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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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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쪽 | A5
ISBN-10 : 8932019002
ISBN-13 : 9788932019000
밤은 노래한다 중고
저자 김연수 |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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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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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시리즈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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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청춘들의 가슴 아픈 노래!

역사와 사랑을 노래하는 김연수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밤은 노래한다』. 1990년대 초반에 등단하여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된 수많은 개인의 아픔과 내면을 응시해온 작가가 이번에는 동만주 벌판에 묻힌 역사를 되살려냈다. 일제강점기의 1930년대 초, 저마다의 사연과 서러움을 간직한 사람들이 몰려든 북간도 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30년대 초반 동만주의 항일유격근거지에서 벌어진 '민생단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 새로운 시대를 꿈꾼 네 명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친구인 신여성 이정희, 그리고 이정희를 사랑한 만철의 조선인 측량기수 김해연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용정으로 파견된 김해연은 측량작업을 하면서 간도임시파견대의 중대장인 나카지마 타츠키 중위와 친해지게 되고, 박길룡의 소개로 이정희를 알게 된 뒤 그들과 종종 술자리를 가진다.

혁명조직의 일원이었던 이정희는 이 모임을 통해 토벌대의 정보를 수집하여 조직에 보내다가 발각되자, 김해연에게 어서 피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마음에 품었던 여인의 죽음 이후 김해연은 조국과 이념, 혁명과 죽음에 직면하면서 세계의 복잡한 이면에 눈뜨게 되는데….

작품 조금 더 살펴보기!
김해연은 이정희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을 저주하며 삶을 저버리려 했지만, 다시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또 하나의 순정에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작가는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과 함께 건네받은 한 장의 편지에서 시작된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놓는다. 시적이고 밀도 높은 문장으로 진실해서 아름다웠던 사람들의 숨결과 역사를 그려내었다.

저자소개

김연수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나섰다. 대표작에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A빠이, 이상』,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사랑이라니, 선영아』『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등이 있다. 1994년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했고, 2001년 『�A빠이, 이상』 으로 제14회 동서문학상, 2003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제34회 동인문학상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2007년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1932년 9월 용정
1933년 4월 팔가자
1933년 7월 어랑촌
1941년 8월 용정
1932년 9월 용정

해제: 그 긴 밤,우리는 부르지 못한 노래, 밤이 부른 노래-한홍구
작가의 말

책 속으로

출판사 서평

역사에 묻힌 청춘의 노래가 시작된다 “아, 그대 어두운 자들이여. 그대 밤과 같은 자들이여. 밤이 왔다. 이제 비로소 사랑하는 자들의 모든 노래가 깨어난다. 나의 영혼 또한 사랑하는 자의 노래다.” - 니체 일제강점기인 1930...

[출판사서평 더 보기]

역사에 묻힌 청춘의 노래가 시작된다

“아, 그대 어두운 자들이여.
그대 밤과 같은 자들이여. 밤이 왔다.
이제 비로소 사랑하는 자들의 모든 노래가 깨어난다.
나의 영혼 또한 사랑하는 자의 노래다.”
- 니체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의 점이지대(漸移地帶)인 북간도(연변, 동만)를 배경으로, 조선과 중국의 항일 전사들의 유격구 활동과 당시 간도를 주축으로 한 민족해방운동진영을 벌집 쑤시듯 뒤흔들어놓았던 ‘민생단(民生團)’ 사건을 모티프로 취한 장편소설이다. 만철 용정 지사의 측량기수인 주인공 ‘김해연’이 용정의 여학교 음악 선생이면서 기실은 조선청년공산당원인 이정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의 의문의 죽음 이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조국과 이념, 사랑과 변절,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면서 이야기는 숨 가쁘게 진행된다. 이른바 심리적 현실적 무국적자들의 삶과 사랑을 다룬 이 소설은, 김연수의 전작들에 이어 이른바 ‘국경을 내면화’한 채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밀실이 아닌 벌판에서 역사와 대의에 묻혀 소리 없이 사라져간 무수한 ‘나-그들’의 이야기가 낮과 밤의 빛을 오가는 듯한 김연수 특유의 시적이고 밀도 높은 문장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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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 주선희 님 2010.04.09

    하지만 측량의 세계에 더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노력하는 한, 인간은 잘못을 범한다'라는 괴테의 말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측량의 세계에는 근사치만 있지, 참값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측량이란 완전해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익히는 일이다. 자신의 몸으로 세계를 재어보면 분명 참값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것을 도면으로 옮길 때는 참값을 포기해야만 한다. _p.54-55

회원리뷰

  • 만약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났으면 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이 한 몸 기꺼이 조국과 민족에 바치는 독립투사가 되었을까? ...

