할 수 없는 그녀의 몸으로서는 다음 세대의 생존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 그녀에게 생식을 초월하여 다음 세대로의 생명의 전이를 느끼게 한 건, 틸로 그리고 미스 제빈 2세와의 만남이었다.

     

     


    2. 지지 않은 죄를 속죄하는 인도의 지식인, 틸로

     

     아룬다티 로이는 카슈미르의 비극적인 역사 위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틸로와 세 남자의 관계를 수놓았다. 아내와 어린 딸을 잃고 이슬람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무사, 인도 정보국의 고위 관료로서 카슈미르의 비극을 관망하는 비플랍, 비플랍과 정보를 적당히 주고 받으면서 자기 처지를 궁리하는 데에 몰입할 뿐인 나가, 이 세 인물을 연결하는 중심 인물인 틸로의 눈과 목소리를 빌어 저자는 인권과 평화마저도 사업이 된, 카슈미르의 슬픔을 시처럼 읊조린다.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검은 마차 셋, 흰 수레 샛
     우리를 한데 모으는 것은 우리를 갈라놓는 것.
     떠나간 우리 형제, 떠나간 우리 사랑.
     그는 누구를 애도하고 있었을까? 틸로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한 세대 전체일지도.
    책 355쪽

     

    수십만 민중이 집에서 쏟아져 나와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의 분출조차도 전략적, 군사적 운영 계획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묘지로 행진할 것이었다.
     책 307쪽

     

     카슈미르가 오늘날의 분쟁의 도가니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충섬심이었다. 그들의 신앙에 대한, 그들의 종교와 그들의 민족과 그들의 역사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은 그들을 갈라지게 하고, 서로의 멱을 따게 하고, 슬픔이든 분노든 그들이 느끼고 표출하는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의 먹이가 되게 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야심이 그 먹이를 갉아먹고 증식한다는 사실이, 이 비통하고 한스런 일들이 저자의 은유가 가득한 문장으로 시처럼 펼쳐진다. 은유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거울. 그래서 독자는 곧장, 이 카슈미르의 현실을 통하여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증식하고 있는 또 다른 카슈미르 내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비정하고 비열하고 비겁한 인물들에 대한 경계와 분노를 끓어 올려 저들의 쌍둥이, 내 현실의 존재들에게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은 잘 헤아리지 못한다. 하긴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파키스탄 때문에 고통 받는 발루치족은 카슈미르인들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해방시켜준 방글라데시인들은 힌두교도를 박해한다. 선량하신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를 ‘혁명의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부른다. 미국인들은 현재 베트남 사람들에게 인권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문제다. 우리 중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요즘 아주 크게 부상한 다른 문제도 있다. 사람들-공동체, 계급, 민족, 그리고 심지어 국가까지도-은 자신들의 비극적인 역사와 불행을 트로피처럼, 혹은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처럼 지니고 다닌다. 유감스럽게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극이 없는 인간이라 거래할 상품이 없다. 나는 상류계급, 어느 모로 보나 상류계급의 압제자다.
     그 사실을 위해 축배를 들자.
    책 259쪽 비플랍의 독백 중에서

     

     비극이 없는 인간, 거래할 상품이 없는 상류계급은 절대로, 절대로 그들의 전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의를 위한, 국가와 민족, 신념과 종교, 신을 위한 투쟁이라는 편가르기를 조장하며 그 단층선 사이로 칼집을 넣어 육체가 난도질당하게 내버려두고 그 피로 자신들의 생애를 존속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목소리를 잃은 채로, 산채로 회가 떠지는 생선처럼 도마 위에 얌전히 누워 있기만 할 것인가? 수상가옥에서 무사와 헤어진 후, 아무런 목적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이한 사진을 찍으며 기이하게 위험한 기록물을 축적하는 틸로는 그런 독자에게 힌트를 준다.  

     


     안줌이 인도를 상징한다면, 틸로는 저자의 분신으로 읽힌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카슈미르로 돌아와 여행을 한 건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서였다(책 359쪽)’는 틸로의 모습에서 저자가 왜 이 소설을 10년에 걸쳐 쓰고 기어코 완성했는지를 발견한다. 저자는 그녀가 작가이거나 활동가이기 때문에 부패한 정치와 무자비한 자본주의, 환경 파괴와 인권 유린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고, 그것은 그녀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피비린내가 걷히지 않은 인도의 시간 속에서, 지식인으로 교육 받고 살아온 저자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속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르포를 쓰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소설을 발표한다. 

