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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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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쪽 | A5
ISBN-10 : 8987608182
ISBN-13 : 9788987608181
옹정제 중고
저자 미야자키 이치사다 | 역자 차혜원 | 출판사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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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26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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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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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권력을 휘드루는 독재자라기보다 구도하는 수도자처럼 경건하고 치열한 자세로 정치에 임했던 옹정제. 형제와 친척, 사랑하는 여인 등 누구에게나 엄격한 통치원칙을 관철시켰던 옹정제. 수천 년이나 지속된 중국 관료제의 고질적인 부패의 고리를 자르고 관료들을 국가의 충복으로 거듭나게 하려고 했던 개혁가 옹정제를 파헤치고 있다.

저자소개

목차

첫머리에 ...23
제1장. 고뇌하는 노황제 ...27
제2장. 개가 되고 돼지가 되라 ...51
제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73
제4장. 천명을 받들어 ...103
제5장. 총독 삼인방 ...131
제6장. 충의는 민족을 초월한다 ...167
제7장. 독재정치의 한계 ...193

참고연표 ...215
옮긴이의 말 ...221
찾아보기 ...231

책 속으로

출판사 서평

역사학자 미야자키는 『주비유지』라는 자료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 군주’ 옹정제를 박진감 넘치게 그려간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호언장담하는 옹정...

[출판사서평 더 보기]

역사학자 미야자키는 『주비유지』라는 자료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 군주’ 옹정제를 박진감 넘치게 그려간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호언장담하는 옹정제의 전기이자 근세 중국의 관료제, 재정, 재판, 풍속을 이해하는 역사서이다.

옹정제는 누구인가
옹정제는 1678년 강희제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45세 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후 1735년 사망할 때까지 13년 동안 중국을 다스렸다.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의 재위기간―강희제가 61년, 건륭제가 61년이었다―에 견주면 형편없이 짧아 보이지만, 옹정제는 그 어느 황제보다도 많은 일을 했으며 청조의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여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군주
2년 전 우리나라에서 「용의 눈물」이라는 사극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때, 이웃 중국에서도 한 사극이 중국 TV방영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12억 중국인을 사로잡았다. 다름 아닌 ‘옹정제’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였다.비록 드라마를 통해 옹정제는 12억 중국인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청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10여 년 전부터 ‘옹정학’(雍正學)이란 용어를 사용할 만큼 옹정시대에 주목해 왔다.

이 옹정학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올라가면 이 책 『옹정제』가 그 진원지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에는 청조의 기틀을 다진 강희시대나 청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시대는 높이 평가되었지만, 옹정시대에 대해서는 앞뒤의 두 시대를 연결하는 다리나 간주곡 정도로 과소평가되었다. 옹정제 개인에 대해서도 폭군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정략가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런 기존의 평가를 거부한다. 그는 옹정시대 13년이 있었기에 청왕조는 건륭시대에 최대의 번영을 맞게 되었고, 옹정제 사후 한 세기 반 이상을 더 지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무엇보다도 옹정제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한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처럼 대외적으로 화려한 전공(戰功)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내치(內治)에 있어서는 중국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완벽한 독재군주였다고 단언한다. 옹정제는 초인적인 의지와 정력으로 만주족의 100배가 넘는 중국인과 방대한 중국 대륙을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나갔다. 그것은 천명(天命)이 부여한 임무를 완수하는 것, 곧 황제로서 천하만민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옹정제는 만일 자신이 이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천명은 다른 데로 가버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명의 완수를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형제조차도.

옹정제의 개혁
옹정제에게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는 정치였다. 당시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과거�A 입신출세�A 축재�A 특권계급 형성으로 이어지는,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보스정치였다. 따라서 여론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특권지식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했다. 중국정치의 맹점은 벼슬을 얻으려면 과거시험을 준비할 만큼 집안이 부유해야 하며, 또 재산을 모으려면 벼슬을 얻어야만 가능하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어떤 사업을 하더라도 관권과 결탁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었다. 사업가는 정치보스에게 상납하는 헌금을 충당하기 위해 탈세를 하고 하층민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지면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노동의 재생산이 불가능해진다.

청조 초기의 황제들은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이 짧아 과거시험과 관련된 일을 한인(漢人) 대신들에게 맡겨두는 형편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과거합격자는 시험감독관의 자유재량에 따라 결정되었고, 감독관과 합격자 사이에는 사제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보스와 부하의 인연이 맺어졌다. 이리하여 옹정시기에 이르자 정치보스를 중심으로 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조직이 형성되어 있었다. 옹정제는 바로 이 점을 꿰뚫고 있었다. 옹정제는 송대(宋代) 이후 깊게 뿌리박힌 학연·지연·혈연에 따라 단결하는 붕당을 깨뜨리고, 보스정치와 부정부패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영향력이 큰 정치 보스들을 제거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인재들을 발탁했다. 그리고 강희제가 만든 주접제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곳곳에 자신의 밀정을 파견하고 관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으며, 민심의 동향을 살폈다. 아울러 지방관들에게도 주접을 쓰게 하여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일일이 점검했다.

이처럼 천하의 모든 일을 황제 한 사람이 책임지고 처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옹정제는 이 불가능한 정치를 실현했다. 실제로 옹정제가 어떻게 국사를 처리했는지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는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밤 10∼12시까지 쉴새없이 일했다.(본문 125∼127쪽 참조) 강희제는 종종 사냥도 나가고 또 장기간 지방을 순행하기도 했지만, 옹정제는 재위 13년 동안 단 한번도 베이징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천명이 부여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몸이 으스러지도록 국사에 전념했다. 그래서 신하들의 불필요한 알현 신청은 언제나 거절하고, 용건이 있으면 편지를 하라고 했다. 또 자신을 위해서는 궁전의 방 한 칸도 늘리지 않았다. 지방관이 하례장을 올리면서 비단을 사용하면 왜 이런 낭비를 하느냐고 하면서 종이를 쓰게 했다. 그야말로 옹정제는 성실과 근면의 화신이었다.

