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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독립자금을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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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보인문학석강
  • 손글씨풍경
무정 평전
403쪽 | 규격外
ISBN-10 : 8933707557
ISBN-13 : 9788933707555
무정 평전 중고
저자 안문석 | 출판사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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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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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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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한 연안파의 리더, 무정(武亭). 불과 15살에 3?1운동에 참여하고, 서울에서 청년운동에 몸담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공산당군에서 활약한 데 이어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항일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섰다. 해방 후 북한에 들어와 초기 국가 건설 과정에 헌신했으나 정치가로서의 삶은 녹록지 않아 결국 6?25전쟁 중 김일성 세력에 의해 숙청당한 후 사망했다. 이후 김일성의 경쟁자였던 까닭에 북한 사회에서 그의 이름과 업적은 지워지고, 북한에서 활동한 정치인인 까닭에 남한에서도 그의 독립운동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이기 전에 조국의 독립과 자주국가 건설을 꿈꾸던 민족주의자였다. 이 책은 민족의 수난기와 격변기를 헤쳐 온 무정의 활동을 면밀히 살펴보고, 어떤 생각과 노선을 가지고 무엇을 지향했는지에 주목하며 숙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및 북한 체제 형성에 끼친 영향을 분석했다.

저자소개

저자 : 안문석
1965년 전북 진안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요크대학교(University of York)에서 정치학 석사, 영국 워릭대학교(University of Warwick)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KBS 통일부, 정치부, 국제부 기자를 거쳐 정치부 외교안보데스크를 지냈다. 2012년부터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북아 국제관계, 북한의 대외관계, 미국 외교정책 등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발전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통일외교 방안 등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북한현대사 산책』 1~5권, 『오기섭 평전』, 『김정은의 고민』, 『외교의 거장들』, 『글로벌정치의 이해』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으며, “A Nuclear South Korea?”(International Journal, 2014), “문재인 정부와 한미동맹―동맹의 지속성에 대한 고찰”(『한국동북아논총』, 2018) 등 한반도와 국제정치 관련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문제 제기
앞선 연구들
연구 방법과 범위

제1장 독립운동의 거두

제1절 서울에서 옌안까지
1. 14살에 3.1운동 참여
2. 서울에서 청년운동
3. 중국 망명
4.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5. 중공군 포병 장교가 되다
6. 2만 5천 리 대장정의 사투
7. 팔로군 포병단장
제2절 중국공산당 수뇌부와 무정
1. 중공 최고지도부와 친교
2. 중국공산당 수뇌부의 중매
3. 신민주주의와 통일전선
제3절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창립
1.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창립
2.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출범
3. 조선인 혁명 세력의 실체 과시
제4절 조선의용군 사령관
1. 화북조선독립동맹 창설
2. 무력투쟁의 첨병 조선의용군
3. 청년독립군의 산실 조선혁명군정학교

제2장 연안파의 분열

제1절 개인 자격 입국
1. 선양 탈출과 지도력 타격
2. 조선의용군 무장 입국 실패
3. 개별적으로 기차로 입국
4. 입국일은 1945년 12월 13일
5. 동북조선의용군의 확대와 입북
6. 동북조선의용군과 무정
제2절 귀국 후 연안파의 분열
1. 무정은 조선공산당으로
2. 김두봉은 조선신민당 창당
3. 옌안 시절부터 갈등
4. 해방 정국 연안파 분열의 의미

제3장 김일성과 무정

제1절 김일성과의 경쟁
1. 황해도의 ‘위대한 아버지’
2. 1946년 초까지 큰 인기
3. 남한정치에서도 큰 비중
4. 김일성의 견제
5. 김일성의 연안파 분열 전략
제2절 당에서 군으로
1. 1946년 당내 권력 상실
2. 북한군 창설에 핵심 역할
3. 초대 보안간부훈련소 사령관?
4. 초대 인민회의 대의원
5. 최용건과의 주도권 다툼

