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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반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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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쪽 | A5
ISBN-10 : 8984282359
ISBN-13 : 9788984282353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반양장) [반양장] 중고
저자 허영철 | 출판사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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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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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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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을 작은 결 하나 놓치지 않고 다채롭고도 따뜻하게 담아냈다. 여섯 개의 장과 여섯 개의 인터뷰, 촌철살인의 미니 인터뷰, 남북을 아우르는 각주,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는 별첨 표까지, 다양한 구성 속에 저자의 이야기는 때로는 소설처럼, 때로는 철학서처럼, 때로는 흥미진진한 역사 평전처럼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흡입력이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 분단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건너 온 허영철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새롭게 읽는 한국사로서 자리매김 된다. 읽다 보면 손에 땀이 고이고, 가슴이 촉촉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하면서 저자와 더불어 우리나라 현대사의 행보를 가장 생생하고 의미 있게 경험할 수 있다.

저자소개

목차

일러두기
추천사

1장 팥각시와 아오지(1920~1945)
성 아래 팥각시 있어/ 지주는 지주고 소작농은 소작농이더라/ 손가락을 잃고 어른이 되었다/ 금쟁이는 꿈을 먹고 노동자는 일을 하고/ 채탄 굴에 그냥 주저앉았다/ 사람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일본인 가가야와 <공산당 선언>/ 고향은 변한 것이 없더라/ 아오지에서 일한다는 것
마주이야기-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어요"

2장 노동당원과 착한 사람(1945~1950)
나는 자랑스러운 노동당원이다!/ 찬탁이 반대고 반탁이 찬성이다/ 3.22총파업 투쟁/ 어느새 혁명가가 되어 있었다/ 시간, 그것은 영원으로 끝나기도 한다/ 변산에 허영철이 들어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내게 당은, 그런 곳이다/ 사람의 두 모습/ 착한 사람들이 잘 사느 세상
마주이야기- "앞으로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이다"

3장 빨치산과 인민위원장(1950~1952)
전쟁의 시작, 다시 고향으로/ 부안군 인민위원장 허영철/ 서울을 지켜라!/ 나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 황해도 도치면 인민위원장 허영철/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허영철(1)/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허영철(2)/ 간부가 되면 걸음걸이부터 달라진다/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허영철(3)/ 백사지 양복천으로 빚을 갚고
마주이야기- "그렇다면 그건, 내가 북에서 다 경험한 것이다"

4장 영웅과 간첩(1952~1955)
영운은 저만큼 띄워 놓고 본다/ 이것은 당 중앙의 명령이다/ 파슬파슬 상쾌한 기분/ 남쪽에 나가면 모두 죽어/ 30초가 목숨을 살렸다/ 몇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허영철에서 전귀환에서 김귀환으로/ 피체
마주이야기- "내 사상의 바탕은 사람이다"

5장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1955~1991)
좌익 재소자 사상 동향 카드/ 서신 기록/ 면회 기록
마주이야기- "따뜻하고 행복한 이야기도 있어"

6장 여기와 거기(1991~2006)
인간 승리다!/ 귀향, 이제는 사라진 사람들/ 혁명가, 이리저리 사회에서 살아가기/ 보이지 않는 것이 나를 돌봐 주었다/ 역사는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통일이라는 아름다운 꿈을 꾼다/ 나는 여기서도 살았고 거기서도 살았다
마주이야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덧붙이는 글
연표
별첨 표 목록
참고 문헌

책 속으로

출판사 서평

책 속 한 문장

회원리뷰

  • '공화국' 개념의 정립 | ph**334 | 2015.10.18 | 5점 만점에 4점 | 추천:0
               &nbs...

                       

                               ‘공화국’ 개념의 正立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을 구술하고 기록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讀評

     

                                                                                                                       무학산인 박 희 용

     

     

     “네, 공화국이 있어서 견뎠다는 것도 그런 의미예요. 설사 공화국이 없었더라도 견뎠겠지만, 그래도 공화국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혁명하고 통일할 수 있는 기지가 굳건히 있다, 늘 함께 있다, 그런 마음인 것이지요. 마음의 신념을 끊는다는 건 육체의 생명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어떤 고통을 겪어도 그 신념을 실현할 기지가 남아 있다, 우리가 혁명하고 통일을 할 기지가 굳건히 남아 있다, 그런 마음이 사람을 꿈꾸게 하고 강하게 해요”

    이 말에 의문을 품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공화국’, ‘혁명’, ‘통일’, ‘기지’란 어휘가 경직된 의식화의 이미지를 갖지만, 지식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쉽게 이해하고 흔히 사용하는 것들이다. 특히 마음의 신념은 육체의 생명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는 말은 종교인과 실천철학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말은 우리 사회에 널리 통용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2006년 현재를 사는 평범한 대한민국 사회의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1955년 7월에 피체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및 간첩 미수’의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구형받아 3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1991년 2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미전향장기수 허영철이 한 말이다.

    비전향 장기수가 한 말인 줄 알고 읽으면 섬뜩하지만, 모르고 읽으면 한국 사회에 어느 의식화가 투철한 통일지상주의자가 한 말 쯤으로 치부하고 그냥 넘길 수 있다. 우리 일반사회에서 잘 안 쓰이는 어휘이기 때문에 좌파 성향의 지식인이로구나 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파 성향의 지식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며 ‘공화국’이란 어휘가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4 ․ 19혁명, 5 ․ 16혁명에서 보듯 ‘혁명’이란 말도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민주주의에 튼튼한 ‘기지’로 만들어 북녘 동포들을 구출하자는 주장이 1950~7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에 통일정책이었다.

    이처럼 말 하나만을 놓고 단순하게 보면, 좌익과 우익, 공산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의 차이가 없다. 즉 겉으로 나타나는 명분상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명분 안에 내장되어 있는 내용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전혀 다르다. 하드웨어는 같지만 소프트웨어는 전혀 다르다. 같은 소리로 발음하지만 의도와 목적이 판이하다.

    이러한 표리부동은 한반도에서 이후에 발생한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었다. ‘공화국’은 같은 말로 출발했지만, 광복 70주년인 2015년 오늘날엔 극과 극의 차이가 난다. 남한과 북한 모두 국명과 헌법에서 ‘공화국’을 선두에 내세우지만, 그 해석과 적용이 전혀 다르다. 그 속에 사는 국민들 역시 개인마다 ‘공화국’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그러므로 그러한 차이를 수렴하는 길이 곧 통일에 근접하는 길이다. 개인마다 다른 차이를 먼저 통일하고, 다음으로는 남한과 북한이 상호 논의 과정을 통하여 ‘공화국’에 대한 개념 정의를 새로 내림으로써 통일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할 수 있다.

    먼저 허영철의 육체와 정신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자.

    그는 1920년 11월 5일 전북 부안군 보안면 성동에서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지극히 가난한 농민인 아버지 허응용과 어머니 임씨의 3남 2녀 중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성동은 시산 허씨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집성촌으로 서당을 개설하여 자손들을 교육하는 반촌이었다.

    1926년 7세 때 성동의 사립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다녔으나 폐교가 되어 마을 서당에 다녔다. 서당에서 『천자문』, 『학어집』, 『소학』, 『통감』, 『당음』을 배웠다. 또한 한시를 배우며 짓기도 하였다. 비록 고등교육을 받진 못하였지만 기초적인 신식교육과 서당교육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소양을 길렀다. 이후의 구술 자서전에 나오는 여러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문제의식 습득과 실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인문학적 소양과 휴머니즘적 심성이 이 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0대 초에 아버지가 소작료를 못 낸다고 소작권을 빼앗고 미납분도 보증인에게 강제 집행하는 것을 보면서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둘 사이에는 어떤 넘어설 수 없는 경계가 있구나 하는 계급이나 계층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그때는 정말 그것이 이치에 맞지도 않고 당하는 것이 억울도 했지만 해결 방법을 몰랐어. 저마다 이야기를 해 보아도 도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농촌에서 소작농들이 1년 내내 농사지어서 지주에게 바치고 나면 겨우 한철이나 양식을 하잖아? 봄부터 배곯다가 색걸이 내서 먹고 새똥 빠지게 일해서 수확하면 또 다 지주 집에 갖다 바치고. 그러니 늘 양식이 모자라고, 옷은 헌 걸레 조각 같은 것만 걸치고. 그러면서 평생을 허리 한 번 못 펴고 굽실굽실하며 사는 거지. 그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농촌을 떠나 노동판에 왔는데도 같은 일이 여전히 일어나는 거야. 내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은 온통 모순투성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면 그건, 고쳐야 하는 거 아니겠니?”

    위의 말에서 보듯 농촌에서의 간고한 유년 시절과, 17세인 1936년 봄에 함경남도 단풍선 철로공사에 인부로 지원하여 일하기 시작한 후 1942년 말까지 함남 와포, 전북 김제, 함북 무산과 길주, 성진, 함남 함흥, 원산, 서울 등지에서 일당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40년부터 1943년까지 3년 동안 일본 북해도 석장군 평화광에서 탄광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이어서 1944년에 함북 아오지 탄광과 문평제련소에서 석 달 씩 일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해방을 맞았다.

    출신은 농촌 소작농의 아들이지만 소년기와 청년기까지의 이 노동자 생활 기간 동안에 체득한 인식과 판단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는 의식 바탕을 스스로 만들었다.

    그가 사회의식에 는 뜨고 막연하게나마 공산주의 기초에 대해 알게 된 계기는 북해도 탄광에서 책이나 신문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고, 일본 공산주의자인 가가야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출구 모를 문제의식에만 들끓고 있던 청소년시기를 지나 스물한 살에 한창 지적 탐구심이 왕성한 그에게 <아사히신문>, <북해도타임>, <동아일보>는 좋은 식료였다. 또한 조선에 주문해서 읽은 『반만년 조선 역사』, 『정몽주 비화』,『김옥균 실기』 등의 많은 책들은 인문학적 소양을 스스로 기르도록 하였다.

    현장책임자인 일본인 가가야는 허영철에게 공산주의 기초를 심어주고, 이후 허영철로하여금 투철한 공산주의자로, 그것도 비전향 장기수로 한 평생을 보내도록 한 원인이었다. 가가야로부터 듣는 이런저런 이야기와 빌린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창을 넓혔다. 특히 가가야가 말하는 ‘새로운 세계’는 그 당시엔 곧바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허영철로 하여금 평생 화두로 삼아 용맹정진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가야가 약 3년 동안에 대화와 교양 도서 소개 등의 개인 교습을 통해 허영철의 의식을 향상시킨 다음에 빌려 준 두 권의 책 『프롤레타리아 경제학』과 『공산당 선언』은 허영철이 공산주의자가 되도록 한 결정타였다.

