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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를 향한 순수한 열망을 그려낸 화가, 고갱 19세기 말의 매력적인 화가, 고갱의 예술혼 속으로 들어가 본다!
『Art Book』시리즈《고갱 : 원시를 향한 순수한 열망》. 이 시리즈는 서양 미술 거장들의 삶과 예술을 당대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문맥 속에서 보여주는 예술서이다. 화가의 삶과 작품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역사적ㆍ문화적 배경, 주요 작품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제12권《고갱 : 원시를 향한 순수한 열망》. 독창적이고 영감이 풍부하고 용감하며 불안한 반순응주의자, 고갱. 그는 10세기 말 가장 매력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다. 파리 인상주의자들의 화려하고 손쉬운 유혹은 거절했던 그는 왜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힘든 길을 택했을까?
고갱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세상의 다른 끝에 있는 마을로 간 이유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의 추구를 포기하지 않았고, 원시를 향한 순수한 열망은 그의 그림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브르타뉴 지방에서부터 타히티까지, 그의 여정을 이 책 한 권으로 들여다본다.
☞이런 점이 좋습니다! 예술가의 삶과 예술을 포함하고 있는 이 책은 300여 점의 화려한 원색 도판이 함께 포함되어 있어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본문 내용을 역사적, 문화적 배경, 주요 작품들의 분석 등으로 나눴으며 각각 색깔을 달리해 독자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색인을 통해 예술가의 주변 인물들과 동시대 다른 예술가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 책에 실린 작품들의 소장처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저자소개
지은이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가브리엘레 크레팔디는 밀라노의 미술품 경매소에서 판화와 고서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고대 회화와 19세기 회화에 대한 여러 편의 카탈로그를 편집하였다. 다수의 전문 미술 비평지와 잡지에 기고하고 있으며, 몬다도리 출판사에서 『프레스코』와 『표현주의』의 편집을 맡았다.
옮긴이 하지은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전공했다. 옮긴 책으로는 『반 고흐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1001』이 있다.
목차
1848-1885 회화적 형성기 ■ 1848-1871: 유년기와 청소년기 ■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 1872-1878: 그림의 비약적인 발전 ■ 예나 다리가 보이는 센 강 ■ 카미유 피사로 ■ 1879-1881: 초기의 전시회 ■ 인상주의 ■ 카르셀 가의 화가의 집 실내 ■ 1882-1885: 코펜하겐과 루앙 ■ 프랑스: 제3공화정 ■ 물 마시는 소
1886-1890 브르타뉴와 기타 지역 ■ 1885-1886: 파리에서 퐁타방까지 ■ 춤추는 네 명의 브르타뉴 여인들 ■ 1887년: 첫 번째 마르티니크 섬 여행 ■ 오고가는 길 ■ 1888년: 퐁타방 ■ 에밀 베르나르 ■ 설교 후의 환영 ■ 퐁타방 화파 ■ 1888년: 반 고흐와 아를에서 ■ 레미제라블 ■ 빈센트 반 고흐 ■ 1889-1890: 르풀뒤 ■ 순결의 상실 ■ 상징주의 회화 ■ 도자기와 목공예 ■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1891-1893 이아 오라나 타히티 ■ 파페에테 ■ 프랑스의 꽃 ■ 태평양의 식민지화 ■ 마타이에아 ■ 뭐? 너 질투하니? ■ 자연과 마법 사이의 오세아니아 예술 ■ 옛날 옛적에 ■ 나비파의 초기 전시회 ■ 테하마나 ■ 어디로 가니? ■ 고갱 이후의 태평양
1893-1895 파리로 돌아오다 ■ 1893년: 첫 번째 대규모 전시회 ■ 모자를 쓴 자화상 ■ 19세기 말 프랑스 ■ 1894년: 몽파르나스의 작업실 ■ 자바 여인 안나 ■ 뷔야르와 발로통 ■ 1894-1895: 유럽이여, 안녕 ■ 퐁타방의 다비드 물방앗간 ■ 드니, 보나르, 마이욜
1895-1897 타히티와 마르케사스 제도 ■ 1895-1897: 타히티 ■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 1898-1900: 파페에테 ■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원시인을 찾아서 ■ 1901년: 마르케사스 제도 ■ 개울 ■ 1902-1903: 쾌락의 집 ■ 고갱의 유산 ■ 히바 오아의 주술사 ■ 영화 속 고갱
증권 중개소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젊은이를 예술가로 만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예나 다리가 보이는 센 강〉을 그린 직후에도 고갱에게 그림은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점차 예술에 깊은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업화가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여러 화가와의 만남은 고갱의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비롯해 에밀 베르나르, 특히 빈센트 반 고흐와의 우정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그림에 대한 견해 때문에 종종 충돌이 있었지만 그는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고갱은 인공미 보다는 원시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프랑스에서 고갱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파리의 화려한 도시 여인이 아니라 거칠고 투박한 브르타뉴 여인의 모습이었다. 프랑스에서 화가로 빨리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고갱은 타보가 섬, 타히티 등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원주민 여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고갱의 작품 속에는 아름다운 타히티 여인과의 사랑, 문명이 훼손하지 않은 자연 풍경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자연주의와 달리 고갱은 사물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상상력을 동원해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실제 사물의 형태를 닮으려 애쓰지 않고 개인적인 감상에서 비롯된 형태를 자유롭게 표현했다. 이에 비롯된 그림 속 대담한 색채와 평면적 구성은 앙리 마티스, 에드바르트 뭉크, 파블로 피카소 등 후배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Art Book’ 시리즈 『고갱』은 고갱의 삶과 예술을 300여 점의 화려한 원색 도판과 알기 쉬운 해설로 풀어냈다. 원시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표현한 화가, 고갱의 작품세계를 탐구해보자.