제4장 숙청

제1절 숙청의 예비 단계
1. 공식 비판의 시작
2. 초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탈락
3. 6?25전쟁 계획에서 배제
4. 공격의 핵심에서도 배제
제2절 전쟁, 숙청으로 가는 길
1. 북한군 초기 작전 실패
2. 인민군 제2군단장
3. 결이 다른 만주파와 연안파
제3절 전격적 숙청
1. 숙청의 첫째 이유는 명령 불복종
2. 숙청의 둘째 이유는 군벌주의적 만행
3. 인민군 39호병원에서 위암 수술 중 사망
4. 조직적 저항력 결여
5. 1994년 복권

제5장 숙청의 원인과 영향

제1절 숙청의 실제 원인
1. 김일성 못지않은 명성
2. 연안파에 대한 경계
3. 김일성의 패전 책임 전가
4. 정치력 부재
5. 소련과의 유대 결여
제2절 중국의 방관
1. 결코 나서지 않은 중국
2. 숙청 당시 중국은 전쟁에 몰두
3. 북.중 가교 역할은 박일우가 담당
4. 중.소 관계 관리에 집중
5. 중국인 아내를 버린 무정
제3절 무정 숙청과 김일성 유일체제
1. 무정 이후 연안파 연쇄 숙청
2. 허가이.박헌영도 제거
3.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 전략의 시발점

제6장 무정의 정치 노선

1. 철저한 민족주의
2. 민족통일전선론
3. 국제연대주의
4. 절대적 평등주의
5. 평화통일론

에필로그
무정 연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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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무정武亭의 본명은 김병희金炳禧이다. 한동안 본명이 김무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에 사는 무정의 8촌 조카 김하수金河壽가 무정의 본명을 김병희로 얘기하면서 비로소 본명이 알려졌다. 1924년 중국에서 군관학교에 다닐 때...

[책 속으로 더 보기]

무정武亭의 본명은 김병희金炳禧이다. 한동안 본명이 김무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에 사는 무정의 8촌 조카 김하수金河壽가 무정의 본명을 김병희로 얘기하면서 비로소 본명이 알려졌다.
1924년 중국에서 군관학교에 다닐 때 실제 전투에 참가해서 적을 격퇴시켰는데, 이를 기특하게 여긴 그의 상관이 군인을 뜻하는 ‘무武’ 자를 넣어 지어 준 이름이 무정이다. 그래서 특이한 이름 ‘무정’을 갖게 되었다. 한자로는 武丁, 武靜 등으로 쓰다가 나중에는 武亭으로 썼다. 무정이 스스로 쓴 팔로군 간부이력표가 중국 중앙당안관(정부기록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데,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武亭으로 써 놓았다.
? 제1장, 37~38쪽 ?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시절 무정은 ‘사꾸라 몽둥이櫻棒子’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조선인학교인 인성학교가 있었다. 매년 운동회가 열렸는데, 이때에는 상하이에 사는 대부분의 한인들이 모여 명절을 쇠듯 했다. 한인들 사이에는 우파도 있고, 좌파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큰 모임이 열릴 때면 서로 논쟁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번은 어떤 이가 무정을 보고 공산주의자라고 비방했다. 무정은 그 자리에서 사꾸라 몽둥이로 그 사람을 쳤다. 그 바람에 모두들 혼비백산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무정의 별명이 사꾸라 몽둥이가 되었다.
? 제1장, 47쪽 ?

무정은 입북 직후 북한정치의 중심부로 뛰어든다. 그의 정치적 무게,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만들었다.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국가 건설 과정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던 정치 세력은 모두 다섯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만주파, 중국 옌안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이던 연안파, 소련공산당에서 활동하다 해방 직후 소련군을 따라 입국한 소련파, 국내에서 좌파 지하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국내파, 그리고 우파 입장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민족주의 세력 등이 그들이다. 만주파는 전투적 투사형이면서 순박한 면도 있었고, 연안파는 온화한 선비형이었으며, 소련파는 관료적이었다. 국내파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기반으로 한 만큼 철저한 혁명주의자들이 많았고, 민족주의 세력은 사회혁명보다는 완전한 독립을 최우선으로 하는 우파였다.
? 제2장, 143~144쪽 ?