    이후, 가가야가 의도한 바대로 『공산당 선언』을 읽고 의식이 확 트인 허영철은 조선인 강렬한 공산주의자로 성장하여 치열한 삶을 살았다.

    허영철이 실천형 공산주의자이도록 하고 최후까지 비전향 장기수로 남도록 한 위와 같은 요인들이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욱하는, 상대방의 불의한 폭언과 폭력에 대해 즉각 반응하는 그의 개인적인 기질이 가장 근거가 된다. 17세가 되어 함경도 고성 와포리 단풍선 철로 공사 현장에서 일할 때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앞차를 빼지 않고 농성하는 그를 감독인 이와나가가 들어서 철로 위에 메어치자, 벌떡 일어나서 ‘호빠’라고 하는 괭이를 들고 대든 일, 21세가 되어 일본 북해도 탄광에서 일할 때 조선 사람들을 욕하거나 얕보는 일본인이 있으면 죽기 살기로 패 준 일 등은 그가 불의한 일에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기질임을 보여 준다. 지식인들의 가장 큰 결점은 실천력의 부족이다. 그러나 그는 이론적으로는 지식인들에게 못 미치더라도 강력한 실천력의 이 기질을 가졌기 때문에 지식인 출신 공산주의자들이 변절하거나 타락하기 쉬운데 비해 초지일관할 수 있었다.

    허영철이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희망을 계속 가질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김일성에 대한 일종의 신성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함경도 단풍선 철로 공사를 마치고 이웃 홍군에 허천강 물을 넘겨올 터널을 뚫는 도로 공사를 할 때이다. 한바 집 주인인 박홍선과 어느 사람으로부터, 김일성 부대가 공사장 회계 날이면 용케도 돈이 오는 줄 알고 찾아온다, 만주에 가면 김일성 부대원들이 대낮에도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젊은이들에게 선전 사업을 하고, 피 끓는 젊은이가 독립을 위해 입대해서 싸우지 않겠느냐고 권고하러 다닌다는 등의 말을 듣고, “만약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거기에 내 생애를 맡기지 않았을까”할 정도로, 17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발아하기 시작할 때에 김일성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1948년 이후, 출신이 남한이고 남로당 창당 당원이지만 박헌영 등 남로당에 대한 소속감보다 김일성이 영도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조국으로 인식하고 조선로동당에 충성하는 기층 당원으로 활동한 것은 이러한 기본 인식이 청소년기에 고착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본 인식은 이후 그의 삶에서 불변의 진리가 되었다.

    “탄광에서 일할 때, 나는 어쨌거나 노동이란 고된 것이고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공산당 선언』을 읽고 나서는 모든 게 달라졌어요.

    그 책을 읽는 순간 정말로 모든 것이 트이는 거 같았어요. 젊은 사람들은 꼭 한 번 읽어 봐요.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그 전에는 노동은 힘들고 고된 일이라 생각했는데, 『공산당 선언』을 보고 비로소 깨달았어요. 노동은 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귀한 것이다. 모든 것은 노동으로 이루어지며, 노동자야말로 앞으로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하는 걸요.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노동이 힘들게 생각되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당당하고 자랑스러워졌지요.

    허영철이 끝까지 비전향 장기수로 버틸 수 있었던 의지는, 16세까지의 소작농 아들로서의 생활을 기반으로 17세 이후 노동 현장 10년 동안에 축적한 에너지에서 나왔다.

    이 에너지의 순도와 강도는 가장 가깝게 비교되는 전향과 비전향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지만, 모든 공산주의자에게까지 비교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 또한 언어로 표현되는 이념의 종류는 다르지만 인간의 정신에 근거하는 모든 사상가들에게까지 비교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시골마을 사립학교 교육 3년뿐인 허영철을 보편적 의미에서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광복 이후 남로당에 입당하여 공산주의자가 된 후부터 면단위에서 활동했다. 활동의 강도에 따라 차츰 성가가 높아졌지만 군 단위 활동의 중심이 되기엔 지식인 출신들이 많았고, 그들이 피체되거나 입산하여 조직에 공백이 생긴 후에 차츰 군 단위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영월 등지에서 피신하다가 인민군과 함께 부안으로 내려와 1950년 9월에 부안군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1년 3월에 중앙당학교에 입학하여 공산주의 소양 교육을 받고 졸업 후에 북한 청수면에서 임시 위원장을 지낸 뒤, 황해도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직을 맡았다. 이후 1952년 2월 금강학원에 입학하여 1953년 말까지 남한의 각 지구당 사업을 지원할 공작 훈련을 받았다. 1954년 7월에 남파되어 1년만인 1955년 7월에 광주에서 피체되었다.

    중앙당에서 그간의 경력을 살펴 판단하기에 허영철은 출신 성분, 활동의 순수성과 열정, 지적 수준과 공산주의 소양 등에서 군 단위 활동 책임자로 적당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남조선 군 단위 지구당 재건의 적임자로 선택하여 훈련시켜 남파하였다. 특히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출신들을 간첩죄로 몰아 숙청한 다음, 하부 남로당원들을 처리하는 한 방법으로 남파 공작을 실시하였다. 지식인 출신인 박헌영 등의 남로당 간부급들은 숙청의 대상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 출신인 허영철 등의 하급간부급들은 여전히 유용한 공산주의를 위한 전위 도구였다.

    육체적 고통을 이미 달관한 장기수들이 전향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 때문일 것이다. 청춘을 바쳐 충성을 다한 공산주의가,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자본주의 경제화 되고, 경제발전 면에서 남한이 북한보다 월등한 비교 우위를 나타내는 상황, 비록 교도소 내에서 듣는 정보이지만 남한의 발랄한 자유민주주 생활상을 알면서 점적관수, 차츰 외부세계에 대한 동경이 짙어지면서 전향을 결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외적 요인이라면, 북한의 공산주의 현실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내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비록 남한 정부에서 전향을 목적으로 제공하는 선전용 정보이지만, 낙후된 경제와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상, 공산당 일당독재와 세습권력의 가혹성은 전향 결심을 익히는데 주효했을 것이다. 특히 그들이 청춘 시절에 공산주의에 투신하면서 배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에 어긋난 세습 독재 권력에 대한 회의는 치열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전향자들의 신념 약화 때문이지만 공산주의 교리와 현실의 괴리가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선택을 하도록 하엿을 것이다.

    이에 반해 허영철은 시종일관 공산주의와 북한 체제에 대한 신념을 견지한다. 인터뷰에서 한 말 어느 구석에도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없다. 한 마디로 말해 투철한 공산주의자이다. 남한으로서는 골치 아픈 비전향 장기수이지만 북한으로서는 절세의 공산주의 투사요 애국자이다. 아마 그가 죽고 난 다음엔 북한에 커다란 비가 세워질 것이다.

    허영철이 공산주의자답게 공산주의자의 시각으로 본 한반도 현대사에 나타난 공산주의 운동의 실천 양상과 북한에 대한 설명 또는 변명은 다음과 같다. 그의 한평생을 끌어당긴 대의명분을 떠받치는 그들만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아오지 탄광이 유명하지? ‘북에서는 죄를 지으면 아오지로 보낸다.’는 악선전도 떠돌고. 하지만 잘못 알려진 거야. 그보다는 아오지 탄광 출신 노동자 가운데 간부들이 많이 배출됐어. 또 남쪽에 징역 제도가 있듯이 북쪽에는 노역 제도가 있거든. 아오지 탄광에 그런 노역자들이 가서 일을 하니까 소문이 나쁘게 난 것 같아. 50년 전만 해도 사무원들이 일부러 아오지를 지원하기도 했어. 탄광 노동이 힘든 일이라 아오지에서 몇 년만 일하면 성분이 개선 됐거든. 과오를 저지른 중앙 간부들도 아오지에서 노역을 통해 과오를 청산할 수 있었고. 게다가 아오지에서 일을 하면 다른 직장보다 갑절이나 되는 임금을 받았어. 식량 배급도 900그램에서 1.2킬로그램이나 받고. 순전히 백미로. 사회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콩기름이나 설탕 같은 것도 배급받았지. 죄를 지었다고 무조건 끌려가는 곳이 아니야.

    남한에는 죄수 강제노동장으로 알려진 아오지탄광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답게 잘못 알려진 악선전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1954년에 남파되었으니, 허영철이 말한 아오지탄광은 1954년 이전에 것이 거나, 수감 생활 중에 후배 수감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제 말 강제 징용당한 탄광노동자들이 모두 열악한 작업 환경과 혹독한 노역을 당했다고 중언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허영철은 일본인 현장 책임자인 공산주의자 가가야의 배려 더덕분인지 북해도 탄광 생활을 꽤 괜찮은 노동이었다고 말한다. 헝영철의 말이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론 근거로 사용될 수가 있다.

    남쪽의 징역 제도와 같은 것이 북쪽에선 노역 제도이고, 노역 형을 선고받은 노역자들이 가서 일한다고 했으니 아오지 탄광이 죄수들의 집합소인 것은 분명하다. 죄수가 아닌 사람이 일부러 힘든 일을 하는 그런 곳에 지원할리는 없고, 과오를 저지른 중앙 간부들뿐만 아니라 사무원들 역시 일부러가 아니라 어떤 과오 또는 처벌 때문에 아오지에 갔음에도 허영철은 아오지 행을 미화하고 있다. 임금이 갑절이고 백미 배급에다 콩기름과 설탕을 주는 직장이면 입사 경쟁이 치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노역 제도에 편입된 죄수들만이 가는 곳이니, 일부러 죄를 지어 노역 제도에 편입되려고 하는 자들은 없을 테고, 결국 모두 노역형 죄수들이 아오지 탄광에서 일했다. 허영철의 말대로라면, 아오지는 노역형 죄수들을 극진히 돌보는 낙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바깥세상인 북한은 지상천국이 되는 것이다.

