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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서의 5 18. 1: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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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쪽 | 규격外
ISBN-10 : 8937603969
ISBN-13 : 9788937603969
역사로서의 5 18. 1: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중고
저자 김대령 | 출판사 비봉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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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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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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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서의 5ㆍ18』 제1권. 2011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광주 5·18민주화 운동에 관한 전체 기록을 기본 자료로 진상을 밝히고 있다. 광주민주화 운동본부에서 제공한 자료의 안내를 받아 당시 현장을 그려낸다.

저자소개

목차

프롤로그
제1장 유언비어 잔치판
1. 전두환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의 소동
2.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
가. 운동권 개입으로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박관현
나. 여수 돌산에서 북한방송 듣고 있었던 박관현
다. 고의적으로 유포된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
라. 사전 기획된 학생사망 유언비어 유포작전
3. 헬기 기총사격 유언비어
4. 미 항공모함 시민군 지원 유언비어
5. 차명숙과 전옥주의 화려한 유언비어 가두방송
가. 전옥주의 혜성 같은 등장
나. 전옥주가 퍼뜨린 유언비어
다. 베일 속의 여성선동가 차명숙
6. 유언비어로 모병된 시민군

제2장 5·18은 사전에 준비된 무장폭동인가 사후의 저항운동인가?
1. 1980년 이전의 무장봉기 준비
가. 통일혁명당의 무장투쟁 준비
나. 5·18의 주역 남민전의 조직
다. 남민전의 무장봉기 예행연습
2. 5·18 이전 사전 준비된 무장봉기
가. 사전 무장봉기 계획을 입증하는 5·18기록물
나. 무기고 위치 사전 파악에 대한 탈북자와 윤한봉의 일치된 증언
다. 3월로 예정되어 있던 광주사태
라. 5월 19일로 예정되어 있던 무장봉기
3. 5·18 이전에 민중봉기를 선동한 5·18 성명서
가. 5·18 이전 성명서 대필한 왕년의 빨치산
나. 광주사태 전주곡이었던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다. 왕년의 빨치산이 대필한 서울대총학생회 성명서
라. 왕년의 빨치산이 5월 3일 살포한‘투쟁선언’전단
마. 대학가 괴성명서 베낀 김대중의 국민선언문
바. 왕년의 빨치산이 대필한 전남대 총학생회 성명서
4. 광주사태에 대한 북한의 입장

제3장 날짜별 주요 5·18 사건
1. 5월 17일 광주사태 전야 -거사 강행과 도피의 교차로
가. 거사 준비 완료한 운동권의 술집 회동
나. 박관현의 퇴장과 더불어 샛별처럼 등장한 윤상원
2. 5월 18일 사태의 발단 :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
가. 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당한 전경들
나. 박관현 총학생회장 사망 유언비어
3. 5월 19일 화공에 의한 폭력시위
가. 동학군을 연상시키는 무기등장
나. 차량을 이용한 화공
다. 시위대의 최초 총기 탈취
4. 5월 20일 차량 돌진에 의한 도시게릴라 방법
가. 차량 돌격에 의한 도시게릴라 방법
나. 방송국과 관공서에 대한 방화
5. 5월 21일 무장 시민군의 도청 함락
가. 오전 8시 시민군 선전조에게 인계된 시신 2구
나. 오전 10시 시민군의 이중 사기협상
다. 도시게릴라전
라. 도청 점거의 정치적 상징: 임시정부
마. 도청 점거 이후의 봉기
6. 5월 22일 예상과 상상을 초월하는 뜻밖의 반전
7. 5월 25일 광주코뮌 권력을 장악한 무장봉기파
8. 5월 26일 전원 자폭 결의
9. 5월 27일 새벽의 마지막 전투

책 속으로

출판사 서평

책 속 한 문장

회원리뷰

  •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는 백과사전에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는 백과사전에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이란 뜻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는 그리 떳떳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전국비상계엄 상태에서 군용 차량을 탈취, 무기고에서 총기를 탈취하고 교도소를 공격하면서 계엄군과 대치하는 무장난동. 이게 반란이 아니면 무장폭동이지, 이런게 ‘운동’이냐?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수수께끼 같은 말만 오갈 뿐, 어디에도 그 당시에 광주 상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막연히 광주학살, 전두환의 정권탈취극, 첫 총질이 공수부대냐 시민군이냐, 게다가 북한특수부대 개입 …   어쩌고 하는 구름 같은 말만 들릴 뿐, 나에게는 세월이 갈수록 이상한 사건일 수밖에 없는 그런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이다.

     

    그 궁금증에 도움이 될까 해서 이 책을 골랐는데…, 우선 저자의 용단에 박수를 보낸다. 정치적으로, 지역적으로 왜곡의 극에 오른 5·18 사건을 정면으로 해부한 그 용기를 말이다. 저자는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5.18 사건에 대한 기록물이 등재되자, 이를 1차 사료(史料)로 보아야 한다면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냐를 밝히는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그 기록물은 당시 떠돌던 허위 투성이의 유언비어 종합메모 수준이라고 했다.

     

    그는 2008년의 광우병 반미 촛불 시위 때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전경에게 돌을 던지며 ‘이명박 물러가라’하던 과격시위를 ‘광주사태’ 당시에 ‘최규하 물러가라’하며 벌인 무장시위와 견주었다. 그때나 이때나 시위의 목적은 정권교체였다. 즉, 국가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전략이었다.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폭력시위’가 ‘헌정질서를 유지하려는 행위’와 서로 입장이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누가 가해자인가.

     

    광주사태 32주년은 그 자료들이 풍족하게 축적된 해이다. 이제 유언비어 혹은 거짓의 안개를 조금씩 걷어내니 5.18의 진실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제 지난 30여 년간의 흑백논리 너머에 있는 진실 찾기를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아니 될 때다. 당시의 증인들이 아직 생존해 있을 때 참 이야기를 회복해야 한다. 이제라도 이 사건을 객관화하여 확실한 지식의 한계를 세워야 한다. 이것이 저자의 뜻이었고, 비록 내용이 길어지더라도, 그가 밝힌 사실을 따라 그날 당시의 사건을 나름대로 날짜 별로 정리 해보기로 했다.

     

    - - - - - - - - - - - -

     

    부마사태 (釜馬事態): 1979년 5월에 야당인 신민당 총재에 김영삼(金永三) 의원이 선출되고 난 후, 김영삼은 즉시 박정희 정권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이에 정부는 강경책으로 맞서 10월 4일 김영삼 의원을 제명시키자 김영삼의 정치 근거지인 부산에서 10월 15일에 반정부 시위가 발생. 시위가 18일 새벽까지 관공서를 파과하는 등, 격렬해지자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 결과 19일에는 마산지역으로 시위가 확대되면서 고교생과 노동자까지 합류하는 등, 폭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조짐이 되자 정부는 위수령을 선포하고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대를 동원하여 소요를 진압…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관사에서 부마사태에 관련된 회의를 겸한 저녁만찬 중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했다. (김재규는 부마사태에 대한 문잭을 당하자,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차지철 경호실장을 가리키며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라면서 차지철과 대통령에게 권총을 발사). 즉시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에 의한 대통령권한대행의 과도정부가 수립되면서, 18년간 이어오던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 체제가 막을 내렸다. 

