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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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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쪽 | 규격外
ISBN-10 : 1196141827
ISBN-13 : 9791196141820
학현일지 중고
저자 변형윤 | 출판사 현대경영사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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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3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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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잘받았습니다. 좋습니다. 5점 만점에 5점 austjoh*** 202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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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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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걸쳐 우리나라에 한국경제학의 뿌리를 심고,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는 ‘약자의 경제학’과 ‘분배의 경제학’을 부르짖어온 변형윤 교수에게도 ‘개인사적인 고뇌’가 있다. 황해도 황주 출생인 변 교수는 서울대 상대 2학년생일 때, 즉 1946년 여름방학 때 고향에 갔다가 부모님과 생이별을 당하는 고뇌를 안고 있다. 당시 변 교수가 부모님과 헤어질 때 그의 어머님은 “잘 가라, 건강하라, 떳떳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이 세 마디는 변 교수의 좌우명이 되었다. 경제학자로서 존경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서 존경받는 변형윤 교수의 회고록 제목은, 같은 황해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본받아 ‘학현일지(學峴逸志)’로 정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 땅의 모든 지성인들을 위한 인생의 ‘전범(典範)으로 이 책을 우리 사회에 바친다.

저자소개

저자 : 변형윤
학현 변형윤(學峴 邊衡尹) 교수
1927년 황해도 황주읍 예동리 출생(1월 6일)
1944년 경기고등학교(당시 경기공립중학교 5년제) 졸업
195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대학원 졸업(1957), 대학원 경제학 박사(1968)
육군병기학교 육군사관학교 교관(육군중위?대위:1951-53)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시간강사?전임강사 대우(1955-57)
1957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교수(1957-75)
1964년 미국 밴더빌트대 대학원 수료
1966년 경제개발5개년계획 평가교수(1966-80)
1970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학장(1970-75)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1975-80)
1980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 해직(1980.7)
1982년 학현연구실 개설(1982-1990)
1984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 복직
1992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 정년퇴임, 명예교수(1992-현재)
1993년 사단법인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대한민국학술원 회원(1993-현재)
1998년 제2의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대표공동위원장(1998-2000), 고문(2000-2003)
2004년 상지학원(상지대학교) 이사장(2004-2007)?(사)연탄나눔운동 이사장(2004-현재)
2007년 한국경제발전학회 이사장(2007-현재)

주요저서
1957 《경제수학》, 일조각
1958 《통계학》(공저), 일조각
1960 《경제 및 경영통계》, 옥천사
1961 《후진국경제론》(공편), 진명문화사
1962 《현대경제학》, 박영사
1968 Readings in Business Cycles,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9 《소비구조의 변화와 유통경제》,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연구센터
1971 Readings in Statistics and Econometrics,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4 Readings in Regional Economics(공저), 광일사
1975 《통계학》(공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6 《독과점 규제의 경제적 효과》,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연구센터
1976 《경기순환연구》, 유풍출판사
1977 《한국경제론》(편저), 유풍출판사
1979 《제3세계의 경제발전》(공편역), 까치
1980 《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 지식산업사
1981 《반주류의 경제학》(편역), 청람
1983 《분배의 경제학》, 한길사
1984 《경제학 대논쟁》(공편), 매일경제신문사
1984 《경제발전과 서비스산업에 관한 연구》,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연구센터
1985 《경제석학의 생애와 사상 상·하》(공편), 매일경제신문사
1985 《현대경제학연구》, 범조사
1986 《한국경제연구》, 유풍출판사
1986 《경제학교수와 경제현실》, 시인사
1986 《냉철한 머리 따뜻한 마음》, 지식산업사
1987 《한 구조론자의 변》, 유풍출판사
1989 《한국경제론》(개정판), 유풍출판사
1995 《한국경제론》(제3판), 유풍출판사
2000 《경제를 되새기며》, 여강출판사
2012 《학현 변형윤 전집》, 지식산업사?《학현 변형윤 교수 대화록》, 대담 윤진호, 지식산업사

목차

잘 가라, 건강하라, 떳떳하라
내 인생의 소중한 지침
젊은 시대의 초상화(肖像畵)
본가는 2대 진사, 외가는 당대 진사
얼을 심어주신 어머니
성불사에 살구꽃이 필 무렵이면
경기중학교, 경성경제전문학교 입학
8.15 해방을 고향에서 맞이하고

제2의 고향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서울대 상대 시절의 이상과 현실
대학 2학년 때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꿈
대학시절의 지적 편력(知的 遍歷)
잊을 수 없는 스승을 만나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육군병기학교 연락장교 및 육사 경제학 교관으로
스물여덟 새내기 서울대 상대 강사

4.19 혁명과 서울대 상대의 재건
열심히 공부하라, 정의감을 가져라
4.19 날 경무대 앞까지 진격하고
‘변형윤 혁명’으로 평가받기도
나의 ‘덧문’을 열면서

한국 경제개발의 명암
총소리로 시작된 5.16 쿠데타
경제개발계획-나는 이렇게 본다
포드재단 초청 미 밴더빌트대 유학
로마 세계계량경제학회에 참석
경제개발계획과 평가교수단 활동
꿈에 그리던 케임브리지대 방문

마지막 학장, 영원한 학장
폭풍 속의 서울대 상대
‘10월 유신’과 서울대 상대 학장
민청학련 사건과 서울대 상대
눈엣가시 서울대 상대 ‘역사 속으로’
해직교수에서 복직교수로
유신시대 다음 또 하나의 시련의 시대
‘서울의 봄’-서울대 교수협의회 회장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 참여
‘거시기 산악회’와의 만남
술로 달래고, 책도 펴내고
학현연구실(學峴硏究室) 개설과 교수복직
학현은 ‘학문의 고개’ 넘자는 뜻

