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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사. 1: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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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쪽 | 규격外
ISBN-10 : 8933707239
ISBN-13 : 9788933707234
한국 경제사. 1: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양장본 HardCover) [양장] 중고
저자 이영훈 | 출판사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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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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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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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사를 새로운 시대구분으로 서술한 연구서! 한반도에서 문명이 성립한 이래 현재까지 인간의 경제생활이 전개되어 온 역사를 서술한 이영훈 서울대 교수의 『한국경제사』 Ⅰ, Ⅱ권 중 Ⅰ권이다. 저자는 한국경제사를 제1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7세기), 제2시대(8∼14세기), 제3시대(15∼19세기), 제4시대(20∼21세기)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는데, 시대를 구분하는 지표는 인간의 가족적, 사회적, 국가적 존재형태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어떤 무리에 속한 가운데 반지하 움집에서 살았던 인간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 극히 개성적인 한국인으로까지 진화해 왔는가라는 문제이다.

Ⅰ권에서는 제1~3시대, 즉 기원전 3세기부터 19세기까지를 다루고 있고, Ⅱ권에서는 제4시대, 즉 20~21세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고대→중세→근대라는 도식적 틀에서 벗어나 사실의 충실한 인과로서 한국사의 전 흐름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한국경제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소개

저자 : 이영훈
저자 이영훈(李榮薰)은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85).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1977∼1982).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를 거쳐 2002년 이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경제사학회, 한국고문서학회,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朝鮮後期社會經濟史』(한길사, 1988),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공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대한민국역사』(기파랑, 2013) 등이 있다. 청람상靑藍賞(한국경제학회, 1990), 경암학술상耕岩學術賞(경암교육문화재단, 2013), Coghlan Prize(Australian Economic History Review, 2015) 등을 수상하였다.

목차

머리말

제1장 한국경제사의 방법
1. 연구사의 회고
2. 무엇을 쓸 것인가
3. 새로운 시대구분

제2장 문명의 아침
1. 선사시대의 한반도
2. 연烟의 성립
3. 족장사회
4. 국가의 출현

제3장 공연孔烟에서 정호丁戶로
1. 7세기 말의 농촌
2. 정丁의 성립
3. 통일신라의 사회

제4장 국인國人과 전호佃戶
1. 집권적 지배체제의 전개
2. 농민과 사회
3. 원 복속기의 사회와 경제

제5장 유교적 전환
1. 조선왕조의 창업
2. 국전제의 재편
3. 지배체제의 이원화
4. 양반과 노비
5. 경제체제와 사회

제6장 소농사회
1. 시장경제의 대두
2. 소농경제의 전개
3. 소농사회의 양상
4. 국가적 재분배경제

제7장 위기
1. 19세기의 정체
2. 제국주의의 도래
3. 1880년대의 혼돈
4. 대외무역의 전개와 전통경제의 재편
5. 황혼의 대한제국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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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을 구비한 주거지에 관한 한국인의 기록은 5세기 이후에야 나타난다. 414년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세운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는 왕릉을 지키기 위한 수묘호守墓戶를 각지에서 차출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에 따르면 장수왕은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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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을 구비한 주거지에 관한 한국인의 기록은 5세기 이후에야 나타난다. 414년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세운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는 왕릉을 지키기 위한 수묘호守墓戶를 각지에서 차출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에 따르면 장수왕은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 110가家와 새로운 정복지에서 220가를 수묘호로 차출한 다음, 그들을 국연國烟 30과 간연看烟 300으로 편성하였다. 중국의 한자에서 가家 또는 호戶는 개별 세대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다. 광개토왕비는 그 가나 호가 고구려의 지배체제에 편입되어서는 연烟이라는 고유명사로 규정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 5세기 초 고구려에서 가의 제도적 표현은 연이었다. 연은 반지하 움집의 부뚜막에서 밥 짓는 연기가 지붕 위로 솟은 연도를 통해 피어오르는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연 규정은 그러한 이미지에서 고안되었다고 여겨진다. 국연은 간연을 감시하고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개 국연 하나에 간연 열이 하나의 대오를 편성하여 30개 대오가 순번으로 수묘의 역을 담당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551년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단양의 적성赤城을 빼앗은 다음, 주민 가운데 신라의 적성 공략에 협력한 사람들을 포상하였다. 그 포상의 내용을 새긴 것이 1978년에 발견된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이다. 동 비문은 신라의 점령지 지배정책에 관해 몇 가지 정보를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적성연赤城烟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적성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신라 역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그의 백성을 연으로 규정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가 그의 백성을 연으로 규정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5세기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백성을 연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기초 단위로 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역사시대의 상징으로서 국가가 솟아오르고 있음을 알리는 그 같은 변화의 저변에는 소규모 가족이 공동취사의 집단으로부터 분리되어 개별취사의 세대로 자립하게 된 역사적 진보가 가로놓였다.
- 제Ⅰ권 제2장 문명의 아침 중에서