     

    광주봉기의 첫 발 - YWCA 위장결혼식: 1979년 11월 24일 오후 5시 30분 명동 YWCA 강당에서의 결혼식에서 가짜 신랑 홍성엽이 입장하자 여러 곳에서 유인물이 빠르게 전해졌다. 이는 김종필과 최규하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하기 위한 집회라지만, "투쟁은 마침내 부산 마산 전역을 휩쓴 거대한 민중봉기로 분출되었다. 그 결과 독재자는 처단되었고…”라는 표현으로 시작되는 유인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들의 주장은 이듬해 4월 하순에 “통대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 “유신잔당 물러가라”에서 4월 말에는 “유신잔당 타도에 우리의 모든 역량을 총집결하자!” 구호로 발전, 그 후 5월에 이것은 “최규하 물러나라”로, 그 다음에 “신현확 물러나라”까지 추가하면서 강도를 높여간다)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취임: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국무총리에는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던 신현확 씨가 수행하는 새 정부 출범.

     

    80년 민주화의 봄: 최규하 대통령은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었다. 정치범의 석방에서부터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들의 복학에 이르기까지 운동권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 것이다. 이것이 대다수의 운동권 편에서는 예상 밖의 큰 승리였다. 그 당시 유난히 시위가 많았던 것은 봉기를 선동하여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은 학원 내 시위를 허용하였다. 본래 비상계엄 하에서는 당국의 허락 없이 시위를 하지 못하게 되어있는데, 이 조치로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주도하는 반체제 조직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총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 학생민주화추진위원회, 학생자율화추진위원회, 민주투쟁위원회 …

     

    사북사태: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인 강원도 정선군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광원(鑛員)들 4천여 명이 어용노조의 퇴진과 저임금 등에 항의하며 쟁의를 벌였다. 회사 측은 광부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경찰을 개입시키자 광원과 가족 6천여 명이 진압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광업소를 점거하며 소총과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는 등, 유혈폭동으로 번져나가 최악의 노동쟁의를 빚었다. 진압경찰이 도주하자 결국 군대를 투입하여 겨우 수습 … 

     

    (※ 광주에서 북한군 1개조를 지휘하던 안창식 대위와 내연 관계였던 전 북한 여교사의 증언에 의하면, 1980년 3월로 계획되어 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4월 말에 일어난 사북탄광 사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탄광에서의 폭동 조짐을 감지한 북한이 광주폭동을 4월 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남쪽 운동권에 보냈다.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 계산하였다. 남한 운동권은 이를 다시 연기하여 5월 19일로 잡았다.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 순방의 귀국일이 22일이므로 그 사이에 전국을 해방구로 만든다는 시간표이었다.)


    - - - - - - - - - - - -

     

    5월 2일(화):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학생회를 성토하는 1만2천여 학생들로 가득했다. 당시 1학년은 10일간 문무대에 입소해야 했는데, 민청학련 복학생들이 “병영집체 거부”를 명분으로 시위를 선동했다. 그들은 시위 명분을 병집거부에서 계엄령철폐로 바꾸어야 한다는 압력을 크게 받고 있었다. 그 결과 박성연, 김부겸 등의 30여 분간의 선동적 연설로 분위기를 ‘유신잔당 타도’ 결의로 몰고 갔다. 이날부터 “학원민주화”와 “병집거부”의 학원시위가 가두시위로, 학원 내 이슈는 정치이슈로 그 양상이 바뀌었다.

     

    5월 3일(수):

    전남대 교정에 뿌려진 유인물에 “<전국 각 대학은 … 조속한 시일 안에 학원의 총역량을 유신잔당 타도에 집결시킬 것을 촉구한다>라는 서울대 중심의 투쟁에 보조를 같이할 것을 촉구한다!”라고 했다. 서울대 교정에 괴문서가 살포되는 시점과 거의 동시에 전남대 교정에 그 괴 성명서에 답하는 내용의 성명서가 뿌려진 것이다. 누군가가 서울대 총학생회 명의로 북치고 전남대에서 민주투쟁위원회 명의로 장구치며 가두시위를 원격조종하고 있었다. 한편, 전남 민청협 사무실에서 정동년, 김상윤, 윤상원 등이 광주에서 서울의 대학생들과 보조를 맞추어 가두시위를 할 때 고교생도 가담시키도록 결의.

     

    5월 8일(목) -  무장봉기 5월 19일로 결정

    전남대총학회장 박관현이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선포. ‘도청 접수 문제’, ‘특공대 조직 문제’와 ‘시위 중 학생이 죽었다는 등의 말을 퍼트리자’는 등등의 문제를 논의. (※ 1980년 봄에 일명 ‘기획실’이라 불리는 비밀조직의 <자유노트>라는 문건에 있음). 여기서 전남대 운동권이 주축이 된 ‘전남 민청협’(민주청년협의회 전남지부)이 가톨릭농민회를 이용(?)하고 국민연합(김대중 세력)과 연계하여 5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은 무장봉기를 기획.

     

    5월 11일(일):

    김대중의 정읍 연설이 있는 날, 그 대상은 가톨릭농민회와 전남대 학생들이었다. 이날의 연설은 광주 운동권과 가톨릭농민회의 합작품으로 광주사태의 사실상의 출정식이 되었다.

     

    5월 12일(월):

    밤중에 서부전선 DMZ 남방에서 미군과 공비 사이에 총격전. (※ 또한 15일 01시 30분경에도 아군 GP 20m 전방까지 침투한 공비들이 40여발의 자동화기를 발사하면서 도주. 5월 13일부터의 가두시위와 북한군의 휴전선침투는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5월 13일(화):

    민청협이 주동이 되어 연세대에서 최초의 가두시위를 일으키자 대규모 시위의 물꼬가 터졌다.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를 외치고 나서는데도 아무도 연행되지 않았다. 이후 전국의 민청협 조직은 신속히 움직여 날마다 전국 여러 대학교들이 대규모 가두시위를 하는데, 계엄 하인데도 내무부는 막을 힘이 없었으며 군부는 조용했다.

     

    5월 14일(수):

    15:00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선출된 박관현은 지하조직 ‘전남 민청협’과 복적생들이 시키는 대로, 전남도청 앞 분수대 위에서 제2의 시국선언문을 발표.

     

    5월 15일(목):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 오후 1시경, 시위대가 시내버스로 경찰을 압사시키고 청와대로 향할 때 경찰은 거의 무방비 상태. 광화문 일대는 시위대가 점령, 이후 김종환 내무부장관은 사태 수습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현확 총리에게 군부 개입을 호소. 이날 밤, 전남지역 운동권의 민족민주화 대성회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도청접수 문제와 함께 고등학생 동원문제, 도시 침투,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

     

    5월 16일(금):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야간 횃불 행진과 5.16 화형식 등의 가두시위를 선봉에서 지휘하면서, 밤 10시에 해산에 앞서 월요일인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일 것이라고 광고까지 했다. (※ 이는 19일에 예정된 전남농민대회라는 행사에서 가톨릭농민회가 주동하기로 한 무장봉기에 전남대생을 동원하기로 한 약속을 위한 행위이었음.)

