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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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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쪽 | 양장
ISBN-10 : 8937439786
ISBN-13 : 9788937439780
가을(Autumn) [양장] 중고
저자 앨리 스미스 | 역자 김재성 | 출판사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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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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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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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지금과 달리 흥미진진하던 시절, 당대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던 지식인이자 작곡가였던 대니얼은 이제 동네에서 늙은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휩싸여 산다. 어린 엘리자베스는 우연히 학교 숙제로 이웃 사람 인터뷰를 하러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이십 년 후, 엘리자베스는 대니얼의 영향으로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 강사가 되고, 백한 살이 넘은 대니얼은 요양원에서 주로 잠들어 꿈을 꾸며 지낸다. 그 ‘투표’ 이후 엘리자베스가 겪는 매몰찬 도시의 분위기와 차가운 사람들, 대니얼의 꿈속에 복기되는 옛 시절에 대한 추억들, 그리고 그와 쌓은 우정의 근원과 영향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추억들을 오가며 순환을 이루던 이야기는 점차 늦가을을 향해 나아간다.

■ 현재 영국 사회를 진단하는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

매일 아침 그녀는 어쩐지 속아 넘어간 것 같은 기분으로 잠에서 깬다. 그러면 어느 쪽에 투표했든 속았다는 기분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온 나라에 몇 명이나 될까 하는 것으로 생각이 이어진다.(본문 256쪽)

『가을』의 배경은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전후의 시점이다. 탈퇴 찬성 51.9%, 반대 48.1%로 근소한 격차로 여론이 나누어진 영국 사회는 반으로 갈라져 뒤숭숭해졌다.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브렉시트 논의는 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니얼이 문화적 축복 아래 보낸 20세기 중반과 2010년대 현재의 모습과의 비교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소설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그렇다고 거대한 역사 소설은 아니다. 삼십 대인 엘리자베스가 스쳐 지나가는 동네 풍경들, 관공서에서 대기하는 주민들의 모습들이 배경처럼 등장인물들을 휘감으며 현재 영국이 어떤 분위기인지 생생히 전달한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여권을 새로 신청하기 위해 우체국에서 하염없이 순서를 기다리거나 우체국 직원과 대화하며 ‘머리 크기가 규격에 맞지 않기 때문에’ 여권 신청을 거절당하는 장면은 이 사회가 가진 관료주의적 성격을 정확히 꼬집는 명장면이다.

청구서를 꾸며서 인쇄하기도 지극히 쉬운 일이에요. 어떤 사람인 척하기도 마찬가지죠.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또 어떻고요? 인쇄된 종잇장에 이름이 박혀 있다는 게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죠?(본문 138쪽)

특히 엘리자베스의 ‘신분 증명’에 대한 논의는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데, 급하게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가지만 증명할 방법이 유효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대학교 교직원증밖에 없는 장면은, 현재 한국에서도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는 고등교육법안 이슈를 떠올리게 한다. 대학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르는 시간강사의 처우와, 그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의 횡포는 눈여겨볼 만하다.
한편 엘리자베스의 엄마 웬디는 작품 내내 딸 엘리자베스와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로 등장한다. 웬디는 딸이 나이 든 동성애자와 우정을 나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딸이 공부하는 예술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반응해 딸과 항상 마찰을 빚는다. 한마디로 기존 사회에 순응하며 현재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웬디는 한국의 「TV쇼 진품명품」과 비슷한 영국 TV 프로그램에 일반인 출연자가 되면서, 사라지고 잊힌 영국의 골동품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새롭게 전환된다. 엘리자베스가 미처 몰랐던 그녀의 과거에 대한 열정과 또 그 프로그램 출연으로 인해 새로이 맺어진 조이와의 동성애 관계를 아우르며, 웬디는 전통의 가치를 간직한 동시에 변화가 가능한 인간의 모습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이렇듯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품은 채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는 한 나라의 다양한 인물들이 ‘가을’이라는 계절적 키워드와 함께 천천히 순환해 나가는 모습을 앨리 스미스는 함축적 장면 묘사와 대화들을 통해 군더더기 없는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 타자를 포용하는 이웃의 가치

