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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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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쪽 | B6
ISBN-10 : 8927802233
ISBN-13 : 9788927802235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양장] 중고
저자 박범신 | 출판사 문예중앙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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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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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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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살인에 관한 긴 이야기! 등단 39년을 맞은 박범신의 39번째 장편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목숨보다 더 사랑한 여자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었던 야수 같은 남자의 처절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교도소에서 출옥한 뒤 노숙자로 떠돌다 고향 도시로 돌아온 주인공 '나'는 5층짜리 원룸빌딩 '샹그리라'의 관리인으로 고용된다. 샹그리라의 주인이자 도시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배하고 있는 이사장은 폭력과 악의 화신 같은 존재이다. 이사장의 행각을 목도하고 잔인성을 깨달아가는 동안 '나'의 손바닥에 숨어 있던 말굽이 모습을 드러내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급기야 '나'는 그 말굽으로 살인들을 저지르게 된다. 폭력이 거듭되는 동안 잊혀졌던 '나'의 기억이 회복되고, 목숨을 버려도 좋을 만큼 사랑했던 여인과 비극이 일어났던 그날을 기억하게 되는데….

저자소개

저자 : 박범신
저자 박범신은 194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8년까지 소외된 계층을 다룬 중ㆍ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문제작가로 주목받았고, 1979년 장편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풀잎처럼 눕다』등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1970~8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1981년 『겨울강 하늬바람』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빛나는 상상력과 역동적 서사가 어우러진 화려한 문체로 근대화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낸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1993년부터 문학과 삶과 존재의 문제에 대한 겸허한 자기 성찰과 사유의 시간을 가졌다. 사유의 공간으로 선택한 곳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멀게 느껴지던 히말라야였다.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를 여섯 차례 다녀왔으며 최근에는 킬리만자로 트레킹에서 해발 5895미터의 우후루 피크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1996년 유형과도 같은 오랜 고행의 시간 끝에 《문학동네》 가을호에 중편소설 「흰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한 후, 단편집 『흰소가 끄는 수레』, 『향기로운 우물이야기』, 『빈방』, 그리고 이주노동자를 다룬 장편 『나마스테』, 예술가의 내적분열을 뛰어난 미학적 구조로 형상화한 『더러운 책상』, 30여 년의 현대사를 바탕으로 인간 본연의 애증을 기록한 『외등』을 발표했고, 이어 『촐라체』,『고산자』를 거쳐 『은교』로 이어지는 ‘갈망 삼부작’을 비롯해, 최근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인간의 기형적 욕망을 파고든 『비즈니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세계를 대상으로 문학적 열정을 새로이 펼쳐 보이고 있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마술적 리얼리즘과 하드고어라는 파격적 스타일로 목숨보다 더 사랑한 여자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었던 야수 같은 남자의 처절한 사랑을 그리며 사회적 폭력의 위태로운 재생산 구조, 인간 마성(魔性)의 근원에 대해 묻고 있는 작품이다. ‘대한민국문학상’(1981), ‘김동리문학상’(2001), ‘만해문학상’(2003), ‘한무숙문학상’(2005) ‘대산문학상’ (2009) 등을 수상했다.

목차

작가의 말

프롤로그 : 살인의 기록
정강이뼈
샹그리라
밝은 눈
클레멘타인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단식, 개인수련
대화
돌아눕는 뼈
탄생 이전에서 온 슬픔
에필로그 : 말굽이 하는 말

작품해설 : 죽음은 죽지 않는다Ⅰ양윤의

책 속으로

*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손바닥에 정말 말굽이 생겨난 것이다. 남에게는 물론이고 평소엔 내게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거기, 내 손바닥에 분명히 말굽이 들어 있다. 말굽이 생긴 뒤로 손금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중이다. 생명선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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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손바닥에 정말 말굽이 생겨난 것이다. 남에게는 물론이고 평소엔 내게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거기, 내 손바닥에 분명히 말굽이 들어 있다.
말굽이 생긴 뒤로 손금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중이다. 생명선의 상단은 이미 지워지고 없다. 말굽으로 뭔가를 내려치면 칠수록 손금이 그만큼 가속적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 말굽의 힘이 강화되면, 생명선은 물론 손금이 모두 없어질는지도 모른다.
생명선이 사라지면 죽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사는 걸까.
손바닥에 쇠말굽을 숨겨 지니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래도 슬픈 느낌이다. (18쪽)

* 남자의 상반신이 이윽고 말쑥하게 드러났다.
운악산 칼바위에서 쏟아져 내려온 북풍이 남자의 벌거벗은 웃통에 예리하게 박혀들었다. 나는 이내 쩍 하고 입을 벌렸다. 단련이 잘된 훌륭한 몸매였다. 팔을 벌리자 가슴의 승모근(僧帽筋)이 산맥처럼 단번에 일어섰다. 어깨 삼각근과 양팔의 이두박근도 훌륭했다. 목에서 쇄골로 이어진 힘줄은 뚜렷한 V자를 그려냈으며 배에는 王자가 선연히 부조되어 있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주름살투성이의 얼굴과 뛰어나게 발달된 젊은 몸매의 부조화는 차라리 기괴했다. 이상하고 언짢은 부조화였다. 나의 시야에서 잠깐 벗어났다가 다시 나타난 남자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칼날이 햇빛과 만나 번쩍했다. 장도(長刀)였고, 잘 갈린 진검(眞劍)이었다. 목이 움찔해졌다. 질이 좋은 진검은 쇠파이프도 자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남자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타고난 무사의 풍모가 뚜렷했다.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 때의 칼날은 급류를 타고 오르는 날치 같고 내리칠 때의 칼날은 얼마나 속도가 빠른지 햇빛까지 두 동강 나는 것 같았다. 때로는 찌르고 때로는 베고 때로는 허공을 날렵하게 가로 그었다. 재빠르게 내딛는 발끝은 유연해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떤 자세에서도 남자의 턱은 정면을 향해 꼿꼿했다. 눈에서는 이따금 푸른 섬광이 번쩍 뻗어 나왔다. 어떤 신념에 가득 찬 아름다운 춤사위였다. 남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햇빛은 보다 투명해졌다.
칼끝이 나를 겨냥한 것은 한바탕의 춤사위가 끝날 무렵이었다. 찌르기 자세였다. 살기가 확 느껴졌다. 나를 겨냥한 것은 칼끝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눈화살도 문틈을 비집고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나와 남자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존재를 알고 있어, 라고 본능적으로 느낀 것과 남자가 한걸음으로 헛간의 문 앞까지 돌진해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이었다. (30~31쪽)