     

    5월 17일(토):

    서울에서 과격분자들이 모두 이화여대 대강당에 모여 전국 학생대표회의가 열렸는데, 사실상 서울지역 운동권 회합이었다. 여기에 오후 7시쯤에 군인들이 갑자기 들이 닥쳤다. 반은 도망가고 반은 잡혔다. 이 때 쯤에 광주에서는 왕년의 빨치산들과 그들의 운동권 조직들이 민란 준비를 완료하고 거사 성공을 자축하고 있었다. 한편,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 일정을 포기하고 급거 귀국하여, 심야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 결정.

     

    5월 18일(일) - 돌발적인 변수, 비상계엄 전국확대

    00:00, 비상계엄 전국 확대. 전국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학생운동 지도부 검속. 이 소식을 접한 광주의 운동권 학생대표들은 19일 거사를 앞두고, 갈등 끝에 결국 피신 쪽으로 방향을 잡고 도피.

     

    08:00 지금까지 며칠 동안 얼굴마담이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여수로 피신하면서 퇴장하고, 이후부터 무명인물 윤상원이 새로운 리더로 등장. (※ 19일 봉기 작전의 원래 계획은 전남 민청협과 카톨릭농민회의가 주동이 되어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이 최규하 대통령 정부에 신현확 총리내각이 사퇴하라는 최후통첩에 그 말미가 끝나는 시점인 19일에 무장봉기를 일으키자는 것. 그런데 비상계엄확대가 돌발적으로 변수로 생기자 18일 아침 국민연합으로부터 윤상원에게 즉시 시위를 일으키라는 것과 18~19일쯤 서울의 국민연합이 서울역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할테니 광주에서 며칠만 버티라고 하자, 윤상원은 바로 전남대 앞 시위에 가담하고,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의 사망설을 퍼트림)

     

    09:20 전남대 정문 앞 거리에 학생들과 계엄군이 공방하는 중에 한 학생이 “나는 근처에 사는데 새벽에 박관현이 연행되는 것을 봤어요, 검은 차에 실려 후문 쪽으로 갔는데 향토사단 연병장에 감금된 모양이에요.” 이 말이 유언비어의 발단이다. 학생들은 다시 모여 정문에 배치된 공수대원 9명을 향해 돌을 던졌고, 공수대원들은 돌을 피하지 않았다.

     

    10:00 전남대생 50여 명 정문 앞에 모임.

    10:30 금남로 카돌릭 센터 앞에 2백여 명의 학생들이 연좌시위를 벌이는데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전경의 시위 강제 해산 시작.

     

    11:00 학생 100여 명이 다시 광주역에 모여 30여분을 기다려도 총학생회장 박관현은커녕 학생회 간부들조차 안보여서 흐터지려는데 누군가가 ‘박관현이 계엄군에게 맞아 죽었다’고 외침. (※ 이 시간에 박관현은 여수 돌산 쪽으로 피신가는 중이었음). 이 소문이 일파만파로 광주시내에 퍼지면서 “경상도 공수부대의 살상” “박관현의 체포, 살해” 등등. 이어서 “전남대 총장 할복자살” 유언비어가 퍼짐. 또한 “전두환이 26일 자정을 기하여 광주시 폭격 작전을 감행하려”한다는 새로운 유언비어가 추가.

     

    12:30 노동청 앞, 전남대 병원 앞, 금남로 등지에서 전경이 시위진압을 위해 최루탄을 쏘면서 충돌. 이와 함께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인들이 학생들을 죽였다”라는 소문에 사실 확인 없이 이 말이 시민에게 퍼져나가며 순식간에 파출소들을 습격하는 시위군중이 형성됨,

    13:00 지금까지 사용된 적이 없던 화염병이 갑자기 대량으로 등장하여 파출소 공격에 쓰이면서 시위가 과격화 됨.

     

    15:00 동명로 쪽에 경찰기동대 차량이 오자 이를 학생들이 둘러싸고 안에 있던 지방경찰 40여 명을 무장해제, 동시에 동명파출소는 순식간에 폐허로 변함. 이후 계림동 파출소와 광주역 파출소 등에 시위대가 몰려들어 철저히 파괴,

    16:00 법원 쪽 산수동에 경찰차량 1대가 시위대에 포위되면서 15명가량의 경찰이 인질로 잡힘.

     

    17:00 군용트럭 1대가 와서 군인을 풀어놓았다. 시위대에게 무조건 전경들을 풀러주라고 했는데 시위대는 이를 무시하고 구호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때 갑자기 군인(공수부대 병력)들이 곤봉을 빼어들고 돌격하자, 돌을 던졌지만 군인들은 돌을 맞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왔다. 시위대는 전경이고 뭐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는데, 이것이 시위대와 군인과의 첫 충돌이다.

     

    (※ 전투경찰 2천 명은 지리멸렬,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계엄군이 출동했다. 이때쯤에 북위 36도선 이남인 하동, 목포, 화순, 영광 등 전남일대는 완전 무정부 상태였다. 31사단 행정병력과 경찰이 있었으나 방호장비 없이 시위 군중에게 쫓기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18일 오후에 투입된 계엄군 병력이 시위 군중과 최초로 충돌한 것이다)

     

    (※ 정오쯤부터 시위대는 화염병, 보도블록 조각, 식칼, 각목과 쇠파이프 등을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화염병이 대량으로 이용되었다. 전경이 페퍼포그차와 함께 가스를 터트리지만 페퍼포그차는 화염병의 적수가 아니다. 화염병을 던지는 자는 주동자로 간주되었고 이들을 연행하는 것이 공수부대가 맡은 역할이다. 오후 늦게부터 투입된 공수대원들은 ‘돌격’ 구령과 함께 군중들 사이로 뛰어들어 곤봉을 휘두르며 무조건 잡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 한편 서울에서 “죄 없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지금 도처에서 애국시민 궐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라며 김대중의 지지 세력인 복학생 그룹들이 시위를 시도했지만 아무도 동참하는 이가 없었고, 또한, 다른 도시들에서도 전혀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광주에서는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와 이를 믿는 군중이 있었고, 다른 도시에서는 이러한 사망 유언비어가 없었다. 아무리 “개 같은 최규하” “유신 잔당” 어쩌고 … 해봤자 헛발질에 불과했다. 여하튼 예정된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5월 19일(월) - 원래의 무장봉기 예정일

    아침부터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시위방법이 등장했다. 차량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군경을 향해 돌진시켜 폭발시키는 방법이다. 이것은 시위라기보다 공격이었다. 어째서 시위가 급격히 난폭하고 공격적이 되었을까? 그 주동 세력은 <전남 가농(가톨릭 농민회)>과 <기농(기독교농민회)> 산하 농민운동세력이었고, 시위는 오전에 전 지역으로 확산되게 되어 있었으며, 이미 해남시민군과 진도시민군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광주로 모여든 이들 세력은 죽창 외에 쇠갈퀴, 낫, 쇠스랑까지 들고 왔다. 시위에는 그 외에도 곡괭이, 쇠파이프, 철근토막과 각목 등이 난무했다. 외국에서의 도시게릴라 방법보다 더 극렬하게 나왔다.