엘리자베스는 어릴 적 ‘이웃과 인터뷰하기’ 숙제를 하기 위해 옆집 노인 대니얼 글럭의 집을 방문하려고 하지만, 엄마는 대니얼이 늙은 호모라는 소문이 있다면서 가까이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엘리자베스는 대니얼과 친구가 되며, 대니얼은 십 대의 그녀의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일깨우며 엘리자베스가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하게끔 도와주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 바깥의 일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영국, 스코틀랜드, 유럽, 비유럽 등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을 긋고 ‘나’와 ‘타자’를 구분 지으려 한다. 이미 유럽 사회는 난민 문제로 인해 큰 홍역을 겪고 있다.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 난 아이의 주검 문제는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된 적 있다. 작가는 작품의 첫 부분부터 그 장면이 떠오르는 장면을 삽입했는데, 이는 독자들을 향해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를 알려 주는 상징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는 해안에 널려 있는, 조수에 밀려온 시체들을 바라본다.
아주 작은 아이의 것들도 있다. 그는 부풀어 오른 한 남자의 시체 옆에 쪼그려 앉는다. 지퍼로 잠긴 남자의 상의 속에서 아이가, 아니 아기가 입을 벌린 채 바닷물을 흘리고 있다. 부풀어 오른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죽어 있다.(본문 25쪽)

타자 혐오는 어제오늘 일의 일이 아니며 다만 변화하는 세계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문제가 이제는 수면 밖으로 터져 나오는 시기이다. 난민에 대한 포용 문제는 유럽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주 예멘 난민 사태에서 보듯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단계에 있다. 이때 문학은 무엇을 전달할 수 있는지 앨리 스미스는 우아하고도 날렵한 태도로 사회의 현 모습을 가리킨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른 일을 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유럽 연합은 무엇인가”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스코틀랜드 이주”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아일랜드 여권 신청”을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잡년이라고 불렀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78~79쪽)

늙은 동성애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로 확대된다. 소설 속 엘리자베스는 대니얼 덕에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깊이 있는 인간으로 성장했으며, 대니얼 역시 사회적 소수자로서 비참한 삶의 노년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엘리자베스라는 가까운 이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루어 낸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 곁에서 인간적 존엄을 지키며 보낼 수 있게 된다. 이웃이 되는 경험은 특별하다는 것을,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시간은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울타리를 쳐도 영원한 순환을 반복하리라는 것을 앨리 스미스는 이 소설을 통해 역설한다.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인데?” 하고 엄마가 묻자 “우리 이웃 사람이니까요.”라고 말한 어린 엘리자베스의 말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명장면 명대사’일 것이다.

■ 변치 않는 창조의 중요성

대니얼은 십 대인 엘리자베스에게 다양한 인문적 감수성을 질문과 대답의 방식을 통해 깨닫게 한다. 대니얼은 작곡가였으며, “세상이 지금보다 더 흥미진진하던” 시절에 다양한 예술가, 지식인과 교류하던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단 한 명 사랑했던 여자는 실존 인물인 영국의 팝아티스트 ‘폴린 보티(Pauline Boty)’로, 작가는 이 예술가의 실제 이야기에 허구인 대니얼의 이야기를 섞어 솜씨 좋게 풀어낸다. 여성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에 눈부시게 활동하다 짧은 생을 마감한 폴린 보티, 그리고 그녀의 작품 도록을 헌책방에서 발견해 그녀를 평가절하하는 지도교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정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무심한 세상 속에서도 번뜩이는 창조력을 지닌 이들과 그들을 알아봐 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만든다. 허구의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어린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대한 대니얼의 대답은, 소설가가 이야기를 짓는 행위에 대한 가치에 대한 작가의 확고한 신념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을 만들어 내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실제 세상이 이미 있으니까요. 그냥 세상이 있고, 세상에 대한 진실이 있어요.
네 말은 그러니까 진실이 있고 그것의 가짜 버전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가짜를 듣고 산다는 거로구나. 대니얼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세상은 실재해요. 이야기들은 만들어지고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진실인 건 아니지. 대니얼이 말했다.
그건 초강도 헛소리예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만들어 낸단다. 대니얼이 말했다. 그러니까 늘 네 이야기의 집에 사람들을 반겨 맞으려고 해 보렴. 그게 내 제안이다.(본문 157~158쪽)