반주류의 경제학
‘민족’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이유
‘학현연구실’의 발전적 재출범
한국계량경제학회, 한국사회경제학회 창립
서울대 교수협의회 회장직도 ‘복직’
한겨레신문 발기인 1번, 경실련 공동대표

서울대학교를 떠나면서
‘37년 6개월’ 서울대 교수 정년퇴임
‘마셜의 경제기사도’ 고별강연
사단법인 서울사회경제연구소의 창립
경제적 약자를 위한 연구
해외 유명대학 벤치마킹

경제민주화, 통일의 길
IMF ‘내인론(內因論)이냐, 외인론(外因論)’이냐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과 IMF 극복
최초의 공직, 제2건국위원회 대표공동위원장
통일을 위한 연탄나눔운동
나의 북한방문기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하게, 착실히
서울사회경제연구소 광화문 시대로
태산, 황산에서 바이칼까지
집사람을 먼저 보내고
경제학이란 인간의 연구다

책 속으로

ㆍ나의 좌우명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 나는 이 책의 첫 글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앨프리드 마셜(Alfred Marshall)의 ‘경제학의 현상’에 나오는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cool heads but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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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나의 좌우명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
나는 이 책의 첫 글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앨프리드 마셜(Alfred Marshall)의 ‘경제학의 현상’에 나오는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cool heads but warm hearts)을 다루기로 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학부에 들어가면서 나는 케임브리지대를 경제학의 메카로 만든 마셜에 흠뻑 빠졌다. 그의 저서를 밤잠을 설쳐가며 탐독하고 그 학문적 깊이에 경외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셜이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되면서 연설한 취임사의 마지막 구절인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제자를 가르치겠다”는 말을 접하는 순간 내 가슴속에 커다란 격랑이 이는 것을 느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석학이 ‘인간’이라는 화두를 놓고 겪었을 고민이 녹아 있는 이 말이 이후 내 인생의 소중한 행동지침으로 자리 잡게 될 줄이야! 그때는 몰랐었다. 마셜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로서 주류경제학자의 대표적인 존재였음에도 항상 분배의 문제를 중시하고 빈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1980년 군부정권의 탄압으로 서울대 교수직에서 해직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평생을 두고 내가 경제학자로서만 웅크리고 살 수 없었던 것은 마셜 교수의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PP. 15-17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
강한 인간의 위대한 어머니인 케임브리지가 세계로 배출하는 사람은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갖고서 자기 주위의 사회적 고뇌와 싸우기 위해서 그 최선의 힘의 적어도 얼마라도 기꺼이 바치며, 또 교양 있는 고상한 생활을 위한 물질적 수단을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 자기의 전 능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결심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더욱더 많이 배출하기 위해서 나의 모자란 재능과 한정된 힘의 모두를 기울여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염원이며 또 최고의 노력이다. - 마셜의 ‘경제학현상’에서

‘Cool Heads but Warm Hearts’
It will be my most cherished ambition, my highest endeavor, to do what with my poor ability and my limited strength I may, to increase the numbers of those whom Cambridge, the great mother of strong men, sends out into the world with cool heads but warm hearts, willing to give some at least of their best powers to grappling with the social suffering around them; resolved not to rest content till they have done what in them lies to discover how far it is possible to open up to all the material means of a refined and noble life. - Alfred Marshall ‘Principles of Economics’

ㆍ잘 가라, 건강하라, 떳떳하라!
1945년 해방이 되고 1946년 여름방학을 맞아 내 고향 황주에 갔을 때 이미 북한사회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때 황주에서도 토지개혁에 관한 설명회가 열렸는데, 친일파 등의 소유지 및 5정보(약 1만5천평) 이상 지주들의 토지는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은 의병운동에 참가했으니 친일파 소유 토지는 아니나 5정보 이상에 해당되어 몰수될 판이었다. 나는 설명회에서 “토지개혁도 좋지만 최소한의 생계수단이 될 정도의 토지는 남겨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묻고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지만 훗날 졸업하면 고향에 돌아와서 부모님을 봉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사정을 참작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엔 이런 발언 자체가 ‘반동행위’에 해당되는 것이어서 나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다고 한다. 1946년 광복절을 지나 집에서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나를 체포하라는 안건이 올라왔다”는 긴급 전갈을 받았다. 부랴부랴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올리자 어머니께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잘 가라, 건강하라, 의젓하고 떳떳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부모님과 생이별을 했다. 우리 집의 가훈은 원래 순후중정(醇厚中正)이다. “마음은 따뜻하게, 태도는 공정하라”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따뜻한 마음, 공정한 태도’는 훗날 내가 경제학자가 되어 ‘냉철한 머리, 따뜻한 마음’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과 일치하는 것만 같다. PP. 50-51

ㆍ육군병기학교 거쳐 육사 경제학 교관으로
1950년 겨울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나도 피난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11월 하순경 ‘유엔군 연락장교단’ 모집광고를 보았다. 육군병기학교가 창설되자 나는 그곳에서 연락장교 자격인 변 중위로서 취직되었다. 그 후 1954년에는 육사 교관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육사 정규 1기생(4년제)들은 1951년 경남 진해에서 입교했는데, 육사생들은 처음 이과과정 중심의 교육을 받고 졸업 때 육군소위 임관과 함께 이학사 학위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태릉으로 복귀하면서 교육과정이 바뀌어 경제학을 포함한 교양과목을 받도록 했다. 당시 4학년 생도들은 경제학 집중강의를 받도록 했는데 내가 이 강의를 맡게 되었다. 항간에는 내가 당시 전두환, 노태우 등의 생도를 가르쳤다는 말이 나돈다. 그러나 당시엔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PP. 81-83