정호는 국가에 대한 조부의 납부에서만 아니라 생산, 결혼, 상속, 촌락 등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기초 단위를 이루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려인들은 정호를 가리켜 가家라고 칭하였다. 가는 소규모 가족이 아니라 그것이 다수 결합한 친족집단으로서 세대복합체를 가리켰다. 원 복속기의 일이다. 1293년 원으로부터 흘절사팔吃折思八이란 번사蕃師가 고려에 파견되었다. 원래 고려인으로서 1271년 진도가 함락될 때 원에 끌려간 사람인데 승려가 되어 번사로 출세하였다. 32년 만에 고려에 돌아와 서림현西林縣에서 부모를 찾았는데, 부모가 가난하여 능히 자존하지 못하고 남의 집의 용작傭作이 되어 있었다. 이에 왕이 그 족속을 교동현喬桐縣으로 옮기고 토지를 지급하여 가를 이루게 하였다. 1351년 공민왕恭愍王은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보허普虛에게 경기도 광주에 있는 왕실의 전장을 하사하였다. 이에 보허가 흩어졌던 친척들을 모아 가를 이루었다.
이 두 예에서 보듯이 고려의 가는 일반적으로 친족집단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의 가족이나 친족의 구성 원리는 중국과 달랐다. 그로 인해 중국과 갈등이 빚어진 적이 있다. 고려가 원에 복속할 때 위의 흘절사팔처럼 끝까지 항전하다가 원으로 잡혀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는 원에 일찍 투항한 사람들의 가속家?이 있었다. 고려는 그러한 사람들을 송환해 주기를 원에 거듭 요청하였다. 이에 원은 일찍 투항한 사람들의 부모와 처와 자녀를 송환하였다. 그러자 고려왕조는 할아버지와 손자, 시아버지, 삼촌과 조카, 형제와 자매도 모두 고려에서는 가속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사람들마저 돌려주기를 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의 가가 일반적으로 소가족임과 달리 고려의 가는 직계·방계만이 아니라 처족까지 포함하는 친족공동체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 제Ⅰ권 제4장 국인國人과 전호佃戶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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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책 구성 제1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7세기)에는 소규모 가족이 개별 세대로 성립했는데 이를 연烟이라 하였고, 생산과 수취의 단위는 취락이었다. 연, 세대복합체, 취락, 읍락, 소국으로 상향하는 제1시대의 사회와 국가는 자연현상이나 동물에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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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구성