저자소개

저자 : 앨리 스미스
1962년 스코틀랜드의 인버네스에서 태어났다. 애버딘 대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 뒤 1995년 발표한 단편집 『자유 연애(Free Love and Other Stories)』로 데뷔작에게 주어지는 샐타이어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7년 발표한 첫 장편소설 『좋아해(Like)』에 이어 두 번째로 출간한 『호텔 월드(Hotel World)』(2001)는 언론과 평단의 열렬한 지지와 더불어 맨부커상과 오렌지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스코틀랜드 예술 협회 도서상과 앙코르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 쓴 『우연한 방문객(The Accidental)』 역시 맨부커상과 오렌지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동시에 휘트브레드상을 수상하며 앨리 스미스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다. 이후 이피스 신화를 토대로 재구성한 『소녀 소년을 만나다(Girl Meets Boy)』(2007)로 클레어 맥클린상과 르 프린스 모리스상 후보에 올랐다. 2011년 『그리고 사라진(There But For The)』을 발표했으며, 2017년 ‘사계절 4부작’의 첫 권인 『가을(Autumn)』을 출간해 문단과 언론으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역자 : 김재성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출판 기획 및 번역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나의 우울증을 떠나보내며』, 『밤에 우리 영혼은』, 『우상들과의 점심』,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푸른 밤』, 『불안한 낙원』, 『아름다운 폐허』, 『신디 로퍼』, 『한 문장의 철학』, 『501 위대한 작가들』 등이 있다.

목차

1 9
2 115
3 233

감사의 말 332

책 속으로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다시. 세상이란 그런 것. 모든 것이 무너진다.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13쪽) 열두 개의 창구를 맡은 직원 두 명이 아마도 154번과 155번일 손님을 응대하고 있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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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다시. 세상이란 그런 것. 모든 것이 무너진다.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13쪽)

열두 개의 창구를 맡은 직원 두 명이 아마도 154번과 155번일 손님을 응대하고 있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여기 온 지 이십 분이 되었는데 아직 같은 손님 둘이 서비스를 받고 있다.) 그녀는 우체국에서 나가 초록불을 기다려 길을 건너서는 버나드 거리의 헌책방으로 간다.
십 분 후에 돌아가 보니 여전히 직원 둘이 서비스를 하고 있는데 안내 화면은 다음 순서로 284, 285, 286번을 알린다.(28쪽)

셰익스피어의 탄생 또는 사망 몇 주기인가를 기념해 제작된 주화가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도 보인다. 한쪽 면에 해골이 있는 것을 보면 사망 쪽인 듯하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마침 읽고 있던 페이지에 셰익스피어의 인용구가 나온다. (...) 소설이 비로소 셰익스피어와 제대로 만나는 순간 책에서 눈을 들어 기념주화를 바라보는 일이란 실로 대단한 경험이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다 실수로 좌석을 절거덕거린다. 옆자리 여자가 살짝 공중으로 뜨는데 모르는지 신경 쓰지 않는지 아무 반응이 없다.
이처럼 비공동체적인 공동 대기석에 앉아 있다는 것이 우습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그 점에 대해 눈짓을 나눌 사람이 없고 책과 기념주화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할 대상은 더더욱 없다.(30쪽)

그는 기존 여권의 사진과 엘리자베스가 즉석 사진기에서 찍어 온 사진을 비교한다.
알아볼 수는 있어요. 그가 말한다. 간신히.(어깨가 들썩인다.) 그런데 이게 스물둘과 서른둘의 차이예요. 십 년 더 지나 새 여권을 받으러 오실 때 한번 또 보죠.(어깨가 들썩인다.)(36쪽)

