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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문학동네시인선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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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1*224*12mm
ISBN-10 : 8954656439
ISBN-13 : 9788954656436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문학동네시인선 122) 중고
저자 배영옥 | 출판사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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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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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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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옥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시집 《뭇별이 총총》을 냈던 바 있는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다. 시인은 2018년 6월 1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6년에 와 2018년에 간 사람. 그쯤이라 하기에는 모자라다는 말로밖에 답할 수가 없겠는 시간, 오십 두 해. 이 시집은 시인이 작고하기 전까지 손에 쥐고 품에 안고 있던 시들로 한 연 한 연 너무 다듬어서 하얘진 속살과 한 행 한 행 너무 들여다보아서 투명해진 속내를 한 편 한 편 평소의 제 얼굴인 듯 다부지면서도 단호히 내어걸고 있다.

저자소개

저자 : 배영옥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뭇별이 총총』이 있다. 2018년 6월 1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목차

1부 엄마 무덤 곁에 첫 시집을 묻었다
훗날의 시집 / 늦게 온 사람 / 사과와 함께 / 그림자와 사귀다 / 위성 / 암전 / 또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 누군가는 오래 그 자리에 머물렀다 / 뼈대의 감정 / 여분의 사랑 / 이상한 의자 / 나는 왜 / 거룩한 독서 / 헛글에 빠지다 / 애 인 들 / 먼지처럼 / 담쟁이를 위하여 / 수치(羞恥) / 자두나무의 사색 / 뱀딸기 / 재활용함 / 자화상 / 사람꽃 / 작약꽃 / 포도나무만 모르는 세계

2부 다음에, 다음에 올게요
나를 위한 드라마 / 거울 속에 머물다 / 훗날의 장례식 / 멀리 피어 있는 두 장의 꽃잎 / 마지막 키스 / 불면, 날아갈 듯한 / 귀 / 눈물의 뿌리 / 모란 / 모란과 모반 / 밥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 사월 / 유쾌한 가명 / 다음에 / 소음의 대가 / 포시랍다는 말 / 어느 발레리나의 오디션 / 그냥 거짓말입니다 / 해피 버스데이 / 나도 모르는 삼 년 동안 / 부드러운 교육 / 꽃피는 가면 / 우리의 기억은 서로 달라

3부 의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의자가 되기까지
의자를 버리다 / 시 / 구름들 / 나의 뒤란으로 / 가나안교회는 집 뒤에 있지만 / 햇볕에 임하는 자세 / 적막이라는 상처 / 수박 / 누군가가 나를 외면하고 있다 / 고봉밥이 먹었다 / 행복한 하루 / 벌레의 족속 / 촛불이 켜지는 시간 / 미자가 돌아왔다 / 페이지 터너의 시간 / 눈알만 굴러다니던 혁명 광장의 새처럼 / 이상한 잠적 / 비의 입국 / 나는 나조차 되기 힘들고 / 천사가 아니어서 다행인 / 사하라 / 나는 새들의 나라에 입국했다

발문 | 사람은 죽지 않는다
| 이영광(시인)

책 속으로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표지의 배면만 뒤집어보리라 순환하지 않는 피처럼 피에 감염된 병자처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하리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전생이여 마음이 거기 머물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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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표지의 배면만 뒤집어보리라

순환하지 않는 피처럼
피에 감염된 병자처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하리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전생이여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보리라

─「훗날의 시집」 전문

나의 미소가
한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걸 알고 난 후
나의 여생이 바뀌었다
백날을 함께 살고
백날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공기마저 온기를 잃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내 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세상을 펼쳐보기도 전에
아뿔싸,
나는 벌써 죄인이었구나
한 사람에게 남겨줄 건 상처뿐인데
어쩌랴
한사코 막무가내인 저 사람을……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여분의 사랑」 전문


엄마 무덤 곁에 첫 시집을 묻었다

시집 속 활자들, 꿈틀거리며 꼬물거리며
흙과 바람과 햇빛과 꽃과 엄마와
잘 사귀었을까
무덤가 작약의 내력까지 읽어내렸을까
시집 속 활자들을 받아먹고 작약은 붉은 꽃이라도 피웠을까