    만약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났으면 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이 한 몸 기꺼이 조국과 민족에 바치는 독립투사가 되었을까? 아니면 부귀영화를 좇는 친일파가 되었을까? 이도 저도 아닌, 민족의 개념 같은 건 없이 각자도생하는 소시민처럼 살았을까? 


    사람마다 대답은 다르겠지만 아마도 이미 그건 개인의 선택을 벗어난 문제일 것이다. 역사가 격동하는 순간에 개인은 자신의 삶은 선택할 수 없고 그저 휘말려 들어갈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역사의 폭력 앞에서 개인의 실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김연수의 소설 『밤은 노래한다』는 역사 앞에 놓인 개인의 삶을 고찰하게 한다. 


    이 소설은 한국에서 의무 교육을 통한 역사 교육만 받은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이해하려면 1930년대의 만주와 '대한민국'이 가르치지 않았던 사회주의 세력의 항일 운동에 대해 알아야 한다. 


    만주는 1677년 청나라가 봉금(封禁) 조치를 시행하며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땅이었으나 청의 빈민들이 화적과 기아를 피해 만주로 이주해 살기 시작한 곳이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청 정부는 만주에서의 거주와 개간을 공식적으로 승인한다. 한편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도 국경의 조선인들은 기아에 시달렸고 새로운 땅을 찾아 만주로 이동한다. 중국인과 조선인이 혼재해 살고 있던 만주를 일본은 1931년 무력으로 제패한 뒤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운다. 


    1932년의 만주는 중국인들과 일제의 식민지인이 돼버린 조선인들도 살고 있으며 일본의 관동군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당시 만주에서는 중국 공산당과 조선 공산당이 각기 항일 운동을 펼치고 있었으나 조선 공산당은 해체됐다. 해체된 조선 공산당의 인원들은 당 앞에 국가와 민족을 통일하여 집결하라는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이라는 지침에 따라 중국 공산당에 합류하여 항일 운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는 그 '하나의 공산당'을 분열시키기 위해 조선인 민생단을 조직해 침투 시킨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김해연은 20대 초반의 조선인으로 만철(滿鐵)에서 일하는 청년이다.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식민지 체제 하의 일본인으로 자랐을 그에겐 '민족'이라든지 '조국'같은 개념이 희미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없었을 지도. 만주는 황량하고 차가운 땅이다. 그 땅에는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중국 공산당과 조선인 소비에트가 있다. 치열한 민족과 사상의 투쟁터에서 김해연은 오로지 개인의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고 있었다. 


    김해연은 결혼을 약속한 애인의 사망 사건에 휘말린다. 그것은 그 자신과 그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를 모두 거짓으로 만든다. 이 사건으로 그는 한 번 건너면 다시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불타는 다리'를 건넌다. 이제 잔인하게 깨달은,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삶은 진실이어야 할 텐데 그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 죽음을 택한다. 그는 역사의 조연도 되지 못한 무기력한 개인으로 삶을 마감하려 한다. 


    하지만 만주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던 조선인 식구들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이후 그는 실어증을 앓는다. 얼큰해진 술자리에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그에게 분노한 길송이형에게 실컷 두드려 맞는다. 막힌 그의 입에서 갑자기 서러운 울음과 외침이 터져 나온다. 복수할 거라고. 


    그는 순전히 타의에 의해 이제까지 살던 세계가 송두리째로 부정당하는 경험을 했다. 그런 그의 가슴속엔 복수심이 조용히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배신감에 찾아간 나카지마를 총으로 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에게는 복수할 구체적인 의지도 힘도 없었다. 그에겐 어떤 무력감만이 남았다.

    내 몸에는 어떠한 소망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내가 겁낸 건 바로 눈물이었다. 늙은 나무에 피는 꽃처럼, 내 마른 몸에서 눈물 같은 게 나올까 봐.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인간으로 볼까 봐. 친절을 베풀고 나를 감싸 안을까 봐. 그리하여 사람들이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나 같은 놈도,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떠한 사람으로 되며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 같은 놈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까 봐.