그가 줄자를 꺼내 들고 몇 센티미터를 당긴 뒤 그것을 엘리자베스의 사진 위에 얹는다.
맞네요. 그가 말한다.
네?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가 말한다. 24밀리미터예요. 예상대로.
잘됐군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잘된 게 아니에요. 남자가 말한다. 안됐지만 조금도 잘된 게 아니거든요. 얼굴 크기가 틀렸어요.
제 얼굴 크기가 어떻게 틀릴 수 있을까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규격에 대한 지시 사항을 따르지 않으셨어요. 이용하신 즉석 사진기에 여권 사진 관련한 지시 사항이 있었다면 말이에요. 남자가 말한다. 물론 이용하신 즉석 사진기에 여권 사진 관련 지시 사항이 없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어찌 됐건 도움이 되지 않아요.
얼굴 크기가 얼마여야 하는데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제출하는 사진의 올바른 얼굴 크기는 29밀리미터와 34밀리미터 사이랍니다. 남자가 말한다. 손님 사진은 5밀리미터가 모자라요.
왜 제 얼굴이 어떤 크기여야 하죠?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규정이 그러니까요. 남자가 말한다.(39쪽)

늙은 호모야. 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인데? 그녀가 보다 보통의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웃 사람이니까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59쪽)

투표가 끝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다. (..) 마을의 분위기도 음울하다. 엘리자베스는 버스 정류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집을 지나친다. 문에서 시작해 위쪽 창까지 전면에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글자들이 검은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72쪽)

사람들은 시선을 깔거나 돌리거나 그녀를 빤히 쳐다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그녀가 어머니를 위해 과일이나 진통제, 신문 따위를 사는데,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과 달리 무심하게 말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어머니의 집까지 가는 길에서 지나친 사람들이 그녀를, 그리고 그녀 또한 그들을 전과 달리 오만하게 대한다.(73쪽)

별것도 아닌 일에는 대단한 일인 양 호들갑을 떨고 정말 끔찍한 일에는 단순하게 다루는 거 말이야. 분노에 지쳤고, 야비함에 지쳤고, 이기주의에도 지쳤어. 그걸 막아 내려는 노력이 전혀 없는 데 지쳤고, 오히려 그걸 조장하는 데 지쳤어. 현재의 폭력에 지쳤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가올 폭력에도 지쳤어. 거짓말쟁이들에 지쳤어. 아닌 척하는 거짓말쟁이들에, 그들이 이런 일을 유발하는 데 지쳤어. 그들이 멍청해서 그런 건지 고의로 그런 건지 궁금해하는 데도 지쳤어. 거짓말을 일삼는 정부들에 지쳤어. 거짓말을 듣거나 말거나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들에 지쳤어. 이렇게 두려워해야 하는 데 지쳤어. 적대감에 지쳤어.(76~77쪽)

온 나라에 고통과 환희가 있었다.
폭풍에 송전선이 철탑을 부러뜨리고 나무와 지붕과 차량들 위의 상공을 지져 대듯 그 사건은 온 나라를 강타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잘된 일이라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패배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승리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른 일을 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유럽 연합은 무엇인가”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스코틀랜드 이주”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아일랜드 여권 신청”을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잡년이라고 불렀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78~79쪽)

온 나라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온 나라에서 평소대로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평소대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온 나라에서 돈, 돈, 돈, 돈이 넘쳤다. 온 나라에서 돈, 돈, 돈, 돈이 씨가 말랐다.(80쪽)

그는 여든다섯 살이야.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여든다섯 살짜리 남자가 어떻게 네 친구니? 왜 정상적인 열세 살짜리들처럼 정상적인 친구를 사귀면 안 되는 거니?
그건 엄마가 정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 정의는 내가 정상을 정의하는 방식과 다르겠지만요. 우리는 모두 상대성 속에 살고 현재 정상에 대한 내 정의는 엄마의 정의와 다르고 아마도 결코 같아지지 않을 거예요.(102~103쪽)

부자연스러워.
불건전해.
안 될 일이야.
허락할 수 없어.
더는 안 돼.(111쪽)

지금 등록해서 진료를 받을 수 있나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몸이 심상치 않아요. 정말이지 누군가와 상담하고 싶어요.
접수원이 신분증이 있느냐고 묻는다.
엘리자베스가 접수원에게 대학 도서관 카드를 보여 준다.
적어도 일자리를 잃기 전까지는 유효하니까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대학들이 예산의 16퍼센트를 감축할 거라더군요.
접수원이 참을성 있는(patient) 미소를 짓는다.(특별히 환자들(patients)을 위한 미소.)
현재 주소와 가급적이면 사진이 있는 게 필요해요. 그녀가 말한다.
엘리자베스가 그녀에게 여권을 보여 준다.
여권의 기간이 만료됐네요. 접수원이 말한다.
맞아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갱신하고 있어요.
죄송하지만 기간이 만료된 신분증은 인정되지 않아요. 접수원이 말한다.(136~137쪽)