옹정제는 기본적으로 관료란 사무를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했다. 따라서 관료가 한가하게 문인취미에 젖어 있거나 축재에 관심을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사회의 특권계급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 황제제도에서 특권이란 오직 황제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며, 황제 이외의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 옹정제의 신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옹정제는 천민을 해방시켰고, 지방관들에게는 전례없는 근무지수당을 지급했다.(이것을 청렴함을 기르는 돈이라 하여 ‘양렴은’[養廉銀]이라고 한다.) 그러나 옹정제식의 정치는 옹정제가 아니면 할 수 없었다. 무쇠라도 견디지 못할 엄청난 양의 국사를 처리하던 옹정제가 죽자 청조의 정치는 다시 강희제식의 관대한 정치로 돌아갔다. 옹정제가 살아 있는 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기득권세력들의 불만이 다시 표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옹정제의 한계
옹정제는 중국 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했던 중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에 과감히 개혁의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 13년 동안 많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그의 사후 다시 과거의 정치로 돌아가긴 했지만 옹정제의 개혁 덕분에 청조는 적어도 1세기 동안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그러면 왜 옹정제식의 정치는 계속될 수 없었을까? 옹정제가 아무리 선의의 정치를 했다 해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독재군주에 의한 철저한 독재정치였기 때문이다. 옹정제식의 독재정치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정치인 것이다. 그러나 옹정제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은 독재정치도 잘만 하면 좋은 정치가 될 수 있다는 따위의 역설이 아니라, 선의의 독재가 낳은 역효과이다. 다시 말해서 선의의 독재를 경험한 대중은 독재에 길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역사에서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다. 왜냐하면 독재를 신뢰하게 된 대중은 독재가 아니면 다스려질 수 없도록 틀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옹정제의 정치는 한마디로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였다.


본문중에서(본문 120∼130쪽)
“짐은 하루 종일 문서를 보고 대신들을 지휘하느라 몹시 분주하지만 너희들의 상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는다. 만일 보다가 안 보다가 할 요량이었으면 애당초 너희들한테 보고를 하라고 할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너희 쪽에서도 짐의 다망함을 살펴 긴요한 것만을 골라 간단 명료하게 적어 보내라. 부하를 시켜 탁상 궁리의 작문을 짓거나 몇 냥, 몇 전의 세세한 용돈 출납장 같은 회계보고를 올리는 것은 짐을 방해하고 폐를 끼치는 일일 뿐이다.”

“짐에 대하여 성인이니 뭐니 하는 의례적인 말을 늘어놓는 게 제일 싫다. 이런 쓸데없는 편지는 보는 시간이 아깝다.”

실제로 옹정제는 여유가 없었다. 강희제는 정치에 싫증이 나면 강남의 풍경을 예찬하며 여러 번 운하를 건너 쑤저우(蘇州)나 항저우(杭州)까지 유람에 나섰다. 건륭제도 이를 따라 하였지만 옹정제는 단지 베이징 근교에 있는 시산(西山)의 별장에 가끔씩 가는 정도였을 뿐 그 이상은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여하튼 일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를 쉬면 하루 분의 일이 밀려 다음에 더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천자 자신이 이런 식이었으므로 지방관들에게도 무익한 여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베이징에 가서 천자를 알현하고 싶다는 청원은 언제든지 거절당하게 마련이었다. 전근하는 관리들은 일부러 길을 우회하여 베이징에 들르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새 임지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짐을 만나러 와서 특별히 이렇다 할 가르침을 받을 일은 없다. 용건은 모두 편지를 통해서 전달하면 충분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헛되이 먼 여정을 왔다갔다 하는 것이 될 뿐이다. 게다가 지방을 비운 사이에 정무가 지체될 게 뻔하다.”

이렇게 옹정제의 치세 13년 동안, 성실과 근면 그 자체와 같은 황제의 선도 아래 여러 가지 정무와 행정이 착착 성과를 올렸다. 이런 천자의 부림을 받게 되어 견딜 수 없다는 관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천자 밑에서야말로 일할 보람을 느낀다는 관리도 생겨나게 된다.

“천하의 재물은 만민을 위한 것이다. 천자 한 사람의 욕망을 위하여 쓰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저자소개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역사학자 미야자키는 1901년 일본 나가노 현에서 태어나 1995년 타계했다. 교토(京都) 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생을 교토대학 교수로 있었으며, 1960년과 1965년 사이에는 파리·하버드·함부르크 대학에 객원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 중국사의 거의 모든 분야와 서아시아사에 걸쳐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 『アジア史硏究』 1-5, 『論語の新硏究』, 『水滸傳』 등 다수가 있으며, 1991년에는 모든 그의 저작을 한 데 모은 『宮崎市定全集』(전24권)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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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은 미야자치 이치사다(宮崎 市定)가 1999년에 지은 ‘雍正帝-中國の獨裁君主(옹정제-중국의 독재군주)’라는...