햇빛 짱짱한 묘지에서
뭇별이 총총, 웃음의 왕국, 흔적과 한순간
시집 속 단어들을 떠올리다가
땅속 뭇별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다가
세월에 마모된 대리석 책을 보았다

살아온 연도가 새겨진 활자들이
날개 하나뿐인 천사상과 무성한 향나무 그림자와
어울렁더울렁 서로 젖어드는 모습을 보니
저 책만한 무덤이 없겠다 싶었다
활짝 핀 작약꽃만한 무덤이 없을 것 같았다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녘 하늘에 작약꽃이 붉게 피어올랐다

─「작약꽃」 전문


나는 가장 아픈 귀였다
피부보다 민감한 통점이었으며
소음의 배후였다
고집이 세었지만
언제나처럼 뿌리는 없었다
나는 부적절한 귀가 지은 죄였다
부글거리는 문장을 오래 품고
발설하지 않는 인내는
절대 미덕이 아니었다
나의 내부가 늘 고요했다면
공사장 소음을 뚫고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따금 귓바퀴가 아파오고
구름도 작약꽃도
단풍나무 숲도
가장 아픈 문장을 엿듣고 말았다
처음과 끝처럼
후회는 결코 혼자 오지 않았다
세상의 한 귀가 부서지고
기우뚱 균형을 맞추려던 그때
나는 이 세상도 오래 앓았던 귀라고 믿었다

─「귀」 전문


내 생애는
두레밥상 위에 숟가락을 놓으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숟가락들
어제 옆집 아버지 친구는
서낭당 언덕에서 돌멩이에 걸려 돌아가시고
건넛집 아이 엄마는 오늘 딸 쌍둥이를 낳았다

나도 이제 상 위의 숟가락에 숨은 배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수저통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숟가락을
상 위로 옮기는 가벼운 노동을
아직 생각이 어린 아이들에게 시킨다
몸과 생각에 물기가 많은 아이들은
죽음과 생의 신비가 숟가락에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밥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부분


날이 저물고 있다.

내가 앉은 의자의 중심이 점점 꺼지고 있다.

해는 곧 수평선 아래로 꺼질 것이다.

죽음은 결코 서두르거나 지체하지 않아도 저절로 올 것이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의자에 앉아 있다.

들판으로부터, 햇빛으로부터, 바람으로부터, 바다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한정된 생애가 풍경으로부터 벗어나려 할수록

의자의 중심은 나를 외면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외면하고 있다」 전문


원시 생물이 첫 눈을 뜰 때
딱딱한 캄브리아기의 시간을 뚫고
이제 막 새것인 시신경이 머리 주위로 모여드는,
몸 일부를 건네주고 눈 하나를 받을 때
껍질은 갈라터지고 환부를 찢어발기며
처음 통증을 마지막 통증으로 다독이는,
통증의 말단으로 온몸이 집중하는 순간
검은 눈망울이 빛과 어둠을 가르고
바깥세상과 만날 때
마침내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의 물거품이 떠오르고
첫 눈빛 세례를 받은 바닷속
풍경 하나가 반짝, 반응할 때
세상이 드디어 어린 영혼의
외로움까지 감싸안으며 더욱 짙어지는,
한 생명이 자기 안의 어둠과 대면하는 바로 그 순간

─「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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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하나의 초, 어차피 타고 없어질, 그저 꼿꼿하기만 한 하나의 초, 그 한 가닥의 흰 등뼈 같은 시들, 문학동네시인선 122 배영옥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가 출간되었다.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시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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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초, 어차피 타고 없어질,
그저 꼿꼿하기만 한 하나의 초,
그 한 가닥의 흰 등뼈 같은 시들,

