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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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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쪽 | B6
ISBN-10 : 8932022291
ISBN-13 : 9788932022291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중고
저자 심보선 |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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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9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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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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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하는 연인에 대한 예찬! 대중의 사랑과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시인 심보선이 펴낸 두 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기쁨과 슬픔 사이의 빈 공간에 딱 들어맞는 단어'로 사랑을 제시한다. 여기서 시인이 연모하는 대상은 앞에 없는 사람, 즉 부재하는 연인이며, 그는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노동 대신 쓸모 없는 것을 만드는 이 사랑의 활동에 골몰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고독이 아니라 타인의 손을 맞잡는 것임을, 침묵이 아닌 소요와 동반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일임을 역설한다. 49편의 시가 담긴 이번 시집에서는 시를 대하는, 시 쓰기로 영혼과 세상을 대하는 시인의 입장과 고백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저자소개

저자 : 심보선
저자 심보선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제16회 김준성문학상(2009)을 수상했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들
말들
인중을 긁적거리며
의문들
나의 친해하는 단어들에게
나날들
필요한 것들
좋은 일들
외국인들
The Humor of Exclusion
텅 빈 우정
나무로 된 고요함
호시절
도시적 고독에 관한 가설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낙화
소년 자문자답하다
찬란하지 않은 돌
시초
지금 여기
영혼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심장은 미래를 탄생시킨다
첫 줄

제2부 둘
이 별의 일
Mundi에게
'나'라는 말
매혹

잎사-귀로 듣다
늦잠
잃어버린 선물

붉은 산과 토끼에 관한 아버지의 이야기
노스탤지어
이상하게 말하기
무화과 꿈
음력
변신의 시간
속물의 방
그라나다
홀로 여관에서 보내는 하룻밤
체념(體念)
4월
운명의 중력
H.A.에게 보내는 편지
Stephen Haggard의 죽음
무명작가
연보(年譜)
사랑은 나의 약점

발문 | 나의 아름답고 가난한 게니우스,
너는 말이야 · 진은영

책 속으로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

[책 속으로 더 보기]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 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의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3일, 5일, 6일, 9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인중을 긁적거리며」 전문

사랑하는 두 사람
둘 사이에는 언제나 조용한 제삼자가 있다
그는 영묘함 속으로 둘을 이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둘만의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
둘 중 하나가 사라지면
그는 슬픔의 옆자리로 자기 자신을 이끈다
사랑에는 반드시
“잊지 마”라고 속삭이는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모른다
신이 낮과 밤을 가르는 시간을
두 사람이 신 몰래
서로의 영혼을 황급히 맞바꿔야 했던 시간을

그 시간을 매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매혹 이후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

매혹 이후
한 사람의 눈빛은 눈앞에 없는 이에 의해 빚어진다

매혹 이후
한 사람의 눈빛은 눈앞에 없는 이에게 영희 빚진 것이다

그러니 그는 평생에 가장 깊은 주의를 기울이며
“하얀 돌 위에 검은 돌”을 올려놓듯이
사랑과 비밀을 포개놓을 수밖에 ―「매혹」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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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당신의 전언 ‘기쁨과 슬픔 사이의 빈 공간에 딱 들어맞는 단어 하나, 사랑’ 등단 14년 만에 묶어 낸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로 대중의 폭넓은 사랑과 문단의 뜨거운 주목을 한몸에 받아온 ...

[출판사서평 더 보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당신의 전언
‘기쁨과 슬픔 사이의 빈 공간에 딱 들어맞는 단어 하나, 사랑’


등단 14년 만에 묶어 낸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로 대중의 폭넓은 사랑과 문단의 뜨거운 주목을 한몸에 받아온 시인 심보선이 두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1)을 펴냈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기쁨과 슬픔 사이의 빈 공간에/딱 들어맞는 단어 하나”를 만들겠노라고 선언한다. 바로 사랑이다. 여기서 시인이 연모하는 대상은 부재하는 연인, ‘문디Mundi’라 불리는 세상이며, 시인은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노동이 아니라 쓸모없는 것을 만드는 이 사랑의 활동에 골몰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적요한 고독이 아니라 타인의 손을 맞잡는 것임을, 침묵이 아닌 소요와 동반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일임을 역설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심장박동을 셀 필요가 없다
한 번 심장이 뛸 때마다
한 개의 기념비적 미래가 태어나고 있다 -「심장은 미래를 탄생시킨다」 부분

1부 ‘들’과 2부 ‘둘’로 나누어 마흔아홉 편의 시를 묶고 있는 이번 시집에서 우리는 시를 대하는, 시 쓰기로 영혼과 세상을 대하는 시인의 입장―단언과 고백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 고백은 시인이 즐겨하는 의문들 혹은 질문들과 늘 함께한다.