     


     개인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운명에 가닿는 일조차 쉽지 않다. 하물며 이 거대한 전쟁을, 폭동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무엇이 안줌 내부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틸로의 목숨을 위협했던 부패한 정권의 위력을, 지금도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있는 카슈미르의 공기총을 막을 수 있을까? [지복의 성자]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그것은 막는 게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 분쟁과 전쟁은 결국 붕괴하거나 자멸하는 것이며 버려진 자들, 언어 밖에 있는 자들, 죽은 자들로부터 불구의 몸이 새로운 생명을 양육하게 되리라는, 그녀만의 희망을 예언한다. 바로 미스 제빈 2세를 통하여.

     

    3. 음부의 낙원, 잔나트. 낙원의 아이, 미스 제빈 2세

     

     왜 묘지였을까?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도 한참이나 ‘잔나트’의 이미지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죽어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카슈미르인들처럼, 묘지에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안줌과 그녀가 건설한 잔나트를 보여준 아룬다티의 마지막 목소리는 뜻밖에 ‘호소’였다.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 절반을 지나가도록 두 주인공인 안줌과 틸로는 한번도 조우하지 않는다. 틸로가 미스 제빈 2세를 데리고 잔나트로 오기 전까지, 안줌과 틸로가 같은 공간에 모이는 건 딱 한 차례였다. 바로 미스 제빈 2세가 나타난 그곳에서. 

     


     미스 제빈 2세는 ‘정의를 위한 싸움, 악에 대항하는 선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 투사들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이들이 모이는 곳(책 162쪽)’에서 나타났다. ‘누군가는 관심을 가져줄 거라는, 누군가는 듣고 있을 거라는 믿음. 누군가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믿음(책 168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출현했다. 안줌은 이렇게 나타난 미스 제빈 2세를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나섰고 그녀가 아가를 데려가는 걸 막는 자와 싸우다 소동이 났다. 틸로는 그 소동을 틈타 아가를 데려와 미스 제빈 2세라고 부른다.

     

     아가를 데려와 보호하고 사랑을 주는 틸로의 선택은 얼핏 기이하다. 그녀는 무사와의 하룻밤으로 임신을 하자 ‘아이에게 자신이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게 자신의 복제물이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책 515쪽)’는 이유로 낙태를 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자기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미스 제빈 2세를 안고 모성애를 느낀다. 자기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을 존재, 그런 확신이 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 새로운 인류. 바로 이 존재가 이 소설이 노래하는 희망이다.

     

     아기는 돌아온 미스 제빈이었다. 그녀에게 돌아온 게 아니라 세상을 돌아온. 미스 제빈 2세. 그녀는 어른이 되면 셈을 치르고 빚을 갚을 터였다. 형세를 뒤집을 터였다. 책 288쪽

     

     압도적인 우둔화 속에서 질식하고 있는 인도. 이 우둔화는 말로, 언어로 진행되고 그래서 안줌은 언어 밖의 세계에, 음부에, 묘지에 잔나트를 세우고 저자는 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인도의 몸은 이대로는 더 이상 생식할 수 없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안줌처럼, 후대에게 운명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 낙태하는 틸로처럼 불구의 몸이다. 이대로 인도에게 희망이 있을까? 이제 인도는 어디로 가야 할지, 인도의 무엇이 죽어야 하며, 그 죽음 후에는 무엇이 살게 되는지. 계급으로서의 인도, 종교로서의 인도, 성별로서의 인도가 죽은 후에 부활하는 미래는 무엇인지, 그 미래에 대한 가능성, 그 희망에 대한 작가의 염원이 미스 제닌 2세에게 실려 있다. 불구가 된 인도의 몸, 그 음부 잔나트라는 낙원에서 엄마가 될 수 없는 안줌과 엄마이기를 거부하는 틸로는 미스 제닌 2세를 키운다. 생명이 잉태될 수 없는 그곳에 새 생명이 깃든 일이다. 잔나트의 구성원들이 미스 제닌 2세를 촘촘하게 둘러싸는 소설의 결말에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이 작품 [지복의 성자]는 불구가 된 인도를 낱낱이 해부하고 해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만신창이가 된 육체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는 초인의 노래다. 이전과 같지 않은 신인류, 고통에 밀려 언어 밖으로 추락한 진정한 미래, 신기루를 불러내는 아룬다티 로이. 이것이 소설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쓰고 읽는다.