    “스물여섯 살인 1945년 5월쯤에 김제 어느 극장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강사 이용무가 한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오히려 그 강연을 듣고 나서 저 사람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김일성 부대라는 게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 그것도 상당히 큰 부대로 밀림에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길림과 같은 큰 도시까지 진출해서 활동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더 나아가 전설처럼 들어왔던 김일성 부대 활동이 실재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도 있었고요. 결국 일본 경찰이 입회하고 있는 강연인데도 오히려 내용은 김일성과 그 부대의 존재를 더 확실히 해 주었던 거지요.”

    1945년 5월이면 일제가 패망을 3개월 남짓 앞두고 최고로 독이 오른 시기다. 또한 조선 땅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조선의 다수 지식인들이 패전 항복을 충분히 실감하던 때이다. 이럴 때 아마 관제 시국강연회가 곳곳에서 열렸을 것이다.

    어용 강사 이용무가 무슨 연유로 김일성을 언급했는지 모르겠지만 짐작컨대 독립운동을 한다는 자들이 실제로는 만주에서 비적 활동을 하고 있음을 광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미 이 당시에 김일성이 여러 명이라고 널리 알려졌다. 그 중 한 명인 1932년 25세인 김일성부대의 보천보전투는 그 당시 동아일보 등 언론에 크게 보도 될 만큼 널리 알려졌다. 또한 이것은 남한 학계에서도 공인된 사실로서 김일성이 항일전선에서 한 역할 크게 한 것은 독립투쟁사에서 분명하다.

    그러나 1940년 일제에 의한 만주 지역 대토벌 이후 김일성 부대가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 건너가 소련군에 편입됨으로써 1945년까지 5년 간 활동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5월에 이용무가 북조선도 아닌 남조선 남도인 김제에서 언급했다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이용무가 말했다고 해도, 비적 활동을 중심으로 간단히 언급했지, 일본 경찰이 입회하고 있는데도 김일성부대, 모든 시설, 길림, 활동 등의 긍정적인 말을 길게 했을 리가 없다. 물론 몇 달 뒤의 해방을 짐작한 이용무가 해방 후에 당할 친일파라는 그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심으로 작정하고 김일성을 부각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 정도 깊은 생각을 할 정도의 인물이면 어용 강사 노릇에 나서지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김일성과 그 부대의 존재를 더 확실히 해 주었던 거지요.”라는 끝말에서 보듯, 김일성부대에 대한 허영철의 논리는 김일성의 우상화와 권력 세습의 근거인 김일성부대 항일투쟁에 대한 북한 현대사의 논리 그대로이며, 자기의 개인적인 체험을 김일성부대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 아오지 탄광에 대한 앞의 언급처럼, 책으로 세상에 나갈 인터뷰를 최대한 의도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몇 백 년 뒤에 후세의 사가들이 이 책을 1900년대 후반기 한국사를 증언할 중요한 사료로 사용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장 항일투쟁에서 김일성 못지않게, 외교 항일투쟁에서 이승만 못지않게, 외려 더 큰 업적을 남긴 항일독립투쟁 지도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보호를 받는 김일성이, 남한에서는 미군의 보호를 받는 이승만이 집권에 성공함으로써 한반도의 현대사는 분단되고 말았다. 허영철은 소학교 졸업의 학력답게 북쪽의 역사 논리를 맹종함으로써, 수십 년 감옥 생활에도 불구하고 비전향장기수답게 북쪽이 충실한 현장일꾼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흔히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하지? 하지만 그건 아주 잘못 알려진 거야. 오히려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고, 소련은 ‘후견제’라는 것을 제시했어. 미국의 신탁통치라는 것은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지 취급하는 것이지만, 소련의 후견제는 달랐지. 우리나라가 자주국가로 안정될 때까지 최장 5년 동안만 정치적인 후견을 하겠다는 제안이야. 그 뜻이 얼마나 정당했는지 늘 미국의 우방이었던 영국까지 찬성하고 나왔을 정도야. 당연히 삼상회의에선 후견제가 채택되었지. 그런데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기자들이 몰려드니까 미국 장관이 ‘조선 문제는 신탁통치로 결정되었다.’고 해 버린 거야. 영어로는 신탁통치라는 말과 후견제라는 말이 같다고 하거든. 그러니까 사실은 ‘소련이 제안한’ 신탁통치(후견제)라고 해야 하는데 그 말을 빼고 교묘하게 말한 거지. 그러자 조선에서는 난리가 났어. 일제에 그렇게 시달려 왔는데 또 신탁통치라니. 모두들 거세게 반대를 하고 여기저기서 반탁 운동이 일어났지. 사실은 그 반탁이 오히려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거고, 찬탁이 되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인데 완전히 뒤집어진 거지. 나중에야 사실을 알고 바로 정책 설명을 했지만, 그때는 이미 찬탁과 반탁을 구분하는 게 어려워지고 말았어.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었지.”

    신탁통치라는 말과 후견제라는 말이 영어로는 같다고 하면서도, ‘소련이 제안한’을 앞에 놓아 미국이 주장한 신탁통치와 소련이 주장한 신탁통치(후견제)에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음을 말하지만, 이미 ‘영어로는 같다’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변명을 위한 변명, 즉 교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미국 장관이 ‘조선 문제는 신탁통치로 결정되었다’고 한 것은 회의를 끝내고 나오다가 몰려드는 기자들에게 한 말일 뿐이지 삼상회의 대변인이 공식 발표가 아니다. 허영철의 이 말은, 역으로 삼상회의가 공식적인 발표가 아니라 미국 장관의 일방적인 발표에 의존할 정도로 주도권이 미국에 있었고, 소련은 자기 수도 모스코바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미국의 전횡에 전혀 반론하지 못한 약세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미국은 처음부터 조선을 식민지 취급을 하였고, 소련은 5년 동안만 정치적 후견을 하겠다는 선의를 가졌다고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신탁통치든 후견제든 삼상회의의 결과를 전해들은 조선 사람들은 모두 분노하여 반대 투쟁에 나섰다. 좌익 역시 반대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지시에 의해 곧 찬탁으로 변절하였다.

    허영철이 말한 대로 소련이 후견제를 주장하였다면, 미국 장관의 일방적인 발표에 반대했어야 하고, 조선에 알려진 다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 했어야 했다. 처음에 좌익 진영에서 반대한 까닭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아직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온 민족적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익이 찬탁으로 돌아선 까닭은, ‘신탁통치’가 소련이 주장한 정치적 후견제이거나, 미국이 주장하는 보편적 의미의 신탁통치 5년 기간 동안에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전자라면 ‘영어로는 같다’라는 허영철의 말이 맞고, 후자라면 허영철의 말이 틀린 것이다. 그런데, 전자라면 좌익은 처음부터 끝까지 찬성이어야 하고, 후자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여야 한다.

    소련은 조선민중들의 격렬한 신탁통치 반대 운동 때문에 삼상회의가 결렬되기 이전에, 미국의 일방적인 결론에 반대하는 결렬 선언을 먼저 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좌익 진영이 찬성 운동을 전개한 것을 보면 소련은 이미 미국 장관의 일방적인 발언을 묵인했음이 분명하다. 즉 소련은 미국과 함께 조선을 신탁통치하기로 합의하고, 신탁통치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다음 수순에 착수한 것이다.

    ‘그 반탁이 오히려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거고, 찬탁이 되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인데 완전히 뒤집어진 거지’란 말 역시 찬탁을 합리화하기 위한 억지 논리이다. 우익 진영에서 한 반탁운동은 민족의 자존심을 밟아 뭉개는 신탁통치를 무조건 반대하여 즉시로 자주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니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일 수가 없고, 좌익 진영에서 한 찬탁운동은 후견제라 하더라도 우리 민족을 미개하고 보아 자주국가 건설을 유예하자는 것이니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찬성하는 것이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 1년이든 5년이든 10년이든 신탁통치를 추호에라도 용납할 턱이 없다. 인구면에서도 3천만이면 적은 게 아니고, 비록 식민지 경제이지만 북부의 공업과 남부의 농업이 균형을 이루며, 비록 고령이지만 조선 왕조의 전통과 경륜을 가진 사대부들이 남아있으며, 1920년대 초부터 상해임시정부와 만주 지역의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 등 소규모이지만 정부 조직을 갖추었으며, 비록 일제식민통치에 협력 했지만 악질적 친일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한 다수 지식인들이, 행정, 교육, 문화, 군사, 경제, 체육, 산업, 외교 등의 국가적 차원에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재들이 축적되어 있는 상태이며, 수십 년 간에 걸친 항일독립투쟁의 업적을 통해 안으로는 조선민중들로부터 인정받고 국제적으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공인받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존재하며, 해방 직후 전국 시군단위에까지 걸쳐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있는 데, 정신 바로 가진 조선사람으로서 어찌 신탁통치란 말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요즈음 들어서 학자들과 논객들 간에는, 그 당시 우익 진영에서 무조건적인 반탁 운동보다 5년 동안 참는 신탁통치를 찬성하였다면 분단과 전쟁이 없었을 것이라는 논지를 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를 안타까워하는 과거형 역사적 가설일 뿐이다. 이미 한반도를 탐하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극우와 극좌의 두 꼭두각시를 내세워 서로 다투는 상황에서 신탁통치는 말만 유엔답게 그럴듯할 뿐 실제로는 영구 식민지로 가는 중간 정류장이다.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반탁이 대의였다.

    그러므로 신탁통치에 관한 허영철의 여러 말은 앞뒤가 모순되는 자가당착이자 조선공산당 투쟁사를 미화하는 변명일 뿐이다. 허영철의 신탁통치에 관한 논리는 현재 북한의 역사관에 근거한다. 그런데 1954년에 남파되어 이듬 해 곧 체포되었으니 위와 같은 논리로 단련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허영철은 감옥에서 북한의 역사관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터득하진 못하였을 거고, 허영철이 대담에서 말한 대로 옥중 학습, 즉 나중에 들어온 수감 동료들로부터 학습 받았음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허영철의 여러 말에 뼈대를 이루는 논리들도 옥중 학습의 결과일 것이다.

    “1948년과 49년에 삼팔선의 상황은 정말 나빴어요. 계속해서 총성이 들려오고, 대대 단위까지 전투를 벌일 정도였으니까요. 남쪽 군대에서 자꾸 도발을 하니까 49년 8월에는 북에서 개성까지 밀고 내려와 버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정말로 전쟁이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래도 전쟁까지는 가지 않으리라,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했는데 그만 전쟁이 나고 말더군요.