제1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7세기)에는 소규모 가족이 개별 세대로 성립했는데 이를 연烟이라 하였고, 생산과 수취의 단위는 취락이었다. 연, 세대복합체, 취락, 읍락, 소국으로 상향하는 제1시대의 사회와 국가는 자연현상이나 동물에서 유추된 종교적 상징으로 통합되었다. 4세기 이후 고구려를 선두 주자로 하여 족장사회의 질서를 율령, 관료제, 불교로 대체하는 국가들이 출현하였다. 이 시기 개별 취락은 아직 신분과 계급을 모르는 공동체사회였으며, 밭농사와 수렵이 경제생활의 주를 이루었다. 이 같은 초기농경사회初期農耕社會는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한 가운데 그리스ㆍ로마까지 통상로가 이어진 활짝 열린 국제사회이기도 하였다.
제2시대(8∼14세기)에는 생산과 수취의 단위로 정丁이 성립하였는데, 정은 여러 세대가 일정 규모의 경지와 결합한 세대복합체世帶複合體였다. 8세기 초 신라는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이 최초의 토지개혁에서 분배의 단위는 정丁이었다. 정은 일정 규모의 경지와 세대복합체의 결합이다. 신라는 정을 단위로 조와 공물을 수취하였는데, 국가의 지배 단위가 취락에서 정으로 이동한 것은 농업의 발전에 따라 세대복합체의 자립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고려는 이 같은 신라의 체제를 충실히 계승하였다. 제2시대의 농촌은 제1시대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사회였으며, 토지소유를 매개로 한 사적인 계급ㆍ신분관계는 발달하지 않았다. 귀족, 관부, 사원에 속한 노비가 있었지만 소수에 머물렀다. 제2시대의 두 왕조는 왕도王都에 집주한 귀족과 중앙군의 공동체가 군현으로 재편성된 제1시대의 읍락이나 소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체제였다. 재분배경제를 영위했으나 체계적이지 못하였으며, 시장은 초보적 수준이었다. 일본과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바뀌긴 했으나 이 시기에 바다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13세기 중반 몽골제국에 복속된 이래 고려의 사회ㆍ경제는 크게 변하였다. 무역이 활성화하고, 지역 간의 인구이동이 활발해지고, 농업생산력이 높아졌으며, 농민의 토지에 대한 권리가 강화되었다.
제3시대(15∼19세기)의 조선 왕조는 15세기 중반에 토지와 인구를 따로따로 지배하는 국가체제상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토지는 양안量案에, 인구는 호적戶籍에 별개의 체계로 등록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2시대의 세대복합체 정丁이 해체되고, 호戶가 성립하였다. 호는 호수戶首의 가족과 그에 예속한 노비로 구성된 인적 결합을 말한다. 정의 해체와 더불어 종래의 공동체사회는 신분제사회로 변환되었다. 유교儒敎를 국시로 삼은 조선 왕조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위계로 짜인 사회질서와 국제관계를 지향하였다. 조선은 명明의 제후국諸侯國으로 자처했으며, 그에 걸맞은 국가체제를 추구하였다. 제2시대까지 열렸던 바다는 굳게 닫혔다. 16세기 말 이후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무역을 중계하는 지경학적地經學的 이점을 누렸으며, 농촌에 정기시定期市가 성립하고, 동전이 유통되었다. 이 단계에 이르러 소규모 가족은 소농小農으로 자립하였다. 17세기 후반 이래 조선의 농촌은 소농사회小農社會로 나아갔고, 경제활동을 둘러싼 생태계는 도작 일변으로 단순화하였다. 나무가 벌채되고 산지가 개간되어 산림이 황폐해졌다. 이는 도작의 생산성을 떨어뜨렸으며, 농촌시장을 위축시켰다. 곡물을 분배하고 환수하는 재분배경제는 서서히 해체되었다. 반상班常의 위계로 통합되어 온 사회질서도 현저하게 이완되었다. 그 와중에 청과 일본을 선두로 한 제국주의시대가 동아시아에 도래하였다. 500년을 지속한 국가체제와 국제질서의 관성에 눌린 조선왕조는 내외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출판사 서평