     

    이 책은 미야자치 이치사다(宮崎 市定)가 1999년에 지은 ‘雍正帝-中國の獨裁君主(옹정제-중국의 독재군주)’라는 책을 연세대 사학과 차혜원 교수께서 2001년에 번역한 책이며 2013년 7월 25일에 9쇄 발행판입니다. 미야자치 이치사다의 책은 중국 통사(中國 通史), 수양제(隋煬帝)에 이어 세 번째 책입니다. 동양사의 대가 라고 일컬어지는 미야자치 이치사다의 책은 믿고 봅니다.


    강희제(康熙帝, 재위1661~1722), 옹정제(雍正帝, 재위1722~1735),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5)의 134년간은 청(淸)나라의 전성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 건륭제는 공식 재위기간이 위에 보듯이 60년 이지만 아들 가경제(嘉慶帝)에게 양위하고 4년간 섭정을 하여 실질적으로는 64년을 통치하여 중국 역사에서 최장 통치 기록을 세웠으며 그의 치세하에 청나라는 칭기즈 칸 이래 최대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옹정제(雍正帝)의 치세는 13년으로 아버지 강희제(61년)와 아들 건륭제(공식 60년, 섭정 포함 64년) 보다 상당히 짧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세상의 관심이 작은 편입니다.

    청나라는 3대 순치제(順治帝, 재위1643~1661)가 명(明)나라 왕조 멸망의 뒤를 이어 1644년에 베이징에 입성하여 중국 전체를 통치합니다. 만약 근세 중국에서 대표적인 독재(전제)군주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자는 서슴지 않고 청나라의 옹정제 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청나라가 베이징에 입성한 이후부터 헤아리면 3대째가 되는데 왕조가 흥할지 쇠할지는 대체로 3대째 정도에 결판나므로 옹정제는 청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갈림길에 서있다고 평가합니다.

    강희제의 4황자로 태어난 옹정제의 즉위는 1722년으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1682년) 보다는 40년 늦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 1740년) 보다는 18년 빠릅니다. 옹정제는 이들 군주와 충분히 어깨를 견줄 만한 치적을 이룩하였다고 저자는 언급합니다.

    옹정제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너무나도 지는 걸 싫어해서 승부를 건 놀이가 불가능한 천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이란 가장 비경제적인 것으로 그 때문에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어야 할 지 모른다는 깊은 배려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옹정제의 치세에는 혁혁한 무훈(武勳)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직접 군대를 지휘한 적도 없었고, 아마 있었다 해도 서툴렀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독재(전제)군주라고 하면 곧 전쟁을 연상하지만 옹정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적인, 그러면서도 철저한 독재군주였습니다. 그러나 무공을 세우지 않은 황제의 업적은 역사에서 가장 먼저 잊혀져 가는 법이라고 언급하며 작자는 옹정제를 책을 통해서 자세히 소개합니다.
     
  • 옹정제 | gh**ms2222 | 2017.01.23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일반 대중독자들에게 대다수 중국이나 중국사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대다수는 삼국지나 공자, 노자, 한비자 등의 제자백가 혹은 진시...
    일반 대중독자들에게 대다수 중국이나 중국사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대다수는 삼국지나 공자, 노자, 한비자 등의 제자백가 혹은 진시황의 춘추전국시대 통일 등 상당히 단편적일 것이다. 본인도 그러했다. 중국사를 굳이 뭐하러 알 필요가 있나. 그저 우리나라 역사가 왜곡되는 현실에서 중국의 외교굴기가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급성장과 더불어 인문학의 부흥이 자연스럽게 중국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중국의 방대한 역사를 다 알기는 쉽지 않다. 다만 단편적이라도 이어붙인다면 나름 의미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저자 이치사다는 일본에서 중국사 전문가로 방대한 내공을 가진 교수로 중국에서도 인정 받은 학자이다. 그의 책은 국내에서 간간히 번역되고 있는데 완간번역되길 바라본다.
    옹정제는 아버지와 형의 재위기간의 훨씬 못미치는 13년 동안 완벽한 독재를 통해 중국 역사의 한 귀틀을 마련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거대한 중국 영토와 민족, 관리들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있을까. 옹정제는 해냈다. 그것도 완벽하게. 그래서인지 독재의 예로 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의 일당 독재체체에서는 이 옹정제는 누구보다 고마운 신화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금물이다. 현재는 그때와는 너무나 다른 사회다. 게다가 옹정제는 개혁을 단행하여 선의의 정치를 했다. 이는 현대정치에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치사다는 재밌는 이야기 한 편을 얽혀내듯 술술 역사를 풀어낸다. 그래서 줄어드는 페이지 수가 아쉬웠다.
  • 편지, 정치를 만나다. - 옹정제와 정조의 가상대담   ...

    편지, 정치를 만나다. - 옹정제와 정조의 가상대담

     

    『옹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이산, 2001

     

    옹정제는 강희제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45세 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후 1735년 사망할 때까지 13년 동안 중국을 다스렸다.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의 재위기간이 각각 61년이었던 것에 비하면 한참 짧은 기간이지만, 옹정제는 그 어느 황제보다도 많은 일을 했으며 청조의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여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일본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의 전기이자 근세 중국의 관료제, 재정, 재판, 풍속을 이해하는 역사서인『옹정제』를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군주’였던 옹정제를 박진감 넘치게 그려냈다.

     

    그동안 청조의 기틀을 다진 강희시대나 청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시대는 높이 평가되었지만, 옹정시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옹정시대 13년이 있었기에 청왕조는 건륭시대에 최대의 번영을 맞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미야자키는 무엇보다도 옹정제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한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처럼 덕망 높은 유교 군주로 추앙 받지도 않고, 화려한 대외원정으로 전 아시아에 ‘청조의 평화’를 각인시켰던 건륭제처럼 화려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만주족의 100배가 넘는 중국인과 방대한 중국 대륙을 가장 완벽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통치했다. 옹정제의 정치는 한마디로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였다.