    북침이냐 남침이냐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남조선에서는 6 ․ 25를 이야기할 때 꼭 누가 먼저 도발을 했는지, 총성이 어디서 먼저 시작되었는지 그걸 밝히라고 요구하더군요. 하지만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하루만 딱 떼어 놓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날 갑자기 터진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자꾸 6월 25일만 특화해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묻는데, 그러면 내가 대답해요. “전쟁의 처음은 당신도 나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그러면 누가 평화 정책을 추진했는지, 누가 도발 정책을 추진했는지 그것을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고요.

    과연 누가 평화를 원했고 누가 도발을 원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하는 것이 이 전쟁을 이해하는 진짜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총성이 울린 시점과 방향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때 누가 ‘조선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본질을 위배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해요.

    (‘조선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본질을 위배한 것은)미국이지요. 해방 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조선 독립의 가장 빠른 해결책인데도 미국은 가장 큰 반대 세력이었어요. 미국이 조선 문제를 질질 끌다가 결국에는 유엔까지 끌고 간 것도 자기들 마음대로 조선을 좌우하려고 했기 때문이에요. 그래 놓고 유엔에 간 것을 마치 평화적인 해결책인 것처럼 말하는데, 당시 유엔의 성격을 생각해 보세요. 미국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미국의 거수기 같잖아요.

    미국은 일본이 항복한 뒤 조선 독립 문제를 논의할 때, ‘조선은 아직 계몽이 안 된 상태다. 그러므로 신탁 통치가 필요하다. 10년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20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했지요. (그러나) 소련은 오히려 신중한 입장이었지요. ‘신탁 통치는 조선 인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5년 정도의 후견제를 하는 게 적당하다. 그 안에라도 조선이 준비가 된다면 후견제는 폐지해도 좋다.’라고. 그런데 그것을 미국이 농간을 부려 마치 신탁통치를 소련이 제안하고, 오히려 자기네들이 조선 독립을 위한 것처럼 거짓 선전을 한 거지요.

    그러니까 나는 6 ․ 25 전쟁을 단순히 남북문제로 보면 해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이건 미국과 같은 외부 세력과 민족 세력과의 대립으로 보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예요. 그래서 북에서는 6 ․ 25 전쟁을 ‘조국 해방전쟁’으로 규정짓고, 25일을 ‘반제 투쟁의 날’로 삼아 기념하지요.”

    삼팔선을 중심으로 대대 단위까지 전투가 벌어지고 북한군이 개성까지 밀고 내려올 정도로 6 ․ 25 전에 이미 내전 상태였지만 전면전은 아니었다. 그러나 6 ․ 25 전쟁이 국제전으로 확대되면서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워낙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전면전쟁을 누가 어느 쪽에서 먼저 시작했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북한이 먼저 남침전쟁을 시작한 데에 대한 여러 가지 증거들이 이미 많이 공개되었기 때문에 허영철로서는 전쟁 개시 책임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6 ․ 25 전에 내전 상태를 강조할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규모 내전일 뿐이다.

    허영철은 구체적 문제인 전면전에 대한 책임론을 그렇게 물 타기 한 다음에,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그러면 누가 평화 정책을 추진했는지, 누가 도발 정책을 추진했는지 그것을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며 추상적 문제로 슬쩍 넘어 간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를 욕심내고, 그들에 아바타인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상전의 욕심에 추종한 것은 공지의 사실이었다. 이승만 역시 김일성 못지않게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다. 요구한 무기를 미국이 대주었다면 이승만이가 먼저 전면전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영리한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묵살함으로써 김일성으로 하여금 전면전의 유혹에 빠지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김일성이가 전면전을 시도한 것은 내부와 외부의 상황 파악을 치밀하게 하지 못한 탓이다. 내적으로는 박헌영의 30만 남로당원 총궐기론에 넘어갔고 외적으로는 남침을 유도해 이참에 친미 반공전선을 확고하게 설치하고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여 세계 1등 국가의 초석을 다지려는 미국의 전략을 간과하였다.

    6 ․ 25 전쟁을 단순한 남북문제를 보는 시각을 넘어 미국과 같은 외부 세력과 민족 세력과의 대립으로 보는 허영철의 말은 맞다. 북한으로서는 ‘조국 해방전쟁’ 이고 ‘반제 투쟁의 날’이 맞다. 그러므로 북한은 6 ․ 25 전쟁 이전의 내전 상태 등에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해가 갈수록 분단이 굳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1950년 6월 25일에 통일전쟁을 전면적으로 개시했다고 하는 게 역사적으로도 떳떳하다. 물론 전면전 시작에 대한 역사적 책임은 부담해야 한다.

    그 때 남한이든 북한이든 평화적 통일을 추구했다는 말은 거짓이다. 북한이 먼저 남침을 개시했기 때문에 가해자가 된 것이지, 신성모 국방장관의 호언장담대로 남한이 먼저 북침을 개시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개될 남북 공동 현대사 작업에서는 남북 양쪽의 시각을 종합해야 한다. 서로의 공과를 공정하게 평가함으로써 평화통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

    “해방 소식을 들었을 때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다 한호에 차 있었지요. 하지만 미국이 들어오면서 상황은 아주 나빠졌어요. 그때 발표된 , ‘맥아더 명령’을 보아요. 질서 유지를 위해 무조건 미국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게 내용의 골자였지요. 공용어로 영어를 쓰려고도 했고, 모든 기관도 과거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어요. 말하자면 일본 제국주의 연장선에서 조선의 통치권을 넘겨받으려 했던 거예요. 심지어 조선총독부도 조선 대표의 참가 없이 인계를 받았어요. 그런 반면에 소련은 맥아더보다 조금 빨리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아주 달랐지요. “조선은 오랫동안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에 시달리다가 이제 해방되었다. 화려한 과수원도 주인이 가꾸기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는 조선은 조선 인민의 것이며, 우리는 조선인들을 도울 것이다.”하는 식이었지요.”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해방군이자 점령군이었다. 허영철이 ‘맥아더 명령’과 ‘소련군사령관 성명’을 비교하며 미군보다 소련군이 더 우호적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명서일 뿐이고 실제로는 소련은 북한 지역의 주요 중화학공장의 기계 설비를 뜯어가는 등의 점령군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조선 인민들 다수의 지지를 받는 조만식 등 민족지도자를 제치고 소련군 대위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웠다. 소련군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김일성이 권력을 절대로 장악하지 못하였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 중 어느 것이 좋으냐고 하도 많이 물어봐서 지치지만 그래도 대답을 하지요. “공산주의는 우리가 이상으로 삼고 지향하는 사회다. 그러나 아직까지 건설되지 못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실시해 온 경험은 모두 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다.”라고요. 그리고 자꾸 ‘자유’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과연 그 자유가 정확히 뭔가요? 이른바 자유를 위한 무제한 경쟁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가 살아남으려고 주위 모든 경쟁자를 눌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물론 (사회주의 사회) 그곳에도 경쟁은 있어요. 하지만 자유라는 미명을 내세워 무제한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 전체 성원들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기 위한 경쟁을 하는 거예요. 교육 문제를 들어 간단히 설명해 볼까요? (학급) 성원들 중에 우수한 사람이 열등한 사람을 도와 같은 수준에 오르도록 도와주는 거지요. (이러한 호조반을 통해) 전 성원이 다 서로 도와 최우등이나 우등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자랄 때부터 경쟁과 협조의 정신을 함께 배우고, 나와 더불어 항상 타인과 집단을 같이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혼자 살아남고자 무한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상생의 경쟁을 통해서 전 성원이 다 잘 살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가 더 좋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치 발전 과정을 봐도 소위 민주주의라는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더 합리적이었어요. 일본이 패망한 뒤 남북조선에 지방정부로서 광범위하게 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죠. 북한은 인민위원회를 합법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그 토대 위에서 중앙정부를 수립했고요. 그런데 남쪽에서는 오히려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일제시대 지방 행정기관을 다시 부활시켜 미군정의 기반으로 삼았어요. 과연 어느 쪽이 더 옳은 걸까요?”

    ‘자유를 위한 무제한 경쟁’이란 말에서 보듯 경쟁은 자유의 한 속성일 뿐인데도 허영철은 자유를 경쟁의 시각으로만 보고 있다. 자유란 인간이 동물성을 극복하고 인간성을 갖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조건이라는 자유의 진정한 개념과 의미를 모르고 있다. 물론 승자 독식이 횡행하는 지나친 경쟁은 조정해야겠지만 경쟁은 자본주의의 활력을 보장하는 유일한 처방이다.

    호조반 등의 사회주의 경쟁이 갖는 장점이 물론 좋지만 그것은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우수한 자가 부족한 자를 도와 줄 수는 있지만 어차피 경쟁 서열이 매겨질 수밖에 없다. 모두 우등이라도 최우등과 차우등은 나타난다. 그러므로 허영철이 말하는 상생의 경쟁을 통해 전 성원이 다 잘 살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란 말은 무한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하여 끌어다 쓰는 수식문이지 않을 수 없다.

    ‘남쪽에서는 오히려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일제시대 지방 행정기관을 다시 부활시켜 미군정의 기반으로 삼았어요.’라는 허영철의 말은 맞다. 미군은 상해에서 귀국하는 임시정부와 지방조직까지 갖춘 건국준비위원회를 부정하고는 곧 이승만과 친일파들을 내세워 행정기관을 장악함으로써 자기들이 점령군임을 분명하게 표명했다. 소련군 역시 조만식 등 민족세력을 부정하고 소련군 장교인 김일성 집단을 내세워 행정조직을 장악함으로써 자기들이 점령군임을 분명하게 표명했다.

    허영철이 ‘인민위원회’를 논거로 삼는데, 남한에선 건준이 조직한 인민위원회가 미군에 의해 부정됨으로써 역사적 의미와 정치적 근거를 상실하고 말았지만, 북한에선 소련군이 점령 직후에 내세운 김일성에 의해 공산당 조직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됨으로써 정통성을 가졌다.