     

    09:30 임동과 누문동 파출소에 70여명의 시위대가 들어가 목조건물인 파출소를 불태워버리자, 경찰은 각 파출소의 예비군 중대의 무기를 경찰서로 예치한 후, 대응하지 말고 군중을 피하라고 지시.

     

    여기에 여성 선동자 전옥주(32세)가 혜성같이 나타나 차량으로 시내를 돌며 “광주세무서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 “여자들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 “임산부 배를 갈랐다” “내 아들 살려내라” “우리 모두 죽여라” 등으로 가두 선무방송. (※ 후에 그녀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방송했느냐는 질문에 ‘내가 지어낸 것도 본 것도 아니다. 다만 학생이 쪽지를 건네 주길래 그대로 방송했을 뿐이다’라고 해명).

     

    13:30 이때에 시위대는 방송차량들만 골라 공격용으로 이용했다. CBS 취재차량과 가톨릭센터에서 끌고나온 승용차 4대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경찰저지선에 밀어 붙였다. 차량이 경찰바리케이드에 부딪쳐 폭발할 때마다 시위 군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때 CBS(광주 기독교 방송) 건물에 경비병 6명(31사단 소속)이 시위대 눈에 띠자 공수부대원으로 판단한 군중들이 이들을 때려 눞혔고, 그중 1명이 빼앗은 M-16 소총을 총기를 치켜들자 도로의 시위대들은 함성을 질렀다.

     

    (※ 북한군의 움직임이 평시와 다른 점을 감지한 미 태평양지구 공군사령관 휴즈 중장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전술 공군기들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한국 전선으로 출격할 것이며, 북한의 어떤 공중 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고 경고)

     

    오후 5시경, 전남대 의대 오거리에서 도청으로 가는 길목에 전경 30~40명이 이미 탈진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앉아있는데, 시위대 1명이 욕설을 하면서 화염병을 던졌다. 전경들은 너무 지쳤는지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오후 7시경, 곡괭이와 삽과 몽둥이로 무장한 시위대가 등장하여 100명 단위로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어 통금 9시가 넘도록 난동을 부렸다.

     

    (※ 이날 밤, 시내 화공약품상의 화약과 철물점의 쇠파이프 등이 매진되거나 탈취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최규하 대통령이 군에 의해 사살됐다” 또는 “연금되었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또한, 들불 야학팀이 제작한 전단에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의 주장이 그대로 실려 “전두환 일파는 민족 반역의 살인극을 중단하고 역사의 심판을 받아라. 최후의 1인까지 싸워나가자.” 한편, 서울에서는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는 대자보와 유인물 등장)

     

    5월 20일(화) : 북한 평양방송의 광주사태 중계 시작

    광주 외곽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징발하여 화염병을 제작하고 학동, 산수동, 계림동, 양동 등 대부분의 파출소를 파괴하고 방화하였다.

     

    (※ 이날 저녁때까지는 시위대와 군경 간에 별 충돌이 없었다. 시위대는 군용트럭이나 버스를 이용하여 노래를 부르며 막대기로 차량을 북삼아 박자를 맞추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런데 저녁 6시경에 22대의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금남로로 들어오는 때와 맞물리면서 사태가 돌변.)

     

    19:50 금남로 5가에 있던 시위버스를 7명이 몰고 도청 앞 계엄군 저지선으로 돌진, 이어 트럭 2대와 잇달아 시내 택시 운전사들이 택시를 몰고 군 저시선으로 몰려들어 군 저시선이 뚤림. (※ 택시를 이용한 차량돌격대가 조직된 배경에는, ‘어제(19일) 시위 학생을 태우고 가던 택시기사 4명이 칼 맞아 죽었다’라는 유언비어의 결과였다. 누군가가 무등 경기장에 택시기사들을 소집하여 선동하면서 돌격대가 조직된 것이다).

     

    20:00 차량을 이용한 가두방송이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먼저 가신님들과 같이 죽읍시다’면서 시위를 선동했다. 이 말에 시위 군중들이 흥분하여 계엄군과의 공방전이 거세어져갔다. (※ 이때까지 아무도 먼저 간 사람은 없었다. 같이 죽자고 선동한 자들은 누구일까?)

     

    이때 쯤, 시골서 올라온 경찰과 서에서 올라온 경찰들이 남도예술회관 앞에서 전면에는 전경이 서있고 뒤쪽에는 직원들이 앉아있었는데, 노동청 삼거리에서 버스 한 대가 속력을 내며 달려들었다. 결국 전면에 있던 전경들은 옆으로 피했는데 뒤쪽에 앉아있던 경찰들이 그대로 깔렸다. 4명이 피할 새도 없이 압사한 것이다. 이로서 광주사태 최초의 사망자 발생.

     

    20:30 시위군중이 KBS 방송국을 점거하고 방송기재를 파괴하여 방송이 중단.

    20:40 MBC 방송사와 신문사 한 곳이 불타기 시작.

    (※ 그러나 소방대는 진화작업을 할 수 없었다. 소방차량을 시위대가 탈취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세무서 등의 공공건물들이 불타올랐다. 계엄군으로 들어온 11공수도 숫자도 열세인데다가 지칠 대로 지쳐 폭동진압은커녕 임시 숙소로 돌아갈 길마저 막혔다. 이미 광주 전역은 공권력의 진공상태였다.)

     

    21:00 시위대가 광주시청 접수.

    21:30 광주세무서가 불타는 동안 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17정의 총기가 탈취되었다. 또한 바로 그 시간대에 나주경찰서 금성파출소 예비군 무기도 탈취되기 시작했다. 이즈음은 경찰들이 광주에서 모두 사복으로 변복하고 철수한 후이었다. 각 경찰서나 파출소에 잔류한 경찰병력은 없었다.

     

    22:30 화염드럼통 등장 -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향하는 모퉁이 주유소에서 한 청년이 트럭에 드럼통 2개를 싣고 휘발유를 가득 채운 뒤 불을 붙여 계엄군을 향해 밀어붙였다. 청년은 전방 20m 앞에서 뛰어내리고 차량은 불덩이가 되어 돌진하여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분수대를 들이 받으면서 주위를 진동하는 폭발음과 함께 폭발하고 불기둥이 솟았다. (※ 이 청년의 정체는? 훈련된 특공대가 아니면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 이날 저녁때부터 북한 평양방송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광주사태 생중계를 시작. 그들은 ‘광주인민봉기군’을 지지하는 <방송보도전>이라고 했다. 방송국 방화 후에 광주에서는 라디오를 켜면 군산 서해방송과 이북방송이 전부였다. 라디오가 주요 대중매체였던 그 시대에 시민들은 라디오 채널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방송은 이북방송 뿐이게 된다. 당시 이북방송과 입소문은 거의 일치했다)

     

    5월 21일(수) : 무기 대량 탈취 - 긴박한 하루

    01:00~02:00 서광주 세무서로 몰려간 시위군중은 “세금으로 독재 권력과 살인 공수부대의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솜방망이에 불을 댕겨 건물에 던졌다. 같은 시간에 동운동 파출소가 불타고, 광주역은 유리창이 모두 깨진 채이며 역전 파출소도 폐허가 되었다.