ㆍ스물여덟 살 새내기 서울대 상대 강사로
1955년 9월 육군대위 신분으로 나는 서울대 상대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스물여덟 살의 새내기 선생이었다. 당시 서울대 상대에는 교수가 13명 있었다. 정원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교수 한 자리가 비어야 비로소 부교수가 교수로 승진이 되고 조교수가 부교수로 승진하는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전임강사로 오래 근무해도 윗자리에 빈자리가 나지 않는 한 10년이든 20년이든 전임강사로 근무해야 했다. 또 지방대학에서 서울대로 옮길 경우에도 이전에 근무했던 대학의 직위와 관계없이 서울대에서는 무조건 전임강사로 시작해야 했다. 그만큼 서울대의 권위가 높았다고나 할까. 당시 서울대 상대에는 고승제, 유진순, 이상구, 이해동, 이기준, 박동묘 교수 등이 재직하고 있었고 박희범 교수는 나보다 뒤에 들어왔다. 나는 모교의 강사로 돌아온 것이 무척이나 기뻤지만 동시에 몹시 긴장되기도 했다.
나는 서울대 상대에서(결원이 나지 않아) 1956년 전임강사대우로, 1957년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 1956년에는 고등수학 외에 경제수학 강의를 맡았고, 그 후 통계학(1957년), 계량경제학(1958년), 산업연관론(1959년)을 맡았다. 서울대 상대 초임 교수 시절, 나는 주로 수학과 통계학 관련 강의를 했지만 학문적 주된 관심사는 역시 학생시절부터의 사회적 문제의식과 관련된 분야에 있었기 때문에 폭넓은 경제학 공부를 계속했다. 강의시간에는 늘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 “사회정의감을 잃지 말라”고 가르쳤다. 나의 꿈은 서울대 상대에서 평생교수로 살겠다는 것이었는데 이같은 나의 결심은 1960년의 4.19 혁명이 일어나고 4.25 교수 데모로 인해 흔들리기도 했다. PP. 85-97

ㆍ4.19 혁명, 4.25 교수데모대에 참가도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한 격노 등으로 흥분할 대로 흥분한 학생들은 4월 19일 날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경무대(오늘의 청와대)로 몰려가고 있었다. 물론 경찰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고 있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아볼 겸 해서 나는 옆길로 경무대에 더 근접해 있는, 내가 강의 나가던 국민대(당시 창성동 소재)로 갔다. 바로 그때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 경무대 쪽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들려왔다. 국민대 옥상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저 피, 저 피!”라고 외치며 학생들이 다쳤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때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흰 가운을 입은 의대와 간호대 학생들이, 피가 낭자한 학생들을 차에 싣고 후송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마음이 숙연해지는 한편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격한 감정이 몰려왔다.
4월 25일 오후 2시 서울대 의대 캠퍼스에 있는 ‘함춘원’에서 교수들이 규탄대회를 갖기로 했다. “학생들이 희생되었는데 이대로는 헤어질 수 없지 않은가”, “우리 교수들도 가두시위를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긴급동의가 나와 채택되었다. 그날 오후 교수들은 가두시위로 들어갔다. 그때 내건 우리의 슬로건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수라고 해서 상아탑에 묻혀 연구활동에만 전념한답시고 현실고발 활동을 게을리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나의 현실고발 활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역시 주된 것은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의 보고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런 활동을 왕성하게 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부터였다. PP. 1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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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평생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서, 서울대학교 정년퇴임 후에는 서울사회경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정의롭고 자유로운 경제건설과 경제민주화에 앞장서온, 한국 경제학계의 ‘큰 별’인 학현(學峴) 변형윤 교수의 회고록을 ‘국민 경제독본’으로 발간, 배포하여 국민...

[출판사서평 더 보기]