외젠 알리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메리카 정복기에 페루로 이주했던 스페인 귀족 가문 출신이고 아버지는 신문 정치부 기자였다. 폴의 아버지가 지지했던 공화파 세력이 힘을 잃자 가족들은 페루행 배에 오른다. 아버지는 배에서 죽고 어머니는 고갱와 마리(딸)를 데리고 페루에 머문다. 페루는 잉카문명의 발상지이다. 고갱은 자신의 태생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자신에게 잉카의 피가 흐른다고 확신했단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 치하였다. 고갱은 베르탱의 증권중개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덴마크 출신의 연인 메테 소피 가드를 만나 결혼했고 4명의 아이들을 낳는다. 그러나 그녀는 젊고 유망한 젊은 회사원인 고갱을 사랑했지 그림을 그리는 고갱을 사랑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고갱이 그림에 빠져들수록 그녀와 아이들은 그와 멀어져갔다.
인상주의 화가였던 카미유 피사로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어간다. 이 때 함께했던 젊은 작가들은 우리가 잘 아는 모네, 마네, 드가, 르누아르 등이 있다. 그의 그림은 분명 독특하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인상주의 화풍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찬사 받던 시기에 고갱의 그림은 이미 인상주의와는 다른 화풍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의 혁신적인 그림은 철저히 외면당한다. 고갱은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파리를 증오했으며 야생이 살아 있는 시골을 사랑하게 된다.
민중의 전통이 살아있는 브르타뉴에서의 삶은 그에게 많은 영감과 모티브를 제공한다. 브르타뉴의 여인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자와 명암법을 사용하지 않아 얼굴에는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이런 방식으로 그린 인물들은 현실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고 순수한 장식적 요소로 변한다. 이런 그림은 훗날 아르누보의 우아하고 복잡한 그림의 기반이 된다. 고갱은 세련된 파리의 모델과 다른 브르타뉴 여인의 소박하고 다소 거친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그는 결국 1887년 프랑스를 떠나 파나마만에 위치한 섬 타보가로 떠난다. 온갖 풍토병과 가난에 시달리지만 그는 그 곳의 삶에 매우 만족하며 그곳의 삶 속에 들어가 그림을 그린다. 인종주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의 여자와 동거한다. 이때 그린 그림들은 테오 반 고흐에게 고갱과의 인연을 만들어준다. 테오 반 고흐는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으로 미술상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종합주의와 클루아조니슴’양식을 완성하는데 종합주의란 사실이 아니라 상상력을 기반으로 그리면서 현실을 단순화 시키는 것이고 클루아조니슴은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채를 둘러싼 윤곽선에서 유래된 말이다. 1888년 고갱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하던 자연주의와는 반대로 “사물을 앞에 놓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인 상상력에서 추출하여 그리기를”원한다.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빈센트 반 고흐를 알게된 고갱은 나중에 고흐의 요청에 의해 서로 동거하면서 서로의 미술세계에 대해 밤새 토론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성이 강했던 두 화가는 결국 성격차이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진다. 친구를 잃은 고흐는 절망감에 자신의 왼쪽 귓불을 잘라 자주 만나던 창녀 라셀에게 주기도 한다. 공포에 떨던 고갱은 결국 파리로 돌아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준 자화상은 매우 인상 깊다.