    06:00 칼을 든 까만 복면의 괴한들 광주 시내에 갑자기 등장. (이 때까지만해도 시민이면 복면을 할 필요가 없었음.)

     

    08:10 낫으로 무장한 시위 세력(까만 복면) 50명이 광주 톨게이트 부근에 매복하고 있다가 광주공단 입구에서 20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한 지프 14대 탈취, 행동이 전광석화 같았다고 한다.

    08:30 이즈음에 계엄군에게 맞아 죽었다는 시신 2구 출현, (※ ‘40대 후반 남자가 팬티차림으로 허벅지가 찢어져 피범벅이 되어 죽어 있었다’는 시신을 목격한 시민의 증언이다. 이 상처는 탈취 당한 20사단 군 지프차 운전병 3명이 입은 부상과 같은 상처였다. 이는 동일범으로 보이는데, 까만 복면을 한 남파 특수부대의 소행인 듯. 또한 시신 2구의 발견 장소도 시민군 점령 지역이었으며, 계엄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때에 나주성당에 은거하며 나주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고 있던 차명숙(19, 본명 김범해)이 시민군 선전조에 합세. 전옥주와 차명숙이 시신 2구를 이끌고 다니면서 ‘내 아들 살려내라’ ‘ 내 동생 살려내라’며 선동. (※ 이들이 퍼트린 유언비어가 광주시민을 무장봉기에 가담시키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옥주와 차명숙의 배후 세력 중 확인된 인물은 차량 운전을 전담했던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의 동생 김상집인데, 끝까지 함구하여 그 배후 조직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음)

     

    09:00 탈취한 군 지프로 아세아자동차에 들어가 장갑차를 포함한 군용 차량과 버스 등 360여 대 탈취. 이때 시민군 복면부대 숫자가 갑자기 6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은 탈취한 차량으로 일부는 전라남도 소재 38개 무기고로 향하고, 일부는 외곽 지역 시위대를 광주로 실어 나르기 시작.

     

    10:00 아침 일찍부터 상당한 시위대가 빼앗은 군 지프, 트럭, 장갑차, 고속버스, 시내버스 등 각종 차량을 타고 시가를 질주하며 시위, 그들의 상당수가 낫, 도끼, 몽둥이, 곡괭이 등으로 무장하고 일부는 M16, 카빈 소총 등을 휴대했다. (※ 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대체로 까만 복면이었다).

     

    10:15 구용상 광주시장이 도청 앞 광장에 설치된 단상에서 “광주시민 여러분, 광주시장 구용상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순간 태극기가 제켜지면서 시신 2구가 드러나자 시장이 기겁한 순간에 돌이 날아오고, 갑자기 장갑차가 밀고 들어와 단상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는 시민군 측의 도청 점거작전의 일부이었다.

     

    10:45 각종 차량을 탈취한 복면부대는 전남 각지에 설치된 38개 예비군 무기고들의 위치를 족집게로 집어내듯 정확히 찾아가 동시다발적으로 무기를 탈취하고, 동시에 전남 서남부 지역(목포, 해남 지역)으로 무장봉기를 확산시켜 나갔다. 지금까지 불과 몇 시간 안에 시민군은 전라도 38개 무기고에서 카빈소총 2,240정, M1 소총 1,225정, 38구경 권총 16정, LMG 기관총 2정, 실탄 46,400발, 10여 정의 M60 기관총, TNT 상자, 다량의 수류탄, 뇌관 100개, 그리고 장갑차 5대, 각종 군용차량과 수십 대의 무전기, 방독면 등을 노획했다.

     

    11:00 광주에서 내려온 200여 명의 시위대가 각종 구호를 위치며 화순읍 일원에서 시위,

    11:00 지산동의 광주지방검찰청과 법원청사에 시민군이 난입하여 기물 파손, 이때를 같이하여 동시에 시민군의 광주교도소 습격이 시작되었다. 시민군과 계엄군(당시엔 육군31사 지원 병력) 간에 전투가 벌어져 시민군이 일단 후퇴. 시민군은 이로부터 5회에 걸쳐 교도소 공격을 시도했다. (교도소 경비 병력이 이날 오후에 육군31사에서 공수여단으로 교체)

     

    12:50 도청에 포진한 계엄군을 향해 갑자기 장갑차와 5톤 트럭이 화염병과 함께 돌진해 왔다. 이중에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2명이 깔렸다. 깔린 2명 중 1명(권용운 상병)은 즉사하고 1명은 마침 31사 병력을 철수시키기 위해 도착한 헬기편에 후송. 만약 나머지 차량까지 전부 달려들었다면 대형 인명피해가 날 뻔했다. (※ 이때까지는 헬기로 철수하는 31사 한동석 중위로부터 7공수 군수참모가 경계근무용 실탄 2백발을 넘겨받기 직전이어서 공수부대에는 아직 실탄이 없었다)

     

    13:30 시민군 장갑차에 의한 두 번째 돌진 공격. 공수부대원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기에 반사적으로 장갑차를 향해 사격. (※ 이것이 그 유명한 ‘공수부대 집단발포’ 사건의 전말이다.)

     

    13:30 옥천여상고 부근 고가도로 근처에 무기를 탈취하러 서둘러 달리던 군용차가 미니버스를 들이 받아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자 헌혈이 필요하게 되었다. 중심사 시민군 이광영이 헌혈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이 헌혈캠페인과 맞물려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가 광주 시내를 휩쓸었다. (※ 이때부터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는 메커니즘이 형성되었다. 피가 보이는 사고가 생기면 무조건 공수부대가 한 것이 되었다)

     

    14:00 나주에서 무기가 탈취되는 시각. 이즈음에, “공수부대가 광주사람들은 모조리 총으로 쏴죽이고 있으니 우리도 이에 맞서 싸우려면 총을 들어야 합니다”라는 유언비어로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나주지부> 간부가 선동. 나주의 무기탈취조는 영암과 해남 지역에서 무장봉기를 유도하기 위해 차량이 다시 몰려 나감.

     

    14:00 이즈음에 효천, 남평에서 크레인차가 굴러 떨어져 12명이 즉사했는데, 크레인 차량에 사람이 탈 공간이 없어서인지 크레인 위에 앉아 가다가 전복되어 그대로 깔렸다. 또한 나주 부근에 군용차 1대가 전복된 사고가 있었는데 운전부주의로 차 아래는 청년 1명이 죽어있었고 2-3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한편, 도청 앞에서는 군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해 탈취한 지프차로 분수대를 향해 돌진하다가 운전미숙으로 뒤집혀 3명이 사망. 여기저기서 이러한 안전사고와 총기오발사고 등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모두는 '전두환의 광주 살육작전'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의 소재가 되어주었다.