    123p

    그는 다시 태어난 세계에서 새로 만난 사랑을 택한다. 여옥이와 경성으로 돌아가려 한다. 경성으로 돌아가기 전 사진관 식구들이 유정촌에서 있는 여옥이 언니 결혼식에 참가하던 날 그들은 관동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는다. 유정촌은 항일 조선인 소비에트였고 그 결혼식은 유격대에 물자를 전달하기 위한 위장 행사였음이 발각된 것이다. 


    당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역사는 비참하다. 폐허로 된 어랑촌과 즐비한 시체 속에서 그를 발견하고 살려준 것은 아이러니하게 변절한 항일 독립운동가 최도식이었다. "너만은 살려줄 꼬마" 민족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었는지, 양심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너 같은 놈은 살아있어도 아무런 해도 안된다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여옥이는 한 다리를 잃은 채로 김해연과 헤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김해연은 두 번째로 모든 걸 잃는다. 하지만 이 두 번째 역사의 폭력을 계기로 그는 변한다. 살아남은 몸을 항일 유격구로 끌고 들어간다. 


    그가 항일 유격구에 들어가 항일 운동에 매진한 이유는 민족과 국가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세상을 빼앗아 간 일제에 대한 복수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항일 유격구가 민생단으로 인해 술렁거리고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그곳엔 두 명의 조선인 지도자가 있었다. 


    박도만은 현실적인 사상가다. 중국 공산당의 지침인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을 따라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하나의 공산당으로 항일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맞서는 박길룡은 민생단으로 이상을 좇는 민족주의자다. 항일 유격구의 정보가 민생단 첩자에 의해 새어나간다는 소문으로 유격구는 광기에 휩싸인다. 서로를 의심하고, 적을 쏴야 할 총구는 동료의 머리통을 향한다. 광기는 걷잡을 수 없다. 수백 명이 서로 죽이고 서로 죽는다.


    민생단과 반민생단이 서로를 서로의 이유로 몰아세워 죽이는 동안 김해연은 그 지옥에서 탈출한다. 역사의 폭력은 유순한 그를 변하게 만들었다. 그는 나카지마를 찾아가 오른팔을 쏘고 그를 인질 삼아 유격구의 포위를 풀고 그곳에서 빠져나간다. 마지막 발걸음 전 어둠 속에서 노래 부르던 한 남자를 죽인다. 다시 그는 온전한 하나의 개인으로 돌아간다. 


    1942년, 처음으로부터 10년이 지나고 그는 최도식을 찾는다. 변절자 최도식을 찾아 그를 죽이려 한다. 최도식에게 이정희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그에게 거짓이었지만 최후의 순간에 그를 지키려 자살했다. 권총을 빼려는 순간 최도식의 자식들을 본다. 김해연은 최도식을 자식들 앞에서 죽일 수 없다. 복수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죽고 죽이는 복수의 나선에서 내려온다. 


    김해연은 결정적인 전환점마다 선택을 한다. 자살을 선택하기도 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에 항일 유격구로 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을 넘어선 사상의 문제로 서로를 죽이는 유격구에서도 자신의 의지로 빠져나간다. 흔히 인간은 역사라는 거대 기계의 한 부품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김해연은 역사의 톱니바퀴로 마모되지 않았다. 삶의 전환점에서 민족이나 이념이 아닌 삶과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으므로. 역사에 휘말렸을지언정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었고 그는 살아남았다. 


    반면 자신의 실존보다 이념을 우선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정희, 안세훈, 박도만, 최도식은 모두 독립을 꿈꾸며 모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던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오해하기 시작하고 서로를 죽이게 된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유가 오로지 이념과 사상이었던 이들은 낮을 꿈꾸며 밤에 노래했다. 그들은 모두 비극을 맞았다. 


    아마도 소설이라 가능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역사를 이루는 부품이 아니라 오롯한 자신만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유기체임을, 그래야만 함을 믿고 싶다. 


    지금 우리 역사에선 만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했던 항일 운동을 말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흘렸던 피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소설가 김연수는 그들을 지면으로 불러냈다. 춥고 황량한 땅에서 피 흘리며 서로 죽이고, 죽어갔던 청춘들이 있었다. 개인의 역사는 공적 역사로 치환되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당위에 알맞게 취사선택된다. 하지만 역사엔 당위가 없다. 잊혀야 할 역사도 없다. 그런 까닭에 아직도 밤은 노래하고 있다.