원시세계를 동경하던 고갱은 마타이에아에 도착한다. 고갱은 단순히 그리는 자가 아니라 그들과의 삶을 원했다. 몇 차례에 걸친 동거. 파리는 그에게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그는 빈털터리였고 심장병, 피부발진, 과음, 매독 등 이미 인생의 밑바닥에 있었지만 뉴질랜드의 타히티에서 새로운 미술세계를 펼친다. 그의 대작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창조된다. 고갱은 인생의 마지막을 원주민의 삶을 살면서 190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 머문다. 그의 그림은 다음 세대의 화가인 앙리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와 피카소, 미로, 칸딘스키 등의 그림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우리는 누구인가?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아버지는 어렸을 때 망명하는 배에...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아버지는 어렸을 때 망명하는 배에서 돌아가시고, 그후 페루 리마의 부유한 저명인사였던 삼촌의 집에서 자라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와 중학교에 다녔으나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학업성적도 좋지 않았다. 선원이 되어 배도 탔지만, 군복무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후견인의 주선으로 베르탱 증권 중개소에 취직했다. 그는 여유있는 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수입을 벌었으며, 결혼도 하여 안정되고 평화로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증권 중개소에서 일하면서 그림에 관심을 보인 폴 고갱은 그림 전시장과 미술관을 찾아다녔고, 미술에 관해 토론하며,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는 방 하나를 화실로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에 출품도 했다.
이쯤에서 그의 아내는 메테는 "남편에게 그림이 순수한 소일거리에서 그를 완전히 사로잡은 열정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점점 불안해졌다. 메테는 고갱이 남편과 아버지로서 의무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p. 18).
고갱,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안정된 삶을 뒤로 하고,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화가로서 새출발을 한 때가 대략 삼십대 중후반이다.
고갱이 화가가 되기까지의 일대기를 이렇게 길게 쓴 것은 이 책이 부제이기도 한 그의 작품세계, 즉 그의 "원시를 향한 순수한 열망"을 이해해보고 싶어서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평균수명을 고려해 볼 때, 삼십대 후반이라는 시기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도전하기가 쉬운 나이는 아니다. 하던 일이 실패했다든지 하는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는 평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게다가 아내의 거센 만류까지.
어쩌면 고갱은 증권 중개소를 그만 두기 그 이전, 배를 타는 선원이 되었을 때부터 도시생활에 실증을 내며 미개척의 땅, 원시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문명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의뿐 아니라, 이후 문명세계에서의 실패와 좌절도 그 이유에 포함될 것이다.
아카데미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폐기하려는 욕구를 가진 인상주의 화가답게 독특한 기법을 추구했지만, "성공에 대한 희망은 환상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그의 혁신적인 미술을 이해하지 못했다"(p. 24). 안타깝게도 고갱이 보란 듯이 화가로서 멋지게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고갱의 독창적인 기법은 눈길을 끌었지만, 그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다. 그는 포스터를 붙이는 노동도 해야 할 만큼 가난해졌다. 이후에도 계속 궁핍과 병과 싸우다 한 섬에서 심장마비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이 책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그는 자살 시도도 한다.) 책은 그이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한다. "마지막까지 그이 곁에 남아있었던 사람은 늙은 마오리족 주술사 티오카와 개신교 목사 베르니에였다. 이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원시인처럼 살고자 했던 한 유럽인의 이중적인 본성을 드러낸다"(p. 126).
문명이 아니라, 원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고갱. "품위 있는 삶을 약속했던 남편의 무능력한 실망한 아내 메테는 친정으로 가버리고", 이후 다소 문란하게 보일만큼 미개한 소녀(!)들과 사랑을 나누는 고갱. (아버지의 부재 속에 성장한 그는 평생을 여성들 틈에서 살지 않았나 싶다.) 그의 그림 속의 원시적인 여성들은 모두 한결 같이 건강하고 활력이 있다.
나를 가장 매료시킨 고갱의 작품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가로 347센티미터, 세로 139.1센티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작품은 실존적인 물음을 가진 작품이다. 이 그림은 그의 사랑하는 딸 알렌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린 그림이며, 그는 이 작품을 마치고 자살 시도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이 책에 없다. 마로니에북스의 아트북 시리즈는 다소 딱딱한 내용의 책인 것이 아쉽다.)
그전까지 내가 아는 고갱의 작품은 독창적인 기법을 바탕으로 다소 거친 붓질과 색감의 아름다움, 그리고 원시적인 아름다움과 순수에 대한 탐구를 주제로 하는 그림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림 속에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고뇌와 문명세계에 대한 좌절과 실망이 포함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사실 자신이 없지만.)
지금도 항상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며 도시에서 사는 나에게 고갱의 고달프지만 정열적이면서 고독했던 생애와 작품은 또다른 동경의 세계가 된다. 나는 고갱에게 깊은 우정을 느낀다. 고흐만큼이나 친구해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다독여주고 싶은 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