무정은 해방 직후 북한과 남한에서 높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던 좌익 인사들 사이에서도 지지도가 높았다.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전신인 재일조선인연맹의 부위원장을 지낸 김정홍의 말에 따르면, 좌익 계열의 재일교포들이 재일조선인연맹을 중심으로 군중대회를 열 때면, 해방 직후에는 박헌영의 초상만을 걸다가 차츰 김일성과 무정의 초상을 함께 걸었다고 한다. 해외의 좌익 인사들도 박헌영, 김일성과 함께 무정을 한국 공산주의의 핵심 인물로 꼽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 제3장, 170쪽 ?

무정에 대한 비판은 김일성이 직접 했다. 긴 연설문을 읽으면서 비판했다. 연설문은 당시 당중앙위 부위원장 김창만이 쓴 것이었다. 김창만은 원래 최창익 계열이었다. 1943년 최창익과 무정이 독립동맹 내부에서 노선 다툼을 벌일 때 무정 쪽으로 돌아섰다. 김창만은 옌안에서 무정과 함께 조선독립동맹 활동을 하다가 북한에 들어가 초기에는 무정을 수행하면서 그를 영웅화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무정과 김일성의 경쟁이 시작되면서 김일성 쪽에 가담했다. 소련의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던 김일성이 절대 유리한 상황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전?선동에 능해 당 선전부장을 거쳐 중앙위 부위원장이 되었다. 김일성 연설 가운데 무정 비판 부분은 이렇다.

다른 실례로 군대에서 명령을 집행하지 않고 전투를 옳게 조직하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 많은 손실을 가져오게 한 무정은 제2군단장의 직위에서 철직당하였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처벌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퇴각하는 과정에서 혼란된 상태를 리용하여 아무런 법적 수속도 없이 사람을 마음대로 총살하는 봉건시대의 제왕과도 같은 무법천지의 군벌주의적 만행을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법적으로 처단받아야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들은 비겁주의자들과 패배주의자들의 자유주의적 류망 행동이며 아무런 조직 생활도 무시하는 행위들인 것입니다.

? 제4장, 259~260쪽 ?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 수립은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등 많은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김일성의 경쟁 상대가 될 만한 거물 정적과 그의 세력에 대한 숙청 작업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순서상으로 본다면 가장 먼저 오기섭을 권력 중심에서 몰아내고, 무정을 숙청한 다음, 박일우?허가이를 제거했고, 이후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파를 제거한 뒤,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거 숙청했으며, 1967년에는 박금철 중심의 갑산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따라서 무정 숙청은 지금까지도 그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김일성 유일체제 수립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한가운데서 실시된 무정에 대한 숙청은 장기적 관점에서 진행된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 전략이 출발하는 지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무정의 숙청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북한의 유일지도체제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초기의 중요한 동력을 제공한 북한정치사의 주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무정을 숙청하는 데 실패했더라면 이후 이어지는 연안파의 또 다른 리더 박일우, 소련파의 수뇌 허가이,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 등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은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제5장, 328~329쪽 ?