평생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서, 서울대학교 정년퇴임 후에는 서울사회경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정의롭고 자유로운 경제건설과 경제민주화에 앞장서온, 한국 경제학계의 ‘큰 별’인 학현(學峴) 변형윤 교수의 회고록을 ‘국민 경제독본’으로 발간, 배포하여 국민경제의 발전과 국민의 올바른 경제의식 제고에 기여코자 이 책을 펴내고자 한다. 변형윤 교수는 1955년 9월, 약관(弱冠) 28세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강단에 선 이래, 1992년 정년퇴임하기까지 37년 동안 수많은 경제학도를 양성하는데 이바지했다. 무엇보다도 변 교수의 여러 가지 업적 가운데에서도 빛나는 대목은 ‘변형윤 경제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학문적인 성취다. 1950년대 후반 한국경제학의 맹아(萌芽)가 싹틀 무렵, 당시까지 생소했던 경제수학, 통계학, 수리경제학, 계량경제학을 한국경제학에 도입, 이식하여 한국적 경제학의 대들보를 세워 올렸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1960년대에는 경제발전론과 경제변동론이라는 최신 학문을 선구적으로 한국경제학계에 소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변형윤 교수는 평생에 걸쳐,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Alfred Marshall) 교수의 학문을 연구하고 소개하는 일에 헌신해온, ‘마셜학파’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의 좌우명이기도 한 “경제학도들은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Cool Heads but Warm Hearts)을 가져야 한다”는 마셜의 경구는, 이 땅의 모든 경제학도들의 가치관으로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학 도들의 공부하는 자세를 일깨워주고 있다. 변형윤 교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1980)’, ‘한국경제연구(1986)’, ‘한국경제론(1989)’ 등에서 엿보이는 그의 학문적 지향점은 첫째, ‘평등과 분배의 정의’, 둘째, ‘균형적 경제발전’, 셋째, ‘자립경제’로 요약할 수 있다. 변형윤 교수를 가리켜 ‘분배주의자’, ‘평등주의자’, ‘구조주의자’, 나아가서 ‘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변 교수의 이러한 세 가지 가치지향점에 대한 해석이라고 하겠다. 1960년 4.19 혁명 당시에 변형윤 교수는 ‘서울대 상대 교수’의 신분으로 서울 광화문 경무대(현 청와대) 데모대에 합류했었고, 같은 해 4.25 교수 데모에도 직접 참여함으로써 4.19 혁명의 ‘횃불’을 함께 들었다.
변 교수의 사회현실 참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당시에는 서울대교수협의회 회장으로서 민주화를 추구하는 시국선언에 앞장섬으로써 군부정권에 의해 중앙정보부 남산분실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고 이로 말미암아 4년간 ‘해직교수’ 생활을 하는 시련의 계절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해직교수’ 시절에 변형윤 교수가 창립한 ‘학현연구실’은 오늘날 사단법인 ‘서울사회경제연구소’로 확대, 발전되어 한국사회의 진보적, 개혁적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요람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한국사회경제학회, 한국경제발전학회를 직접 창립하는 계기가 되어 회장 및 이사장으로서 소장 경제학자 및 제자들의 든든한 보호막 구실을 자임해왔다. 나아가서 변 교수의 학문적 이념을 따르는 진보, 개혁적 경제학자들이 변 교수라는 큰 나무 아래 모여드니 세상에선 이를 변 교수의 아호인 ‘학현(學峴)’에 빗대어 ‘학현학파’로 부르고 있다.
오늘날 현대경제학은 시장경제를 절대만능으로 여기고 이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현상을 변 교수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물론 시장경제가 계획경제에 견주어 우월한 점이 있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평생을 한국경제학의 기초를 쌓아온 원로경제학자는 “시장경제가 만능은 아니다”라고 일갈하고 “시장은 스스로의 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부가 이에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문제는 “시장이냐, 정부냐” 하는 2분법이 아니라 “어떤 방법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더 필요한가 하는 인간중심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변형윤 교수의 지론이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앨프리드 마셜이 했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셜은 그의 주저인 ‘경제학원리’의 첫 페이지에서 경제학은 부의 축적에 관한 연구인 동시에 인간에 관한 학문의 연구라는 명언을 남겼다. 다시 말해서 경제학은 인간중심의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평생에 걸쳐 우리나라에 한국경제학의 뿌리를 심고,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는 ‘약자의 경제학’과 ‘분배의 경제학’을 부르짖어온 변형윤 교수에게도 ‘개인사적인 고뇌’가 있다. 황해도 황주 출생인 변 교수는 서울대 상대 2학년생일 때, 즉 1946년 여름방학 때 고향에 갔다가 부모님과 생이별을 당하는 고뇌를 안고 있다. 당시 변 교수가 부모님과 헤어질 때 그의 어머님은 “잘 가라, 건강하라, 떳떳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이 세 마디는 변 교수의 좌우명이 되었다. 경제학자로서 존경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서 존경받는 변형윤 교수의 회고록 제목은, 같은 황해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본받아 ‘학현일지(學峴逸志)’로 정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 땅의 모든 지성인들을 위한 인생의 ‘전범(典範)으로 이 책을 우리 사회에 바친다.

[책속으로 이어서]
ㆍ경제학계의 큰 줄기, 근대경제학의 씨를 뿌린 인물
경기고(京畿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로 볼 때 경제학에 가장 뚜렷한 족적(足跡)을 남긴 학자를 들라면 변형윤 동문(40회)과 조순 동문(45회)을 꼽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두 동문은 문자 그대로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큰 줄기를 만든 거목들이다. 그(변형윤 교수)는 4.19 때 직접 플래카드를 들고 대학 교수단 데모에 참가하여 한몫을 했고, 그 후 자유당 정권에 협조한 교수들을 몰아내고 이른바 ‘변형윤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이며, 교수진의 공백을 메우고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실력 있는 교수들을 모아 서울대 상대를 완전히 새것으로 만드는 한편, 젊은 학구파들을 연구에 전념케 해 교수진에 흡수했다. 1960년 이후의 서울대 상대는 완전히 변형윤 동문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 동문이 사회정의에 바친 관심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의 학문적 공헌을 압도하지는 못한다. 그는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 척박한 국내 학계에 근대경제학의 씨를 뿌리고 가꾼 인물이다. 변 동문은 우리나라 경제학계에 계획경제학을 처음 도입했다. 수리경제학도 마찬가지이다. 해방 후 서울대 상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자들 밑에서 공부한 사람치고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항상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질 것을 당부해온 변 동문이 계량 또는 수리경제학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병아리 교수 시절부터 초지일관(初志一貫) 소득재분배를 통한 빈부격차의 해소를 주창해왔다.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닌 그는 강단이나 공사석을 가리지 않고 이 지론을 폈다. - 경기고등학교 동창회보, 1992.6.10

ㆍ경제개발 5개년계획 평가교수로 임명 통보
1966년 9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변형윤 교수’실로 국무총리 기획조정실 명의의 우편물이 날아왔다. 그 내용은 나를 경제개발계획 5개년계획 평가교수로 임명한다는 통보였다. 나로서는 사전에 아무런 상의도 받은 적이 없었고 배경도 몰랐기 때문에 몹시 당황했다. 평가교수단은 자주 회의를 가졌는데…한번은 총리 공관에서 회식을 했는데, 이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다. 회식자리에는 모두들 정해진 테이블에 앉아서 마주앉은 사람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옆에서 툭툭 치며 웬 기척이 나서 무심히 돌아본즉 박정희 대통령이 술 주전자를 들고 히죽이 웃고 서있었다”는 것이다. “변 교수지요? 앞으로 자주 만납시다”라고 하는데 그 모습이 워낙 털털해보여서 “이쪽에서도 그다지 황공해할 것도 없이 마음 편하게 따라주는 대로 마셨다. 그 인상은 비록 대통령으로서 한번 ‘폼’으로 그랬다 치더라도 썩 괜찮아 보였다”고 한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도 차츰 터를 잡아가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10년 넘어 70년대 말엽 다시 그런 만찬석상에 참석해보곤 그 분위기의 변화에 기가 질려버렸다. 저 아득한 높이에 ‘상감마마’처럼 앉아서 애당초 아래쪽으로는 내려와 볼 염두도 안내더라는 것이다. 구중궁궐(九重宮闕)이 따로 없었다. 그것은 천상이나 다를 바 없었고 권력의 절정, 권위의 표상이었다. PP. 137-139