“청구서를 꾸며서 인쇄하기도 지극히 쉬운 일이에요. 어떤 사람인 척하기도 마찬가지죠.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또 어떻고요? 인쇄된 종잇장에 이름이 박혀 있다는 게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죠?”(138쪽)

“우리가 단지 수사학적, 실제적으로 이 나라의 이민자들에게만 통합 반대를 권고해 온 것이 아닙니다. 수사학적, 실제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도 통합하지 말라고 권고해 온 것입니다. 대처 총리가 우리에게 이기적이 되라고, 사회라는 것은 없음을 머리로 생각만 하지 말고 신봉하라고 가르친 이래로 우리는 이를 자기 검열의 사안으로 삼고 있습니다.”
“뭐, 이런 셈이군요. 포기해, 철 좀 들어. 네 시대는 끝났어. 민주주의. 너는 진 거야.”(146쪽)

아파트 건물 근처의 거리에서 깡패 같은 자들이 떼를 지어 「지배하라, 영국이여」를 불렀다. 영국은 파도를 지배한다. 먼저 우리는 폴란드인들을 잡을 테다. 그다음에는 이슬람교도들과 날품팔이들을 잡을 테고, 이어서 동성애자들을 잡을 테다. “아무리 도망쳐도 우리는 당신들을 쫓아가서 잡을 거예요.”(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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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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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문단의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 앨리 스미스의 사계절 4부작 중 첫 번째 단편

앨리 스미스는 독특한 방식의 글쓰기와 신화와 회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지적인 주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의식 등으로 영국에서 독보적인 여성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영국 작가다. 맨부커상에 4회나 최종 후보작에 오른 경력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언젠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다면 그녀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평가 역시 세상이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 중 하나다. 국내에서는 ‘알리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소녀 소년을 만나다』 (문학동네, 2008), 『호텔 월드』(열린책들, 2011) 두 작품이 출간된 후 다른 작품들이 소개될 기회가 없었지만, 앨리 스미스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자신의 행보를 넓혀 가고 있었다. 이번에 민음사에서 새롭게 국내에 소개하는 작품은 그녀의 2017년 최신작이자 ‘사계절 4부작’으로 기획한 연작 중 첫 번째로 출간된 『가을』이다.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도서 시장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뉴욕 타임스》에서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언론과 문단, 독자들의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스미스는 현재까지 『가을』과 『겨울』을 집필해 발표했고, 4월에 『봄』이 출간을 앞두고 있으며, 민음사는 스미스의 4부작 작품을 모두 계약해 차례대로 국내에 소개할 예정이다.
팔십이 넘은 이웃 노인 대니얼과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십대 소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와, 시간을 건너뛰어 서른두 살의 미술사 강사가 된 엘리자베스의 일상을 교차시키며 진행되는 이 이야기가 “최초의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뉴욕》)이라는 평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 소설은 실제로 여러 사회 정치적 이슈들로 혼란스러운 영국 사회의 면면을 현재 진행형으로 묘사한 통찰력 있는 작품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에도 적용되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동시대성을 지닌 소설이다. 백한 살이 넘어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는 대니얼과, 사회인이 된 엘리자베스의 차가운 일상은 ‘독거노인’와 ‘비혼여성’을 넘어 ‘관료주의’와 ‘난민’으로까지 생각의 영역을 넓힌다. 이웃과의 교감이 개인들 각각의 삶에 얼마나 강한 불빛으로 사회를 건강하게 밝힐 수 있는지, 앨리 스미스는 사회의 한복판 속에서 소설가가 가진 날카로운 직감력으로 사회를 크로키한다. 재기 발랄하고 영리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녀만의 언어유희를 발견하는 것 역시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빼놓을 수 없는 독서 체크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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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회원리뷰