인간의 경제활동은 인구와 자연환경, 가족과 소농, 소유와 신분, 지배와 통합, 신뢰와 갈등, 제도, 지경학적 조건 등 실로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이다. 이 책은 그 복합적 과정에서 경제활동의 주체로서 개별 인간의 가족적, 사회적 존재형태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 어떠한 굴곡을 겪는 가운데 오늘날의 극히 개성적인 한국인으로 이어졌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사의 각 시대를 상징하는 인간의 가족적, 사회적, 국가적 존재형태는 같지 않다고 정의하여, 제1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7세기)에는 연烟, 제2시대(8∼14세기)에는 정丁, 제3시대(15∼19세기)에는 호戶, 제4시대에는 개인個人(20∼21세기)으로 변하였다고 본다. 오늘날 한국경제의 국제적 위상이 중진국 상위권에 놓인 것과 이처럼 인간의 존재형태가 시대에 따라 높은 수준으로 진화해 온 것은 내밀한 관련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제1~3시대의 한국인의 자생적 진화 내지 내재적 발전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제4시대(20∼21세기)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시대라고 해서 그 구분이 칼로 자른 듯이 절연截然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2시대에 들어서도 제1시대의 부문이나 요소는 오랫동안 이어졌으며, 이 점은 제3시대와 제2시대의 관계에서도, 나아가 제4시대와 제3시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이식된 근대가 전통을 누르거나 해체하는 단선單線의 과정이 아니라 전통이 근대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를 재편성하기도 했던 복선複線의 과정이었다. 그 같은 관점에서 20세기 이후의 한국사를 전체적으로 재조명할 필요성을 이 책은 제기하고 있다.

책속으로 추가

두락당 지대량은 1680년대 이래 1750년대까지는 15~20두 수준에 머물다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6~7두로까지 낮아져 있었다. 18세기 전반에 비해 1/3에 불과한 수준이다. 이후 1890년대부터 상승의 추세로 반전하여 1940년대까지 15두 수준을 회복하고 있다. 두락당 지대량의 감소를 초래하는 요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두락당 생산량이 감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량 가운데 지대가 차지하는 비율, 곧 지대율이 감소하는 것이다. 17~19세기 민간의 병작(어우리) 관행에 있어서 지대율은 통상 50%였다. 그 지대율이 장기적으로 하락했다는 증거는 어디서고 찾아지지 않는다. 병작 관행에 관한 20세기 초의 조사 자료는 공통으로 지대율이 50%임을 전하고 있다. 36종의 추수기 가운데 2종의 추수기로부터는 지대율을 추정할 수 있는데, 거기서도 지대율은 변하지 않았다. 36종의 추수기 가운데 3종은 두락당 지대량이 아니라 두락당 생산량을 기록한 것이다. 거기서 확인되는 두락당 생산량 역시 위와 같은 형태의 장기추세를 그렸다. 요컨대 18세기 후반 이래 19세기 말까지 두락당 지대량이 근 1/3로 감소하는 장기추세의 기본 요인은 두락당 생산량, 곧 수도작의 토지생산성의 감소에 있었다. 지대율이 감소하여 위와 같은 추세를 가속시킨 기간이 있긴 했었다. 민란이 자주 발생하여 사회기강이 문란해진 1860년대 이후는 지대율의 하락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것은 민란이 종식된 1894년 이후 지대량이 곧바로 상승의 추세로 돌아선 것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 제Ⅰ권 제7장 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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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리뷰

  • 훌륭한 책, 그러나 | en**nje | 2018.09.10 | 5점 만점에 4점 | 추천:0
    이 책은 훌륭한 책이다. 동시에 이 책은 큰 책이다. 오래 공부한 사람이 정성 스럽게 쓴 책이다. 읽는 사람에게 (이런 훌륭...

    이 책은 훌륭한 책이다. 동시에 이 책은 큰 책이다. 오래 공부한 사람이 정성 스럽게 쓴 책이다.

    읽는 사람에게 (이런 훌륭한 책을 읽고 있다는, 읽었다는) 自尊感을 준다.


    이 책 1권을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은 아래와 같다. (괄호 안은 페이지 )


    (27)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처음부터 한국사에 맞지않는 잣대였다.

    (30) 그럼에도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지주와 전호라는 상호 무관한 두 외래어를 조합하여 그들의 중세 사회 구조를 대변하려 하였다. 돌이켜 보면 더없는 범주 착오였다.