     

    대표적인 것이 강희제가 만든 주접제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곳곳에 자신의 밀정을 파견하고 관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으며, 민심의 동향을 살피는 방법이다. 아울러 지방관들에게도 주비유지라는 붉은 붓으로 쓴 친필서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관들을 일일이 점검했다. 그는 요즘말로 하면 워커홀릭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밤 10∼12시까지 쉴새없이 일했다. 강희제는 종종 사냥도 나가고 또 장기간 지방을 순행하기도 했지만, 옹정제는 재위 13년 동안 단 한번도 베이징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저자가 갖고 있는 옹정제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과 호의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살아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생생한 묘사와 구체적인 사실이 엮어내는 긴박함은 이 책을 역사에 길이 남을 10대 전기의 하나로 높이 평가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옹정제를 읽다가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정조다. 비록 시대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옹정제(1678〜1735)가 근세 중국의 대표적인 獨裁君主로 불리는 반면, 정조(1752〜1800)는 조선 후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불러 온 改革君主 또는 好學君主로 알려져 있다. 서로 다른 부분이 많지만 어느 면에서는 흡사한 구석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둘이 지금 만나 가상으로 대담을 나눈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상상이 들었다.

     

    옹정제 : 내가 보위에 오르는 과정이 얼마나 신산했는지 들어 아실테지요. 부왕인 강희제께서는 덕망 높은 유교 군주이면서 다른 면으로도 얼마나 부지런하셨던지 무려 일흔명에 달하는 자녀를 두었고, 그 중에서 황자 숫자만도 서른다섯이나 되었답니다. 처음에 이이아거 형님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황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로 인해 결국 청조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황태자이며 두 번 황태자가 되었다가 두 번 폐위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지요. 우여곡절 끝에 사이거인 내가 왕위에 올랐지만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자식들에게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아 고안해 낸 것이 바로 미리 후계자를 정해 두되 행실이나 인물됨을 지켜보면서 얼마든지 바꿀수 있는 태자 밀건법(密建法)이라고 불리는 방식이지요. 내가 만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참 훌륭한 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그나저나 내 들으니 작년 2월에 대왕이 중신이었던 심환지에게 보낸 친필 어찰 297건이 새로 발견되어 세간의 비상한 주목을 받더군요. 대왕과 정치적 입장이 상반되는 노론 벽파의 중추적 인물에게 私信이면서 密書를 보내는 일종의 막후정치, 그거 솔직히 내 통치술을 따라한 것 아니요?

     

    정조 : (하하) 네! 맞습니다. 맞고요. 사실 친부인 사도세자가 조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갖혀 죽음을 당한 사실로 인해서 입지가 매우 곤혹스럽고 위태로웠습니다. 내 가 구상한 정치운영 방식에 반대하는 세력을 견제하고 탕평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심환지와 같은 노련한 정치력이 필요했지요. 느리게는 몇 달에 한 번, 빠르게는 하루에 4번이나 편지를 보내 민감한 정치현안을 막후에서 조정하고 정국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옹정제 : 원래 100만도 되지 않는 만주인이 그 100배도 더 넘는 중국인 위에 서서 청조를 건설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밀정정치를 쓸 수 밖에 없었지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주접(奏摺)이라는 형식의 문서로 직접 보고하게 하고, 주비유지라는 붉은 붓으로 쓴 친필서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관들을 점검한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라오. 어떤때는 나도 주비유지에 “바보는 고칠 수 없다는 말은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수라도 너보다는 낫다.” “양심을 뭉개 버리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소인배.” 등 원색적인 욕설과 온갖 비난을 퍼부었는데 대왕도 크게 다르지 않더이다. ‘참으로 호로자식’ ‘주둥아리를 놀리려고 한다’ 등과 같은 거친 표현이 어찰에 심심찮게 나오는걸 보면 말이오.

     

    정조 : 대왕께서도 마흔다섯에 대임을 지고 천자의 자리에 오른후 13년 재위기간 동안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천자는 일일만기(一日萬機), 곧 하루에 1만 건의 사무를 처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왕이라는 자리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정말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바쁜 자리지요.

     

    옹정제 : 그렇지요. 보통 밤 열시나 열두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네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 정무를 보는대도 늘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으니까요. 신하들을 보세요. 그들은 벼슬살이를 할 만하면 벼슬을 살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 두지 않습니까. 늙으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손들을 돌보면서 유유자적하게 보낼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같은 군주들은 평생토록 부지런히 수고하고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우리같은 3D업종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후대에서도 그걸 서로 하겠다고 저 난리들이니 원. (쯧쯧)

     

    정조 : 지금 사람들은 그걸 워커홀릭이라고 말합니다. 조기사망의 지름길이지요. 그러나 대왕은 57세, 나도 48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장수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은것 같습니다. 선대왕들의 긴 재위기간 끝에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보위에 오른 것이나 선호했던 통치술도 그렇고 말입니다.

     

    옹정제 : 그러게 말입니다. 어쨌거나 군주로서의 내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지는 일은 하지 않으리.” -끝- (2010.5)

  • 옹정제 | ha**0829 | 2008.10.06 | 5점 만점에 4점 | 추천:0
    내가 알고 있는 중국의 역사는 얼만큼이며, 우리가 알고 ...
    내가 알고 있는 중국의 역사는 얼만큼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봉건독재체제의 황제는 가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은 우선 진시황을 답할 것이며 그 외에 또렷하게 기억나는 왕이라면 영화에서 본 무력하고 기구한 운명의 푸이라든가 그리고 징기스칸이 중국역사에 있었던지 몽골역사에 있었는지 ..하고 갸웃갸웃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중국이라는 곳에 와서 공부를 하기로 했으면서도 부족한 한국사보다도 더 적은 중국의 역사지식뿐이었다. 