ㆍ평가교수단 회의에서 ‘부익부빈익빈’ 발언해 파란도
1967년 2월경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대한 평가교수단의 평가대회가 중앙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재무부장관 등 각부 장관이 참석했다. 5명쯤의 교수들이 평가보고를 했는데 나는 운수업 평가를 맡고 있었지만, 이와는 관계없이 ‘물가와 국민생활’이라는 주제로 평가보고를 했다. 당시 한국은행 자료를 분석해보니 이미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이 자료를 근거로 제1차 5개년계획이 가져온 부작용을 보고하자 회의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경제개발계획이 잘 되었다고 보고하는 판에 내가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보고를 한 셈이다. 보고를 마치자 장기영 부총리가 벌떡 일어나서는 얼굴이 뻘개져서 “부익부빈익빈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그런 일은 없다”고 내게 따졌다. 다른 장관들도 벌떼처럼 일어나서 내 보고내용을 비판하는 발언들을 했다. 나도 젊은 혈기에 화가 나서 보고에 사용했던 지시봉을 흔들면서 “비판은 좋으나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며 “밤을 새워서라도 토론하자”고 응수했다. 그날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이러한 논쟁에 끼어들기 곤란했던지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PP. 139-140

ㆍ세계계량경제학회 총회 참석, 케임브리지대 방문
1970년 9월, 제2회 세계계량경제학회 총회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열렸는데 나는 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세계적인 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이어졌다. 그 하이라이트는 새뮤엘슨(P. A. Samuelson)의 강연 다음에 케인스 학파인 토빈(J. Tobin) 예일대 교수, 칼도어(N. Kaldor)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한편이 되고, 프리드만(M. Friedman) 교수 및 존슨(H. G. Johnson) 시카고대 교수가 다른 한편이 되어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나는 프리드만의 주장이 싫었다. 이와 달리 칼 도어어는 내 맘에 들었다. 그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나라의 데이터를 가지고 증명이랍시고 내놓고 있다”고 프리드만을 맹렬히 비판했다. 이 자리에는 로빈슨(J. Robinson) 케임브리지대 교수도 참석했는데 매우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로빈슨 여사는 당시 중국의 문화혁명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중국통’답게 중국옷을 입고 나와 예리한 질문을 하곤 했다. 한편 존슨 교수는 거구의 몸집에 목소리가 크고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으로 레슬링 선수인 김일 선수와 닮은 모습이었다. 반면 프리드만은 미꾸라지 같은 약삭빠른 모습으로 대조를 이루었다. 당시 케임브리지대에서 가르치고 있던 한승수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후에 국무총리), 워릭대에 연구차 와있던 박우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도 만났다. 드디어 내 일생 가운데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을 찾았다. 나는 마셜이 살았고 가르쳤던 곳을 가볼 수 있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막상 거기서 1주일간 지내게 되었다. 케임브리지대는 경제학의 메카 같은 곳이 아닌가? 마셜과 케인스가 숨 쉬던 공기를 맛보고 그들이 다녔던 도서관과 강의실에서 책을 보는 경험을 어떻게 말로써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앨프리드 마셜 도서관에 가서 여러 문헌들을 섭렵한 뒤 마셜이 살았던 집과 케인스가 졸업한 킹스 칼리지도 방문했다. 내 일생을 통해 정말로 행복했던 일주일이었다. PP. 147-150

ㆍ1970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대 상대 학장 취임
1970년 9월 케임브리지대에서 돌아와 그동안 밀렸던 일을 처리하느라고 한 동안 바빴다. ‘경제논집’ 발간을 위해 글을 쓰기도 하고 원고를 모으기도 하고 바쁜 나날을 보내던 가운데 그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최문환 서울대 총장의 임기가 11월에 끝나면서 부총장으로 있던 한심석 박사가 그 후임으로 서울대 총장에 임명되었고 또한 그 후임으로 서울대 상대 학장이던 민병구 박사가 부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서울대 부총장에 임명된 민병구 학장 후임으로 내가 서울대 상대 학장에 임명되어 이후 6년 동안 봉직했다. 그때가 서울대 상과대학의 마지막 학장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서울대 상대 졸업생들 가운데는 나를 가리켜 ‘영원한 상대 학장’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당시 43세로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학장 가운데 가장 젊은 편이었기 때문에 무서운 것 없이 패기 있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상대 학장으로 취임 후 첫 번째로, 당시 서울대 상대 동창회장이었던 고 박두병(전 두산그룹 회장, 전 대한상의 회장) 회장에게 인사차 찾아가서, “돈이 없어서 등록을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당시 돈 200만 원(당시 1학기 등록금 3만원 대)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박 회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 돈을 학생과장에게 맡겨두고 등록을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주도록 했다. 당시 이 돈으로 꽤 많은 학생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었다.
다음으로 나는 좋은 교수들을 영입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의 일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신행 박사(컬럼비아대), 최범종(하버드대) 박사 등을 조교수로 영입했고 동시에 경제학과 조교나 강사로 있던 사람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어 박사학위를 받도록 했다. 이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유학을 가기 싫어해서 거의 강요하다시피 해서 보냈다. 이들은 국비유학시험에 합격하여 장학금을 받고 미국유학길을 떠났는데 나는 학장의 직권으로 이들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자리를 보장해 주었다. 학교에서 “휴직기한이 다 되었으니까 귀국하라”는 지시가 내려와도 “학장이 최대한 막아줄 테니까 안심하고 유학을 가라”고 설득을 했다. 나는 기존의 교수진으로는 부족하니 신진 교수진으로 탈바꿈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 나름대로는 가능하면 사회 모순을 해결해나갈 수 있는 보다 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교수진을 구성코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러한 나의 목적은 실패하고 말았다. 예컨대 조교로 있던 시절에는 개혁적이던 사람들이 유학을 갔다 오더니 사람이 변해버렸다. 미국식 사고방식으로 학문 경향을 고스란히 몸에 붙이고 돌아온 것이었다. 이들이 이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되어 미국식 경제학과 가치관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치게 됨에 따라, 서울대 경제학과의 학문적 풍조는 자연히 미국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들이 우리 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영향력이나, 졸업생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나로서는 매우 아쉽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PP. 153-155

