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달린다!
노동자계급의 삶을 격렬하고 신랄하게 그려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문단을 풍미한 '성난 젊은이들'의 선두 주자 앨런 씰리토의 『장거리 주자의 고독』. 우리 시대 가장 훌륭한 영국 작가로 꼽히는 저자의 빼어난 소설집이다. 영국 중부지방 노동자계급의 냉혹한 생활과 그들의 자본주의사회를 향한 분노와 절망을 생동감 있게 담아낸 소설 9편을 수록했다. 삶의 비극과 맞닥뜨려도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지배계급을 향해 익살맞은 냉소를 던지는 노동자계급의 일상 속으로 초대하고 있다. 특히 비참한 생활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자살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등 섣불리 희망을 품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을 긍정하면서 꿋꿋이 일구어나가겠다는 의지를 지닌 생생하고 거칠며 솔직한 청소년들을 만나게 된다.
저자소개
저자 : 앨런 씰리토 1928년 영국 노팅엄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다 공군에 입대하여 무전 기사로 복무했다. 1958년 발표한 등단작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으로 영국 작가 클럽의 신인소설상을 받았다. 1959년, 「장거리 주자의 고독」으로 호손덴 상을 수상하며 문단에서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전후(戰後) 영국 문단을 풍미한 이른바 ‘성난 젊은이들’(Angry young men) 그룹의 일원으로, 소외받는 노동자와 반체제적인 청춘의 삶을 묘사한 작품세계로 호평받았다. 이 시대 가장 훌륭한 영국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2010년 4월 타계했다.
역자 : 이은선 연세대학교 중문과와 같은 학교 국제학대학원 동아시아학과를 졸업했다. 편집자와 저작권 담당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화성의 인류학자』『통역사』『몬스터』『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해?』『딸에게 보내는 편지』『노 임팩트 맨』 등이 있다.
목차
장거리 주자의 고독 어니스트 아저씨 레이너 선생 어선이 있는 그림 노아의 방주 토요일 오후 축구 경기 짐 스카피데일의 치욕 프랭키 불러 쇠망사
옮긴이의 말
책 속으로
소년원에 장거리 크로스컨트리 선수가 있다니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다. 장거리 선수를 들판과 숲에 풀어놓으면 당장 똥줄 빠지게 도망치지 않을까 싶을 테니까. - p.10
이 시대 가장 훌륭한 영국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앨런 씰리토의 대표작 『장거리 주자의 고독』이 창비청소년문학 33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냉혹하게 소외당하는 영국 중부지방 노동자계급의 생활을 담은 단편들이 실려 있는 소설집으로, 1950년대에 발표되었지만, 자본주의사회 깊숙이 자리 잡은 분노와 절망감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표제작 「장거리 주자의 고독」은 그간 국내에 몇 차례 번역된 적이 있으나, 작가 개인의 소설집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는 것은 최초라 더욱 뜻깊다.영국 작가 클럽 신인소설상, 호손덴 상 수상 작가 앨런 씰리토가 선보이는 현대 영국 단편소설의 정수
노동자계급의 삶을 격렬하고 적나라한 필치로 묘사하며 제2차세계대전 직후 영국 소설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일컬어지는 작가 앨런 씰리토는 일찍이 등단작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으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작가 클럽(Author's Club) 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영국 노동자와 반체제적인 청춘의 삶을 표현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듬해 발표한 「장거리 주자의 고독」으로 신선하고 패기 넘치는 문학 작품을 발굴하는 호손덴 상까지 잇따라 수상하며 문단에서 확고히 자리매김한다. 뚜렷한 문제의식과 정직한 문체로 등단부터 문단과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씰리토는 이후 일관되게 날카로운 사회 비판과 가정 내 긴장 상황을 묘사한 소설로 호평을 받는데, 이러한 씰리토의 작품세계는 작가 자신이 체험한 가정폭력과 계급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더 큰 울림을 전한다. 이번에 소개되는 『장거리 주자의 고독』에 실린 단편들은 지배계급을 향한 익살맞은 냉소가 돋보이는 작품들로, 인생의 부조리함과 비극 앞에서도 재치를 잃지 않는 단편소설의 편편(翩翩)한 묘미를 느끼게 한다.