  • 가을 | hm**stk | 2019.05.17 | 5점 만점에 4점 | 추천:0
      민음북클럽 첫 번째 독자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책이다. 앨리 스미스의 4계절 4부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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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북클럽 첫 번째 독자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책이다. 앨리 스미스의 4계절 4부작 중 <가을> 책을 받게 되었다. 표지 그림은 유명한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이라고 한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가 영국에서 쓴 최초의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이라고 한다. 이민자는 떠나라고 외치는 사람들과 자신의 어린 딸과 친하게 지내는 이웃 노인 대니얼 글럭을 동성애자로 생각하며 멀리하게 만드는 엘리자베스 어머니는 다수자를 대변한다. 최초의 서양 여성 팝 화가 폴린 보티에 대해 꽤 자세히 다루는데 그 당시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여성이 예술 활동을 하는 것에 사람들은 무모하고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한다. 문학에 조예가 깊은 이웃 대니얼과 엘리자베스는 다양한 여러 분야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우정을 쌓는 동안 문학과 예술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되며 결국 엘리자베스는 미술과 관련된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보수적인 인물인 엘리자베스 어머니는 순수하게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대니얼과 엘리자베스의 관계를 의심하며 대니얼을 배척하려 하였지만 말년에 그녀는 여성 애인과 살게 된다. 또한 소수자 난민을 위해 투사급으로 변신하는 장면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이 변화를 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뀐 건 아닐까 생각된다. 학교 숙제로 이웃을 인터뷰해야 한다는데 뉴스도 어차피 가짜이니 그냥 꾸며내라고 하고 늙은 호모이니 가까이하지 말라는 엄마 밑에서 자란 엘리자베스는 대니얼과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세상이 흑백, 이거 아님 저거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상 깊었던 것은 대니얼이 엘리자베스를 항상 만날 때마다 하는 첫 문장은 "뭘 읽고 있니?"다. 그만큼 이 책에는 다양한 문학의 문장들이 나온다. 우리 아이들이 이웃 사람과 만날 때마다 책에 대해, 문학에 대해, 예술에 대해, 그리고 그 예술을 가두지 않고 끊임없는 상상력으로 끌어내는 대화를 하게 되는 행운이 쥐어졌으면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이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폴린 보티'와 '크리스틴 킬러' 세대를 앞서갔던 여성들이 궁금하다. 4부작 중 하나인 <가을>을 읽고 나니 나머지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 뚝 뚝 끊어지는 느낌이 있어 처음에는 읽기가 조금 힘이 드나 퍼즐이 조금씩 맞춰가는 느낌이 들면서 뒤로 갈수록 강하게 끌어당기는 소설이다.

    평생의 친구. 그가 말했다. 우리는 때로 평생을 기다려서 평생의 친구를 만나게 된단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도 일어서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71p)

    아무도 대니얼처럼 말할 줄 몰랐다.

    아무도 대이널처럼 침묵할 줄 몰랐다.(194p)

    시간 여행은 진짜가 맞아. 대니얼이 말했다. 우리가 늘 하고 있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찰나에서 찰나로.(228p)

    우리의 동물적 본성에 이렇게 깊이 뿌리박혀 있잖니. 대니얼이 말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지 않는 것 말이야.(229p)

    "이상적인 여성은 일종의 충실한 노예예요. 불평 한마디 없이, 보수도 한 푼 없이 집안일을 돌보고, 남자가 말을 걸어야만 대답하고 늘 양순해야 하죠. 하지만 혁명이 다가오고 있어요. 온 나라 젊은 여성들이 각성하고 고개를 젓고 있어요. 두려우세요? 그게 그녀들이 바라는 바예요."(319p)