* 창밖으로 귀를 열면 가랑잎들이 비탈길을 쓸고 가는 소리가 먼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오랫동안 노숙자로 떠돌던 남해 쪽빛 바다가 때로 그리워지기도 했다. 이 도시로 돌아오게 될까 봐 두려워 떠돌던 세월이었다. 죽을 때까지 결단코 오지 않으리라고 골백번은 맹세했었다. 감옥에서 4년, 부산에서, 마산-진해, 사천, 광양, 여수에서, 또 목포의 바다 끝에서 비렁뱅이 노숙자로 흘러 다닌 것이 10여 년이나 되었다. 겨울바닷가는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틀이나 사흘을 완전히 굶은 적도 있었다. 굶고 누워 있을 때조차 겨울바다는 저 혼자 끝없이 깊어졌다. 백사장 모래 속에 몸을 파묻고 칼바람을 견딘 날도 부지기수였다. 죽음 직전으로 몰린 적도 있었다.
잠이 들면 한 소녀를 찾아 헤맸다.
볼이 붉고 이마가 하얀 소녀였다. 처음엔 분명했던 얼굴이 시간 따라 조금씩 지워지는 슬픈 경험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아주 옛날에 볼 붉은 소녀가 있었다.’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감옥에서 나올 때쯤 소녀의 턱과 입술이 지워졌고, 떠돌이로 10년쯤 지나자 콧날과 눈과 귀도 완전히 지워졌다. 소녀가 그리우면 피가 밸 때까지 손바닥으로 바위나 벽돌담장이나 철판 따위를 두들겼다. 아무리 두들겨도 소녀의 얼굴은 완성되지 않았다. 손바닥에선 자주 껍질이 벗겨지고 피가 흘렀다. 심지어 이름까지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기억은 하루가 다르게 닳아 없어졌다.
그것이 고통스러워 끓는 물에 손을 넣은 일도 있었다. 닳아 없어진 기억들은 복원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꿈속에서조차 그냥 소녀…… 라고, 이름 모르는, 보랏빛 점을 가진 소녀…… 라고만, 불러야 했다. 오랜 노숙자 생활에 그만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은 것은 형태 없는 붉은 볼과 박속같이 하얀 이마와 짙은 눈썹 끝의, 팥알만 한 보랏빛 점 하나였다. 내 안에서 오래 묵어, 소녀는 마침내 전설이 되고 만 것이었다. ‘아주 옛날에 보랏빛 점을 가진 소녀가 있었다.’라고 나는 동화책을 읽듯이 자주 소리 내어 말했다.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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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우리는 그날 함께 죽고 싶었으며 또 함께 죽음을 이겨내고 싶었다 등단 후 39년, 박범신의 39번째 장편소설 박범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하드고어의 새로운 발견 박범신 신작 장편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가 ‘문예중앙’에서 출간되었...

[출판사서평 더 보기]

우리는 그날 함께 죽고 싶었으며
또 함께 죽음을 이겨내고 싶었다

등단 후 39년, 박범신의 39번째 장편소설
박범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하드고어의 새로운 발견


박범신 신작 장편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가 ‘문예중앙’에서 출간되었다. (2010년 11월 1일부터 2011년 4월 22일까지 여섯 달 동안 중앙일보 인터넷 홈페이지(joongang.co.kr)에 총 120회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박범신이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을 본격적으로 차용한 첫 번째 소설이며, 지금까지 집필했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도 높은 하드고어(Hardgore)적 폭력 묘사로 인간 마성(魔性)의 근원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소설이다. 또 다른 한편 야수적 욕망의 난장(亂場) 속에서도 소멸하지 않는 신성한 순수와 불멸의 사랑에 바치는 우화이기도 하다.

“나는 이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로, 번지르르한 자본주의 문명 뒤에 은밀히 장전돼 있는 폭력성의 비정한 탄환을 가차 없이 발사했다고 느낀다. 내가 쓴 것 같지 않다. 오늘의 이 문명이 나를 앞세워 썼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여기 차용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은 우회로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향해 직진보행하기 위한 첩경을 선택한 것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즘이다. (...) 이 소설에서, 손에 말굽이 생기는 마술적인 장치는 내적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동의를 얻을 자신을 가지고 있다.”
―박범신, 《문예중앙》 2011 여름호 인터뷰에서