나는 즐긴다/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누군가를 정성 들여 쓰다듬을 때/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서글플까/언제나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의문들」 부분

저 의문과 호기심은 홀로 있어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 사실을 홀로 깨달을 수 없다./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인중을 긁적거리며」) 있을 때 성립하는 질문이고, 시인은 이 질문에 답하고자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좋은 일들」)인 이 세상의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바구니에 놓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여 “선행과 상관없는 동행”(「외국인들」)이라 불리는 그의 발걸음은 지난 3년간 용산으로, 홍대 두리반으로, 85호 크레인 희망버스로, 명동 제3개발구역 카페 마리로, 가볍게, 자발적으로 옮겨 다녔다. 너와 나, 그들과 나, 세상과 나라는 이들 관계 속에서 그가 “불현듯 하나의 영혼을 넘쳐/다른 영혼으로 흘러간 무모한 책임감에 대하여”(「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질문하고 답하기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인간과 인간은 도리 없이/도리 없이 끌어안는다”(「지금 여기」)라는 절대명제가 시인의 가슴에 별처럼 빛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머나먼 별/휘날리는 깃발/적의 없는 입술/삶에 던져졌던 은밀한 영향력들”(「소년 자문자답하다」)을 깨달아버린 탓일 수도 있겠다.

“나는 어떤 영혼들에게 감동받고 배우고 그 위에 내 영혼을 겹쳐본다. 감동을 주는 영혼이 있고 아닌 영혼이 있다. 나도 호오가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특별한 영혼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전제가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다.”(심보선, 좌담 <호모 와쿠우스, 호명될 수 없는 삶에 대하여>, 『현대문학』 2011년 7월호)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사실”(「인중을 긁적거리며」)을 목도한 시인은 태어난 이래 줄곧 잊고 지냈던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인중을 긁적거리며」)를 곱씹어본다.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말들」)는 시인의 신념은 바로 이러한 골몰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접사 ‘들’이 붙어 복수로 존재하는 바로 이때, “모든 것이 이해되는/단 한 순간”(「필요한 것들」)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 역시 “너의 손”일 수밖에 없다. 바로 고요에서 소요로 옮아가는 변화를 부르는, 태도와 실천을 부르는 ‘손잡기’ 말이다.

침묵은 나의 잘못, 그것이 나쁘고
슬프다는 것도 잘 안다
영혼은 오로지 한순간에만 눈에 띈다는 사실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가는 새처럼 ―「영혼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부분

한편, 유독 2부 ‘둘’에서 자주 등장하는 멸망, 죽음, 이별 모두 지나간 과거이거나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에 속한 ‘사정’으로 그의 단어와 문장으로 말해지는 이것들은 모두 진지하나 경쾌하게, 낯설지만 명랑하게 호명되곤 한다. 짐짓 결연한 다짐과 엄숙한 선언으로, “인간사에 대한 경탄과 절규”(「Mundi에게」)로 비칠 수도 있는 심보선의 시들이 “신비의 작은 놀이터” 안의 놀이마냥 사소하고 가벼워질 수 이유는 슬픔과 기쁨, 이별과 재회, 두려움과 행복 그 사이에 ‘희망’이라는 끈을 놓고 있어서가 아닐는지. 여기서 시인은 다시 ‘희망’을 ‘사랑’이라고 고쳐 말한다.