    처음에 중국에 대한 관심은 공산당을 비롯한 근대사에 있었다. 그러나 근대사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는 일종의 순환을 거듭하고 있고 또한 역사속에 중국인의 문화와 습관을 알아야지만 현대의 중국도 이해할 수 있는 당연한 논리때문에 중국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알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칸의 제국]과 [마테오리치 기억의 궁전]을 읽고나서 집어든 책은 미야자키 이치사다라는 일본 역사학자의 [옹정제]였다. 

    이 책은 1951년도에 출판되었던 책으로 지금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과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옹정제라는 숨어있는 황제에 대한 연구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미야자키의 이 책은 그 중요도를 무시할 수 없다 한다. 

    [옹정제]는 그 양이 적어 읽기 편한 글씨와 넉넉한 간격을 둔 디자인을 이룬 책이다. 그 내용이 적어 다른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작가는 내내 이야기를 하듯이 자신의 의견을 시기적절하게 적용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옛날 구중궁궐에 이런 일이 있었단다...라는 식의 이야기체로 중국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접근하기 쉬울만한 필체이다. 

    그러나 단지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옹정제를 미야자키라는 노()역사가가 다시 들추어 낸 이유가 무엇이며 이 책이 출판된 1951년의 중국정세를 상상했을때 이 작가는 옹정제를 통해 그 당시의 중국과 그리고 현재가 되어버린 미래의 중국을 한꺼번에 통찰하려했음을 알 수 있다. 

    1951년, 중국이 공산당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마오쩌둥이 중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장하였던 시기다. 

    미야자키의 옹정제는 책의 마지막 장을 "독재정치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마무리하였다. 

    작가는 아마도 그 당시의 중국의 모습을 또 다른 하나의 전제정치, 황제독재정치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상해에서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낸 나로서도 중국은 정신적 실질적 황제없이는 존재하기 힘든 나라로 보일때도 있다. 정치에 관심이 없어 정부를 믿고 있고 공산당이라는 유일당만이 존재하며 정부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느냐는 푸단대 사회학과 졸업생의 말을 듣었던 나는 이들의 정치의식이 평균적으로 어느 수준에 있는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중국의 자본주의는 급속히 발전할 것이며 이들 천성의 장사기질은 개혁개방이후 들어온 자본주의로 인해 엄청난 꽃을 피울 것이지만 5천년이 약간 안되는 오랜 세월동안 황제없이 살지 않았던 국민들과 현대화 이후에도 종신제나 마찬가지인 세명의 주석을 나랏님처럼 모시고 살던 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50년이 지난 오늘에서도 중국을 보는 눈이 이럴 것임을 작가는 미리 예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란 항상 돌고 돈다했다. 그리고 과거의 일이 결국은 반복되기도 한다했다. 나는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작가 미야자키가 역사가 무엇인지 알고 1951년에 300년 청조역사에서 불과 13년동안 권좌에 앉아 있던 조용한 황제 옹정제를 일부러 끄집어 낸 것은.. 분명히 뭐라 말할 수 없는 의미가 있어보인다. 

    작가는 또한 이런말을 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영토를 확장한 왕만이 이름있는 전제군주로 역사에 남는 것은 무척 슬픈일이라고. 

    40이 넘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던 옹정제. 그의 가리워진 인생을 들추어보며 역사에 대한 감을 느껴보는 것...적잖이 만족스런 일이었다.


    2001.7.7 
  • Ⅰ. 머리말  옹정제(雍正帝)는 청(淸) 왕조의 5대 군주로서 성명은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 胤縝)’이고 묘호는 ‘...
    Ⅰ. 머리말

     옹정제(雍正帝)는 청(淸) 왕조의 5대 군주로서 성명은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 胤縝)’이고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이다. 열정적으로 대외정복 사업을 수행했던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황위 계승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그였지만 정말 뜻하지 않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청을 다스리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옹정제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군주'라고 칭하면서 그가 대단한 위임임을 역설하고자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항상 청나라의 황금시대로 여겨지는 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 이어지는 약 150여년간의 치세에 포함되어 설명되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강희제와 건륭제 사이에 즉위했던 군주였기에 그랬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자체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학풍 속에서 옹정제는 두 군주들 사이에서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런 옹정제를 저자는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내어 본래의 빛을 되찾아주는 작업을 한 셈이었다.

     사실 평자 역시 옹정제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리포트를 낼 기회를 맞이해서 읽어보고 관련된 자료를 조금 찾아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저자가 옹정제를 두고 세계에서 제일 가는 독재군주이자 정치가였다고 호언장담한 것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그만큼 옹정제에 대해서 평자가 아는 것이 전무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겠지만 그보다는 옹정제에 대한 기존과 다른 시각에서 쓰여진 이 책이 옹정제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전해줌으로써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강희제와 건륭제를 정복형 군주에 비한다면 옹정제는 철저한 내정지향형, 즉 수성형(遂成形)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희제 시절에는 내부적으로 ‘오삼계의 난’이라고 하는 청 왕조의 생사를 결정지을 정도의 대규모 전란이 있었으며 건륭제 시절에는 준가르부로 대표되는 서부 지역을 평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전쟁 하나만으로는 그들을 정복형 군주라고 할 수는 없으니 두 군주 치세때에는 청 왕조가 군사력을 이용해 어려차례의 활발한 대외 정복이 이뤄졌던 때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옹정제 치세에는 이렇다 할 대규모 전란이 없었다.