작가의 자전적 체험이 녹아 있는, 타협하지 않는 청춘들의 초상(肖像)
영국의 평론가이자 소설가, 전기 작가이기도 한 D. J. 테일러는 앨런 씰리토의 업적을 가리켜 ‘블룸즈버리 광장뿐 아니라 노팅엄의 뒷골목에서도 예술이 싹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블룸즈버리 광장은 20세기 초 버지니어 울프 등의 지식인ㆍ예술가 들이 속한 블룸즈버리 그룹의 활동무대였던 런던의 대표적인 문화 명소로, 씰리토는 블룸즈버리 광장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자신의 고향 노팅엄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절박한 노동자들의 삶을 그려왔다. 특히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중에는 표제작 「장거리 주자의 고독」을 비롯해 작중 화자가 10대인 작품이 여러 편인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이 하나같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들이라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자살하는 사람을 목격한 계기로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자살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소년의 모습(「토요일 오후」)이나, 나라에서 허락하는 나이가 되자마자 집을 떠나겠다고 다짐하는 또 다른 소년의 모습(「짐 스카피데일의 치욕」)에서는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꿋꿋이 일구어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달리기에 소질 있는 소년원 수감자의 반항을 다룬 「장거리 주자의 고독」에서 소년원 원장의 한심한 바람대로 우승을 해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면서도 굳이 결승점 앞에서 멈춰버리고야 마는 주인공의 고집은 가진 자들을 향한 일종의 ‘선언’으로 읽힌다.
1950년대 영국 문단을 풍미한 ’성난 젊은이들‘ 세대의 대표작
한편 앨런 씰리토는 ‘성난 젊은이들’(Angry young men)의 선두 주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성난 젊은이들’이란 영국 전통 사회에 대한 환멸로 무장한, 1950년대 새롭게 부상한 문학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존 웨인, 존 브레인, 도리스 레씽 등 기성 사회의 질서와 권위주의, 보수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젊은 작가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중에서도 앨런 씰리토는 단연 돋보이는 성과를 이루었다. 존 오즈번의 연극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로부터 시작된 ‘성난 젊은이들’의 물결은 문학, 영화 등 문화 전반으로 번졌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강렬한 사회적 메씨지를 갖고 나타난 「장거리 주자의 고독」은 영국 자유영화(free cinema)를 주창한 토니 리처드슨 감독에 의해 1962년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장거리 주자의 고독」_시시한 말썽을 일삼으며 지내는 빈민가 소년 스미스는 빵집 금고를 훔쳐 소년원에 수감된다. 스미스의 달리기 실력을 눈여겨본 소년원 원장은 스미스를 전국 크로스컨트리 대회에 내보내 우승시켜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 하지만, 스미스는 이런 원장을 한심이 여길 뿐이다. 드디어 대회가 열리고 스미스는 탁월한 달리기 실력으로 모든 선수를 제치지만, 원장과 교양 있는 자들을 조롱하듯 결승점을 눈앞에 둔 채 달리기를 멈춰버리는데…….
「어니스트 아저씨」_가구 수리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어니스트. 가족도 떠난 지 오래인 그는 술만이 유일한 친구이자 위로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굶주린 어린 자매와 친해진 어니스트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며 난생처음 행복을 맛본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니스트의 순수한 행복에 싸늘한 오해의 시선을 보낼 뿐이다.
「어선이 있는 그림」_해리의 아내 캐시는 십여 년 전 칠장이와 바람이 나 도망갔다. 전쟁이 시작할 무렵 수척해진 모습으로 해리를 찾아온 캐시는 칠장이가 납중독으로 죽었다고 고백하며 돈을 빌린다. 전쟁 내내 목요일 저녁마다 해리를 찾아와 돈을 빌리던 캐시는 그렇게 육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장례식이 끝나고 멍하니 남아 있던 해리는 혼자 흐느껴 울고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한다. 해리는 누구냐고 물어볼 것도 없이 그 사람이 지난 육 년 동안 여전히 캐시와 함께 살고 있었던 칠장이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토요일 오후」_‘나’는 어린 시절 어느 토요일 오후, 자살하려는 사람을 목격한다. ‘나’에게 주어진 건 가정폭력과 암울한 미래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결코 자살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짐 스카피데일의 치욕」_드센 홀어머니 아래서 응석받이로 자란 짐 스카피데일은 어머니 치마폭에 싸여 지내는 어수룩한 공장 노동자다. 어느 날 짐이 세련되고 우아한 신부감을 데려와 모두 놀란다. 그러나 교양 있는 짐의 아내는 처음엔 당신 같은 노동자가 자본주의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둥 알 수 없는 정치 이야기를 하며 잘해주더니, 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자 결국 꼴도 보기 싫다며 집을 나가 버린다.
「프랭키 불러 쇠망사」_어린 시절 앨런이 살던 동네에는 아버지의 전쟁 후유증으로 약간의 지적장애를 갖고 태어난 ‘프랭키 불러’라는 스무 살 무렵의 형이 있었다. 전쟁놀이의 명장인 프랭키 불러는 동네 소년들의 정신적 지주다.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진짜’ 전쟁을 겪고 난 후,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작가가 된 앨런은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우연히 프랭키 불러와 마주친다. 옛 모습과는 많이 변한 프랭키 불러와의 짧은 만남에서 앨런은 자신의 커다란 일부와 영원히 작별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외 3편 수록_「레이너 선생」「노아의 방주」「축구 경기」)
어린이는 걷지 않는다. 걷더라도 가뿐가뿐 걷거나 거의 뛰어다닌다. 어린이를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놀 공간을 주...