     

    14:40 시민군이 지원동 석산 탄약고를 파괴하고 다량의 TNT(약 8톤 분량)와 뇌관을 입수.


    14:45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해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로 전남도청 상공에서 정찰을 하던 중에 시위대 일부가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설치한 LMG 2정에 6발 피격,

    15:50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선무방송을 하던 61항공단 방송용 UH-1H 헬기도 6발 피격. 

    (※ 헬기 피격 사건을 조비오 신부가 헬기의 기총사격으로 판단하고 퍼트린 말이 광주사건 주동자인 김현장에 의해 ‘전두환 광주살륙작전’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전국으로 유포) 

    (※ 실제로 시민군이 기관총을 설치하자 인근 주민들이 피난하기 시작했고, 시민군이 다이너마이트로 도청을 폭파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자 일대의 주민들까지 모두 피난을 갔다)

     

    19:00 조선대에서 철수를 결정한 7공수 36대대는 차량제대와 육로제대로 구분하여 화순방향으로 철수를 시작. 출발 후 2km 지점 건물에서 무장시민군이 사격을 해와 5명이 관통상을 입는 등의 부상자가 생기고, 차량 2대와 운전병이 낙오되어 보급품의 손실을 보았는데, 육로철수제대는 야음을 이용해 야선을 따라 주답 마을로 가는 도중 조직적인 사격을 해와 철수를 방해. (※ 결국 낙오된 차량과 보급품은 폭도들이 방화하고, 운전병 1명은 광주사직공원에서 온몸이 찢겨진 변사체로 발견됨)

     

    17:30 500여 명의 무장시민군을 인솔하고 가짜 대학생 김원갑이 의기양양하게 도청 접수. (※ 본래 19일로 예정되어 있던 무장봉기 및 도청접수 계획이 늦어진 것은 공수부대의 지원으로 광주경찰이 이틀간이나마 버티며 도청 사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임)

     

    17:30 닥치는 대로 민간인 옷을 훔쳐 입고 도망가는 경찰의 행렬이 22일 아침 무렵까지 이어졌다. 트레이닝에 신사복을 걸치는 등, 가지각색 우스꽝스런 복장으로 신분을 감추고 도망가는 경찰에게 장난삼아 총질하는 어린 시민군도 있었다.

     

    조선대 학생들이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이라는 유언비어 유인물을 만들어 서울 등 여러 도시에 배포, 서울대 운동권은 사실로 여기며 ‘광주대자보 속보’를 제작하여 전국 대학교에 보급. ‘전두환이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최규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 구호가 난무.

     

    (※ 광주 시민은 아직 전두환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이었는데, 당시에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고, 공수부대의 특전사령관은 정호용이었음. 또한 전주의 문정현 신부도 천주교 전주교구 교구청이 갖추고 있던 고속윤전기로 ‘전두환 광주살육작전’ 1만장을 복사해 서울, 대구, 부산에 살포, 서울은 이를 다시 복사해서 전국에 살포, “부마사태 때는 전라도 군인, 금번 광주살륙에는 경상도 군인을 투입하여…” 등의 문장도 추가됨)

     

    도청에서 철수한 계엄군은 조선대 뒷산에서 학운동 뒷산을 타고 태봉산으로 이동하여 아침밥을 해먹었다. 시민군은 이들 공수부대원의 퇴각로인 학운동 ‘배고픈다리’에 병력을 배치. 그들은 카빈 60정, 수류탄 1박스, 최루탄 2개와 실탄 등으로 무장했다 (※ 이 사람들을 시민군이라 해야 하나? 반란군(叛亂軍)이라고 해야 하나?)

     

    5월 22일(목) : 광주 해방구

    오전 시간, 이제부터 광주는 군경이 1명도 없는 해방구가 되었다. 시민군은 군경의 복장이 뒤축박죽이 되어 언뜻 보면 누가 군경이고 시민인지 헛갈리는 상태에서 서로 총격전을 벌이기도 하고, 오인 사격도 빈발했다. 주로 청소년 시민군이 무책임하게 여기저기 총질을 해댔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고속버스 기사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민군의 징발을 피하고자 부산 쪽으로 과속으로 버스를 몰고 나갔으며, 그런 차량들은 당연히 시민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시내 3-4층 이상 건물에는 시민군이 무장 배치되고 도청 뒤 전남의대 병원 옥상 등엔 기관총 설치까지 완료되었다. 이렇게 수천 정의 총기들이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시위가 마무리되자 문제가 생겼다. 시민군은 있는데 지휘부가 없다. 중심가에는 ‘이성으로 해결하자’는 유지들의 마이크 호소와 ‘10시에 궐기대회를 하니 도청 앞에 모이라’고 선동하는 소리가 서로 섞였다. (※ 봉기 주동자들은 시민을 끌어 모으기만 하면 성공하는 줄로 여겼다. 전날 밤까지 한편이었으므로 당연이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학생들이 모이지 않았다. 운동권 학생들 중에도 무장봉기를 지지하는 숫자는 극소수일 뿐이었다.)

     

    21:00 비로소 <학생수습대책위>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전남대 김창길,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은 조선대 김종배. 그들은 모두 비운동권 학생들로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던 학생들이었고, 수습위의 목표는 시민군 해산이었다.

    (※ 뜻밖에 무장봉기를 반대하는 학생세력이 등장했다. 김창길 등의 무장반대파가 학생 수습위를 구성한 것은 큰 반전이었다. 그러나 무장파의 무력과 강압에 의한 반전이 또 있었고, 그런 긴장관계는 25일 밤까지 지속되었다)

     

    5월 24일(토) :

    14:00 <수습위>의 부위원장 김종배는 “우리 모두 총을 반납하겠습니다”라며 아래층으로 총을 들고 내려가더니 의문의 불순세력(까만 복면)들이 “반납은 안 된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하자 강경파로 바뀌었다. 바로 그때 무기반납을 막기 위해 주동자 윤상원이 YWCA 시민군을 데리고 도청에 나타나 결사항전을 주장, 총기 반납을 사이에 두고 격론과 긴장이 이어지는 상태가 지속됨.

     

    5월 25일(일) :

    “광주시민 여러분께”라는 대자보에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2척이 부산에 정박하여 전두환 일파의 무모한 만행에 대해 견제 … 전두환의 멸망은 멀지 않아 확실합니다.”라고 하는 유언비어가 새로이 시작.

     

    22:00 이즈음에 무장봉기파가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 10여 명을 도청에서 몰아낸 후, 최후까지 투쟁을 결의한 <광주 민중민주항쟁 지도부> 발족. 위원장에 김종배가 되면서 <학생수습위원회>의 명칭을 <민주투쟁위원회>로 개칭하고 정상용이 투쟁위원장을 맡기로 합의. 비로소 봉기 지도부가 공식적으로 발족되고 <남민전>이 그 지도부를 장악했다.