    인민위원회도 역사적 중요성을 갖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민위원회 대의원과 대표자 선출 방법이다. 남한은 1948년 5 ․ 10 총선거 때 여러 후보자 나선 가운데에서 주민들의 자유 투표에 의해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그들이 국회에서 자유투표로 이승만 대통령을 선출했지만, 북한의 선거 제도에 관해서 지금까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보면, 북한은 자유 투표가 아니라 당에서 지명한 대의원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하고, 그들이 모여 당에서 지명한 김일성에 대하여 100% 찬성투표를 하였으니, 남북이 갖는 선거 정통성이 이질적이다. 대표자 선출에 있어서, 남한은 국민들이 다수의 경쟁자들을 대상으로 직접 권리를 행사했지만 북한은 당이 선출한 한 명의 지역 대표자를 주민들이 찬반 두 칸 투표지에 추인하였으니, 북한은 선거라고 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선거, 그것도 ‘자유선거’인데 북한식 선거는 선거가 아니므로 북한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 발전 과정을 봐도 소위 민주주의라는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더 합리적이었어요.’ 라는 허영철의 말에서 사용된 ‘합리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철저히 자기들 식으로 해석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북한의 정식 국명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우리 남한의 사전적 의미에서 볼 때 ‘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의 두 말은 맞지 않는 게 아닌가 한다. 자유선거가 없으니 ‘민주주의’가 아니고 인민들이 주인이 아니라 공산당이, 그것도 김일성 핏줄 세습권력이 주인이니 ‘인민공화국’이 아니잖은가. ‘조선’이란 말 역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이성계의 ‘조선’ 등으로 이미 낡은 전통성이 덕지덕지 붙은 말이니, 극진보성을 주창하는 공산주의자들로선 사실 썩 내키는 말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 말은 북한의 선거 제도를 직접 본 게 아니라 언론과 책자를 통해 보고 들은 것에 의거한 나의 추론이다. 북한 선거의 실제 모습이 이와 반대로서 후보자들의 자유 경쟁을 통한 선거가 완벽하다면, 북한은 대단한 민주주의 국가로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품격이 충분하다.

    “철로를 따라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허리를 구부리고 있어. 학생인 것 같았지. 가방에서 책을 꺼내 놓고 그대로 앉아있었으니까. 그런데 가까이 가서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을 않는 거야. 자세히 살펴보니 등 뒤에서 총을 맞아 죽어 있었어. 서울에서 학교 다니던 학생이 전쟁이 나자 지방으로 내려가다가 군이나 경찰에게 신문을 당해 총에 맞았을 거라고 추측했어. 누구 소행인지는 모르지. 전쟁 과정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전쟁 시기라도 비전투원을 살해하지 않는 것이 국제법 규정인데, 미군은 조선 전쟁에서도 국제법 같은 것은 짓밟아 버렸던 거야.”

    누구 소행인지는 모른다고 말해놓고선, 이어서 미군이 국제법 규정을 짓밟고 비전투원인 학생을 사살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법에도 안 맞는 논리 착종이다.

    “남에서는 지하 조직 활동만 하다가 (인민군 점령지인 부안에서 부안군 인민위원장이 되어 합법 공간에서) 처음으로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라서 실무 능력이나 작풍, 품성 등이 기대치에 많이 미치지 못했어요. 거기다 혼란기라서 굉장히 어수선하기도 했고요. 복수심으로 상상도 못할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내가 남파되었다가 붙잡혔을 때 경찰서에서 “전쟁 때 우리도 잘못했지만 너희도 잘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잘못한 일이 없다.”고 항변했지요. 그런데 징역을 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보니까 우리 쪽에서도 분명 잘못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좌익 가족이 복수를 하거나, 내가 아는 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사람을 몇인가 죽인 사람도 있었어요. 혼란기였고, 모두가 이성적으로 잘할 수는 없는 시기였겠지만 어쨌거나 공화국 정책을 실행하는 것보다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인민군대가 들어오기 전이야 어쩔 수가 없었지만, 들어온 뒤부터는 이런 사건에 대해서 엄격하게 법령을 적용했지요. 그건 북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북에서 청수면 인민위원장을 할 때에) 그 때 청수면 위원장이 재판을 받고 있었거든요. 미군이 치고 올라오던 시기에 청수면 인민위원장이 산에 피해 있었대요. 그런데 미군이 후퇴하자 산에서 내려와 반(反)인민적인 행위를 한 사람에게 보복을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개인적인 보복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데. 결국 그것 때문에 재판까지 갔어요.”

    좌익의 우익 인사들에 대한 학살을 일부 시인하면서도 인민군대 치하에서는 개인적인 보복 행위가 엄금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민군 후퇴시기에 이루어진 무차별 집단 학살과 납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특히 청수면 인민위원장에 대한 재판 사실을 예로 들면서 북한 사법 제도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나라의 중심은 당연히 인민이지요. (그리고 인민의 중심에는 당이 있다고 말씀하시겠지요?) 그건 당연해요. 중앙에서 시군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적인 결단은 당에서 내리니까요. 물론 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이나 부위원장이 당원이 아닐 수도 있어요. 민주당이나 청우당 사람들이 지역 인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대표로 선출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대신 정책기관이나 단체들의 책임자는 모두 당원이죠. 유능한 인재를 파견해서 당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해애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렇다면 그건 솔직히, 조금 독재의 냄새가 나는데요.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이 민중의 지지를 받아 대표자로 뽑혀도, 결국 실무자들이 모두 당원이라면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당이 결코 특별한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당 지도부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힘을 누리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맞는 일을 함으로써 존중을 받는다는 뜻일 뿐이거든요. 물론 지도부가 권위를 가지기는 해요. 하지만 그건 이론과 실천에서 모두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될 때만 주어지는 거예요. 만약에 제대로 인민을 위하지 못한다면 절대 그 권리를 가질 수도, 남용할 수도 없는 겁니다. 남에서처럼 일반인들에게 군림하는 지위를 지니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거지요.

    당에서는 어떤 문제든 단독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으니까요. 반드시 회의와 협의를 거치지요. 여기서는 북한이 무조건 독재를 한다고만 하는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북조선은 굉장히 민주적인 편이죠. 전쟁이라는 그 어려운 시기에도, 매해 당 대회를 열어서 중요한 문제를 토의하고 그랬거든요. 공개회의 같은 것을 열어 충분히 정책을 설명하고 알려 주니까, 인민도 정책과 법령의 내용을 다 알고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인민의 중심에는 당이 있다고 말씀하시겠지요?) 는 대담을 진행하는 사회자의 말이다. 이에 대해 허영철은 당연하다고 대답한다. 즉 나라의 중심은 인민이지만 그 중심의 중심은 노동당이란 말이다. 당이 나라의 중심이자 곧 나라란 말이다. 민주당이나 청우당은 민주주의에 구색을 갖추는 장치일 뿐이고 유능한 인재인 당원이 국가의 모든 기관을 책임진다고 한다. 이어지는 사회자의 ‘독재의 냄새’라는 말에 대해, 존중과 모범이란 추상어를 내세우면서 당 지도부의 권위를 옹호한다. 당원은 당 지도부의 엄격한 심사에 의해 선발되고 당 지도부는 극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지명 선출되니, 인즉슨 당은 극소수의 기득권 집단이나 한 명 절대 권력자의 것이고 당원은 그의 수족이다. 그러므로 국가란 곧 한 명 최고지도자의 사적인 조직인 것이다. 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절대군주제 왕국인 것이다.

    허영철의 민주주의 개념은 남한 지식인들의 보편적 인식과는 다르게 공산주의식 민주주의이다. 국가든 회사든 어느 조직이든지 수장이 신이 아니 이상엔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반드시 회의와 협의를 거친다. 그런 다음에 회의와 협의에서 나온 여러 의견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과 비판을 거치는 게 아니라 부하들의 의견을 참고해서 수장이 결정한다. 회의와 협의는 수장이 자기 생각을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다. 북한 사회 하부 조직의 공개회의도 정책을 지시하고 설명하는 과정이지 민주주의 기초 회의라고 할 수 없다.

    허영철이 말하는 공산주의식 민주주의가 북한에서 통용되고 있다면,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념 역시 남한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이 그 국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북한은 자기들만의 ‘공산주의식 민주주의’를 강조하면 될 일이지 민주당이나 청우당을 내세워 북한에도 서구식 민주주의 형식이 있다고 장식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사대주의 잔재가 아닐 수 없다.

    “협동조합을 보죠. 북에서는 처음부터 협동조합을 구성한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니지요. 처음에는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높이려고 토지를 개인에게 다 나눠 줬어요. 그 과정에서 당연히 반대가 있었죠. 개인에게 다 줘 버리면 나중에 협동조합을 만들 때 어려워진다고.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당시 농민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가져 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거든요. 어민들은 자기 배 한 척 가져 보는 게 소원이고. 이런 상황에서 협동조합을 하면 그 개인적인 소유욕을 충족시켜 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는 섣불리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보다 농민들에게 먼저 땅을 나눠 주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어요. 1946년 3월 5일에 시행됐으니까 굉장히 빨리 시작됐죠. 나중에 협동조합이 생길 때에도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된 편이지요.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그건 전쟁 중에 젊은 사람들이 군대에 동원되면서 농촌에 노동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전부 다 품앗이처럼 협동해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마련된 거죠. 농토를 처음에 분배받을 때에는 노동력에 따라 받았는데, 막상 젊은이들이 출전해서 경작 능력이 부족해지니까 전부 협동 노력에 의지해서 농사를 짓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농민들이 먼저 협동조합 개념을 원하게 된 거죠. 그게 효율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잘 되었을까 싶은 의구심이 조금은 들기도 하거든요) 실제 체험하지 않았다면 나도 단순히 이상이나 유토피아로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반대하는 선전을 펼치면 의문이나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을 거고요.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내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인데 어떻게 확신을 안 가질 수 있겠어요.