  • 가을 | mo**ardin | 2019.05.15 | 5점 만점에 4점 | 추천:0
        유럽연합이 탄생한 뒤에 겪는 지금의 고통들은 멀리 떨어진 우리들이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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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연합이 탄생한 뒤에 겪는 지금의 고통들은 멀리 떨어진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심각하다는 느낌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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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를 보면서 영국 국민들의 저마다 다른 의견들, 대영제국이란 이미지의 명성은 예전에 비해 훨씬 떨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이름만 들어도 각인이 되는 이미지는 강하게 다가오는데 바로 이 시점에서 브렉시트라는 걸림돌을 겪고 있는 영국의 상황을 그린 소설, 특히 저자가 자국의 시대를 그린 이 책을 통해 다시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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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인 대니얼 할아버지는 101세로 지금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첫 도입부인 바닷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교한 것은 마치 난민들의 위태위태한 모습과도 연상이 되는데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중 또 다른 한 사람인 엘리자베스와의 우정을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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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책 소개를 접했을 때는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이란 말에 하긴 서양에서는 나이에 구분 없이 우정이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상상컨대 '우정'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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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실제로 읽어 나가는 동안엔 글쎄 뭐랄까?  우정이라고 하기엔 마치 뭔가가 부족한 느낌 내지는 우정이란 말 자체보다는 존경이나 인간에 대한 사랑(?) 정도로 이해를 하면서 읽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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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만남은 엘리자베스의 숙제 때문이었다.

    이웃에 있는 사람과의 인터뷰 숙제 때문이었는데 엘리자베스의  엄마는 호모라고 알려진 동성애자 대니얼과의 만남을 싫어한다.

     

    하지만 이후 그들의 만남은 기타 손녀와 할아버지처럼 산책을 통해서 교감을 나누게 되고 엘리자베스는 그의 영향으로 인해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직업까지 그 계통으로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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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 간의 대화라는 것을 통해 어린 엘리자베스가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과 흐름들, 현재와 과거를 오고 가는 순서의 흐름들을 통해 영국이 당면하고 있는 이민자들에 대한 인식과 철조망 설치, 곧 직업을 잃게 될 처지에 놓인 엘리자베스의 모습들은 저자가 그리고자 한 현 세태의 흐름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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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렉시트, 노화와 상실, 소수자로 대표되는 대니얼과 그를 비난했지만 결국 엄마조차도 같은 사랑을 나누게 되는 모습들을 통해 저자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한 부분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 점차 변화해가는 쓸쓸한 '가을'의 분위기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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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는 대화체의 따옴표도 없고 영국 내각을 붕괴시킨 크리스틴 킬러에 대한 이야기나  한 여류 화가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라서 새삼 그녀들에 대한 생애를 찾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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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중에서 지금이야 여성들의 활발한 활동이 다방면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1960년대를 살아갔던 여류화가 폴린 보티의 이야기는 그녀의 재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생애를 통해 창작활동에 대한 제지가 많았음을, 엘리자베스가 그녀의 삶을 추적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부분에선 예술가로서의 비운 한 삶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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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의 유희 또한 맛깔스럽게 표현했을 부분들이 제대로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아쉬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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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제목이 주는 의미처럼 가을의 느낌, 특히 예술과 사랑, 노화의 순간들과 상실감, 문학, 여성의 활동들, 엘리자베스가 느꼈을 감정들을 충실히 녹여냄으로써 대니얼과 나누었던 순간순간들은 독자들 가슴에 살며시 스며들게 했다는 느낌이 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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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접한 작가의 작품이라 연작시리즈로 나올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도 크고 뭣보다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녹여낸 글이 인상적으로 다가온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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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 rm**l7827 | 2019.05.06 | 5점 만점에 5점 | 추천: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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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다시. 세상이란 그런 것. 모든 것이 무너진다.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p. 13)

     

    어느 날, 해안가에 노인이 떠밀려 올라온다. 그 노인은 몇 년 전, 난민 아이와 겹쳐지며 소설이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인 영국을 살아가는 엘리자베스는 브렉시트 이후에 벌어진 사회의 문제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뿐만이 아니라 거리에는 타국에서 온 사람들을 멸시하는 고성이 오가고 이웃을 경계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자주 묘사된다. 찬성과 반대 어느 쪽도 확실히 우세하지 않았던 영국의 선언은 속았다는 떨떠름한 기분을 국민들에게 얹어줬다.