해방 정국 이북 지역 정치의 중심에 있었고, 초기 북한 군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무정은 국가 건설 전략, 분단의 극복 등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정이 김일성과 갈등, 반목하게 된 데에는 그들 사이의 이념과 노선 차이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무정은 기본적으로 누구보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좌우익을 막론하고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민족통일전선론을 주장했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약소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국제연대주의자였고, 직업과 신분 등에 따른 차별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 평등주의 노선을 견지했고, 대화를 통한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 제6장, 33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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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기울어 가는 나라, 분연히 일어서다 대한제국 광무 8년(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한반도를 군사기지화한 데 이어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에 강제로 조인케 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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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 가는 나라, 분연히 일어서다
대한제국 광무 8년(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한반도를 군사기지화한 데 이어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에 강제로 조인케 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었다. 무정(武亭)은 이렇게 나라가 급속히 기울어 가던 그해 5월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병희(金炳禧)이나, 중국에서 군관학교에 다니던 때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상관이 군인을 뜻하는 ‘무(武)’ 자를 넣어 지어 준 이름이 무정이라 전한다.
경성에서 나남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불과 15살의 나이로 참가했다. 다음 해 이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중앙고보로 진학했으나 1922년 3월에 퇴학했다. 일제 총독부 자료는 그 이유를 ‘병’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병’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3?1운동 이후 학생운동이 활성화되고 있어 1921년 7월 중앙고보를 비롯한 7개 학교의 교장들이 회의를 열고 전문학교 학생 이상만 학생운동을 허용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고보 학생들은 운동 조직에서 탈퇴해야 했으므로 무정이 학교와의 갈등 때문에 퇴학한 것으로 보인다. 퇴학한 그다음 달에 바로 경성기독청년회관에 입학한 것으로 미루어 추정해 볼 수 있다. 1923년 4월 경성기독청년회관을 졸업하고 경성여자강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사회주의 활동에 뛰어들다
무정은 경성기독청년회관 졸업 전인 1923년 2월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1월에 출범한 서울청년회는 초기에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이 모두 참여했으나 1922년 4월 민족주의 계열을 축출하고 사회주의 단체로 개편되었는데, 무정이 가입한 시기는 사회주의화된 이후였다.
1923년 3월 서울청년회가 주도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무정도 참여했는데 사회주의 성격이 강해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20여 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무정은 현칠종 등과 함께 자산층 옹호에만 주력한다는 이유로 ‘조선청년연합회’를 성토하는 강연을 하고 ‘동아일보’ 불매 운동도 전개했는데, 양측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관련자들이 일제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강택진, 최창익 등과는 노동자와 농민의 단결을 도모하고 계급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조선노농대회’를 준비했으나, 대회가 열리기 전 10월 5일 체포되었다. 대회가 열리기 전이었기 때문에 큰 처벌 없이 그달 말 풀려났다. 무정은 나중에(1937년) 중국 중앙당안관에 보관된 팔로군의 ‘간부이력표’에 “조선에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참가하여 세 번 옥살이를 했다“고 썼는데, 위의 세 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여 약 8개월 동안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무정은 조선노농대회 준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중국공산당원으로 독립운동에 전력을 쏟다
만주를 거쳐 베이징에 들어간 무정은 바오딩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는 제1차 국공합작 시기여서 국민당군으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군벌 간의 다툼에 회의를 느끼고 우한으로 가 본격적으로 공산당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장제스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상하이로 옮겨 갔다.
상하이로 이동한 무정은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 지부’와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파난지부 소속 조선인 지부’에 소속되어 활약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무정은 한인 세력을 규합해 나가는 한편, 중국과 한국, 대만 등의 연대를 통한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중국관내 독립운동단체들의 좌우파 연합을 위한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가 구성되어 있었는데, 1928년 내분을 겪으며 무너지기 시작하여, 1929년에는 ‘한국독립유일당 상해 촉성회’도 해체되었다. 이후 좌파 세력은 ‘유호(상하이) 한국독립운동자 동맹’을 결성했는데 무정도 이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그러던 중 중국공산당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무정도 동지들과 함께 ‘한인규찰대’를 조직하여 폭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2개월의 옥살이를 한 후 장제스 세력의 테러를 피해 홍콩으로 몸을 숨겼다.

중공군 장교로 대장정에 참여하다
잠시 홍콩으로 도피했던 무정은 장시성(江西省)의 중공소비에트 지역으로 들어가 활발하게 활동하며 토지혁명 투쟁에 참가하고 상하이에서 열린 소비에트 지역대표대회에도 참가했다. 대회 행사 중에 홍군 제5군 군장이던 펑더화이(彭德懷)를 만나게 되고, 홍군에 입대했다. 무정은 홍군이 영?미?일 연합함대와 싸운 웨저우 전투에서 맹활약하여 포병 지휘관으로 승승장구하며 포병 연대장에 오르고, 포병과 공병의 실전교육을 위한 홍군특과학교 교장까지 지내게 되었다.
1934년 장시소비에트의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되는데 무정도 참여하여 2만 5천 리 행군을 함께했다. 1년이 걸린 대장정의 와중에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무정은 포병단을 이끌고 참전해 전과를 올리며 중국공산당 수뇌부의 신임을 쌓아 갔다. 험난한 대장정을 끝내고 옌안(延安)에 도착한 후 무정은 모처럼의 휴식기를 가지며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을 다녔는데 이때 공산주의 이론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사상을 깊이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전과 이론을 두루 학습한 무정은 홍군의 개편으로 신설된 팔로군의 작전과장을 거쳐 포병단장에 오르는 등 중국공산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며 주더(朱德), 펑더화이,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공산당 고위층의 신임을 얻고 친교를 맺게 되었다. 특히 펑더화이는 중매에 나서 중국인 텅치(藤綺)와 무정을 결혼시킬 정도로 매우 가까웠다.