소설의 주인공 ‘나’는 4년간 수감되어 있던 교도소에서 출옥한 뒤 노숙자로 십여 년을 떠돌다 고향 도시로 돌아온다. 그곳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묻고 떠난 뒤,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수천 번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강력한 힘에 이끌리듯 돌아온 것이다. ‘개백정’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던 무허가 판잣집이 사라진 자리에는 음산하고 위압적인 5층짜리 원룸빌딩 ‘샹그리라’가 들어서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우연히 만난 기괴한 외모(젊고 건장한 사내의 몸에 노인의 얼굴을 가진)의 집주인 이사장에게 빌딩 관리인으로 고용되고, 어둡고 축축한 욕망의 배설관 같은 그곳에 숨겨진 비밀들에 한 발짝씩 다가가게 된다. 샹그리라엔 메마른, 불모의 인간들이 살고 있다. 샹그리라에 사는 인물들과 그들이 벌이는 천태만상은 자본주의 문명의 남성적 야수성과 잔혹성의 표본이다. 샹그리라의 주인이자 그 도시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배하고 있는 군주인 이사장은 폭력과 악의 화신 같은 존재다. 그의 비정한 행각을 목도하고 잔인성을 깨달아가는 동안 나에게는 믿기지 않는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나의 손바닥에 숨어 있던 말굽이 모습을 드러내고, 위기감과 분노에 빠지는 순간들마다 걷잡을 수 없이 자라서 나는 그 말굽으로 희대의 연쇄살인에 버금가는 살인들을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 말굽이 휘두르는 불가해한 폭력이 거듭되는 동안 망각의 늪에 빠져 있던 나의 기억이 회복되어, 나는 ‘샹그리라의 눈먼 안마사 여인’이 목숨을 버려도 좋을 만큼 사랑했던 ‘여린’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래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났던 그날, 내가 화염 속에 뛰어들어 구했던 소녀. 나의 얼굴에 새겨진 흉물스런 화상 자국은 그애의 아버지를 구하려고 불구덩이에 몸을 던졌다가 얻게 된 상처였다. 나와 여린의 어린 날에 대한 기억과 함께 이사장이 과거 특수부대 부대장으로 저지른 끔찍한 사건들도 드러나고, 그로 인해 나와 여린의 삶이 어떻게 파멸되어왔는지도 밝혀진다. 이사장이 장악하고 다스리는 ‘죽임’의 장소, 생명의 폐기장소에서 사이코패스처럼 살인을 거듭하는 말굽을 몸에 지니고 살아야 하는 나는 그 악의 잿더미에서 여린을 지켜내기 위한 최후의 결단을 내린다.

등단 후 39년, 박범신의 39번째 장편소설
박범신 소설 특유의 흡입력과
또 다른 문학적 편력의 예고 같은 변화들이 만나고 있는 작품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올해로 등단 39년째를 맞은 작가 박범신의 39번째 장편소설이다. 올여름 25년간 몸담았던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직을 떠나며 소설가로서의 새 출발을 앞두고 여섯 달간 치열하게 매달려 집필한 소설인 만큼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독자들의 오랜 지지를 받고 있는 박범신 소설 특유의 흡입력과 앞으로 새롭게 펼쳐나가게 될 또 다른 문학적 편력의 예고 같은 변화들이 만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손바닥에서 자라나 폭력의 화신으로 날뛰는 말굽, 이사장의 몸에 현현되는 괴이한 징후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먼 여린의 비밀스러운 방의 묘사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스릴과 섬뜩한 호러의 분위기 등, ‘맹목적인 폭력의 잔혹함’을 그 어느 소설에서보다 강렬하게 형상화하는 미학적 장치들도 쓰였다.

“작가노릇, 지금까지 정확하게 38년을 했는데, 앞으로 30년이 더 남았다면 이제부터 뭔가 다시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가로서 스스로 무르익었다고 느낀다. 교만하다고 비난해도 할 수 없다. 이제 온갖 테크닉도 마음대로 두려움 없이 구사할 수 있고, 쓸 거리도 여전히 넘친다. 무엇을 쓸지 모르겠다는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박범신, 《문예중앙》 2011 여름호 인터뷰에서

자본의 독재가 지배하는 세계의 폭력적 구조와
무한히 확대 재생산되는 욕망의 노예로 사는 가짜주체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싸늘한 자본주의적 국가가 폭력의 컨설턴트로 군림하기 시작할 때 무한히 파생되는 폭력의 고리들을 냉철하게 증언하는 소설이다. 주인공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들을 복원해가며 이사장이 ‘인간성이 완전히 뿌리 뽑힌’ 기형의 괴물로 탄생되기까지를 추적하는 과정은 ‘무한 증식하는 폭력’의 연대기다. 말굽을 통해서 주인공과 이사장의 폭력은 무한히 이어진다. 문학평론가 양윤의는 주인공의 손바닥에서 자라는 말굽을 ‘폭력으로 이어진 인간관계의 결절점(폭력?폭력?폭력?폭력…)’과 ‘모든 폭력의 누적과 총합(폭력?폭력?폭력?폭력…)’의 기호로 보았다.(작품해설 <죽음은 죽지 않는다> 참조)
소설 출간을 앞두고 《문예중앙》과 가진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떤 독재자의 독재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무서운 ‘자본의 독재가 지배하는 세계의 폭력적 구조’와 그곳에서 ‘무한히 확대 재생산되는 욕망의 노예로 사는 가짜주체’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힘들게 쓴 소설이다. 많이 아프기도 했고, 악몽도 많이 꾸었다. 이런 이야기를 꼭 써야 하나, 회의에 빠진 순간도 있었다. 나는 이번 소설에서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잔인하고 무참하게. 쓰면서 내가 왜 몸서리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가 배후에 거느리고 있는 가감 없는 현실이다. 폭력은 인간문명의 이중성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예민한 키워드다. 잘 차려입고 고상한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이대어 묻고 싶었다. 당신의 가슴속에 진짜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당신은 진짜 인간이냐고.” ―박범신, 《문예중앙》 2011 여름호 인터뷰에서

태어남과 함께 부여되는 불가피한 슬픔과 존재함의 뜨거운 고통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구원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갈망의 의미를 묻는 소설이기도 하다. 주인공 ‘나’가 사랑과 헌신을 바치는 눈먼 여린은 타락한 세계의 추함과 악함을 마주하지 않는 순수한 존재이자 되찾을 수 없는 생명의 시원이다.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이 작품을 위한 발문에서 “실로 악이 죽는 순간들이 있으니, 그건 슬픔이 터져 나올 때라고 작가는 말한다. 슬픔은 끝없는 악의 불길들 사이에 문득 스며든 어떤 수액, 저 기승하는 악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흰 햇빛 붉은 놀’의 처연함이다.”라고 했다. 흰색과 붉은색의 대비로 그려지는 처연한 여린의 이미지는 태어남과 함께 부여되는 불가피한 슬픔과 존재함의 뜨거운 고통에 대한 상징에 다름 아니다.