     

    5월 26일(월) 복면부대 사라지다

    05:30 전남도청 탈환작전을 구상하던 소준열 장군은 선량한 시민들을 무장 세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시험 삼아 새벽에 전차를 농성동까지 진입시켜보았다. 시민군의 규모와 동태 등을 파악해 보려는 것을 알지 못한 무장봉기파는 초비상을 맞았다. 혼란은 극에 달했고 전원 자폭하자는 등의 갈팡질팡이었다. 운동권 신부 김성용은 도청 지하실에 있는 8톤 분량의 TNT로 고민했다. 폭발을 막아야 했다. 광주 전역이 불바다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런데 불순세력으로 의심되는 수백 명의 복면부대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10:00 이때부터 오후 1시 너머까지 궐기대회가 있었는데, 결론은 자폭이었다. 계엄군이 진주할 경우 보유한 수류탄 1천발과 시내 절반 이상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TNT로 자폭하겠다는 결의였다. 그러나 시민들이 점점 비협조적으로 되어가는 것이 눈에 역력했다. 시가행진 때 3만여 명까지 불어나던 군중은 곧 전부 흩어지고 저녁 때 도청 앞에 남은 숫자는 2백 명도 채 안 되었다.

     

    14:00 기동타격대 결성. 수습위원회 산하로 유일하게 조직된 시민군이다. 8개조로 구성하고 각 조마다 5~6명씩 편성되어 개인화기로 카빈 소총과 각 조당 무전기 1대씩 지급되어 비로소 오합지졸을 면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조직의 모형은 50년대 빨치산식이었으며, 왕년의 빨치산 장두석이 광주의 무장봉기를 지원하고 있던 영향이었다. 그런데 곧 진압군이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밤이 되면서 무장시민군의 규모는 눈에 띠게 얇아져 있었다.

     

    5월 27일(화) : 5일 만에 끝난 광주해방구

    00:30 시민들로부터 계엄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제보가 도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고

    01:00 ‘계엄군이 들어왔다’는 풍문에 시민군은 “죽기로 싸우자”고 결의하면서 무기를 나누어 주기도 하는 반면에, 한편으로는 야음을 타고 하나 둘씩 빠져 나가는 탈영 시민군이 생기기 시작.

     

    02:00 정말로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도청에 들어왔다. 이에 2백 명이나 되는 시민군이 차량 편으로 어디론가 수송되어 나갔다. 소준열 장군은 시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시민군을 분산시키려 했는데 시민군 스스로 걸려 주었다.

     

    02:15 도청 안에 비상이 걸리고 전문대 여학생 박영순, 이경희를 데모 진압용 가스 차에 태워 가두방송을 시도, 그러나 이들의 가두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총성이 울리기 시작. 이즈음 봉기지도부 최고책임자였던 윤상원이 수류탄 폭발사고로 사망했다. 비록 안전사고였지만, 윤상원의 죽음과 더불어 무장봉기로부터의 광주사태는 끝났다. 윤상원을 잃은 봉기 지도부는 금방 항복을 선택했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광주는 금방 평상상태로 되돌아갔다.

     

    03:30 계엄군 도청에 도착, 이로부터 상황이 종료되기 까지는 30분도 채 안 걸렸다. 도청 안에 있다가 연행된 시민군 수는 200명 가량이고, 전남일보사를 점거하고 있다가 연행된 수도 20명 가량이었다. 계엄군은 시민군 총기 회수와 더불어 거리청소를 해주고 시민들에게 쌀 배급을 한 후 오전 일찍 모두 철수했다. 

     

    5월 29일(목): 북한 로동신문 29일자 사설의 첫 논평 - <남조선 인민들의 반파쇼 민주화 투쟁사에 빛나는 장을 기록한 력사적 사변>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광주인민봉기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동방 인민들의 근대 역사에서 처음 있는 가장 역사적 사변이다”라고 평가. 이후, 6월 1일자에는 “모든 애국 민중은 반파쇼 구국의 기치 아래 민주화의 아침을 앞당겨 오기 위해 총 분기하라”라는 격문을 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발표하고, 6월 14일자에는 “만천하에 고발함 - 광주살륙 만행백서”를 발표.

     

    1997년 4월 17일 - 5.18 재판 종결.

    광주시민군은 국가를 수호하고 민주화를 주장하기 위한 호헌세력이라고 판결. (즉, 광주에서 분명하게 “최규하 물러나라” “최 돼지 물러나라”고 반정부 구호를 외친 쪽은 호헌세력이 되어 최규하 대통령을 수호한 세력이 되었고, 이를 진압한 군경은 오히려 반란세력이 되었다. 황당한 판결로 인해 5.18사건 자체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렸다)

     

    2011년 5월 -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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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엄사 광주사태 전문’에 따르면, 전체 사망자 170명 중에 군인 22명, 경찰 4명이고, 민간인 사망자 144명 중에는 시민군과 계엄군 간에 총격전에 의한 사망자보다 시민군이 낸 사고에 더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즉, 5차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할 때 28명이고, 시민군이 이동 중 혹은 음주운전, 과속, 전복, 충돌 등의 교통사고가 32명이며, 소총과 수류탄 등 무기류의 취급 미숙에 의해 15명이 사망했다. 이 수치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거듭거듭 확인되었다. 그런데 시민군 증언록을 살펴보면 시민군의 교통사고와 총기 오발 등으로 사망한 수는 오히려 더 늘어난 것으로 관찰된다. 또한 광주사태 이후 그 후유증으로 여러 해가 지나 술에 의한 간암 등의 질병으로 사망한 이들까지 계속 5.18 묘지에 안치되어 왔기에 희생자 수가 부풀려 졌다. 실제 사태 중에 사망자 수는 훨씬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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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사태는 유언비어의 잔치판이었다. 온갖 악성 유언비어가 급조되어 퍼지면서 무장봉기를 유도했다. 유언비어가 선동수단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긴 거짓이 지배한 이유는, 시작부터 유언비어가 직접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승용차를 타고 여수 돌산으로 피신할 때, 광주역전에서 누군가가 박관현이 계엄군에게 맞아 죽었다고 외치면서 5.18의 막이 올랐다. 그 이후는 뻥튀기 유언비어 시리즈의 연속이었고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던 시민들이 그 흐름 속에 따라 흘러갔다.

     

    그 흐름을 타고 전면에 나선 단체들은 가톨릭농민회 전남지부, 김대중의 외곽단체인 국민연합, 전남대와 조선대의 극렬 운동권, 무등산 증심사를 연락처로 둔 북한 간첩집단과 그리고 정체불명의 까만 복면부대. 이들이 하나가 되어 광주를 5일간 해방구로 만들었다. 유언비어의 허상을 하나하나 벗겨보니 그 안에 나온 결과가 이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유언비어의 허상을 벗겨가던 저자가 찾아낸 것은 “5.18 사건이 사전에 기획되고 준비된 무장봉기”이었다. 어렵게 알아낸 것도 아니다. 정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노출되었을 뿐이다. 19일의 광주무장봉기. 그 거사일이 18일을 기해 발효된 비상계엄확대 조치로 하루 당겨진 것뿐이다.