     

    매일 아침 그녀는 어쩐지 속아 넘어간 것 같은 기분으로 잠에서 깬다. 그러면 어느 쪽에 투표했든 속았다는 기분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온 나라에 몇 명이나 될까 하는 것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p. 256)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지나며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웃을 인터뷰하라는 숙제를 받고 엘리자베스는 근처에 사는 노인 대니얼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늙은 호모라는 소문이 있다면서 그녀의 엄마 웬디는 둘의 만남을 가로막는다. 그에 굴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는 대니얼을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차 예술과 삶, 가치관을 형성해 나간다. 장차 그녀가 미술강사로 자라게 된 건 대니얼의 영향이다. 그는 어린 소녀에게 다채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정신적 교감을 나누어서일까. 엘리자베스는 그가 요양원에서 잠만 자도 매번 찾아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을 만들어 내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실제 세상이 이미 있으니까요. 그냥 세상이 있고, 세상에 대한 진실이 있어요.

    네 말은 그러니까 진실이 있고 그것의 가짜 버전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가짜를 듣고 산다는 거로구나. 대니얼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세상은 실재해요. 이야기들은 만들어지고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진실인 건 아니지. 대니얼이 말했다.

    그건 초강도 헛소리에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만들어 낸단다. 대니얼이 말했다. 그러니까 늘 네 이야기의 집에 사람들을 반겨 맞으려고 해 보렴. 그게 내 제안이다. (p. 158)

     

    어린 엘리자베스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할 때, 그는 사람을 반기라는 말을 해준다. 엘리자베스가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품게 해준 건, 대니얼의 힘이었다. 오히려 혐오와 분노가 주가 돼버린 차가운 세상 속에서 그래도 엘리자베스가 버티며 살아간 건, 그와의 우정 때문이다. 대니얼의 하루가 행복한 꿈만 꾸는 수면기였을 때도 그를 찾아가 매일 책을 읽어주고 병원 직원과 꽉 막힌 대화를 반복한 건, 이런 사회이기에 사랑이 필요하고 사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이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조금 아는 이들이 우리를 제대로 보았기를 바라야 해. 다른 건 결국 별로 중요치 않아. 대니얼이 말했다. (p. 210)

     

    엘리자베스 주변은 답답하다. 우체국에선 여권 사진이 규격에 맞지 않다고 계속 반려하고, 이웃들은 늘 분노에 가득 차 있다. 성소수자와 여성을 혐오하고 난민 문제로 자국민이 아니면 "꺼져!"라고 길거리에서 냉혹하게 소리친다. 나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도 나도 모두 인간이기에 고정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의 엄마가 대니얼을 호모라고 기피했지만 자신의 동성 연인이 생겨 사랑을 나눈 것처럼. , 영국으로 망명을 신청해 건너온 청년들의 재정 지원을 삭감한다는 발표가 나자 기압계를 울타리에 던진 것처럼.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변했으니까.

     

    영국만이 이러한 혼란을 겪고 있을까? 난민 문제는 제주도에서 이미 현실이다. 여성 혐오는 강력한 목소리가 시작됐다. 성소수자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람들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관료주의를 답답하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조직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최악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불안한 현실에서 봇물 터지듯 공동체는 변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친애하는 대니 오빠, 문제는 결국 우리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보고, 할 수 있다면 또렷하게 볼 수 있을 때 절망하지 않고 가장 적절하게 대처하기로 어떻게 선택하느냐야. 바로 그거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타인에게 하는 부정적인 행위들을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야. 희망은 바로 그거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타인에게 하는 부정적인 행위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느냐. 그것뿐이야. 그들도 우리처럼 모두 인간이라는 것을, 사악한 것이든 정당한 것이든 인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세상에 눈 깜짝할 순간만 머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런데 그 눈 깜짝할 순간은 다정한 윙크일 수도 있고 자발적인 무지일 수도 있는데 자신이 두 가지다 가능한 존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해. 그리고 악이 턱까지 차 있다 해도 그 너머를 볼 준비를 해야 해.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친애하는 오빠의 따뜻하고 매혹적이고 쓸쓸한 영혼을 향해 직접 말하려고 해.) 시간, 우리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그것을 허비하지 않는 거야." (p. 247)

     

    속는 기분이 든다면 이 때문이 아닐까. 잊지 말아야 할 자명한 사실, 그건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도 인간이란 것이니까. <가을>이란 제목이 붙은 건, 마치 대니얼의 모습처럼 우리도 곧 시들해져 겨울이 될 것이란 생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기에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옳고 그름의 선을 잘 구축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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