어린이는 걷지 않는다. 걷더라도 가뿐가뿐 걷거나 거의 뛰어다닌다. 어린이를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놀 공간을 주면 어린이는 늘 경쾌한 몸놀림으로 움직인다. 내가 어렸을 때도 그랬다. 진중하게 하는 일이 거의 없고 날개 달린 몸을 마음껏 놀렸다. 아침마다 초등학교로 등교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으니 그것이 선생님 눈에 띄어 시작한 것이 오래달리기다. 이른바 마라톤 선수로 발탁된 것이다. 그리하여 아침마다 동무들보다 일찍 학교에 등교하여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미루나무가 즐비한 신작로를 달렸다. 달리면서 나는 정말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그 기억 때문이다. 지금도 내가 혼자 마라톤을 즐기는 것은.
앨런 씰리토의 중편소설「장거리주자의 고독」에 나오는 스미스 또한 아침 일찍 오래달리기를 하며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출입문을 나선 뒤, 뻔뻔하게 배를 불룩 내밀고 골목 끝에 서 있는 떡갈나무까지 왕복하며 두세 시간 열심히 달리다 가끔 이렇게 자유로워진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스미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존재다. 오래달리기를 잘한다는 이유로 아침마다 혼자 들판을 달릴 수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으니 스미스는 오래달리기를 통해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인지 모르겠다. 스미스는 아주 주체적인 인간형이다. 자신에게 특혜를 준 소년원 원장의 기대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으니 말이다.
살짝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다. 그랬다가는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가장 더러운 허드렛일과 부엌일을 맡게 될 게 손바닥 보듯 뻔하지만 말이다. 놈들에게 거지발싸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겠지만, 내가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성실함을 발휘한 대가가 그거라면 고맙게 받아들이겠다. 원장은 내 기준이 아니라 자기 기준에 맞춰서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했는데, 내가 원장의 기준에 맞는 성실한 태도로 이 경기에서 우승하면 앞으로 달리기나 하며 설렁설렁 육 개월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좀 전에 생각한 것처럼 내 식대로 성실한 모습을 보이면 앞으로 온갖 개수작을 견뎌야 할 것이다. (61쪽)
전국 크로스컨트리 대회에 나간 스미스가 우승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장면이다. 소년원 원장 바람대로 스미스가 우승을 한다면 남은 수감 기간 동안 편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것은 원장의 기준에 맞는 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스미스가 생각하는 것은 소년원 원장 같은 사람의 성실함이 아닌 자신이 속한 계급 사람들의 성실함이다. 성실한 사람이 돼서 일주일 일하고 적은 돈을 받는 편안한 직장에 정착하는 성실함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성실함인 것이다. 그리하여 스미스는 충분히 우승을 할 수 있는 실력임에도 우승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이러한 스미스의 모습은 노동자 계급의 주체적인 인간형일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요구하는 인간형을 부정하는 데서 체제 밖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앨런 씰리토의 단편들은 이렇게 노동자 계급의 여러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나머지 8편의 단편소설이 청소년소설인지는 의문이다. 주인공이 청소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청소년에 적합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노동자 계급의 인물형을 노동자 관점에서 들려주고 있는데 「어니스트 아저씨」와「어선이 있는 그림」에 공감이 많이 갔다. 두 작품 모두 중년 남성의 쓸쓸한 삶을 그리고 있고, 둘 다 혼자 살면서도 남을 돕는 인물이다. 앞 작품의 어니스트 브라운은 소파 천갈이를 하는 돈으로 식당에서 만난 가난한 자매에게 선물과 먹을거리를 사 주고, 뒤 작품의 해리는 28년째 집배원으로 살면서도 자신을 떠났던 여자의 뒤를 대 준다. 외롭고 가난하게 살지언정 남을 돕는 바람직한 인물이다.
나머지 단편들은 노동자 계급의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이를테면 「레이너 선생」의 주인공은 포목상 가게 아가씨들에게 관심이 가 있을 뿐 자신이 맡은 열등반 아이들이 조용하게 졸업하기만을 바라는 인물이다. 「노아의 방주」의 콜린과 버트는 이동식 유원지에서 감시하는 직원을 피해 놀이기구인 노아의 방주를 공짜로 탄다. 「토요일 오후」의 ‘나’는 목매달아 죽는 아저씨를 목격하지만 자신은 결코 죽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축구 경기」의 마흔 살 레녹스는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축구 경기에서 지자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구타한다. 「짐 스카피데일의 치욕」의 주인공은 노동자 속으로 들러온 지식인 여성과 결혼하지만 아내가 떠나가자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지저분한 장난을 치다 감옥에 갇힌다. 「프랭키 불러 쇠망사」의 주인공은 쓰레기통 뚜껑과 가로대로 만든 창을 휘두르며 아이들을 지휘하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글자 모르는 노동자 계급답게 납작 엎드려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