     

    4. 2020 한국, 우리는 신인류가 될 수 있을까.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사회에서 작동하는 인간 행위 원리 중 하나로 ‘공감’을 제시했다. 누군가의 감정은 사회성과 합리성을 획득하면 보이지 않는 공감의 힘을 발휘하게 되고, 이 공감대를 느끼는 것을 아담 스미스는 인간성이라고 보았다. 아담 스미스의 시민사회 분석은 현대의 시민사회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타당성과 필요성과 연결된다. 소설이 선사하는 문학적 상상력은 공감을 부른다. 이 문학적 상상력은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이들과 정서적 관계를 맺게 하고 나아가 현실에서 우리 각자가 진정한 인간 존재로서 서로 관계를 맺게 한다(<시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 소설로부터 얻은 공감을 현실에 적용하여 체화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도를 위한 땅은 오직 한 곳뿐! 묘지 아니면 파키스탄! (책 90쪽)
     
     “다들 구경만 했어요.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어요. (중략) 난 아버지를 죽인 폭도의 일부였어요.” 사담이 말했다.
     웅성거리는 벽과 은밀한 지하 감옥이 있는 안줌의 비탄의 요새가 다시 그녀를 둘러싸고 솟아오르려 했다. (책 124쪽)

     

     아룬다티 로이가 묘사하여 건네준 건 인도의 얼굴이나 거기에 한국의 현재가 비친다. 나와 정치적, 사상적 뜻이 다르면 원색적인 욕을 퍼부어도 마땅하고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이라는 말이 대기에 넓게 퍼져 있고 특정 종교단체가 기이할 정도로 미디어의 집중 포화를 맞고 그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인도의 거기, 델리, 카슈미르, 구자라트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히 일치한다. 칼부림만 없을 뿐, 영혼들이 흘린 피가 낭자하다. 지복의 성자들은 지금 다 어디 있는가? 우리는 과연 언어 밖의 세계로 탈출할 수 있을까? 언어에 잠식되지 않는 사람들의 성지, 내가 지지 않은 죄를 회개하고 속죄하는 이들의 시원, 편견과 역사가 미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이 같은 걸음으로 귀결하는 낙원으로. 새들의 시체가 성물이 되는 거기로, 우리는 과연 다다를 수 있을까? TV와 온갖 미디어들이 합세하여 전염병처럼 혐오와 야만을 도처에서 증식시키며 우리를 갈라놓는 데, 우리가 과연 무얼 할 수 있냔 말이야.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이 뭔지 알아? 가장 싸우기 힘든 상대가? 연민이야. 우린 자기 연민에 빠지기가 너무 쉽지... 우리의 사람들에게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집집마다 끔찍한 일을 당했어.. 하지만 자기 연민은 너무도... 너무도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어. 너무 굴욕적이고.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은 맞서 싸우는 것뿐이야.”
    책 487쪽 무사의 말 중에서

     

     인도의 계급과 종교, 성별을 가리지 않았던 ‘우둔화’는 현재 이곳 한국에서도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소설에 비쳐 보이는 지금의 한국을 제대로 보는 것. 자신을 향한 모욕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음에 영혼이 병들어 버린 안줌처럼, 아버지가 몰매를 맞는 동안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한 사담처럼, 우리 사회의 진짜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비탄-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 보아야 할 때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때 듣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 때 하지 못하면 이 비탄의 요새는 안줌과 사담에게 그랬듯이 우리를 가둘 것이다.

     누군가는 목청에 날을 세운다. 이 피해에 대하여, 비극에 대하여 책임지고 이 탓을 짊어져야 한다고.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는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비극에 대한 본질적이고 엄정한 대답이다.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책 428쪽

     

     우리 자신이 발견하고 목도하지 않으면 전쟁은 계속된다. 우리는 저항하고 비판해야 한다. 무지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우리를 비탄의 요새나 폭동의 구름 속에 가두어두려는 우둔화에 대하여,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인 척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미디어에 대하여, 우리를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의 모든 것을 갉아 먹는 정치꾼들에 대하여 의심해야 한다.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서로를 만나면서, 지금까지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 밖의 세계로 함께 나갈 때에 여기 한국에서도 미스 제빈 2세들이 나타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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