    (결국 선생님의 신념이 북에서의 경험으로 더욱 견고해지고 확실해졌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아마 거기서 보낸 시간이 내 인생에 없었더라면 그렇게까지 확신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 시간이 없다고 신념이 바뀌지는 않았겠지만, 이렇게 뚜렷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분명 그때 경험이 중요한 작용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목표는 협동조합 -남쪽에서는 집단농장-이면서 처음에 한시적으로 개인적인 소유욕을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땅을 분배해줬다는 것은 정책의 혼선이거나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기만책이다. 처음부터 집단농장을 만들었다면 농민들의 이탈이 많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랬다면 공산당의 집권과 건국, 그리고 남침전쟁이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데에도 공산당 정책의 강제적 집행 면보다는 농촌 노동력 부족에 따른 농민들의 자발적인 품앗이 협동 노력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가 거기서 보낸 시간 동안에 얻은 체험을 근거로 하여 북한에 협동조합은 유토피아가 아닌 실제라고 주장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토지는 국가 경제의 근본이다. 광복 이후에 국가 권력이 대지주들의 토지를 접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해주는 것은 시대적 대의였다. 남한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했지만, 사유재산제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시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소유욕을 일시적으로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개별 분배를 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공업 생산도 그렇지만 농업에서는 특히 개인적인 노동력과 의욕이 중요하다. 땀 흘려 일해 봐야 소득이 남들과 똑같아서는 열심히 일할 의욕이 안 난다. 양질의 토질로 가꾸고자 하는 노력이 미흡하다. 그러므로 소유권은 국유로 하되 경작권은 농민들에게 주어야 한다. 각 농가의 노동력에 맞게 토지를 분배하여 경작하도록 하고, 그 지역 토지 별 평균 소출의 30% 정도를 세금으로 내도록 하는 게 토지의 효율성을 높여 농업 생산을 증대하는 방법이다. 열심히 노력하여 평균 소출 이상을 낸 부분은 그 농가의 소유로 인정함으로써 생산 의욕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농가는 잉여 농작물을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다른 산업에도 파급 효과가 커져 국가경제가 제대로 순환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유토피아 농촌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북에서는 강제로 인민을 동원한다는 식으로 쉽게 말을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아무리 권력기관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인민 동원을 할 수 없어요. 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인민위원회 뿐이에요. 인민들에게 20일 간의 의무 노동이 있지만, 절대 그걸 초과해서 동원할 수도 없고요. 위법이니까요. 동원할 때도 반드시 꼭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에만 할 수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그것도 또 위법이에요.”

    남한 쪽 시각에서 볼 때엔 강제노동이지만, 북한은 북한 나름대로의 제도와 법이 있으므로 인민 동원과 의무노동에 대해 비판할 필요가 없다. 허영철의 말대로만 법이 엄격하게 시행된다면 그것은 강제 노동이 아니라 국가사업에 참여이다. 6 ․ 25 전쟁 이후, 미군기의 대량 폭격이 초래한 그 참담한 파괴를 몇 해만에 복구하고, 오늘날의 평양 시가지를 이루어놓은 북한 당국과 인민들의 노력이 참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 동원과 의무노동이 국가 재건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그곳에서 선생님이 마음으로 가장 크게 느끼고 보신 것은 무엇일까 묻고 싶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나는 그때……이상향을 보았어요. (이상향?) 예, 새로운 체제하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사업을 직접 하면서 이제껏 꿈꾸었던 이상향을 장풍군에서 경험한 거지요. 그야말로 내 인생에 가장 큰 의미였어요. 내 사상의 견고함도 그때 얻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실생활을 통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시기는 북에서 보낸 4년입니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아무리 신념이 있었더라도 나는 사회주의 실상이 과연 무엇인지 잘 몰랐을 거예요.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예, 사람들은 자꾸만 남조선은 민주주의 국가고 북조선은 독재주의 국가니까 남조선이 더 좋고 북조선이 나쁜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말을 해요. 그런데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민주주의란 사실 부르주아 독재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는 거고요. 그러니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뜻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냐가 아니라,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듯 과연 그것이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냐가 더 중요한 것이겠네요) 바로 그거예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북조선에서 이뤄진 거 같아요. 예, 맞아요, 나는 이미 북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전히 저쪽의 민주주의를 더 신뢰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저쪽에서 그렇게 했거든요.”

    허영철이 말한 대로 북한 장풍군에서 체험한 4년이 이상향일 수 있다. 대담 내내 그의 말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이다. 지금이야 세습독재체제 소리를 듣지만, 그 당시에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당원 모두가 일심일체가 되어 전쟁 승리와 공산주의 체제 완성을 위해 노력했음은 분명하다. 공산주의도 교과서에 적힌 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허영철은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같이 엮으면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반대 되는 뜻이 아니라고 한다. 부르주아 독재를 하는 국가는 과거 식민제국주의 국가들이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부르주아 독재가 통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공산주의 교범에 나와 있는 원칙이므로 허영철로서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민주주의란 말과 섞어 종착 현상을 일으킨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의 혼란이다.

    경제 이념면에서 볼 때 자본주의의와 공산주의는 서로 반대이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란 개념이니 자본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나 다 해당된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란 자유선거를 유지하고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개인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삼는다. 하지만 북한은 지명식 찬반투표제이고 집단 중심의 사회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회주의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이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이란 허영철의 말은 맞는 말이다. 백성이 하늘이라는 말은 곧 한 사람 한 사람이 고귀한 존재라는 말이다. 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이 곧 하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개인주의든 사회주의든 개인이 행복하게 살도록 해줄 의무가 있다.

    그의 말대로 과거에나 현재나 과연 북한에서 백성이 하늘로 떠받들어지고 있는지. 만약에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사실이라면 허영철은 의인이고, 반대라면 평생토록 속아 산 허수아비가 된다.

    “박헌영에 대해서 남쪽의 많은 지식인이나 젊은이들은 북의 세력 논리나 종파 싸움에 밀려서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쓰고 희생되었다고 보는 거 같아요. 최근에 박헌영을 다룬 책 두 권을 보고 있는데, 두 책 모두 공통적으로 박헌영을 희생양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전혀 사실이 아닌데도요.

    박헌영과 관련해서 그 도당인 이승엽 일당들이 재판받을 때는 평양에 있어서 공판 기록이랑 여러 가지 자료를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지요. 재판에는 일부러 남한 쪽 사람들을 많이 참관시켰다고도 해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죠. 절대 남로당 계열을 종파로서 처단하는 게 아니라는 걸 직접 보라고. 남조선 사람들이 박헌영을 숭배하니까 더욱 진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봤던 거예요.

    법정에서 이승엽은 쿠데타 음모를 시인했어요. 미국이 정권을 준다면 어떤 정부를 조직하려고 했느냐?하고 묻자, “유고와 같은 정부를 조직하려고 했다.”고 대답했대요.

    남에서는 거듭해서 그렇게 말하더군요. 박헌영에게 전쟁의 책임을 떠넘겼다, 박헌영은 종파 싸움의 희생자다. 하지만 6 ․ 25 전쟁은 우리가 승리한 전쟁인데 어째서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는 거지요? 그렇게까지 박헌영이나 이승엽을 희생시킬 필요가 북에서는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그 싸움을 붙여야 할 이유가 있던 쪽은 처음부터 줄곧 미국이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간첩 행위를 하도록 부추긴 거지요.”

    남쪽의 많은 지식인이나 젊은이들이 박헌영에 대해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쓰고 희생되었다고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건 아니고, 박헌영은 일제 강점기에 지독한 지도자급 공산주의자로서 특히 30만 남로당원 봉기설로 남침전쟁을 주도한 전범일 뿐이다. 전쟁 이후를 대비한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북한 정치인일 뿐이다. 전범이 됨으로써 일제 강점기에 쌓아올린 독립투쟁의 업적이 산산이 붕괴하고 말았다.

    남한 정복을 목적으로 남침하였으나 패주하여 목적 달성을 못하였으니 승리한 전쟁이 아니다. 옛 삼팔선을 중심으로 정전되었으니 현재로는 무승부이다. 미래 언젠가 정전 협정이 깨지고 다시 전쟁이 난다면, 그 때에 비로소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정전협정이 종전협정으로 대체되어야만 비로소 완전한 무승부가 될 것이다.

    “주체철학은 그 인식 문제를 두고 여러 가지 입장 차이가 있지만, 무엇보다 철학의 대상이 인간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 인간의 기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중심에 놓인다고 할까요. 물론 맑스 이론을 연구해 온 기초 위에서 주체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맑스주의도 인간의 의식 개조에 소홀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정신이 물질보다 선차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했지만, 물질에서 파생한 정신은 물질세계를 개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거죠. ‘이론도 대중을 파악하자마자 곧 물질적 힘으로 전화한다.“라고 하잖아요.

    세계의 주인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주인은 자신이고요. 그러므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스스로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자가 혁명을 하는 것도 다 스스로 주체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요. 그러므로 주체사상의 가장 기본은 내가 나 스스로의 주인이라는 ‘자주성’, 그러기 위해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창조성’, 거기에 주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의식이라는 ‘의식성’, 이렇게 세 가지를 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공화국이 처한 현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이 내려오실 당시, 주체 사상은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지요?) 그렇지요. 60년대 이후에 완성되었으니까. 나도 감옥에서 공부하면서 익혔어요. 물론 그 중심은 이미 그 전부터 세워져 있어서 배워 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혁명과는 달리 사회주의 혁명은 권력을 쟁취한 다음에 비로소 새로운 생산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니까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정권을 빼앗아서 그것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모든 것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시작’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사회주의 혁명도 권력을 쟁취한 뒤에 이뤄진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의 사회가 완성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 의식을 개조하면서 좀 더 높은 사회로 전진해야 하죠. 더 높은 수준의 사회는 있을망정, 완성된 사회는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그 좀 더 높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점에서 나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어요. ‘인간의 의식 개조’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간은 오랫동안 사유 제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버리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 건설을 지향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의식을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자기 코 바로 아래에 있는 쿠바같이 작은 나라도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아요. 전쟁이 끝나고 50년 동안이나 온갖 모략과 압박을 가하면서 북조선을 없애려고 하고 있지만 미국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북조선은 여전히 건재하잖아요.

    (그 이유를 사람에게서 찾으시는군요) 예, 그 사회의 인민들이 당과 수령, 곧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못 없애는 거예요. 북이 아무리 독재 사회라지만, 인민들의 저항이 거세다면 저렇게 유지될 수가 없지요. 북이 미국에 대해서 아직도 저렇게 당당한 것은 그 사회가 독재 체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옳다는 것이 북의 인민들에게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또한 가장 민주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진정한 혁명이란 바로 그 백성, 사람, 민중에게서 시작된다고 나는 믿어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 등 이 세 가지 기본은 소위 북한식 주체철학이 아니라도 인간에 대한 탐구가 오랜 정신이라면 어느 학문, 종교, 철학, 사상에서나 중요시하는 개념이다.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 물질이 고도로 종합, 온축하여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물질이 선차적이고 정신이 부차적인 게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관계, 즉 유의미한 물질이 있음으로서 유의미한 정신이 생긴다. 물질에서 발생한 정신은 곧 물질을 이끌어 물질이 유익한 방향으로 활동하도록 한다.