     

     ˝아까 그놈들은 토비들이었다. 우리와는 전혀 싸울 마음이 없는 마적단에 불과하지. 저런 토비 따위 말고 말이야. 공비를 만나본 적은 없겠지? 생포해보면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녀석들이 수두룩 해. 그런 녀석들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공산당 만세를 외친다. 그놈들의 머리통에다가 총알을 발사할 때, 우리는 공히 고통을 잊어버리지. 내게는 총이 있고, 그놈들에게는 신념이 있으니까.˝ 23p
     시간의 흐름을 일일이 느껴가면서 천천히 일했고 자주 암실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어 가만히 암등을 바라봤다. 직시할 수 있는 빛, 볼 수 있는 어둠. 암등은 빛도, 어둠도 아니지만 동시에 빛이자 어둠이다. 영국더기 언덕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빛의 세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빛의 세계 속에 어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 채게 됐다. 인화된 양화(陽畵)는 필연적으로 음화(陰畵)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은 현상한 필름에도, 인화한 사진에도 있지 않았다. 진실은 음화와 양화, 두 세계에 동시에 걸쳐 있다. 126p
     누군가를 죽일 수만 있다면, 내가 살아온 과거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었다. 내 인생을 모두 바꿀 수 있었다. 나는 고문받았고, 그때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들을 모두 목격한 후에 살아남은 자에게 고통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다만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이 아직은 살아있다고 자각하는 일이 좀더 우리가 아는 고통에 가깝다. 173p
     그 말에 나는 눈을 떴다. 산등성이만 바라봐도 눈이 푸르게 물들 것 같은 7월의 화창한 날이었다. 남산 보자구드니 맘은 벌써 뎌길 넘어가 있는겐데. 문득 여옥이가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먼저 적위대 쪽에서 총구를 내렸고 이에 호응해 구국군이 총구를 돌렸다. 산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돌리다가 나를 바라보는 한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마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섞여 서 있던 어린 학생이었다. 우리에게 토벌대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소선대원이었다. 그 학생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누가 볼세라 얼른 양쪽 소매로 그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동자. 내 눈동자. 두 개의 검은 눈동자. 어둠을 보지 못하고, 또 믿지 못하는 두 개의 검은 눈동자. 226p
  • 시끌벅적하다. 4.11 총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이라서 그렇다고 여긴다. 과연 그런가.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우린...
    시끌벅적하다.
    4.11 총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이라서 그렇다고 여긴다. 과연 그런가.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우린 그전부터 이미 절망하고, 환멸에 중독됐다. 너무 멀리 가지 않아도, 용산에서 목격한 불두덩에서 우리는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시절임을 뼛속 깊이 새겼다.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에서 울려퍼진 자본에 대한 환멸은 또 어떤가. 어쩌면 99%를 무간지옥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를 자유무역협정(FTA)의 구렁텅이도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매일 구럼비의 울음을 들어야하는 비극도 우리 것이다. 봄밤을 진득하게 느껴보고 노래할 수 없다. 절망과 환멸을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   
     
    1930년대의 간도라는 세계. 
    연변이라고도 부르고, 동만이라고도 불린,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기막힌 사연이 많은 땅. 한때 1930년대(특히, 경성)를 다룬 일군의 소설 트렌드가 있었다. 허나 이 소설, 그것들과 다르다. 거칠게 말해서 그것들이 야들야들하거나 판타지로 포장됐다면, 《밤은 노래한다》는 바늘로 쿡쿡 찔러댔다. 소재에서 비롯된 듯하다. 1930년대의 간도, 항일유격근거지에서 벌어진 ‘민생단 사건’. 이전에는 몰랐던, 동지가 동지를 죽이는 기막히고도 참담한 사건. 대체 무엇이 잘못됐고, 누구의 잘못인지 얽히고설켜 혼돈 그 자체인 사건. 그리고 이에 맞물린 어떤 사랑이야기. 밤'을' 노래한 것도, 밤'이' 노래한 것도 아닌, 밤'은' 노래한다. 보조사 '은'은 격 조사 '이'보다 좀 더 객관적인 느낌이다.
     