도착된 것일지라도 사내의 흡혈과 식인은 사랑하는 이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동일시의 욕망을 보여준다. 피와 살을 먹고 마심으로써 사내는 둘만의 성찬식을 거행한다.
불멸의 사랑이야말로 외롭게 방랑하는 이 사내가 평생 안고 온 소망이다. 나아가 그것은 문학이라는 빙벽에 매달린 작가 박범신이 갈망해온 가치이기도 하다. 불가능한 꿈, 그것은 박범신의 소설에서 ‘모성’의 상징으로 반복되었다. 여인의 품, 절대적인 모성의 우물. 그것은 바로 이 세계의 자궁이다. ―양윤의(문학평론가)

책속으로 추가
* 사막이 그리웠다. 내가 그리는 사막엔 해가 지지 않았고, 모래바람이 자주 불었으며,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바닷속처럼 고요했다. 보물 같은 것은 없어도 좋았고 찾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나도 무조건 사막으로 가고 싶었다. 사막이 너무 그리워 무릎 사이에 한참 동안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모래폭풍 소리가 들렸다.
밤에는 엎디어 짐짓 글을 쓰는 시늉을 해보기도 했다.
오래전, 정말로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십대 때였다. 나의 소일거리는 책을 읽는 것과 암벽을 타는 일뿐이었다. 책을 읽고 암벽을 타고 책을 읽고 암벽을 탔다. 심심하면 개한테 소설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책을 읽어주면 난폭하던 개들은 조용해졌고, 빈사상태의 개들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일어났다. 감동적인 힘이었다. 그 외에 내가 개를 위해 하는 일은 사료를 주는 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개를 잡는 일엔 나를 절대로 끼워 넣지 않았다.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고 아버지도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고기를 안 먹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특수부대 장교들이 아버지를 양쪽에서 꼼짝 못하게 잡고 개고기를 강제로 입안에 마구 밀어 넣은 일이 있었다. 장교들 손을 뿌리치고 잽싸게 도망친 나는 암벽 꼭대기에 숨어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뙤약볕 아래 웃통을 벗어부친 장교들이 낄낄거리면서 아버지의 입에 개고기를 쑤셔 넣었다.
“자기는 안 먹으면서 개고기를 판다는 건 부도덕해!”
“그렇지. 불륜과 같아!”
젊은 장교들은 소리쳤다. 부도덕한 아버지와 부도덕한 나의 시선이 찰나적으로 마주쳤다. 아버지의 번질번질한 눈가에 햇덩어리가 타고 있는 게 보였다. 배를 잔뜩 불린 장교들이 몰려 나간 뒤에야 은행나무 밑에서 아버지는 한참이나 구역질을 했다. 고막을 쇠꼬챙이로 뚫려 듣지도 짖지도 못하는 조용한 개들이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107~108쪽)

* 나는 불길 속으로 부나비처럼 뛰어들었다. 나에겐 증오로 만든 창(槍)이 있었으며, 그러므로 사랑에의 열망으로 빚은 뜨거운 화살과 전통(箭?)도 있었다. 지옥인들 가지 못할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린 그녀는 불길이 잡아먹다시피 한 거실 한 귀퉁이에 혼절해 있었다. 그녀를 먼저 둘러업고 나왔다. 현관 일부가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아, 아버지!”
혼절에서 깨어난 그녀가 몸부림쳤다.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누구를 말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몸부림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현관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는 불지옥을 그녀는 가리켰다. “가라!”라고 나의 여신이 내게 명령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를 구하러 다시 불지옥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때마침 도착한 소방차에서 물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거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물과 불의 지옥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잠들어 있을 안방 쪽으로 무작정 내닫는데 천장에서 쏟아져 내린 무엇인가가 머리와 어깻죽지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118~119쪽)

* 말굽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말굽의 단점은 손금과 손가락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살인을 통해 육체와 정신이 강고해지는 건 진정으로 황홀하면서도 고귀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했다가 내 안에서 풍선처럼 부풀린 다음 우주까지 다시 확장시키는 경험이 그럴 터였다.
나는 점점, 그러면서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제 내 육체를 유린할 수 없을 것이며, 샌드백처럼 다루게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둠의 제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밤이 되면 명안진사도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칼날 같은 그믐달빛에 의지해 나는 랜턴도 켜지 않고 가볍게 암벽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열패감은 더 이상 없었다. 근육들이 산맥처럼 일어서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곧 암벽이고 암벽이 곧 나였다. (180~181쪽)

* 갑자기, 너무도 간절하게 여린이 그리웠다. 밑도 끝도 없이 다가든 그리움이었고, 폭력보다 더 폭력적인 그리움이었다. 그것은 그리움이라기보다 차라리 통증이었다. 명치가 찢어지는 고통이 왔다. 나는 씨근덕거리면서 숲 사이로 걸었다. 나뭇가지들이 달려들었다. 눈두덩이 찢어진 듯, 피가 배어나왔다. 내부의 통증은 이제 명치를 찢고 간장(肝臟)을 찢고 염통을 찢었다. 올 때와 달리 나는 상처받은 짐승이 되어 걸었다. 여린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193쪽)