나의 문디여,
나는 세계를 죽도록 증오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내가 세계를 한없이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Mundi에게」 부분

시인이여, 노래해달라.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나의 머지않은 죽음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는 나의 일생에 대해.
나의 슬픈 사랑과 아픈 좌절에 대해.
그러나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에 대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생존하여 바로 오늘
쪽동백나무 아래에서 당신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음에 대해.
―「사랑은 나의 약점」 부분

이렇게 “당신 영혼의 아침”(「H. A.에게 보내는 편지」)의 안부가 궁금하고 “나에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운명의 중력」)이 있는지 자문하는 심보선은 “지극히 평범하고 직설적인 말”(「사랑은 나의 약점」)“로 세상을 향해 묻고, ”때로는 환멸에 대해서 때로는 치욕에 대해서”(「붉은 산과 토끼에 관한 아버지의 이야기」) 쓰고 말한다. 그리고 벌건 대낮에 법과 질서가 유린되는 시대, 불편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의 말들은 “투명한 입술이 하염없이”(「텅 빈 우정」) 떨리는 새로 스며 나오는 따듯한 입김처럼 울림과 집중을 일으킨다.
“평범하고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시도 속에서 자아의 종말을 감수하면서 그 시도를 격정적으로 이어나가는 행위”로서 ‘사랑’과 ‘시 쓰기’는 동일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리하여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을 펼쳐든 순간, 당신에게도 “한 개의 기념비적 미래”가 탄생할 것이다. 당신의 영혼을 세상으로 이끄는 말, “목구멍에서 소용돌이치며 솟구치는 진실”, 우리에게 영혼이 있음을 증거하는 그런 말, 말들. 이 시집에 담긴 “옳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아름답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한”(「찬란하지 않은 돌」) 단어와 문장 들은 어떤 누구에게는 “연서의 첫 줄”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구에는 “선언문의 첫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말들은 모두 당신에게로 흘러가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는 얼음의 첫 줄/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불의 화환”(「첫 줄」)으로 피어나리란 사실이다.

[발문]
시인은 떨어져 다친 이들의 손을 잡는다. 붉은 피와 슬픔으로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흐르며 그의 몸과 영혼을 적시는 다른 이의 손을 잡고 떨어지면서 그는 쓴다. 추락하는 이가 결국 다다르며 상처 입고 다치게 되는 어두운 바닥 어디께에서 마치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이. [……]
그들의 손을 놓지 않는 한 그는 함께 떨어질 테고 다치고 죽을 것이다. 그 죽음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이 아니기에 시인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 될 수 없다. 그 죽음은 나를, 나도 너도 아닌 “누군가”로 죽게 하는 비인칭의 죽음일 것이다. 이 죽음은 내가 홀로 결단하여 온전히 나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다른 이의 손바닥을 필요로 한다. 그들 각자는 이 죽음 속에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로 태어나는 것임을 시인은 알고 있기에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인중을 긁적거리며/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라고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제안하고 연인에게 청혼할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사랑이 시작되기 전의 오랜 과거 동안 우리가 무슨 보물이라도 되듯 간직해왔던 고유한 자신의 특성들을 분실하고 또 망가뜨리면서 존재한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신비하고 서정적인 놀이터에 도착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저 추락하는, 어느 바닥의 심연으로 불시착하는 너의 손을 잡으면 된다. 그때 내 손안에 있는 존재는 도구가 아니라 그저 너의 따뜻한 손바닥이다. 이 손의 유일한 쓸모는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 그런데 그런 이유로 너의 손바닥은 안전하지도 친밀하지도 않다. 오히려 너의 손을 잡으며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상처 입으며 도저한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손-잡기는 격정적이면서도 가벼운 것이다. 연인의 흰 손, 친구의 거친 손, 혹은 한 권의 책을 잡으면서 우리는 가벼워져야 한다.
-진은영(시인), 발문 「나의 아름답고 가난한 게니우스, 너는 말이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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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리뷰

  • <비평적 사고의 OO 적용가능성>에 관한 초안만 쓰는데 오전 내내 소비해야했다. 감정적으로도 버거운 날이 연속이지만...
    <비평적 사고의 OO 적용가능성>에 관한 초안만 쓰는데 오전 내내 소비해야했다. 감정적으로도 버거운 날이 연속이지만 이성적으로도 부하가 가중되었다. 원고는 밀리고 어떤 것들은 취소되었다. 사실 지금도 내일 오전에 마감인것을 다 마치지 못했지만, 이렇게 정서적인 산책을 하지 않으면 금새 무너질 모래성에 서 있는 듯이, 현실의 가파른 다리위에 서있는 듯이, 다리가 후들거리기 때문이다. 완성되지 않는 현재는 그러한 시점의 연속이다. 우리말에 현재완료시제가 없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완성되지 않은 현재의 것을 현재로 읽어 버리는 습관 덕을 본다.  
     