     

    5.18이 진정 광주시민에 의한 민주화 민중운동이었다면, 5월 27일 새벽, 지도부 윤상원이 죽었다고 사태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계엄군이 총기를 회수해 갔다고 시위가 중단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광주 인구는 80만이었다. 당시 김대중씨는 구속된 상태에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김대중 석방하라’라는 구호가 판을 쳤다. 김대중이 잠시 연행되었을 때 그가 구속될 것을 예상하고 그 구호를 만들었다. 그것은 광주 시민의 외침이 아니라 <김대중의 사조직>의 외침이었다. 광주시민과 김대중의 사조직인 국민연합을 혼동하면 해석이 달라진다.

     

    여기서 그 전말을 본 책자의 내용을 기본 자료로 해서 나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그 중에 가장 궁금해왔던 점이 북한 특수부대 남파 관련 의문들이었다. 그래~ 사실이었구나..! 이걸 여기에 정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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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김일성이 1975년 월남 패망을 결정적인 시기로 보고 남조선 통일을 추진하다가 주변국들의 반대로 무산된 경험이 있었다. 그후 방향을 바꾸었다. 남조선 혁명세력의 요청이 오면 그에 맞추어 밀고 내려가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다. 남쪽에 박정희가 졸지에 없어졌다. 후임 체제가 굳어지기 전에 적화를 서두르기로 하고 3월로 때를 맞추었다. 농번기가 오기 전에 남조선 전체를 휩쓰는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 정선의 사북탄광에서 폭동조짐이 보이자 혁명봉기를 4월 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다. 그런데 막상 4월 말에 사북사태가 터지니 다시 5월로 미루었다. 그 날이 남한 운동권이 잡은 19일이었다. 그 사이에 미리미리 준비된 특수부대 수백여 명을 남파시켰다. 이들이 광주에서 차량탈취와 무기고 습격, 광주교도소 공격과 불타는 차량으로 저지선 밀어붙이기, 그리고 각종 화기로 무장하고 장갑차와 군 트럭을 몰고 돌아다니던, 바로 그 정체불명의 시민군 - 복면부대였다. 5월 21일 오전 9시 광주에 들어 왔다가 26일 새벽에 갑자기 사라진 무장세력. 이에 관련된 탈북인들의 증언 자료를 몇 가지 모아 보았다. 

     

    ※ 북한군 특수부대 남파에 관련된 증언들;

     

    -. 전 대남공작 전투원(필명 김다윗)은 1979년 5월,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인 60저격려단에 ‘장발 명령서’가 내려왔다고 증언. 아무리 당 간부라 하더라도 남조선식의 장발은 감히 생각도 못할 시기였다. 당시 김일성은 서울, 인천, 부산, 대구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인 폭동을 계획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후회한다고 했다.

     

    -. 전 문천제련소 노동자 2009년 증언; “남조선에서 광주인민봉기가 일어났을 때에도 이미 전에 자기네 정찰부대에서는 한 개 전투조가 미리 선발되어 나가서 대기하고 있었고, 항쟁이 일자마자 참가해서 남조선 인민들을 지원해 주었다”

     

    -. 전 남포시 농촌경영위원회 지도원: “남한에 와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5.18 사건이 한창이던 그때 남쪽에서는 광주인민봉기를 전혀 중계하지 않아서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는데, 북한에서는 어떻게 돼서 바로 그 다음날부터 남조선의 광주에서 있던 일이 그대로 TV에 전국으로 중계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 전 러시아 벌목공, 보위부 반탐부장의 고백 2009년; 창고장은 북한에서 70년대 말에 극비리에 조직한 특수부대인 당원사단 출신이었다. 그들 조는 80년 3월 말경에 남조선으로 침투할 데에 대한 임무를 받고 한 달 정도 가상훈련을 받은 다음 80년 4월 말경에 출발하여 남포항에서 디젤 잠수함을 타고 서울에서 가까운 서해안에 들어가 서울로 침투했다. 인원은 총 12명이었다.

     

    -. 전 북한군 대위 안창식의 내연의 처였던 탈북자(전 함경남도고등중학교 교원)의 증언 2009: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교도소에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도 참가했다. 그 중 1명이 복부 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어 과다출혈도 치명상이었다고 했다.

     

    -. 전 통일선전부 작가 장진성 2010; “통전부 영웅관이라고 있습니다. 간첩들의 공적을 기리는 거기에 여러 전시관 중에 광주관이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광주에 들어가서 계엄군 옷 입고 대학생들을 쏘고, 대학생 옷을 입고 계엄군을 쏘고 이런 교란작전을 했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전 북한군 하사 박행운 2009: 광주 봉기가 한창이던 날, 중대 병실에 TV에 광주봉기 참가자들이 장갑차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자 중대 병사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중에 사관장이 “야, 저거 광수 아니야? 광수가 어떻게 저기 나가 있어? 저 자식이 별을 달고 승진해서 특수부대로 간다더니 저기 나가 있네, 세상일 참 모르겠다.” 라면서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전 조선동맹 작가, 2009;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나눠주는 곳에서, 20대 중반 여성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은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는 거야. “쌍간나 새끼, 괴뢰군 새끼들이 몰려오는데 총 안 잡고 뭐하고 서 있니?” 했더니 여성이 “아저씨 광주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어디서 오셨어요?” 그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녀를 미행하여 다른 시민에게 뭐라고 말하는 순간 두 명을 모두 총으로 쏴 죽였다.

     

    -. 전 북한군 하사 박행운 2009: “광주사태 때 전쟁이 날 뻔했다. 김일성의 지시로 본격적으로 밀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시점에서 광주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인민군대는 광주와 남조선의 전역에서 신호가 오면 즉시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 전 러시아 벌목공, 염동유 2009; “그때까지 창고장 일행 중에 부상당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빠져 나오는 과정에 진압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으면서 교전이 벌어졌고, 고향이 신의주 출신인 조원 1명이 복부에 맞아 중상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들은 당시 국군복장으로 위장해서 노출될 수 없었는데 어떻게 눈치 채고 먼저 공격했는지 당황했다. 아마도 머리를 기른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시내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의심스러워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전 문천 제력소 노동자 2009; “광주사건이 끝나고 난 이후부터 ‘무사고 정시 견인 초과운동’이 아니라 ‘5.18 무사고 정시견인 초과운동’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고, 운동의 성격까지 갑작스레 바뀌었다. 광주사건을 얼마나 대중적인 운동으로 기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른 부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룡성기계연합소에서 만든 1만톤 프레스를 ‘5,18 청년호’, 어느 일 잘하는 생산직장에는 ‘영예의 5.18청년직장’이라는 칭호를 붙여 부르게 했다. 광주사건이 북한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 습격사건도 그랬지만 5.18광주사건에 대한 내용에서도 조금도 비밀에 붙이는 것이 없었다”

     

    -. 전 북한군 서해안 군관 2009; “평양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광주항쟁이 수일 안에 전국적인 무장봉기로 확산될 것에 대비하라는 지시였다. 그때 우리는 남조선 정권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통일은 어떤 방법이든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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