문학동네시인선 122 배영옥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가 출간되었다.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시집 『뭇별이 총총』을 냈던 바 있는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다. 시인은 2018년 6월 1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6년에 와 2018년에 간 사람. 그쯤이라 하기에는 모자라다는 말로밖에 답할 수가 없겠는 시간, 오십 두 해.
이 시집은 시인이 작고하기 전까지 손에 쥐고 품에 안고 있던 시들로 한 연 한 연 너무 다듬어서 하얘진 속살과 한 행 한 행 너무 들여다보아서 투명해진 속내를 한 편 한 편 평소의 제 얼굴인 듯 다부지면서도 단호히 내어걸고 있다. 예서의 단호함이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미련이란 이름으로부터의 탈탈, 손을 털어버린 자의 차가움이자 가뿐함이기도 하겠다. 생을 훌쩍 건너버린 자니 이때의 놓음은 크게 생의 집착 같은 것이 되기도 할 터, 하여 이곳에 아니 있으니 저곳에 있을 시인에게 365일이 지났으니, 그쯤 지났기도 하였으니 이제 좀 물어봐도 될 일 같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땅을 내려다보며 묻노니, 그래 거기서도 시인이여,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전생이여” 하며 “영원을 돌이켜보”고 있으려나.
이런 돌아봄, 이런 뒤척임, 이런 되감기가 태생이며 성격이지 않았을까 싶게 시인은 이번 시집 속 제 살아옴의 시간을 역으로 돌아 뒤로 걸어가기를 매 순간 반복하고 있다. 더는 앞으로 걸어갈 수 없음을, 걸어간다 한들 캄캄하여 보이지 않는 그 시간들은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참으로 잘 아는 시인이기에 제 눈에 보이고 제 입이 말할 수 있을 겪고 난 지난 시간 속 제 삶에서 풀려나온 실들만 하나하나 매듭을 짓고 있다. 정확한가? 그러하다. 꼼꼼한가? 그러하다. 덤덤한가? 그러하다. 아픈가? 그러하다.
아무렴, 안팎으로 꽤나 아픈 시간을 보냈겠구나, 이제 와 짐작이나 해보는 작금의 우리들 앞에 이 시집은 생의 무상이라는 그 어찌할 수 없음, 그 안 보이는 바람 소리를 들려줌으로 서늘히 등짝을 쳐주는 기능 속에 있기도 하다. 안 보이는 그 뒤, 그 뒤가 누군가에게는 문이 되어 훤히 다 보이는 세계라는 거. 뒤가 앞이고 앞이 뒤라는 그 당연한데도 살면서는 속수무책 모를 수밖에 없는 삶의 비밀을 조금 알아버린 것도 같은 시인은 납덩이를 찬 것 같은 음울한 무거움 속 나날을 사는 우리들이 조금이나마 가벼울 수 있게 힘을 빼는 법의 시를 털어놔주고 간 듯도 싶다.
어떻게 이렇게 탈탈 저에게서 저를 털어낼 수 있었을까. 하나의 초, 어차피 타고 없어질, 그러나 애초의 생김이 딴 거 없이 그저 꼿꼿하기만 한 하나의 초, 그 한 가닥의 흰 등뼈 같은 시들, 마지막까지 끝끝내 쉽사리 손에서 놓지 못한 채 만졌다는 시들의 깊은 이야기 속 힌트를 부 제목에서 더듬어본다. 1부 “엄마 무덤 곁에 첫 시집을 묻었다” 하니 그 키워드 하나를 ‘엄마’로 삼는다. 2부 “다음에, 다음에 올게요” 하니 그 키워드 하나를 ‘다음’으로 미룬다. 3부 “의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의자가 되기까지” 하니 그 키워드 둘을 ‘여자’와 ‘의자’에서 찾는다. 어쨌거나 엄마에게로 갔겠구나, 그 다음이란 게 그런 돌아감이겠구나, 여자가 앉아 있을 때는 의지의 여자였겠으나 여자가 돌아갔으니 의자는 의지의 의자가 되었겠구나……
이 생에서의 남은 날이 얼마 주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손바닥이 까지도록 시를 붙들었음을 너무 알게 한 시집. 페이지가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 시집. 쉽게 종잇장을 넘길 수 없는 이유, 목숨 '수壽'가 걸려 있는 연유. 첫 시부터 울음이나 통곡하게는 안 한다. 그게 비수다. 잘 가시라. “혁명 광장을 지키는 독수리떼의 지친 울음소리가/ 이토록 내 어깨를 누르는 것을 보면/ 이토록 내 마음을 울리는 것을 보면/ 나는 아무래도 새들의 나라에 입국한 것이 틀림없다” 하시니 부디 그곳에서는 훨훨 나시라. 모쪼록 배영옥 시인의 명복을 빈다.