    (38) 한국인은 언제부터 자유인이었나, 한국에서 사유재산제도는 언제 포괄적으로 성립하였나?

    (53) 역사에서 순전한 의미의 이식이나 시혜는 없다. 19세기까지의 한국사가 성취한 문명의 토양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일본의 법과 제도는 이식될 수도 없었을 뿐더러 해방 후 남한의 정치, 경제 세력이 그것을 계수하는 선택도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한국사에 있어서 시장경제체제의 성립이란 대사건은 이같은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199) 요컨데 8~9세기의 한국사는 아직 중국적인 노비제, 곧 唐律이 그 사회적 인격을 가축에 준하는 것으로 판정한 비천신분제를 알지 못하였다.

    (203) 각 시대는 다른 시대와 구분되는 고유 체계의 언어를 지닌다. (중략) "필사본 화랑세기"가 20세기에 만들어진 위작이라면 그것은 20세기 언어에 녹아있는 복잡코드로 짜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노비는 개똥이나 소똥과 같은 비천과 오에의 존재이어야 했다. (중략) 그렇지만 `

    (216) 벼는 삼국시대 이래 귀족적 지배층의 사치적 소비품으로서 그들의 주식이었다. 서민들의 주식은 여전히 보리와 콩 등의 밭작물이었다. 쌀이 서민의 주식으로까지 널리 섭취되는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243) 고려 왕조는 왕도에 집거한 국인들의 지배 공동체가 전국의 580여 군현과 거의 같은 수의 향, 부곡을 예속 공동체로 지배하고, 예속 공동체의 토지를 지배 공동체의 성원에게 분배하고, 그로부터 조와 부를 수취하는 군사적 공납제 국가였다.

    (252) 고려인이 불경을 필사한 사경 속의 그림에서도 民庶의 주거는 일반적으로 움집이다.

    (273) 고려의 노비들은 그의 주인과의 관게에서 천하였을 뿐이다. 반드시 사회적으로 천하지는 않았다. 주인이 총애하면 노는 해방되고, 심지어 권력자로 출세하였다.

    (354) 양반 관료와 지방 세력의 상당한 저항을 누르면서 강인하게 추진된 세조의 개혁은 왕조를 새롭게 세운다고 할 정도로 창업적인 것이었다.

    (356) 1468년 保法을 시행한 지 4년 만에 세조가 사망하였다. 이후 양반 관료들은 세조의 개혁을 하나씩 취소하거나 수정해 갔다.

    (중략) 이로써 ~ 조선 왕조는 개별 호에 대해 호가 보유한 토지와 무관하게 호의 인정 수를 기준으로 군인을 선발하는 순수 인신 지배 체제로 전환하였다.

    (365) 인구의 30% 이상이 노비 신분으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고려 시대의 노비는 전체 인구의 3~4%에 불과하였다.

    (366) 한 조각의 토지도 지급하지 않고 오로지 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인신으로부터 무거운 역을 강요했던 조선 왕조의 백성 지배체제는 후대의 한국사에 더없이 큰 영향을 미쳤다. 국가와 개인이 직접 대면하는 가운데 보다 나은 신분 지위를 추구하는 개인간의 경쟁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격심한 갈등을 유발하였다. 어찌해서 이같이 더없이 독특한,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지배체제가 성립하게 되었던가.

    (378) 세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허용했으며, 그들이 낳은 자녀를 모두 노비신분으로 돌렸다. 從賤法으로 불린 이 고약한 신분 세습의 원리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이후 세조는 종천법을 취소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392) 조선 왕조는 양반 관료와 대립하면서 결탁하였다. 그같은 지배 연합은 토지에 대해서는 소유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 몰인격적인 지배체제를, 인구에 대해서는 공적 예속의 양인과 사적 예속의 노비를 구분하는 지배체제를 창출하였다.

    (401) 일본銀에 지지된 중국 물화의 대량 유입은 일대 사치풍조를 유발하였다. 16세기 조선의 지배층은 중국에서 수입된 사치품 없이는 혼례를 치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치 풍조는 왕조와 양반 관료의 공물 수취를 자극하였다.