    북한에서 주체철학을 개발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세 가지 기본이 진실이라면 그 기본들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적시해야 한다. 그것이 개개 인간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즉 인간의 존엄성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궁극이 바로 인간의 자각, 즉 내가 우주의 주인이라는 주체의식 아닌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체의식이 충만한 인간이 된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저절로 종식된다는데, 그것이 언제 실현될지 모르겠지만 북한에서 개발한 주체철학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궁극이라면, 공산주의의 완성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징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론과 달리 실제 현실에서 주체철학이 왜곡되었다면, 북한 공산주의 자체가 왜곡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세 가지 기본이 교과서에만 적혀있고 생활 현장에선 사용되지 않는다면 허영철이 감옥에서 학습한 주체철학은 엉터리이거나 구두선일 뿐이다.

    (선생님이 내려오실 당시, 주체 사상은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지요?)라는 사회자의 말대로, 허영철이 피체된 게 1955년이고 주체철학은 60년대 이후에 완성되었으니, 그의 말대로 감옥에서 공부를 어떻게 했는가 궁금하다. 비전향장기수라서 신문이나 도서 등이 반입되지 못했을 텐데 그 난해한 주체철학을 어떻게 통달했을까. ‘주체철학’이란 화두를 십여 년 붙들고 명상한 결과라면 한 경지에 오른 정말로 대단한 정신이다. 만약에, 피체 후입 공작원들로부터 교양 받거나 바깥 사회 공작원으로부터 책자를 받았다면, 대한민국 법무행정에 큰 구멍이 나 있다는 증거가 된다.

    허영철은 북조선이 여전히 건재한 이유를 사람에게서 찾고, 그것을 주체철학에 연결시켜 ‘인간의 의식 개조’를 강조하면서 사회의 인민들이 당과 수령, 곧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기 때문이라고 논리를 발전시킨다. 앞에서 당이 국가에 중심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 특유의 논리상에 어긋나는 건 아니지만, 세 가지 기본을 강조하는 까닭이 인간의 의식 개조에 있고 그 개조된 의식이 당과 수령에게로 집중된다면, 주체철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성을 위한 게 아니라 결국 여왕벌 한 마리, 곧 수령을 위한 어용철학인 것이다. 꿀벌의 자각은 오로지 여왕벌을 향하여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세 가지 기본으로 이룩한 인간의 자각은 내가 사회, 그리고 우주 속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각한 인간은 수령의 주위를 맴도는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엄한 능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능동적인 존재는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간다. 어떤 상급자나 집단, 어떤 철학이나 사상 등 어디에도 구속당하지 않고 자기만의 자유의지를 발산하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다.

    주체철학이 이런 원리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주체인 수령을 보위하는 정치적 명령일 수밖에 없다.

    허영철은 북한을 독재 사회라고 인정은 한다. 그러면서도 구구한 변명을 통해 그 독재를 옹호한다. 또한 허영철이 ‘진정한 혁명이란 바로 그 백성, 사람, 민중에게서 시작된다’고 굳게 믿지만, 이미 수령론을 말했으므로 진정한 혁명이란 수령에게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결국 현란한 수식어들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의 앞과 뒤가 판이한 논리 구조를 갖는다. 허영철의 생각 속에서 수령론과 주체철학이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거의 독학하여 비전향장기수답게 이만한 논리로 말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강고한 공산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소련이 붕괴되었다고 사회주의가 지상에서 소멸한 것이 아니다. 크게 보자면 역사는 과정이지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며, 때로는 후퇴하고 때로는 우회도 하면서 총체적으로 전진해 가는 것이다. 소련이 붕괴되고 사회주의가 일시 퇴보했어도 반드시 좀 더 나은 사회주의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사회주의 전형이 나와야 할 때이다…….

    또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제도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그것을 운영하는 것도 사람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운영을 잘못하면 잘못될 수도 있다. 소비에트가 그런 것처럼.”

    사회주의는 소중한데, 사람의 역할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었다고 생각하는 허영철은 대안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북해도 탄광에서도 신문을 구독할 만큼 지적 탐구심이 강한 그이기에, 마찬가지로 북한의 현실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즉 북한의 현재가 온전한 사회주의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다.

    허영철은 경제면의 공산주의 개념과 정치면의 사회주의 개념을 혼용하고 있다. 소련이 붕괴한 이유는 경제적인 곤란 때문이므로 공산주의에서 찾아야 한다. 북한 역시 남한에 비해 매우 열등한 경제력이 된 까닭도 공산주의 경제정책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나 중국은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북한 역시 남한에 비해 매우 열등한 경제력이 된 까닭도 공산주의 경제정책 때문임을 자각하고 자본주의적 개혁개방 정책을 조금씩 추진하고 있다. 반면에 사회 구조와 운영의 바탕인 사회주의는 북한, 중국, 러시아 등에서 약간의 개인주의적 자유가 허용되지만 사회 전체적 통제 장치로는 아직 유효하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경제가 쇠퇴하였다고 말해야지 사회주의가 소멸 또는 퇴보했다고 말해선 안 된다.

    대량인구 시대에는 그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게 국가의 가장 무거운 책무이다. 과거처럼 그 욕구를 이민족이나 타국을 침략해서 얻은 재화로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국가 경영을 책임진 지도자들의 고민과 능력은 경제발전에 집중된다.

    산업혁명의 근본 원인 역시 인구팽창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자본주의를 용납한 까닭도 인구팽창에 따른 경제적 욕구의 충족과 해소 문제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갈수록 인구 팽창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그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모든 국가들의 현안이 된다.

    공산주의보다 우수한 경제제도로 판명 난 자본주의로 그들의 욕구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팽창하는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나 자원과 환경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만족시켜 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욕구를 적당하게 조절하는 교육과 정책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각각의 장점을 결합한 경제정책이 필요하다. 전자와 후자를 관통하는 정신은 개인과 사회의 조화이다. 즉 정치에서는 민주주의의 선거의 원칙을, 경제에서는 창의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자본주의 원칙을 존중하되 사회기간시설, 핵심 산업시설 등은 공개념을 적용한 국유화를, 사회적으로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이다.

    특히 어느 시대에나 토지와 농업이 중요하다. 농업의 종류에 따라 사유경작지 소유 한계를 설정하고, 임야 역시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면적에 한계가 있도록 해야 한다. 사유지 이외의 토지와 임야는 국유로 하되 전답경작권이나 산림경영권을 개인에게 일정 기간 동안 임대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토질 변경이나 도로, 주택, 공장부지 등에 대해서는 도 단위 급에서 엄격하게 심사한 후에 허가하도록 하여야 한다.

    “(2005년 11월 26일 ‘광복60년 기념 평양 문화유적 참관단의 일원으로 출발) 이튿날은 만수대와 대동강 유람을 했어요. 대동강 저편에 있는 쑥섬도 구경했는데, 거기에 통일전선기념관이 있어요. 1948년 ‘남북 정당 ․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렸던 곳이 바로 거기예요. 기념비에 그 이야기가 적혀 있더라고요.

    김 주석이 직접 썼다는 글귀인데, “우리나라 역사상 정견과 사회적 견해가 다른 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의견 일치를 본 적이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 그 기적이 일어났다.” 같은 내용이었어요.”

    1948년의 ‘남북 정당 ․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정당 ․ 사회단체들이 결국 북한 공산당의 의도에 이용된 점이다. 북한은 이미 소련군의 후원 하에 김일성을 중심으로 권력 체제를 구축했고, 남한 역시 미군정의 후원 하에 권력을 구축한 마당에, 남한의 실세인 이승만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참석하지 않은 연석회의는 남북 전체의 회의라는 명분을 갖추기 위한 북한의 일방적인 회의일 뿐이다.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할하여 점령한 이상 김일성과 이승만을 제외한 정당 ․ 사회단체들은 들러리일 뿐이다. 그것보다는 극좌 김일성과 극우 이승만의 정당 ․ 사회단체를 제외한 중도 정당 ․ 사회단체들이 모여 연석회의를 열었다면 훨씬 더 큰 역사적 의미와 정통성을 가졌을 것이다.

    “(선생님이 생각한 인민이란 무엇인데요?) 노동자, 농민, 인텔리, 그 모두를 다 통칭해서 인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각성하고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다 그 누가 됐든 인민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허영철은 그 모두를 인민이라 통칭할 수 있다면서도, 각성하고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인민이라고 한다. 즉 주체철학의 세 가지 기본을 완전히 터득한 북한 사람들은 모두 각성하고 깨달은 인민이란 말이다. 그러니 북한은 지상낙원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현실의 북한이 과연 지상낙원인가? 그들의 시각과 잣대로 보면 그럴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북한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의 객관적인 평가이다. 즉 북한엔 아직 인민이 못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이 북녘이 안쓰럽다는 생각에 더 많이 동조할 거라는 점이에요.) 하지만 잘 산다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안정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호화찬란하게 살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물질적인 보장이 되면 좋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지요.

    (북한 사람들의) 생활이 여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에요. 북이 어렵다는 것은 굳이 평양까지 가지 않아도 여기 앉아서도 알잖아요. 그렇게 만든 것은 미국의 탓이 가장 크지만요. 사회주의 경제 체제는 무너지고, 미국의 경제 압력은 거세지고, 거기다 자연재해까지 계속 이어졌지요. 그래도 그 힘든 것 다 극복하면서 이만큼 이뤄 냈잖아요. 자존심 잃지 않고, 자긍심 버리지 않고. 비록 지금은 생활이 조금 어려워 보여도 미래를 보면 더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분명 있어요. 그게 진짜 잘 사는 것 아닌가요? 오히려 내가 보기엔 자본주의에 더 희망이 없어요.”

    골수 공산주의자답게 끝까지 북한을 옹호하는 허영철이 대단하다. 허영철이 말하는 ‘잘 산다’의 의미는 맞다. 정신적 안정이 기초하지 않은 물질적 풍요는 사상누각이다. 그러나 그것이 북한의 낙후성을 감싸는 변명이어선 곤란하다. 그것보다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왜 무너졌는가에 대한 반성과 모색이 더 필요하다.