    간도의 문장은, 어쩔 수 없이 서늘했다.
    속살을 가늠키 힘든 어떤 사랑의 편지로 시작하였으나, 제목이 암시하듯, 이 노래는 ‘밤’이 부르기 때문일까. 그 사랑은, “시시하게 죽을까 봐 온 몸을 떨어대면서 겁을 내는” 대신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사랑. 사랑의 속성 자체가 본디 그렇다지만, 이 사랑은 왠지 더더욱 위험하다. 불온하다. 그 대상이 고결한 존재,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순수한 영혼에 가까운 ‘이정희’였기 때문이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고, 사랑도 ‘사랑 그대로의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서늘한 이유가 있었다.

    ‘김해연’은 그럼에도, 사랑에 빠진 작자였다.
    국가나 민족을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독립이나 해방이니 하는 말에도 시큰둥한 그는, 간도(만주) 또한 모른다. 그래서 나 같은 독자와 비슷한 처지다. 내가 그에게 감정이입을 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를 따라 우리는 만주를 만나고, 민생단 사건과 마주대한다. 깊은 어둠이, 근원을 알 수 없는 혼돈이 자리한 그곳. 좀더 깊은 곳에 들어갈수록 서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는 다른 의미에서도 우리였다.
    소박한 삶을 원하지만,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지 않는 세상으로 인해 때론 뜻하지 않은 격랑에 휩쓸리기도 하니까. 김해연은 그랬다. 우리가 그러하듯. 그는 사랑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한편으로, 상상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면서 어른의 세계로 편입한다. 어쩌면 지금-여기의 시대가 그렇지 않나. 우리라고 다를까.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 앞에 닥치는 사건사고는 우리를 예기치 않은 곳으로 데려간다. 앞서 언급한 것들이 그랬다. 우리는 절망했고 환멸한다. 김해연의 애인이 된, 다리를 잘리게 된 여옥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다가오던 서늘함, 어느덧 냉기가 되어 있었다.
    크게는 같은 뜻으로 모였던 동지들. 그러나 그들, 서로 죽고 죽인다. 아주 조그만 의심이 단초였다. 어떤 세계는 그렇게 조그만 의심에서 파탄이 나기도 한다.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그 무엇. 작은 흙이 뭉쳐 거대한 돌덩이가 되어 굴러오듯, 격렬한 반목과 대립으로 이어진 조그만 의심은 주인공들을 미치게 만들고 고립시킨다. 읽는 사람에게도 그것은 하나의 고충이다. 감정적 소모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죽어가고 있다. 절망과 환멸 속에서.

    그렇다면,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까?
    읽으면서 그것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들이라고 희망을 건사하고 싶지 않았을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텐데... 희망을 이야기하고, 품고 싶으면서도 그러나 그들, 종국엔 아무도 믿지 않는 상태가 됐다. 희망 따윈 없다는 절망이 모든 걸 덮어버린다. 이럴 때, 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다. 파국 혹은 절멸.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매일 절망하고 환멸을 감내해야 하는 삶은 얼마나 고단한가 말이다. 그들이 더욱 절망하고 환멸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같은 뜻을 가지고 모인 동지들이었으니까.  

    희망 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실패를 예정한 인생들의 이야기여서 더욱 끌렸던 것 같다. 희망은 사실 절망의 끄나풀일지 모른다. 계속 고집을 피우게끔 만드는. 김해연이 측량기사인 이유도 그래서였을까. 근사치만 있지, 참값은 없는 것이 측량이다. 김연수의 표현에 따르면, “완전해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익히는 일”이다. 살아있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살아 있는가’라고 끊임없이 묻지만, 우리는 이 바람이 어디에서 부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바람이 불어오고, 우린 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그럼에도, 무엇이든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진짜 원하는 희망이든, 우리 앞에 떡하니 존재하는 절망이든, 생을 위해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 이 엄혹한 세계, 신산한 삶을 살아야할지라도, 환멸을 참고 견뎌야 할지라도 말이다. 김연수는 박도만의 이야기를 빌어 우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성장한다는 것이오. 그게 힘이라오. 물론 나 역시 사람을 죽인 뒤에 톨스토이의 책을 버렸소. 결국 잔혹함마저도 진리의 한 부분이라고 인정하게 된 것이오... 인간이 변화하는 한, 세계는 바뀌게 되오. 죽는다는 건 더 이상 변화하지 못하는 고정의 존재가 된다는 것. 다만 이 역사 단계에서 더 이상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 죽음은 그 정도로만 아쉬울 뿐이오. 내가 죽음으로써 세계가 조금 변화한다면 그 이상 아쉬움은 없소.”