     우리가 흔히 옹정제를 잊고 강희제와 건륭제만을 논하는 이유는 또 하나, 옹정제의 재위 기간이 다른 두 군주에 비해 지나치게 짧았던 점도 한몫 담당한다고 본다. 거기에다가 역사에 화려하게 기록될만한 대외 정복 기사가 지나치게 적은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이 강희제와 건륭제만을 논하고 마는 알 수 없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얼핏 들으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흔히 시작과 끝을 중요시 여기는 풍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옹정제의 치세는 청 왕조 초기, 청 왕조가 기틀을 확실히 잡아가던 그 시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저자 역시 옹정제가 북경에 입성한 이후 3대째 황제가 된 인물로서 한 왕조의 흥망성쇠는 3대쯤에 결정난다고 보고 있으니 옹정제의 치세가 청 왕조에 있어서 일종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런 몇가지 생각들을 가진채 간단하게 서평을 남기고자 한다.

    Ⅱ. 책의 구성과 비평

     이 책은 중국의 거의 모든 분야와 서아시아에 걸쳐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기는 등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로 활약하던 저자의 연구 서적 중 하나이다. 저자는 특히「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로 불리는 13년간 옹정제가 지방 관아와 주고 받았던 비밀편지들을 주 사료로 채택하여 옹정제의 치세를 평가하고 있다. 

     옹정제는 종래 중국의 어떤 제왕도 해내지 못하였던 훌륭한 정치를 행하고 일찍이 중국 역사가 경험하지 못하였던 공정한 사회를 건설해서 만민이 안심하고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군주였었다. 그것이야말로 하늘이 청조의 군주에게 특별히 내린 임무이며 그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청조와 만주인은 중국인한테는 물론이고 하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일가는 자손 만대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말이다. 이것이 옹정제의 확고한 신념이었고 거의 종교적인 신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이 신념을 당시의 만주인 특유의 성실함과 강한 인내심으로 실행에 옮겼는데 그 증거가 바로 앞서 언급한「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였던 셈이다.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 책을 서술함으로써 비록 교양서적이지만 옹정제에 대해서 굉장히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한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희제로부터 건륭제까지의 치세가 왜 청 왕조 최고의 태평성대였는지 알기 위해서는 옹정제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 책이 제공하는 정보는 실도 대단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의 부록을 제외한 본문의 목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머리에
    1장 고뇌하는 노황제
    2장 개가 되고 돼지가 되라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4장 천명을 받들어
    5장 총독 삼인방
    6장 충의는 민족을 초월한다
    7장 독재정치의 한계

        1. 남들과는 다른 타고난 처세술

     개인적으로 처세술은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이 처세술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옹정제 역시 처세술에 있어서 훌륭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는 분명히 강희제의 4번째 황자, 사아거로서 황위 계승권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은지 오래였다.

     후술하겠지만 강희제가 황태자로 지목한 이아거의 말썽으로 인해 청 황실은 많은 내부 문제를 겪은 바 있다. 옹정제가 젊은 나이에 등극하지 못하고 한창때에 등극한 것만 봐도 애초에 강희제가 사아거인 그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님을 잘 알 수가 있다. 이와 더불어 그 와중에 옹정제는 자신의 처신을 잘 했고 그런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모습이 결코 우연히 다음 제위를 넘겨 받은 것이 아님을 드러내보였던 것이다.

     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옹정제는 사아거의 신분으로 태자인 이아거의 행동을 보면서 어느정도 제위에 대한 욕심이 생겨났던 것 같다. 물론 다른 황자들도 다 그랬겠지만 사아거는 유독 다른 야심찬 황자들과 달리 정치권과 결탁하지 않았다. 이 말은 곧 옹정제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세력들과 모의해 다음 제위에 대한 욕심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고도의 심리전인 동시에 최고의 처세술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렇게까지는 평하지 않고 단지 옹정제가 사아거로서 학문에 정진하고 권력에 욕심이 없음을 밝혔고 그로 인해 강희제의 눈에 들어 황제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분명 당시 옹정제는 제위를 넘볼 수 있는 계승권상에 있었으며 그럴만한 능력과 야욕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옹정제는 당시 붕당을 이루어 서로 권력을 다투는 정치판을 보고 일종의 회의감과 붕당의 부정함, 정치판의 양면성을 꿰뚫어보기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제위를 꿈꾸는 그로 하여금 더욱 학문에 정진해 더 영민한 군주가 되게끔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실제 그가 즉위하여 행한 일련의 독재정치의 수단, 즉 112책 분량에 달하는「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와 함께 군기처(軍機處)의 설치는 그러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옹정제는 준가리아 토벌을 계기로 신속한 용병과 기밀보존을 목적으로 1729년 궁내에 임시로 군수방(軍需房)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1732년에 판리군기처(辦理軍機處)로 개칭하고 독립적인 상설관청으로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이 곳에서 군사상의 사무만을 보았으나, 점차 황제의 자문에 응하고 조칙을 작성하고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중요사항까지 처리하여 중요한 국무 전반에 걸쳐 심의 결정하는 국가 최고기관이 되었던 것이 바로 군기처였다.