* 무한한 슬픔이 그 순간 나를 사로잡았다.
이유도 없고 단계도 없고 근원도 없는 슬픔이었다. 포악했다. 의식할 새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짐짓 돌아서서 주차장 쪽을 멀리 우회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더 이상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플루트 소리 역시 나의 귀를 찢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가 그랬듯이 맑은 플루트 선율이 갑자기 슬픔이 되어 내 빰을 스쳤고, 잔설이 버석거리며 내 신발을 감쌌고, 마른 풀들이 내 종아리에 자꾸 감겼다. 얼어붙은 연못이 다가왔다. 나는 연못가 빈 정자에 간신히 기대섰다. 플루트 소리가 멈춰 있었다. 식당 앞까지 걸어간 그녀는 식당을 나온 애기보살과 이모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무실을 나선 백주사가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모두 햇빛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애기보살이 뭐라고 했는지 이모들이 왁자지껄 웃었다. 나는 행여 누가 볼세라 얼른 돌아서서 얼어붙은 연못을 보았다. 나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감정은 슬픔이었다. (202~203쪽)

* 나의 슬픔은 안도 없고 바깥도 없었다. 허공과 같았다. 샹그리라로 돌아와 창 너머로 운악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더니, 유리창을 보는 건지 운악산을 보는 건지, 또 이유 없이 눈물이 나왔다. 나는 가책도 없었고 노함도 없었고 미움도 없었다. 사랑과 욕망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남아 있는 감정은 단 하나, 이유 없는 덩어리, 슬픔뿐이라는 걸 나는 그날 밤 깨달았다. (206쪽)

* 놀이 타는 듯이 붉었다. 열네 살 그녀의 새하얀 이마엔 지금처럼 핏줄이 파르스름하게 불거져 나와 있었다. 피돌기가 두근거리며 뛰고 있었다. 나는 땀에 젖은 그 핏줄에게, 피돌기에게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만 기억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가르고 내리닫이로 흐르는 그 핏줄을 보았다. 파르스름한 그곳에 귀를 갖다 대면 멀고 싶은 강물 소리가 아스라이 들여올 것 같았다. (240쪽)

* 분명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녀는 그러나 나를 보고 있었다. 우물 밑이라도 다 들여다볼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 경혈에 붙은 삭정이의 불꽃이 어느새 몸 전체로 옮겨 붙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녀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방화범이 나라고 믿고 있으리라 생각해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증거는 완벽했고 사법부는 내게 4년형을 언도했다. 그녀를 구하고 난 뒤 그녀의 아버지를 구하러 다시 불 속에 뛰어든 것조차, 취조형사는 오히려 그녀의 아버지를 불구덩이 속에 밀어 넣기 위해 뛰어들었다고 나를 몰아세웠다. ‘개백정’의 사악한 ‘새끼’가 하는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실은 철저히 은폐되고 조작됐다. 이제 생각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쓰고 면밀하게 연출한 힘 있는 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10쪽)

* 꿈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고개를 끄덕거려주자 입을 벌려 웃었다. 누리끼리한 잇속이 혐오감을 주었다. 말굽은 이미 제 할 일을 다 감지한 눈치였다. 꿈틀했다. 일어나려는 그녀를 도와 침대 위에 간신히 앉혔다.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말하기가 너무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입에 손가락을 대 보이고 나서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고 섬세히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내 어깨를 주물러주던 여린의 손길이 세세히 기억났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했다. 마음을 다독거리기 위해 고갯짓을 하면서, 살 속 깊이 손가락을 박아 넣어 나는 그녀의 뼈를 부드럽게 만졌다. 그녀의 숨긴 뼈들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가늘었다.
“꿈…… 이겠지, 이것이. 마치…… 신방에 든 거 같네…….”
내 손바닥이 입을 막았으므로 그녀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말굽의 컨디션은 최고조였다. 벌써 독이 잔뜩 오른 말굽이 생생히 느껴졌다. 말굽의 유일한 인정주의는 제 힘을 창끝보다 더 예리하게 모아 대상을 가급적 단 한 번에, 단호하고 깔끔하게 쪼개는 것이었다. 망설이거나 하진 않았다.
나의 말굽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먼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다음에 다른 손으로 힘차게 두개골을 내리쳤다. 그녀의 두개골은 상한 생선의 비늘처럼 연약했다. 그러나 옹골차게 지켜온 목숨이었다. 뇌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느꼈지만, 살아온 관성을 좇아 버르적거렸기 때문에, 나는 여러 번 내려쳐야 했으며, 한참이나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강력하게 틀어잡고 있어야 했다. 쏟아져 나온 뇌수가 무절제하게 흘러내렸다. 손바닥은 물론이고 앞섶에도 뇌수가 묻었다. 그녀가 잠잠해진 다음, 나는 손바닥을 커튼에 문질러 꼼꼼히 닦아야 했다. (321~322쪽)

* 그러므로 나는 슬픔 때문에, 슬픔을 따라가서 그를, 그들의 두개골을 내려앉혔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어떤 슬픔이냐고 반문한다면 반문하는 그의 두개골도 단연코 쪼갤 터였다. 슬픔이란, 어떤 슬픔이 없었다. 내겐 탄생 이전부터 전해져온 슬픔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슬픔은 언제나 그냥 하나의 슬픔뿐이며, 분파되지 않았다. (340~341쪽)

* 그렇지만, 그녀는 나에게 여전히 ‘아주 옛날에’ 있었던, ‘보랏빛 점’을 가진 꿈속의 소녀였다. 나를 위해 세계의 폭력에 맞서준 유일한 전사였으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서 우주의 순결한 바람을 넣어준 단 하나의 어린 천사. 세상이 그녀를 어떻게 다루든지, 내게 있어 그녀는 결코 훼손되지 않을 ‘존엄’이었고, ‘감미’였으며,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었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자연법이 만든 최고의 가치로서, 영원히 훼손될 염려가 없다고 나는 믿었다. (398쪽)