시는 비상한 뜨거움으로 한 생애에 “백일”만이 남았던 사람이 어떤 “늦은 사람”(「늦게 온 사람」)과 함께한 고통과 사랑의 시간을 적고 있다. 고통이 “온기”를 뺏어가고 “죄”를 심어주는 닫힌 나날은 그러나,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의 발명 가운데 저도 모를 사랑을 향유하는 듯하다. “어쩌랴”에는 사랑할 방도가 없음에도 사랑을 끌어안고 말았던 기쁜 무장 해제의 마음이 묻어난다. “백날”이 “일생”이 되는 까닭이 여기 있지 않을까. “여분의 사랑”은 곧 사랑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영광 발문 「사람은 죽지 않는다」 중에서

일러두기
* 이 책은 2018년 6월 11일 세상을 떠난 배영옥 시인의 유고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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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회원리뷰

  • 당신의 마지막 | dh**14 | 2019.06.21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마지막은 멀리 있어서 마지막이라는 말은 마지막에 써야만 할 듯한 기분이 든다.하지만 누구인들 어느 누구라도 마지막이 마지막일 ...

    마지막은 멀리 있어서 마지막이라는 말은 마지막에 써야만 할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누구인들 어느 누구라도 마지막이 마지막일 수 있을까, 마지막이 마지막이라고 알 수 있을까.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고자 해서 하는 일들이 아닌 일들이 있다. 아프기, 가난하기.
    아프고 싶어 아픈 이가 어디 있고 가난하고 싶어 가난한 이가 어디 있나.
    예고 없이 맞는 자연재해 같은 거다, 질병은 빈곤은
    원인을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만큼의 고통을 받을 만큼의 원인은 아니다, 누구라도 다 그만큼은
    그만큼은 하고 사니까.

    통증의 시간이 길었었나, 싶게도
    상황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게
    감상적이지도 않게 그러나 묘한 날이 종잇장에 베이는 손가락 같은 느낌이 든다.
    한 편 한 편 읽어갈 때마다 종잇장에 썰린 거죽이 아프다.

    문동 시인선은 디자인적 요소를 뒤표지에 둔다는 편집자의 말을 듣고
    뒤표지의 그림을 처음으로 눈여겨보았다.
    초 같기도 하고 향 같기도 하고
    사위어가는 목숨의 불꽃을 세운 촛대 같기도 하고

    하루하루 가늘어져가는 불꽃을 목격하는 사람의 마음은
    애가 끓을 뿐이다.
    그러다 마침내 불꽃이 꺼지는 날 애도 함께 끊어지는 마음을 느낄 뿐이다.
    울음은 명치끝에서 올라와 목젖에서 뛰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눈물은 눈동자 안에서 가득 돌아나는데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그때 기억들이 시를 타고 떨어져 다시 올라왔다.

    긍정도 부정도 없이
    처지를 동정함도 미워함도 없이 나약함도 없이 의지도 없이
    오로지 느낀 감정은 오히려 체념에 가까운 냉정이었다.

     

    어느 날 과거와 미래의 다른 얼굴이 나를 찾아온다면
    그녀들이 둥글게 손에 손을 맞잡고
    위성처럼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면
    나는 환호성을 울리며 기뻐할 수 있을까
    비명 없이 끔찍할 수 있을까
    그중 몇몇을 내가 좋아할 수 있다면
    그중 몇몇은 나를 비판할 수 있을까
    -위성 가운데

     

    뼈대 가지는 것이 이토록 슬프다는 것을
    왜 예전에 몰랐을까

    말라붙어 검은 때가 낀 공중화장실 비누같이
    양손으로 비벼도 거품이 일지 않는 공용 비누같이
    가까스로 남은 생을 지탱하는 조각 비누 같이
    .....
    공중화장실에서 하염없이 말라갈 비누와
    뼈가 생기는 무척추동물의 진화에 참여하는 시간대에