ㆍ‘10월 유신’과 서울대 상대 학장
내가 서울대 상대 학장직을 수행하던 1970년대 전반기는 ‘10월 유신’을 명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독재체제가 이루어지면서 여기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시기이고 서울대 상대에서도 여러 차례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었다. 학장으로서 이러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과 이를 억압하려는 유신정권 사이에 끼어 매우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아마도 서울대 상대 학장직을 수행하던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심적으로 괴로운 시기였다. 1970년 서울대 상대 학장에 취임하자마자 ‘전태일 사건’이 발생했다. 1970년 11월 13일, 당시 평화시장 봉제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분신자살한 이 사건은 노동문제에 무관심했던 지식인 사회와 학생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고,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닷새 뒤인 11월 18일, 서울대 상대생 200여 명은 “기업가는 근로자의 인간적 삶의 기초를 보장하고 노총은 본래의 사명을 다하라”고 결의한 뒤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것은 1970년대의 학생운동이 노동운동과 연계되는 최초의 사건으로서, 그만큼 서울대 상대생들의 사회의식이 높았던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장으로서는 가능한 한 농성을 풀도록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농성장으로 찾아가서 “너희들 하는 게 틀렸으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학생들 말이 맞으니까…! 그냥 급하니까 그저 “자네들, 나 좀 한 번 봐다우!” 하는 식으로 호소를 해서 어떻든 농성이 풀리게 되었다. 학생들이 나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믿는다. PP. 156-158

ㆍ비상계엄 시 전두환 특전단장 서울대 상대 학장실 신고도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는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하는 동시에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두려웠던 나머지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지했다. 계엄 선포와 휴교 조치에 뒤이어 각 대학에도 계엄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 종암동에 있던 서울대 상대는 인근에 있는 고대와 함께 동일한 계엄군 관할 아래 놓여 특전단(特戰團)이 진주했다. 특전단 본부를 고대에 두고 서울대 상대에는 2개 대대가 주둔했다. 특전단 계엄군에는 사병은 없고 장교와 하사관만 있었기 때문에 실제 병력은 그다지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계엄군이 대학에 진주하면 그 대학 책임자에게 신고를 하도록 되어 있는데 고대에 본부를 둔 특전단장(대령)이 서울대 상대 학장에게 신고하러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누가 특전단장인지 알지도 못했는데 “혹시 내가 가르친 육사 1기생이 아닌가” 하고 궁금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학장실 문을 열어 놓고 특전단장이 들어올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지 보기로 했다. 만약 육사 출신이라면 내가 육사에서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 것이므로 들어올 때 고개를 숙일 것이고 아니면 머리가 뻣뻣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특전단장이 들어오면서 고개를 숙였다. 알고 보니 바로 내가 육사에서 가르친 육사 1기생 전두환 대령이었다. 육사에서 성적이 우수한 편이 아니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내가 가르친 제자임은 분명했다. 전 대령은 학장실에 들어와서 매우 공손한 태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마음이 순하고 마치 선생님 앞의 학생과 같은 태도였다. 그러나 전 대령은 육사 시절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계엄군이 주둔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다음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12월 14일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뒤 한 차례인가 전 대령의 초청으로 점심을 대접받는 일도 있었다. 고기를 굽고 당시 귀했던 조니 워커 양주까지 나오는 등 대접을 잘 받았지만 나로서는 사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 후 전두환 씨는 다시 만난 적이 없다. PP. 163-165