    이것은 지구에, 세계에 발을 딛고 서 있기 위한 우리의 태도다.
    지금,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사랑이어도 좋다. 어쨌든 우리는 어제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어제와 다르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세계다. 오늘이라는 이름의 세계.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 내가 숨 쉬고 호흡하고 발걸음을 떼는 오늘. 그랬으면 좋겠다. 어제와 다른 오늘에게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물론 그 오늘은 그냥 오지는 않을 터이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명제는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밤은 노래한다》는 그렇게 우리의 움직임을, 우리의 발악을 추동하는 이야기다. 결과야 어쨌든. 서로 죽고 죽이는 혼돈이 인류에게 닥치는 것은 누구든 원하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밤은 노래하는 이유다. 봄밤, 그래서 나는 노래하고 싶어졌다.


    이 리뷰는 사계 백일장 : 봄 응모작 입니다. 백일장 바로가기
  • 핓빛속에 지워져가는 | ra**ssant7 | 2010.03.04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이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고귀함과 하찮음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다. 그게 부끄러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500여명의 혁명가가 적이 아닌 동지의 손에 의해 죽어간 1930년대 초반의 '민생당 사건' 을 배경으로 한 소설.소비에트, 조선 공산당, 조선혁명당등 근현대사를 공부할 무렵 가장 어렵게 공부한 그 부분이 소설에서 다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미 나는 이 책에 70%이상의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암기만 하던 그 시대의 사건들과 당들이 시대의 폭풍속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이어져가는지, 그 과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은 나에겐 조금 어려운 감이 없진 않으나 북간도, 그 세 글자가 나를 붙잡았던것 같다.

     

    유격구는 더 없이 평화롭고 서로 의지하는 곳이지만, 그 만큼 잔인한 곳이기도 하다.

    유격구에서는 마음을 쉽게 주지 않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언제 누가 죽을지 모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선 모두가 숨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서며 격렬하게 저항하던 만주지방은 최전선이였고 사상적으로도 매우 복잡한 곳이였다. 그곳에 나 (김해연) 이 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고자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청춘들이 있었다. 복잡하고 흐릿한 세상속에서 그들이 가야 할 길 또한 막연하기만 했으나 그들은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그 이유만으로 살 얼음판을 걸어나가고 있던 것이였다. 박도만, 최도식, 안세훈, 박길룡, 그리고 혁명의 길을 걸어가던 이정희, 그런 그녀를 사랑한 김해연에게 닥친 잔혹하고도 소름끼치는 이야기가 소설안에 담겨 있다. 배신은 배신을 부르고, 오해와 비뚫어진 신념이 죽음을 부른다. 바른 세상을 외치던 젊은 피들이 결국엔 피의 역사를 쓰고 만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간도란 양면성을 지닌 곳이였다. 지금은 나를 품고 있으나 언제 내 육체를 짓이겨 피를 흘리게 할지 모르는 곳이였다. 그런 곳에서도 그네들은 혁명을 외치며 그 목소리로 세상이 변화하기를 기대했다. 그런 와중에 민족이 민족을 죽이는 민생단 사건이 일어난다.서로 의지하며 전진해야 하던 시점에,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게 민족의 손에 사라진 영혼들은 일본에 의해 짓밟힌 것보다도 더한 아픔을 안고서 사라져 버린게 아니였을까?

    나는 내 인생에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했더랬죠. 가슴으로, 어깨로, 목으로 밀려들그 차가운 물결처럼, 더 많은 기쁨이, 더 많은 고통이 내 몸을 감싸기를..그리하여 죽는 그날까지 배우고 또 배울 수 있게 되기를. 그런 시절은 이제 아득하게 멀어졌군요.

     

    결국 민생당 사건은 정해진 이유없이 죽고, 죽이는 피의 역사로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그리고 그 사건을 바라보던 한 남자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현대에 까지도 이어지게 되는 것이였다.읽는 내내 답답하고 터질것 같은 울분을 누르기 힘들었다. 결국엔 최도식을 살려보내야 했던 김해연의 선택에 대한 울분이 아니라, 그들이 지나온 긴긴밤의 외로움과 아픔이 또 한번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이였다.

     

    그런 시대가 다시 한번 도래한다면, 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맞설 것인가, 아니면 두 눈을 감을 것인가?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채, 허공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 김연수 소설! | so**1123 | 2010.02.16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과연 김연수다.   김연수의 소설은 묵직하고 또한 날카로웠다.   ‘민생단&rsqu...