* 아름다움이란 도착점인가 출발점인가.
그날은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다. 만약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오랜 풍상을 겪은 뒤에 만나는 마지막 발화라면, 나는 뒤로 물리지 말고 그녀를 당장 차지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었다. 그녀의 모든 뼈들조차 실팍하고 섬세히 부순 뒤 그녀의 살과 머리칼과 내장까지 유쾌하게 거기 버무려서 남김없이 먹어치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이 더 유장한 길의 출발점이라면 어쩔 것인가. 단지 나의 슬픔에 밀려 그녀를 먹어치우고 만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비윤리적인 죄업이 될 터였다. (401쪽)

* 겨울 초입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가 자꾸 길도 없는 곳으로 앞장서 내달리는 바람에 간신히 쫓아가 어깨를 붙잡은 곳이 바로 여기 어디쯤이었다. 어깨를 붙잡힌 열네 살의 그녀는 내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울음을 터트렸다. “나도 아빠처럼 눈이 멀 거래.” 그녀는 울면서 고백했다. 실명으로 가는 불치의 유전병이 자신의 몸속에서 시시각각 자라고 있다는 걸 그녀가 최초로 알아차린 날이었다. 눈이 멀게 된다는 말을 우연히 듣고 나서 암벽으로 올라가 뛰어내릴 셈이었다고 그녀는 고백했다.
날이 저물도록, 우리는 그날 이 부근에 앉아 있었다.
강을 물들이며 시작된 놀이 유독 황홀한 날이었다. “나는 흰색과 붉은색이 젤 좋아, 오빠. 언젠가 죽으면 햇빛, 아니면 놀이 될 거야!” 그녀의 말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었다. 실명될 것을 예시 받고 그녀가 먼저 생각한 것은 죽음이었고, 죽음의 빛깔로 그녀가 서슴없이 선택한 것은 흰 햇빛, 붉은 놀이었다. 죽고 싶기로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리다고 해서 죽음이 먼 것은 아니라는 걸 그녀와 내가 확인하고 동의한 날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날 함께 죽고 싶었으며, 또 함께 죽음을 이겨내고 싶었다.

*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우물처럼 고요해졌다.
나는 그녀 안으로 깊이 엎드려, 그녀의 우물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피를, 마음껏 빨아마셨다. 그녀의 피는 희고 붉었으며, 따뜻하고 달고 향기로웠다. 나는 놀랐고, 감동했다. 미각만은 완벽하게 살아 있었다. 혀가 천 개로 갈라지면서 길게 길게 늘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댔을 때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예민한 감촉이었다. 빨아 마시는 것도 모자라, 나는 천 개의 긴 혀를 그녀의 심장에 더 깊이 박아 넣어, 좌심실 우심실 좌심방 우심방은 물론,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간 여러 동맥의 붉은 내선을 따라, 그녀의 몸속에 숨겨놓은 모든 우물물을 섬세히 핥아먹었다. 따뜻하고, 달고, 향기로운 에너지가 나의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기쁘고 뿌듯했다. 본성을 찾아 가진 것 같았다. (4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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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 조승호 님 2011.08.31

    언제부터인가 내 손바닥 안쪽에 말굽이 생겨난 것이다. 정말로 쇠로 된 말굽이다. 말굽이 생긴 뒤로 손금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중이다. 생명선의 상단은 이미 지워지고 없다. 말굽으로 뭔가를 내려치면 칠수록 손금이 그만큼 가속적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 말굽의 힘이 강화되면, 생명선은 물론 손금이 모두 없어 질지도 모른다. 생명선이 사라지면 죽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사는 걸까. - 박범신,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p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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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 전 사이비 종교의 기도원 같은 곳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불치의 병을 앓던 이들에게 건네진 것은 일명 생명수. 효...

    오래 전 사이비 종교의 기도원 같은 곳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불치의 병을 앓던 이들에게 건네진 것은 일명 생명수. 효능이 아주 좋다며 고가에 판매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일반 수돗물이었다. 첨단 과학이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시대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는데, 그 사건을 목도한 나는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생각하며 한참을 허무해했었다.

    어떤 사건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의 전반을 흐르고 있는 것은 악이었다. 정말이지 있어서는 안 되는 모든 부정한 것을 한데 긁어모으기로 작정을 한 듯 참으로도 차분하고도 굵은 문체가 무심해 보여 읽는 이로서는 다분히 서러웠다. 일단 작품의 배경이 그러했다. 운악산 인근에 위치한 명안진사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겉으로 볼 땐 사찰이었다. 세상의 어려움을 거두는 것이 종교의 몫이듯 이 절 역시 사회에서 버림 받은 사람들, 불치의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 등을 향해 열려 있었으니 여기까지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떠한 일도 정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절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쪽보다는 신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데에 중점을 둔 듯했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려 제 병이 치유되고 있다 굳게 믿었지만 타자의 시선을 하고 보았을 때 그들은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어린 소녀의 요염한 시선은 보살의 이미지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저질스러운 세상의 이치를 따르기엔 너무 어린 것이 문제였다. 그녀를 이용해 어른들은 제 힘을 과시했다. 사람들의 합장을 이끌었던 그녀는 실상 피해자에 불과했다.