    (403) 1592년 전쟁 초기에 벌어진 조선 왕조의 급격한 붕괴는 이 왕조의 백성 지배체제가 지닌 모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중략) 일본군이 7년간 장기 주둔했던 남부지방에서는 왜복과 왜발을 하고 조선 왕조가 다시 복귀할까 봐 걱정하는 백성들도 생겨 났다.

    (447) (18세기 들어, 특히 영조의 ) 조선 왕조의 노비 정책이 노비제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것도 중요했지만, 노비제의 해체를 이끈 궁극의 힘은 시장 경제의 대두, 집약 농법의 진전, 인구 증가 등, 노비들을 소농으로 자립할 수 있게 한 사회 경제의 새로운 환경이었다.

    (503) 대동법의 정착에 무려 10 년의 긴 기간이 소요되었음은 조선 왕조의 국가 체제가 양반 신분의 이해 관게에 얼마나 크게 제약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514) 저장의 체계, 교역의 체계

    (564) 조선 왕조는 1876년의 개항을 맞기 이전에 이미 심각한 체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587) 같은 시기 한반도를 여행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이 나라가 오직 약탈자와 피약탈자의 두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면허 받은 흡혈귀인 양반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 계급과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문자 그대로의 하층민인 평민 계급이라고 하였다.

    (635) 대한제국의 황제가 개명 군주로서 그에게 부여된 전제권력을 활용하여 부국강병 정책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는 그 시대가 남긴 방대한 기록에서 단 한 조각의 근거도 찾기 힘든 荒說에 불과하다.

    (641) 세금이 주권자의 권리로 부여되는 한, 그것이 아무리 너그러운 수준일지라도 , 그 국가는 전 근대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국가의 과세 행위에 대한 인민의 동의권은 아무리 낮은 수준일지라도 대의제적 정치 형태의 성립을 요구한다. 인민의 대표로서 구성된 의회가 군주의 과세행위에 동의할 권리를 확보하거나 군주를 대신하여 과세를 행할 때 그런 나라를 두고 근대적 국가체제의 성립을 운위할 수 있다.

    그러나, 1권에서 정치한 분석, 완벽한 증거 앞에서 감탄하던 독자는 2권에 와서 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저자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음으로써 "근대"가 비로소 한반도에 이식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유재산제도의 도입, 근대적 사회간접 자본의 설치 등등, 일제 시대가 끝난 뒤에는 박정희의 근대화, 산업화가 백성들의 경제적 삶을 크게 향상 시켰다고 주장한다. 
    그 다음은 우리 사회가 신분제적 차별 사회라고 규정한다.

    우리 사회가 신분제적 차별 사회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일제가 이식한 근대화, 박정희의 산업화 과정의 찬양에는 두 가지 점에서 이의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1) 일제가 우리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조지 오웰이 영국이 인도 식민지에 대한 태도를 갈파한 "평등 없는 친밀성" (intimacy without equality) 이란 말을 한번 천착해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고세훈 저 '조지오웰"에 잘 설명되어 있다. 
    박정희 시대에 관하여는 그 시대의 초기에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께서 박정희를 "히로뽕주의자"라고 부르며 그 독재자가 국민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경제적 혜택이 아니라 일종의 '히로뽕'이라고 한 바 있다. 조지 오웰과 같은 맥락이다.

    2) 그렇다면 여기서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경제사" 연구자는 경제사 외의 분야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아야 하는가? 경제사 연구는 반드시 그 시대가 경제적으로 어떠하였느냐만 문제 삼는 것인가 아니면 필연적으로 경제로 부터 시작하여 , 경제를 가능케한 정치, 경제의 후발 생산품인 문화 등을 취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아마 정답은 없을 것이다. 학자 개인의 몫일 수 밖에. 언급한만큼 자기 것이 되는 '마이다스의 펜'을 가진 자가 탄생될 것이다. 펜을 버리기 전에는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찌하랴 ? 배운 자의 숙명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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