ㆍ19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 변론도
역사는 정박하지 아니한다. 1979년이 되면서 ‘종말’적 현상으로 각종 대형사건이 터지면서 유신체제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1979년 4월 3일에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이 터졌다. 강원룡 목사가 운영하던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교회 및 각 기관과 연계하여 각계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중간집단 육성 프로그램을 시행해 왔는데, 그 내용은 노동조합이나 농민단체, 여성단체 등을 대상으로 노동자, 농민, 시민의 의식 개발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당국에 의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의식화교육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면서 그로 말미암아 크리스천 아카데미 간사들을 비롯한 다수 인사들이 용공 혐의로 대거 구속되었다. 그 가운데는 당시 여성사회 간사였던 한명숙(민주통합당 대표, 국무총리)을 비롯해서 이우재(전 국회의원), 황한식(부산대 교수), 장상환(경상대 교수), 김세균(서울대 교수), 신인령(이화여대 총장) 교수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가운데 황한식, 장상환 등은 서울대 상대 졸업생이고 한명숙 씨의 부군인 박성준(전 성공회대) 교수도 역시 서울대 상대 졸업생이고, 김세균 교수는 서울대 상대에 재직하고 있던 김진균 교수의 동생이다. 그런데 한 달 이상의 수사 과정을 거친 뒤 이들은 ‘용공서클’로 발표되었는데 이들이 결코 공산주의자나 용공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수사 과정에서 고문에 의해 강제진술을 받았다는 것이 나중에 확인되었다. 이 사건의 재판이 열리면서 나는 피고 측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피고 측에서 신청한 여러 증인들이 모두 거부된 상태에서 나는 그래도 국립대학 교수이고 이 사람들이 학교에 다닐 당시 선생이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피고 측이 신청한 증인 가운데 유일하게 채택되었다. 재판 바로 전날 내가 심사위원장이었던 박사학위 취득자의 초청으로 성북동의 대원각이란 고급 요정에서 저녁을 잘 얻어먹고 집에 돌아오니 피곤해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결국 그 다음 날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재판정에 증인으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서 불현듯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시 담당 검사는 박 모 검사였는데 서울대 법대에 다닐 당시 나에게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검사가 논고를 하면서 모리스 돕(M. Dobb: 영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책을 피고인들이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이들을 용공주의자로 몰았다. 나는 아침에 떠올랐던 아이디어를 살려 새뮤얼슨의 ‘경제학(Economics)’ 이야기를 증인석에서 꺼냈다. 굉장히 좋은 기분으로 말문을 열어나갔다.
“재판장님도 저 유명한 새뮤얼슨 교수를 알지요. 새뮤엘슨은 가장 대표적인 신고전학파 주류경제학자로서 ‘자본주의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쓴 대표적인 교과서인 ‘경제학(이코노믹스)’의 첫 페이지를 보면 경제학의 3대 저서로서 ①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②케인스의 ‘일반이론’, ③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들고 있습니다. 즉 경제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저서는 누구나 필수적으로 읽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중적인 책이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 ‘자본론’인데 모리스 돕의 책은 바로 이 ‘자본론’을 해설한 책이니, 이 책을 지니고 있었다고 해서 피고들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판단합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피고들 대부분은 내가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서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이 증언이 먹혀들어 갔는지 아무튼 피고인들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PP. 180-183

ㆍ‘서울의 봄’, 서울대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내 인생의 목표인 평생교수라는 바램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일컬어지는 민주화 격랑의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 또 이로 말미암아 해직이라는 고초를 당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유신체제가 붕괴되면서 온 국민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열망했고, 교수나 학생 등 모든 서울대 구성원들도 물론 같은 마음이었다. 12·12사태 이후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구체제를 복원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기 때문에 결국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 대다수와, 구체제를 복원시키려는 신군부 세력 및 이에 기댄 유신잔존 세력 사이의 대결구도로 말미암아 정국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정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특히 1980년 3월 신학기를 맞아 학생들의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사회적으로도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게 됨에 따라, 평소에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교수들을 중심으로 ‘서울대 교수협의회’의 활성화가 논의되었다. 4월 3일 교수협의회 정기총회가 있다고 해서 참석했더니 회의순서 마지막에 신임 회장 선출 차례가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누군가가 나를 추천해서 전혀 뜻밖에 내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나는 교수협의회 회장으로서 한편으로는 서울대 교수들의 의견을 모아 학원자율화와 사회민주화를 위한 선언서를 발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대학의 교수협의회 회장들과 연합하여 역시 선언문을 발표하는 일에 나섰다. 이 경우 역시 서울대 교수협의회 회장인 내가 항상 대표자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80년 3월, 개학을 앞두고 서울 시내 중견교수 몇 분들이 민주화를 위한 교수들의 의사표시로써 성명서를 발표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4월 24일, 서울 시내 14개 대학 교수 361명이 ‘최근 학원사태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대표자 명단에는 나(서울대), 조기준(고대), 길현모(서강대), 이우성(성균관대), 유인호(중앙대), 조요한(숭전대, 현 숭실대), 이효재(이화여대) 교수 등의 이름이 열거되었지만 서울대 교수협의회장인 내가 주도자로 되었다. PP. 186-189

ㆍ지식인 134인 시국선언 참여
1980년 5월 15일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으로 불린 성명서가 나왔다. 이 선언은 5·17 비상계엄령 확대 직전에 발표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의 사임을 명시적으로 요구함으로써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지식인 선언’을 만들던 초기단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당시 유인호(중앙대), 서남동(연세대), 장을병(성균관대) 교수와 송건호(언론인) 씨 등이 초기의 논의 단계에 참여하여 위의 네 사람을 포함, 9명의 준비위원을 선정하고, 3월 28일에 서울시청 앞의 세실 레스토랑에서 다시 준비위원회가 열렸는데, 나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여기서 시국선언을 발표하되 계엄 해제 후 적당한 시기에 하기로 하고 선언에 참여할 후보자 명단을 각 준비위원들이 작성하기로 했다. 이후 모두 다섯 차례의 준비위원회와 선언문 기초위원회가 열려 선언문을 가다듬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국군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장군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직 문제였다. 준비위원회에서는 군부의 정치개입에 대한 반대를 어느 정도 수위로 표현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토론 끝에 겸직이 위법이므로 제7항에 이 부분을 추가했다. 결국 선언문 발표 뒤에 합수부(합동수사본부)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이 이 부분이었다. 자기들의 우두머리 격인 전두환 장군을 직접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국선언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많은 대학교수 등이 직장에서 쫓겨났고 합수부 등으로 끌려가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나도 합수부로 끌려가 취조를 받고 교수직에서 해직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이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당시의 민주화 열기 속에서 유신독재체제로 회귀하려는 신군부와 유신잔당 세력에 맞서 지식인들이 최소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할 수 있는 길은, 이러한 선언문 발표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지식인이자 교육자로서 너무도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PP. 190-191