    뭔가 일어날 것만 같던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 무렵 드디어 주인공이 사건을 저지른다. 인간의 손에서 말굽이 자라나는 병에 대해 들어본 이 있는가? 소설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만 주인공은 병명도 알 길 없는 증세에 시달린다. 그 말굽은 점점 더 제 존재감을 과시한다. 처음에는 손바닥에 조금 돋아났다 사라졌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손 전체를, 팔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발견된 시신마다 새겨진 말발굽 모양.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은 분명 주인공의 손에 달린 말굽이었다. 그것은 단지 손이 행한 일이 아니었다. 말굽이 이야기했듯 말굽과 주인공은 곧 하나였다. 개 잡는 것을 업으로 삼아 평생을 비루하게 살았던 아버지로부터 몹쓸 운명을 물려받으면서부터 온몸으로 체득한 폭력성. 주인공이 꾹꾹 눌러가며 부인했던 그 폭력성을 말굽은 주인공에게 알려주고야 만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 머리가 터져 뇌수가 흘러나온 시체를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어느 누가 쾌감을 느낄 수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악한 행동은 어딘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미화된다. 딱히 이를 꾸미기 위한 수식어가 사용된 건 아니다. 주인공의 칼끝이 향하고 있는 곳에 위치한 인물들이 지닌 성품이 주인공의 행동을 알게 모르게 정당한 것으로 포장시키기에 독자로서는 폭력을 수용해야만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이러한 착각에 힘을 실어주고자 작정이라도 한 듯 저자는 주인공에게 깃든 앙심의 뿌리가 깊음을 잊지 않고 언급한다. 이사장과 김 실장은 그 자체로도 악한데 주인공의 과거와 얽히면서 좀더 표독한 인물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주인공이 오래도록 호감을 품었던 ‘여린’이라는 인물도 그런 의미에서 희생양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 하겠다. 적어도 주인공에겐 예전의 그 수수한 모습으로 끝끝내 기억되었어야 하거늘 그녀의 현 모습은 일종의 환상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안에 자리한 이미지에 변형을 가져다주었다. 고로 그녀는 말굽의 잣대에 의할 때 유죄였다. 따라서, 방법이 옳다 볼 순 없겠지만, 단죄를 통해 주인공은 소녀의 순수성이 깨어지는 것을 막아낸다.

    작품마다 차이가 있는데 박범신의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에 몰두한 결과는 참혹했다. 속이 뒤집힌 듯 헛구역질이 나는 듯도 하고 왠지 인간의 모습을 한 어떤 존재가 내 머리를 후려칠 듯한 자세로 내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섬뜩함도 지금 난 느끼고 있다. 주인공의 살인 행위에 질린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종교의 탈을 쓴 채 사람들의 생명을 수탈하고 있을 존재들이 꼭 책 속에서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며 선의를 품은 이들마저도 의심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이와 같은 회의감이 꽤 오래 지속될 듯하다. 그러나 악은 찬양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당한 만큼 되갚아주는 보복보다 반대편 뺨까지 내밀며 한 대 더 맞는 게 차라리 현명한 태도라고, 머리로는 물론 달리 생각하고 행하더라도 가슴으론 그리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없진 않다. 저자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잊지 않고 결론을 통해 어떠한 경로로 악을 제 것으로 만들었건 사회에서 정당한 악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설법했다. 맘에 들건 들지 않건, 충분하건 미흡하건 그리하여 나는 이 끔찍한 독서를 그래도 차분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아니, 이제부터 내 심연의 파장은 일기 시작할 것이다. 말굽이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된 것은 주인공이 진실로 애타게 말굽을 불러댔기 때문이라 했던가. 무심한 듯 바라봐온 세상이지만 시시때때로 난 외롭고 또 아파왔다. 그 때마다 비록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어쩌면 나도 나만의 강력한 말굽이 생성되길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내게 속한 모든 것이 내 말을 듣고 있다. 그러나 내 거친 일부가 여린 내 전부를 잡아먹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당장 손바닥부터 확인하게 된다. 꼭 손바닥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온몸 구석구석, 상대를 해치고 기어코 나를 해할 네 놈이 깃들어 있진 않은지 아마도 며칠간은 불안에 떨며 나를 살피게 될 것 같다. 

  • 지금까지 국내에서 '폭력미학'하면 떠올려지는 예술가들은 김기덕이나 박찬욱과 같은 영화감독들의 이름들이었다. 소설가들의 경우는 ...
    지금까지 국내에서 '폭력미학'하면 떠올려지는 예술가들은 김기덕이나 박찬욱과 같은 영화감독들의 이름들이었다. 소설가들의 경우는 폭력보다는 남녀간의 사랑이나 가족애의 테마가 주류를 이루었고 설령 사이코패스와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미학'이라는 꼬리표를 갖다붙이기에는 그 수준이 떨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이제 박범신의 이름을 폭력미학의 작가 명단에 올려야 할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폭력은 인간문명의 이중성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예민한 키워드다." 이 책《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문예중앙, 2011)는 '말굽'으로 상징화되는 인간의 야수성에 대한 고발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한 병폐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문명비판적인 틀에서 본다면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가 본질적으로 약육강식의 폭력사회임을 고발한다.
     