      ‘하늘이 모르는 일도 황제는 안다’라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로 공포 정치가 이뤄졌고 옹정제가 죽자 모든 백성이 환호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독재정치는 상당히 엄격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옹정제의 정치행보는 황제가 되자 그제서야 생각해낸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늘로부터 절대권력을 이임받아 만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내겠다는 야심은 그가 이미 제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가슴 속에 항상 남아있었다고 봐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그만의 처세술이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꼼꼼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세심한 성격

     저자는 옹정제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유약하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하고 있다. 솔직히 청 왕조같은 대제국의 대외정책은 그 지도자의 성격이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했을 때 앞서 봤듯이 옹정제는 강건하고 진취적인 기상보다는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고 확실하며 꼼꼼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의 그런 성격은 앞으로 서술할 그의 정치 스타일과 그의 치세 중에 있었던 몇가지 일화를 보면 잘 알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저자가 서술하기를 만주족은 대륙을 지배하면서 한화(漢化)되어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서 가족 제도나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러지 못 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독재 군주로서의 황제는 가족이라는 사사로운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선 왕조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부득이하게 형제들을 내친 옹정제를 봤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독재 군주로서 그는 항상 만인의 위에 당당하게 서야만 했으나 그의 유약한 성격이 이런 점에 있어서 어느정도 약점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고, 옹정제는 스스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는 그 성격으로 인해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얻었으며 청 왕조의 정치체제를 공고히 다져놓았다. 이 말은 곧 그가 ‘청 왕조 제 2의 건국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사실 만주족은 그 수가 수백만에 불과한 군대식 사회조직을 갖춘 기병이 중심인 군단을 운용하던 동북방의 소수민족에 불과했다.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정복 왕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비슷한 실례로 만주족과 비슷한 배경의 몽골족은 유라시아를 정복하였고 거대한 대륙을 본국인 대원 울루스와 4한국으로 분할하여 다스렸지만 그 치세는 채 100년을 제대로 넘기지 못 했다. 하지만 청 왕조는 오늘날 중국의 계승선상에 존재했던 마지막 왕조로서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라고도 일컬어지던 나라였었다. 원 왕조보다 그 영토는 적을지 몰라도 중국사에 끼친 영향은 그보다 더 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청 왕조의 경우는 옹정제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청 왕조는 중국사의 여러 왕조들 가운데 평균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으며 또한 단 한명의 무식한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고, 독살이나 내분으로 비명횡사에 간 군주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청 왕조가 멸망한 이유는 원 왕조가 그러했듯이, 한족의 반란때문이 아니라 서양 세력의 침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당시 청 왕조의 지배를 받던 모든 백성들은 청 왕조를 정통성이 있는 명 왕조의 계승국가로 여겼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면에는 옹정제의 치세가 아주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기실 강희제 치세에만 해도 청 왕조는 거대한 영토에 걸맞는 제국적 시스템이 갖춰지지 못 했었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것이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 옹정제가 아닌 다른 정복형 군주가 즉위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분명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다음에 즉위할 건륭제가 이룬 업적을 본다면 역시 그에 앞선 옹정제의 치세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평자가 보기에는 옹정제의 이런 성격에서 기인한 그만의 정치 스타일이 청 왕조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3. 뚜렷한 통치 철학과 뛰어난 정치감각

     옹정제에 대해 논할 때 이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중국사에서 가장 강대했던 왕조야말로 바로 청 왕조라고 생각하는데 그 강성함 이면에는 역시 옹정제가 잘 닦아놓은 정치 체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옹정제는 중앙 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펴 잘 처리되지 못하는 단점을 안고 있음을 알고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으로 중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치제도라고 생각한다. 또한 옹정제가 이런 정치적인 개혁을 한 이면에는 전통적인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이 아니라 탄력적인 사고를 지닌 반농반목의 만주족(滿洲族)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본다. 자고로 무슨 일에 있어서나 경직된 사고가 아닌 탄력적인 사고를 지닌 자야말로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크게 신경을 써서, 지방대관에서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주필(朱筆)로 주비(朱批: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 훈계를 내렸는데 이것들 중 일부를 모아 편찬하고 또 이 책의 주요 사료로 채택된 것이 바로 앞서 여러번 언급했던「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다.

     이것 역시 앞선 왕조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는데 아마 저자도 옹정제를 논할 때 이 부분을 가장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까 싶다. 옹정제는 즉위했을 때부터 청 왕조가 들어서기 전부터 대륙에 만연했던 전통적이고 비효율적인 국가 체제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이 바로 잡으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행한 정치적인 개혁은 하나같이 대단히 훌륭하고 대단히 효과적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지방대관들과 나눈 주접이라는 서신은 옹정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다. 청 왕조는 몽골족의 원 왕조와 달리 대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려고 하였가. 그 결과, 철저한 계급주의와 원리주의, 무력 통치를 실행했던 원 왕조와 달리 지배자가 직접 백성을 사랑하고 위할 줄 아는 너그러움과 아량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청 왕조의 치세하의 백성들은 모두 천자의 덕을 칭송하고 자신이 청이라고 하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옹정제 치세하의 독재 정치는 백성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청 왕조는 수백년의 시간을 더 유지할 수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이처럼 여러 통로를 통해 얻은 정보들은 황제에게 접수되어 하나같이 주옥같은 정책 실행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청 왕조는 그 기반을 공고히 하였으니 옹정제가 행한 정책들이야말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또 주목할 것이 당시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한 것인데 말 그대로 ‘청렴 결백함을 기르는 돈’이라는 뜻이며 이는 오늘날 보아도 대단히 합리적이고 뛰어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과는 다른 일인독재체제하의 봉건국가에서 관리라는 것은 명분과 실익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돈방석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탐관오리로 인해서 수탈받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옹정제는 당시 어느 정도 묵인되었던 관리들의 생존을 위한 수탈을(물론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법적으로 규제하고 대신 충분히 살만한 생계비를 지급하는 쪽을 택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것은 물론이요, 관리들과 중앙 정부간에도 이득이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밖에 지방의 천민들을 헤아려 양민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이것은 그가 행한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그는 청 왕조를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백성들이 잘 사난 왕조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다.