    그러면서 다 읽은 것이 심보선의 <눈앞에 없는 사람>. 우뇌와 좌뇌에 고르게 단비를 내리거나 혹은 바람을 일으키는 신선한 시집이다. 하긴 몇 주를 잡고 있다가 오늘 끝냈던 것이다. 읽기가 아까워서가 대답이다. 한 줄읽고 가슴에 품어야 했던가? 예이츠는 타고르의 시집을 그렇게 읽었다고 했다. 그의 감동을 남에게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 쉬엄쉬엄 읽어야 했다고 했던가. 
     
    내가 읽은 심보선도 그에 비슷했다. 물론 타고르처럼 심금을 울리는 종교적인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쓸쓸함이, 그의 상실이. 마치 그는 마치 모리스 블랑쇼를 언급하고 싶은 듯했다.  부유함이나 풍족함이 아니라 삶의 근저를 잃을만큼 가난한 언어로 보여주는 강렬한 존재가 문장마다 서려 있어서 그렇다.  
    사랑하는 두 사람 / 둘 사이에는 언제나 조용한 제삼자가 있다. /그는 영묘함 속으로 둘을 이끈다. / 사랑에는 반드시 둘만의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 / 둘 중에 하나가 사라지면 / 그는 슬픔의 옆자리로 가 자신을 이끈다. / 사랑에는 반드시 / "잊지마"라고 속삭이는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 (매혹, p. 76) 
    상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도 하지만,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한 존재감에 대한 강렬함이기도 하다. 우리는 존재의 용도가 있을 때, 혹은 존재를 그리워할 때,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눈앞에 있음"이 항상 존재 자체를 파악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혹은 눈앞에 없음이 존재를 잊게 하는 것도 아니다. 시집의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연인 혹은 그의 아내는 강력하게 존재하는 자이기도 하고 혹은 모호하게 부재하는 자이기도 했다. 연인이 존재하기도 하고 아내는 부재한자이기도 했으며, 혹은 연인이 부재하기도 했고 아내는 존재하기도 했다.  
     
    나는 어쩌다가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 내가 사랑하는 여인: / 3일 5일 6일 9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 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인중을 긁적거리며, p 2)
     
    그러나 심보선이 가난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혹은 텅 빈 우정을 말한다고 해서 결코 절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 / 그 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이 별의 일, p. 65)
    존재의 가난함은 존재의 쓸모없음과 유사하고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규정되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강력한 존재확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심보선의 시에서 사랑의 존재는 부재하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하다. 존재에 대해서 확신하지 않고서 관계는 늘 허약하기 마련이다.  
     
    그의 시에 대한 태도는 이 인간과의 관계설정과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시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시는 시간날 때 쓰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비워 써내는 것이다. 6일을 일하고 안식일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6일간이 시를 쓰는 날들이며, "사랑의 날짜를 빼곡이 채우는" 날들이며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것이다. 심보선은 이렇게 썼다. 
     
    나에게는 6일이 필요하다. / 안식일은 제외한 나머지 나날이 필요하다 / 물론 너의 손이 필요하다 / 너의 손바닥은 신비의 작은 놀이터이니까. (필요한 것들, p. 22) 
    이때 그는 이 시에서 "나"와 "너"를 혼돈한다. 이 혼돈이 게니우스에서 나온듯이 보이게 자연스럽다. 내안에 시를 쓰게하는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처럼 혹은 혈액의 순환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욕구로서의 "너". 그는 그 "너"의 <시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심보선은 세상을 향해서 조용히 이 시집을 펼치고 있다. 
     
    그의 가난함이, 그의 쓸쓸함이, 혹은 눈앞에 없는 그 사람이 나를 가난하게 한다. 
     
     
    201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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