    솔직해지자. 우리들 모두 살인자의 후손들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절멸시켰듯이 우리의 유전자에는 살인과 전쟁 그리고 물리적 폭력의 본성이 깃들어 있다. 그런 폭력적 본성이 소설에서는 선명한 인격성을 부여받은 '말굽'으로 상징화된다. 말굽의 전기생체인 이사장과 현기생체인 주인공 모두 폭력의 화신들로 살아간다.
  •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박범신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폭력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박범신의 소설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에둘러 이...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폭력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박범신의 소설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에둘러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박범신이 사회를 대하는 태도이고 바라보는 눈일 것이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형식을 취했다. 마술적이라는 허상의 접두사와 리얼리즘이라는 실상의 명사가 결합된 모순적인 단어는 난감한 현실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쓰인다.
    노벨문학상의 받은 콜롬비아의 소설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남미의 어두운 현실을 그려내는데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을 사용했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소설인 “백년동안의 고독”은 마술적인 상황을 통해서 남미의 상황을 더욱 리얼하게 고발할 수 있었다.
    박범신이 손에서 말굽이 자라는 마술적인 장치를 동원하는 까닭 역시 폭력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실을 표현하는데 그 마술적 상황이 좀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현실을 아프게 반영한다고 봐야한다.
    한국현대사의 흐름에서 뒷전으로 밀린 “나”는 개인적인 폭력과 사회적인 폭력에 그대로 노출된 체 성장하고 그 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한 소녀마저도 폭력의 순환고리 속에 처연하게 들어와 있다. 백지처럼 깨끗한 애기보살마저도 그 순수함이 폭력의 가리는 역할을 할 뿐이다. 누구도 그 고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폭력의 말굽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내 손에서 자라나듯이 우리는 누구나 폭력의 원죄를 안고 있는 것이다.
    박범신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폭력의 개별성이 아니라 사회성일 것이다. 그럼에도 애기보살이 그 폭력의 세계에서 살아남듯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아직도 남아있는 사회에 대한 긍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   박범신은 이 책을 '살인에 대한 긴 보고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살인보다는 폭력에 대한 긴 보고서...
      박범신은 이 책을 '살인에 대한 긴 보고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살인보다는 폭력에 대한 긴 보고서다.
      폭력의 탄생과 전이와 확산, 소멸-재탄생의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야기의 과정은 스토리텔러로서의 박범신의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좀 더 늘어지고 어둡고 음울한 이야기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초반에는 손에서 말굽이 자라나게 된, 그래서 그것을 이용해 살인을 하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듯 시작해놓고, 그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며 이야기가 어려워진다. 도움을 주는 듯 주인공을 받아들이는 이사장은 실은 자신이 만든 종교의 교주로서 권력을 잡은 폭군이고, 갈 곳이 없어 이사장을 의지하는 듯 했던 주인공은 이사장이 구축해 놓은 세계를 조금씩 파괴해 나간다. 점점 자신과 하나가 되는 말굽을 어려워하면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굳이 떼어 내려 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은 공감하기 어렵다. 이사장과 말굽으로 표현되는 폭력과 여린과 애기보살 사이를 오가는 순수 사이에서 독자는 감정 몰입이 쉽지 않다. 그래도 쉽사리 책을 내려놓지 않게 되는 것은 독자를 쉬 놓아주지 않는 박범신의 힘이다.
     
      사이 사이 일러스트가 삽입되어 있는데 표지에서 주는 음울하고 기괴한 느낌을 주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이야기에의 몰입도는 해치고 있어 아쉽다.
     
      혹시 내가 놓친 것이 있어 읽기가 쉽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해설을 읽어보았는데, 해설의 내용이 만만찮게 어려웠다. 흠.
  •     개인적으로 박범신님의 작품을 첨 읽어본다. 촐라체, 은교가 나왔을때 한번 읽어볼까 했던것이 아직까...
     
     
    개인적으로 박범신님의 작품을 첨 읽어본다. 촐라체, 은교가 나왔을때 한번 읽어볼까 했던것이 아직까지 ;;;
    다른책을 읽느라 내내 잊고 있다가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라는 신간이 나오고, 박범신이라는 이름 세글자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 늦기전에 이 책만이라도 꼭 한번 읽어봐야 겠구나 싶었달까 ~ 기이한 살인에 관한 긴 보고서가 될 것 같다는 띠지의 내용으로 보건데 내용 자체도 내가 좋아라하는 스릴러, 미스터리류인 것 같아 강한 호기심이 인 것도 이유중 하나다.
    
    교도소에서 출소후 노숙자로 십여년을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나.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두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수천번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힘에 이끌려 오랜시간 흐른 후 찾은 고향에는 개백정이라 불리웠던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던 무허가 판잣집이 사라지고 5층짜리 원룸빌딩인 '샹그리라'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빌딩 앞에서 우연히 검을 휘두르며 운동하는 이사장과 만나게 되고 화상으로 흉한 그의 얼굴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는 이사장의 모습에서 피할 수 없는 어떤 운명을 느낀 나는 이사장의 도움을 받아 곧장 빌딩 관리인으로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태어나고 자란 그 곳에 마침내 돌아왔다는 감격도 순간. 기억상실증 환자라는 이력서를 내밀고 명안진사의 한 식구가 된 나는 그곳에 사는 이들이 벌이는 추악한 모습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 . .
     
    이것은, 아마도 살인에 관한 긴 보고서가 될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책을 읽기전에 숨을 잘 골라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더니 역시나 ~
    살인에 관한 긴 보고서 ? 어떤 내용이길래 ? 라는 호기심은 금방 손바닥 안쪽에서 말굽이 생겨나는 한 사내의 이야기로 옮겨가게 되고 또 그것은 이사장을 둘러싼 명안진사로 향하면서 기이한 이야기는 끝도 없이 시작된다.
    과거와 현재, 순수와 폭력을 넘나드는 이 이야기가 결코 편치만은 않은데도 페이지는 쉼없이 넘어가니 신기할 뿐이다.
    개백정이라 불리었던 아버지부터 신처럼 군림하며 모든것을 좌지우지한 이사장의 행태까지 ~
    그 어떤 소설에서도 만나볼 수 없는 폭력적인 묘사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지만 어떤면에선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있으면서 믿지 못했던 현실속 모습이 아닐까 싶은 그런 생각도~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해준다는 감언이설로 폭행, 재산갈취, 사기, 성폭행등 온갖 행태를 일삼았던 신흥종교가 뉴스의 한 면을 차지했던 적도 많았으니 말이다.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말굽이지만 탄생 이전의 슬픔이라는 감정만은 남겨뒀던 주인의 대한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말굽.
    영원히 살기 위해서 슬픔이란 것도 버려야 했지만 버리지 못한 그를 보면서 우리가 죽을때까지 갖고 있어야 할 것이 감정인걸까 ??? 고민하게 되는 나.
    좀 더 진화된 새 주인을 기다리는 말굽. 탄생 이전의 슬픔까지도 완전히 거세된 불멸의 주인을 기다리는 말굽.
    그에게 모든것을 내어주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았음 좋겠다 ㅠ-ㅠ
     
    유쾌하지 않은 기록인 건 확실하지만 내 맘속에 책 속 말굽이 살지 않는다고 어찌 말할 수 있으랴 ~
    당신의 가슴속에 진짜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당신은 진짜 인간이냐고 박범신이 묻는다.
    당신의 대답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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