     이렇게 간단한 몇가지 사례만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듯이 옹정제는 정치력에 있어서 대단히 탄력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이는 그가 그만큼 뚜렷한 통치 철학을 갖고 있었고 그에 따른 뛰어난 정치감각을 갖고 있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학습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갖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옹정제 당시 총독 삼인방으로 불리던 톈원징, 리웨이, 오르타이 등은 모두 앞에 봤던 옹정제의 정책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사람들인데 옹정제같은 군주 밑에서 그와 같은 정책을 무리없이 수행한 것을 보면 이들의 능력 또한 대단했던 것 같다.

     이처럼 옹정제가 갖고 있던 정치적 능력은 저자가 책에서 표현한 이상이라고 평자는 본다. 명군(名君)과 명신(名臣)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봤을 때 신하들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 걸맞는 임무를 주어 수행케해 결과물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옹정제가 보여준, 모든 군주들이 가져야할 정치적 능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4. 유순한 성격과 다른 무서운 결단력

     아무리 옹정제의 성격이 유순하고 부드럽다고는 하나 그런 성인적인 면모 못지 않게 군주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결단력과 위엄, 소위 카리스마일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옹정제는 단지 성격 탓에 아버지 강희제, 아들 건륭제와 달랐을 뿐이지 그가 위엄이나 결단력이 없던 인물, 즉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고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수누 일족과 관련된 기독교 문제도 슬기롭고 위엄있게 잘 해결했으며 그 다음으로 윈난, 구이저우, 광시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이 토사(土司:토착 호족) 밑에서 반독립적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개혁했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영토를 확실하게 내지화(內地化)했던 것이다.

     당시 티벳이나 먀오족, 통족 등은 중원 밖의 영역이라 하여 간접적인 통치만을 했었는데 명대부터 그들에게 직접적인 통치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옹정제 치세때에 이르러 대륙 남부에 널리 거주하는 먀오족을 본격적으로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 정책에 대해 반란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 철저하게 시행된 정책에 그들은 속소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듯이 옹정제는 어떤 일에 있어서 한번 결심한 바는 곧바로 실행하였으며, 성급하게 실행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해서 한번에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저자가 언급하듯이 그가 신하들에게 황제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호령하는 것을 떠나서 그야말로 진정한 군왕의 면모를 훌륭히 갖춘 지도자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자는 앞서 옹정제의 대외 정책에 대해서 강희제, 건륭제와 달리 소극적이고 크게 내세울만한 업적이 없었다고 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이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으니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토귀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대외적으로 티벳의 동란을 평정, 지배체제를 확립하면서 서북 지방에서 강성하던 준가르부를 공격해 격파한 일이다. 옹정제의 치세 중후반에 행해진 이 대외 정벌은 그동안 청 왕조를 다스려온 옹정제의 의지이자 당당함의 표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오정제는 그 치세가 13년으로 아버지인 강희제(61년), 아들인 건륭제(63년)에 비해 극히 짧았지만 중국사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리고 그가 늦은 나이에 즉위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짧은 치세라고도 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지 못한 일들을 해냈다. 바로 청 왕조를 내부적으로 다듬고 고쳐서 기본 틀을 만들어냈으니 그것이야말로 옹정제가 칭송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Ⅲ. 맺음말

     중국사상 가장 강대했던 왕조이자 동시대 전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하고 강대했던 왕조, 그 왕조의 기틀을 다진 옹정제를 보는 저자의 시각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왜 지금까지 이런 시각의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이런 인물에 대해 간과하고 있던 평자 본인에 대한 부끄러움도 들었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옹정제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을 뒤엎을 정도로 참신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그가 마지막에 강조했던 옹정제 독재정치의 한계에서 인간 옹정제를 뒤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천하의 모든 일을 본인이 직접 관장하고 주재하느라고 개인의 영달과 황제로서의 부귀영화는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 한 사람, 거기다가 독재군주로서 포기하기를 강요받아야만 했던 사생활을 통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옹정제를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죽으면서 그가 13년간 이뤄놓은 통치체제가 옹정제 치세만큼이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 점 또한 주목할만 하다. 왜 옹정제는 하루에 20~30통, 많을 때는 50~60통의 주접을 읽어야만 했을까? 세상만사를 혼자 다 처리할 수는 없을뿐더러 그 자리가 황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정제가 그렇게 했던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가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일을 맡겨도 마음에 들지 않을 바에야 자신이 직접 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자는 앞에서 총독 삼인방으로 불리던 옹정제 치세의 관리들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가 청 왕조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독재자가 죽은 이후 그만의 독재정치는 다시 재현되지 못 했다. 철저히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이 아니라 특출난 개인적 능력에 의해 유지되던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형태는 남았어도 다시 그처럼 철저하게 운영되지는 못 했던 것이다. 즉, 빛 좋은 개살구 격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래서 더더욱 옹정제라는 인물이 대단하게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고, 그의 치세가 청 왕조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올바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한국사에서 비교해 본다면 아버지 고국원왕때의 엄청난 국난을 이겨내고 왕위에 올라 조카인 광개토태왕이 대제국을 이룩할 수 있게끔 토대를 마련한 소수림왕과 옹정제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 고국원왕때의 끔찍한 국난이나 광개토태왕 시절의 위대한 대외정복 사업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도 그 사이 즉위했던 소수림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소수림왕이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아는 자랑스런 고구려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이만 글을 마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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