조선의용군 총사령으로 항일투쟁을 지휘하다
중국공산당에서 활약하면서도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활동을 쉬지 않던 무정은 중국공산당과 긴밀히 협의하여 펑더화이의 동의를 얻어내 1941년 산시성(山西省) 타이항산(太行山)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구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그다음 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선독립동맹’, 충칭(重慶)과 뤄양(洛陽) 등지에서 이동해 온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했다. 독립동맹은 반일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의 참여를 꾀했으며, 독립동맹의 군사 조직 격인 조선의용군의 총사령직은 무정이 맡았다.
조선의용군은 일본군 진지에 접근해 일본군의 전투 의욕을 떨어뜨리는 선전 활동과 적구 조직 공작 활동을 주로 하고,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하기도 했다.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을 하면서도 청년독립군 양성을 위해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세워 조선혁명사와 사회발전사, 군사학 등을 중점적으로 교육했다. 무정이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처럼 무정은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으로서 무력투쟁을 지휘하고 조선 청년들의 교육을 실시하며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숙청되다
해방 후 북한에 들어온 무정은 초기에 주민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고 북한군 창설 과정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런 만큼 김일성 세력의 견제는 심했다. 소련 군정도 김일성을 적극 지원하면서 무정을 홀대하여 무정은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연안파도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약했는데, 이러한 틈은 김일성에 의해 더욱 조장되기도 했다. 즉 김일성은 무정의 부하였던 인물로 하여금 무정을 비판하도록 시키기도 하고, 무정보다 높은 자리에 기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무정은 점차 지지 기반을 잃어가면서 당내에서의 권력도 상실해 갔다.
1950년 6?25전쟁의 남침 준비 단계에서는 포병 준비 작업을 진행했으나 이전의 계획 작성 단계나 실제로 공격이 이뤄진 때에는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울 함락 작전에 실패한 제2군단장의 후임으로 전선에 등장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10월 13일 김일성은 무정을 평양방어사령부의 사령관에 앉혔으나, 무정은 평양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2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 일명 별오리회의에서 숙청되었다. 숙청 이유는 평양 방어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후퇴했다는 것과 후퇴 과정에서 법적 절차 없이 사람을 총살하며 무법천지의 군벌주의적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황은 평양을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고, 해당자에 대한 즉결처분의 명령이 하달되어 있었다. 결국 무정은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며 대중적 인기가 높은 연안파의 고위 지도자였다는 것이 숙청의 실제 이유였다. 무정은 뛰어난 무인(武人)이었지만 정치가로서의 수완이나 지도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정의 생각, 그리고 노선은…
무정은 청년기에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하여 중국공산당 간부로 활동했으나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공산주의 실현보다 민족의 독립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이를 위해 모든 세력, 모든 계급이 하나로 뭉치고 국제사회와의 연대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정서적으로는 민중 지향적이었으며, 절대적 평등주의를 주장했다. 해방 후의 남북 분단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세력이 연대해 조속히 남과 북이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남북의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전쟁을 피하면서 대화와 평화의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무정 연구에서 배우다
무정의 활동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의 침략에 대응한 다양한 국내 세력의 동향과 중국에서의 독립 운동 정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당시의 국제정세도 엿보인다. 특히 해방 후부터 6?25전쟁기까지 북한에서 펼쳐진 복잡한 정치 세력의 부침을 통해 북한 체제 형성 과정을 파악하고, 지금의 북한 체제와 정치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무정의 활동은 중국공산당과의 긴밀한 관계를 떼어놓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중국과 깊은 유대를 맺은 사실, 소련의 북한 정치인에 대한 분석 및 평가와 김일성에 대한 지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외부 세력이 북한 체제 형성 과정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고, 중국?소련과의 숙연(宿緣)이 오늘까지 어떻게 이어져 오고 있는지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나아가 향후를 전망하는 데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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