    하염없어라 이날이여
    하염없이 늘어지는 티셔츠 낡은 목선이여
    ....
    비누는 비누의 이름보다 좀더 슬픔을 가진
    뼈대의 감정에 가까워지고
    뼈대의 감정 가운데

     

    거룩한 독서

    비석은
    한 줄로 읽는 망자의 자서전

    이름과 문중
    그리고 매장 연도만으로도
    일대기를 알 수 있다

    자간은 좁고
    행간은 넓다

    짧은 주석 하나 없이
    한 생애가
    저리 일목요연할 수 있다니

    저 두껍고 무거운 책 앞에선
    누구도
    비평을 달지 못하리라

    그것은 전속력으로 한 생을 덮어버린다

    예고 없이 불쑥 솟아나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에 달라붙어
    수시로 나를 곁눈질한다
    ......
    수치는 이제 나의 힘
    그것마저
    사랑해야겠어
    수치(羞恥)가운데

    누군가 아픈 이를 곁에 두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이 마음을 기억하라고픈 시다.

    전문을 옮겨오고픈 시 몇 편을 옮긴다.

    훗날의 장례식

    주인공인
    나만 없을 것이다
    벅찬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찍 떠났으므로
    엉킨 실타래 같은
    검은 부재의 바람이 불고
    태극 휘날리고
    잿빛 비둘기만 구구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무거운 공기가
    이제 진짜 안녕이라며
    작별을 고할 것이다
    새 없는 공중으로 검은 비가 내릴 것이다
    한가한 사람들도 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인 나만 홀로
    슬플 것이다

    우리의 기억이 서로 달라

    너는 동사서독에서 복사꽃을 보았다 하고
    나는 그곳에서 푸른 바다를 보았다 했네
    바다는 떠돌이를 부르는 주문처럼
    보이지 않는 섬을 옮기면서 이동하고
    정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랑은 영원할까
    우리의 희망도 동사서독 필름처럼 다시 재생할 수 있을까
    우리의 기억은 모두 다르고
    모래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기억은
    남은 인생을 어디에 의탁해야 할지 알 수 없으므로
    나는 천사의 복숭아를 훔치는 동자처럼
    기억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기억 또한 나를 믿어 의심치 않기를 바랐네
    나는 동사서독에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고
    너는 복사꽃 향기에 매혹당한 이십대를 보냈다 했네
    그러므로 우리의 기억이 서로 합치하는 순간은
    지금 함께하는 이 순간도 아닐것이네

    그냥 거짓말입니다

    내게 서너 개의 가면이 있습니다
    그날그날 쓰고 싶은 가면을 꺼내 씁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모릅니다
    아무도 내 나이를 모릅니다
    나도 나를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나는 존재합니다
    모두 이름으로 불리고
    모두 나이로 재단되고
    정말 가면은 필수불가결합니까
    나를 모른 척하세요
    나를 매몰차게 인정해주세요
    가장 힘든 일은
    효용가치 없는 가면을 버리고
    또다른 가면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나도 모르는 나는
    그냥 거짓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악의 없는 거짓말입니다
    아무도 나를 모릅니다
    나는 나입니다

    담쟁이를 위하여
    -아버지

     당신의 빛나는 손바닥을 가진 적이 있지. 당신 손바닥 위
    에서 나는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
    라질까봐 나는 매일 뒷골목을 맬돌았지. 당신 손바닥에 있
    을 때만 나는 어린아이였지. 여전히 어린아이고 싶었지. 당
    신 손바닥에 달린 천 개의 창으로 나는 세상을 보았지. 당
    신 손바닥이 보여주는 뒷골목의 사람들은 아름다웠지.당신
    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매일 붉은 벽에 서서 바람
    을 마셨지. 지독한 행복이었지. 당신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그 빛나는 상처를 품고 나는 어른이 됐지. 어린아이고 싶은
    어른이었지.혼자서도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는 어른이었지
    만, 나는 결코 손바닥을 뒤집을 수 없었지. 행여 당신 손바
    닥이 쏟아질까봐,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주
    먹을 움켜쥐고 살았지. 그리운 기척 같은 버릇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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