    과연 김연수다.

     


    김연수의 소설은 묵직하고 또한 날카로웠다.


     

    ‘민생단’ 사건이라는 희대의 비극적인 사건을 갖고 조선시대 간도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이 소설을 보고 나는 깊이 감동받았다.


     

    김연수라는 작가가 이렇게 화려하게 성장했던 것일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후 그의 글이 부쩍 힘찬 느낌이 든다.


     

    울림을 주는 그 어떤 흔적도 있고.


     

    김연수의 행보가 기대된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꽤 그럴 듯한 소설임에 분명하다.

  •         부르지 못한 노래 -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

            부르지 못한 노래 -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김연수 장편소설 『밤은 노래한다』를 읽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의 점이지대인 북간도를 배경으로, 조선과 중국의 항일 전사들의 유격구 활동과 당시 간도를 주축으로 한 민족해방운동진영을 벌집 쑤시듯 뒤흔들어놓았던 '민생단' 사건을 모티프로 심리적현실적 무국적자들의 삶과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민생단 사건은 중국공산당 내 조선인 당원들의 대부분이 민생단원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중국공산당과 항일 유격대 내부에서 반민생단 투쟁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500명의 조선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토벌에 의해 희생된 숫자보다 혁명조직 내에서 이념, 사상, 투쟁, 배신, 의심, 오해로 점철된 죽음과 죽임이 훨씬 더 많았던 참담한 사건이다.

     

    주인공인 만철 용정 지사의 측량기사 '김해연'은 용정의 여학교 음악 선생이면서 기실은 조선공산당 혁명전사인 이정희(안나 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그녀의 의문의 죽음 이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조국과 이념, 사랑과 변절,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게 되고 결국 민생단 사건이라는 가혹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혁명을 꿈꾸던 박도만,최도식,안세훈,박길룡의 네명의 중학교 동창생들이 그 잔인한 세계에 함께 있었다.

     

    나 반지를 받겠어요.지금 당신은 그리뇨프를 닮았어요.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 같은 눈빛이에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리뇨프보다는 푸가초프가 되기를 원하는 마리아랍니다. 그러니 저를 사랑하지 마세요.너무 사랑하지는 마세요.

     

    간도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처한 세계는 ‘빛도, 어둠도 아니면서 동시에 빛과 어둠인 세계’였다.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과 농밀한 어둠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시각과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민생단도 되고 혁명가도 될 수 있는 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있었다. 간도땅에 살고있는 조선인들은 죽지 않는 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 소설은 바로 이 민생단 사건을 겪으면서 억울하고 허망하게 죽음으로 내몰렸던 또는 내몰았던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이 담고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아름답고도 서글픈 연민과 사랑 이야기가 척추처럼 버티고 서있다.

     

    나를 데려가우. 이번에는 진짜 바다를 내게 보여줍소.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떠한 사람으로 되며 사람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잘 압지. 그러니 내게 진짜 바다를 보여줍소. 그럼 나는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의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이 되겠슴둥

     

    김해연이 이정희를 잃고 아편에 빠져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을때 만난 여옥이 김해연에게 하는 말이다. 그녀 역시 간도의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서 기구한 운명의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불쌍한 존재였다. 가혹한 운명앞에 놓인 개인은 너무나 무력하다. 더구나 그 무력한 개인이 보다듬어야 할 사랑의 무게는 또 얼마나 무거울까.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가 다시 폈는지 모른다. 아프고 저릿저릿한 운명 앞에 놓인 한없이 무기력한 사랑 때문에 자주 숨이 막혔고 그때마다 책장을 덮고 숨을 크게 내쉬기를 반복하면서 이 책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그걸 알겠어요. 이미 너무 늦었지만. 그러기에 말했잖아요. 지금까지 내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그러니까 당신과 그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때, 이 세상은 막 태어났고,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평안 속으로 나는 막 들어가고 있다고.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네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

     

    이쯤에서 나는 왜 하필 20년도 더 지나서 쓰여진, 서른한살의 나이로 죽은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작가는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수 없었다.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우리 삶에서 가려진 내밀한 삶의 이야기였고 부르지 못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노래할 수 있다면 그건 참으로 높고 아름다울 소리를 낼 것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그토록 간절히 소망하고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끝- (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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