    미래에 남한식의 천민자본주의가 북한에 유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존심과 자긍심이 강한 북한 사람들이니까 자본주의가 횡행하더라도 정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에 찌든 남한 사람들에게 진짜 잘 사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모습을 꼭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한 번도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내 이상과 동지들이 항상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언제나 든든했지요.

    공화국이 있어서 견뎠다는 것도 그런 의미예요. 설사 공화국이 없었더라도 견뎠겠지만, 그래도 공화국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혁명하고 통일할 수 있는 기지가 굳건히 있다, 늘 함께 있다, 그런 마음인 것이지요. 마음의 신념을 끊는다는 건 육체의 생명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어떤 고통을 겪어도 그 신념을 실현할 기지가 남아 있다. 우리가 혁명하고 통일을 할 기지가 굳건히 남아 있다, 그런 마음이 사람을 꿈꾸게 하고 강하게 해요.

    그래요, 그런데 바로 그런 공화국이 있고, 어렵게 살아도 사람들의 마음에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걸 보고 왔으니까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충분히 평양을 다녀온 보람이 있어요.”

    “(선생님 소원은 통일이지요?) 그럼 여러분은 아니에요? 우리 모두의 소원이 통일이 아니었나요? (맞아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에요. 하하하.) 그래요 통일이지요. 허허허

    2005년 노무현정권의 남북대화 정책의 덕택으로 비전향장기수 출신으로서 ‘공화국’을 방문할 수 있었으니, 허영철로서는 자기 신념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였다. 아마 그를 보낸 당국의 의도는 북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라는 것이었겠지만, 북한의 오류와 약점까지 환히 꿰고 합리적 변명까지 준비해놓은 그에겐 방북이 오히려 자기 일생 동안 추구한 사상이 결국 정의롭다는 자기 위안의 시간이었다. 출옥 후 7년 동안 아파트 수위 생활을 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그늘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하류 생활을 하는 그로서는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게 살아가는 공산주의 사회가 더 좋을 것이다.

    그는 20세 때 몸으로 배운 “내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은 온통 모순투성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면 그건, 고쳐야 하는 거 아니겠니?”를 한 평생 동안 철저하게 추구한 사람이다. 공산주의 말고는 그것을 고칠 방법이 없음을 확신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에겐 공산주의가 종교요 공화국은 그 종교의 집이다. 당국이 수십 년 동안 온갖 회유와 고문을 해도 결코 굽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를 살게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공산주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신념에 따라 한 생을 산다. 남들이 아무리 오류가 있다고 지적해도 끝까지 신념을 수호한다. 그에겐 ‘공화국’이 천국이다. 천국의 완성을 위해 희생한 작은 벽돌 한 조각으로서 매우 만족한다. 벽돌은 이미 벽돌로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결코 다른 것이 될 수가 없다.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허영철처럼 자기신념을 위해 한 평생 일관되게 살기 어렵다. 그 신념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한반도 현대사에 피와 눈물을 보탠 숱한 신념인들 덕분에 남한과 북한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남한의 지식인들도 허영철의 실체를 통찰할 필요가 있지만, 북한의 지식인들도 허영철과 같은 신념인들이 무엇을 위하여 한 살이를 희생했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요 통일이지요. 허허허”하는 그의 마지막 말대로, 이제 통일, 반드시 평화적 통일이 되도록 그도 노력하여야 한다. 그가 그리워하는 ‘공화국’이 피로 피를 씻는 전쟁 위에 건설되는 허상이 아니라, 아픈 과거를 더 깊이 삭여서 밑거름으로 만든 평화 위에 건설되는 우리 모두의 ‘공화국’ 실상이 되어야 한다.

     

     

                                            2015년 8월 22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쓰다

  • 비전향 장기수인 저자가 구술하고 기록한 내용이다. 아마도 이러한 인물이 쓴글이고 내용이니 국방부에서 추천해줬겠지. ...
    비전향 장기수인 저자가 구술하고 기록한 내용이다.
    아마도 이러한 인물이 쓴글이고 내용이니 국방부에서 추천해줬겠지. 
    한쪽 말만 들으면서 배워왔으니 이런 내용의 책도 봐줘야 균형이 잡히지 않겠소이까
  • 김정일은 김일성 기념관을 짓는데 8-9억달러를 사용한다. 그 기간에 아사한 북한 주민은 300만명이다. 8-9억 달러면 북한의...

    김정일은 김일성 기념관을 짓는데 8-9억달러를 사용한다. 그 기간에 아사한 북한 주민은 300만명이다. 8-9억 달러면 북한의 주민에게 3년간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돈이다. 김일성 때도 그랬고, 김정일 때도 역시 북한은 국민들이 아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은 캐비어 등을 먹으며 초호화 생활을 누리고 있다. 북한의 생산 체계는 생산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신과 같은 존재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자신에게 권력을 물려준후 무력해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자신은 그러한 처지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 현재 후계자 지명을 하지 않고 있다.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 또는 한국으로 보다 나은 삶을 찾아온다.

     

    역사는 소련과 중국, 캄보디아, 루마니아 등의 사회주의 국가와 독재 국가들의 몰락을 통해서 그러한 지도자와 체제, 사회가 인류에게 끼친 해악과 결말을 보여주었다.

     

    비전향 장기수로서 역사로부터 외면당하는 사상을 바탕으로 소위 '치열한 투쟁의 삶'을 살아간 사람...  그에게는 혁명가라느니, 민주화 운동가라느니 라는 타이틀보다는 역사는 헛된 삶을 위해 자신 삶을 '치열하게' 낭비했던 사람이란 타이틀을 붙여줄 듯 싶다. 모파상의 목걸이에서의 여주인공의 모습이 연상되는 삶.....

  • 0.75평에 갇힌 사람들 | kj**09 | 2006.08.15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이 책은 0.75평으로 상징되는 비전향 장기수가 쓴 책입니다. 수많은 질곡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에서 한 인간의 삶과 투쟁...
    이 책은 0.75평으로 상징되는 비전향 장기수가 쓴 책입니다. 수많은 질곡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에서 한 인간의 삶과 투쟁이 어떻게 신화가 되고 역사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배태하고 있는 비통함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비통함이 때론 부채의식으로 때론 알듯 모를 듯한 죄의식으로 화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살아낸 시대를 감정이입하지 않고 응시할 배짱이 없던 탓도 있었지만, 크게는 그들을 많게는 40년 이상 그 좁은 감방 안에 처넣었어야 했을 만큼 내 의식이 그리도 편협하고 내 시각과 행동이 그토록 모질었는지, 민족이라는 큰 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나'에게서 비롯한 철저한 자기반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 인간의 개인사라 하기엔 역사성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개인이 도드라지지 않는 거대 담론으로서의 역사라 하기엔 너무도 가까운, 그래서 마치 피붙이 같은 역사를 마주하고, 비록 며칠 지나지 않아 속절없이 스러질 생각일망정 어떻게 뒤척이는 번민과 가슴을 째는 사유 없이 지나칠 수 있을까요?

     

    이 책을 계기로 굴절된 현대사가 바로 잡아지길 기대합니다. 적어도 기술되지 않은 현대사가 제자리를 잡고, 어떤 이유로도 양심과 사상을 이유로 개인을 잡아 가두는 야만의 시대가 다시 오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오늘 그들에게서 빚진 심정이 되고야마는 우리가 부채를 덜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오늘 내가 무엇으로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주저 없이 이 책을 권합니다. 그리고 이 책이 복무하는 철저한 자기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진중하게 가져보기를 바랍니다. 지금과 전혀 다른 새로운 창이 열릴 것입니다.

     

  • 역사 속에 빠진 위험한 삶 | qu**tz2 | 2006.08.02 | 5점 만점에 4점 | 추천:0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헌법 제3 조에 규정된 영토규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녘 땅은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진다. 전쟁을 도발했으며, 현재의 분단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공한 주체로서 우리는 북한 정권을 대한민국 제1 의 적대국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아 왔다.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역사를 새로이 해석하는 움직임 역시 대두되었지만 현재 진행형인 분단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다. 이는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받기 위해 일방적으로 사람들의 목소리를 억누르던 지난 날의 분위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전쟁이 가져다 준 파괴의 놀라운 힘을 우리 모두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의 체제를 인정하는 순간 또 다시 과거와 같은 전쟁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랄까? 하지만 단순한 불안감이라고 하기엔 지금껏 양산된 불행이 너무도 크다.

    이 책의 저자인 영철 님은 만 36년을 차디찬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사람이다. 대다수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그러하듯 지난 70-80년대의 자유를 갈망하는 움직임이 없었더라면 그의 삶 역시 세상과는 단절된 체 끝났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외면한다고 하였던가? 한 번 뿐인 삶을 통해 그가 경험한 모든 것들은 옳고 그름의 여부를 떠나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지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내기에는 너무도 벅찬 이야기를 나는 만났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몸은 감옥을 벗어났으나 여전히 보호관찰법에 의한 구속을 받고 있다. 삶의 마지막 끝자락까지도 자유롭지 않은 인물. 하지만 그의 삶을 무모하다 욕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일제 치하의 서글픈 우리 역사를 그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만났다. 아무 생각 없이 뛰어 놀던 혹은 대학 입시에 찌들어 있던 나의 10대 시절과는 너무도 다른 한 개인으로서 사회가 강요하는 삶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그 역시 그 시절을 살던 한 개인으로서 사회의 혼란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뿐. 평범했던 삶이 사회주의 사상에 충실한 혁명가의 삶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의도적인 선택이라기 보단 자연스러움에 가까워 보였다. 마치 끊어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물의 흐름 마냥 혼란은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 변화는 우리에겐 생소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읽고 있는 내내 드는 불편한 생각은 내 안에서 자기 통제 레이더가 작동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과 세상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간의 모순점 사이에서 나는 표류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나로서는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가 없었다. 역사의 한 복판에 놓인 그의 삶을 두고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위험했다라는 평을 내릴 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이 어디 온전히 그 혼자만의 몫이었겠는가. 남과 북 모두 역사를 통해 지금껏 수많은 희생양을 양산해 왔음을...

     

    전쟁의 책임을 놓고 어느 한 편을 탓하는 행위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상대방을 탓하는 순간에도 분단이라는 현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단만이 고착화될 뿐이다. 특정한 희생양을 만들어 그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가 통일을 위한 길은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분단의 현실이 우리의 것이듯 통일 역시 우리 자신의 움직임에 의해 이룩해야 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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