ㆍ‘평생교수’의 꿈 좌절되고 ‘해직교수’로
평생교수가 되겠다는 것을 신조로 삼았던 내가 해직교수가 되었다. 5·17 이후 민주화 운동과 관련, 공식발표만으로도 전국적으로 86명의 교수들이 해직되었는데 그 가운데 서울대에서는 모두 네 명이 해직되었다. 변형윤(경제학), 한완상(사회학과), 김진균(사회학과), 이명현(철학과) 교수 등이었다. 공식발표 외에도 사립대학 등에서는 평소 재단의 눈 밖에 나 있던 교수들이 이번 기회에 해직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해직 직후에는 전화도 많이 오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해서 거의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하나둘 연락을 끊기 시작했고 대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를 하기도 했다. 나는 해직된 후 “앞으로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여러 유명 인사들의 행적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 가운데 내게 가장 큰 감명을 주었던 것은 일본의 학자인 야나이바라 다다오(矢?原忠雄: 1893∼1961) 전 동경대 총장과, 장이욱(張利郁: 1895∼1983) 전 서울대 총장의 책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한, 일간의 두 총장 모두 비슷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신념으로 말미암아 교직에서 해직당한 경험이 있었고 이를 극복한 글을 남겨서 좋은 참고가 되었다. 먼저 야나이바라 선생은 무교회주의자로 유명한 ‘우치무라 간조(?村鑑三)’의 제자로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동경제대 교수 시절에 일본의 군국주의와 식민지 침략을 비판하다가 1937년 교수직에서 해임된 분이다. 해직된 후에도 성서 연구와 집필로 소일하면서 꼿꼿한 자세로 살아오다가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자 동경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복직되었고 나중에는 동경대학 총장을 지낸 일본의 최고 지성인으로서, ‘일본의 양심’으로까지 불리는 분이다. 장이욱 선생은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회고록’이란 책이다. 장이욱 선생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미국 유학시절 안창호 선생을 만나 감화를 받고 흥사단에 입단, 활동했으며 1928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평안북도 선천의 미션스쿨인 신성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1937년 5월 신사참배 거부가 발단이 된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일제 식민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8월에 보석으로 석방된다. 해방 후에는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에 따라 초대 사범대 학장을 거쳐 1948년 제3대 서울대 총장에 취임했지만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직을 강요받고 같은 해 11월에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뒤 흥사단 활동에 주력하다가 1960년 장면 정부 시절 잠깐 주미대사로 활동했지만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쿠데타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사직을 사임했다. 장이욱 선생은 민족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에 투옥과 해직을 당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던 점에서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나는 이 두 분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나도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해직 후에 보니 과거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만나기를 꺼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들로부터 뜻하지 않게 격려를 받거나 도움을 받는 일도 생겼다.
나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두 분 선생들처럼 꼿꼿한 자세로 살아가기로 결심을 했다. 또 평소에 가깝거나 내가 혜택이나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혀 연락을 주지 않더라도 조금도 섭섭하게 여기지 않고 대범하게 살기로 작정을 했다. 이로 말미암아 마음의 평정을 찾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PP. 196-201

ㆍ‘학현(學峴’)은 ‘학문의 고개’ 넘자는 뜻
많은 사람들이 나의 아호인 ‘학현(學峴)’이 무엇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1981년 봄, 나와 같이 서울대에서 해직된 김진균 교수 댁에서 막걸리 파티가 열렸다. 당시 김 교수는 평택에 농장을 갖고 있었으므로 좋은 막걸리를 담아가지고 “아는 사람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회식이나 한번 합시다”라는 나의 말이 결국 이런 자리를 낳았던 셈이다. 이 자리에는 다른 대학의 해직교수들도 몇 사람 어울리게 되었는데 이 자리가 그만 ‘호(號)’를 짓는 모임이 되어 버렸다. 각자 어떤 호가 어울릴까 하고 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마침 한말 의병대장인 의암 유인석 선생의 문집인 ‘의암집(義菴集)’에 나오는 내 고조부에 관한 글 가운데 ‘학현(鶴峴)’이란 동네 이름이 나오는 것이 기억이 났다. 의암은 내 증조부와 과거(科擧) 동기이고 조부가 의암 휘하의 의병 간부였으므로 이 이름이 ‘의암집’에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한다. 그래서 “학현(鶴峴)이 호로서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성균관대의 이우성 교수가 ‘학(鶴)’을 ‘학(學)’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도 동조하는 바람에 그대로 받아들여 ‘학현(學峴)’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퇴계(退溪)라는 호도 이황 선생의 향리가 토계(土溪)인 데서 지어진 것이니, 같은 ‘히읗(ㅎ)’자 발음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의 호를 학현으로 정한 것은 한편으로는 내 뿌리를 찾으려는 생각도 포함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을 때까지 ‘학문의 고개’를 허우적허우적 올라가려는 내 생각과도 잘 맞아서 참으로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호는 그해(1981년 12월)에 발간된 나의 편저인 ‘반주류의 경제학’ 서문에서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글에는 ‘연구실에서’라는 글 대신에 멋있게 ‘학현헌(學峴軒)에서’라고 처음 썼다. PP. 213-214

ㆍ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알현도
나는 1984년 5월 초순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인사를 드리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는 해직교수에 대한 가톨릭교회 측의 특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1980년 8월 말 서울대 교수직에서 해임된 뒤 1984년 9월 4일에 복직될 때까지 만 4년 남짓을 해직교수라는 이름으로 지냈다. 해직 기간 동안 주위의 도움으로 학현연구실을 열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이른바 ‘학현학파’로 불리게 되는 서울사회경제연구소로 성장하게 된 것도 내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내가 해직되지 않고 계속 현직교수로 머물러 있었더라면, 학현연구실과 서울사회경제연구소는 탄생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나 개인적으로 보면 해직기간 동안 인간적으로 폭이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원래 나는 학교 연구실과 집밖에 모르는 좁은 세계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해직을 계기로 하여 ‘거시기 산악회’를 비롯한 여러 모임에서 폭넓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위안을 받았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술도 잘 못 마시던 내가 소주와 막걸리 맛을 알게 되었고, 노래 한마디 못 부르던 내가 애창곡을 부르게 되었고, 등산 다니는 사람을 비웃던 내가 국내의 명산이란 명산은 모두 오르게도 되었다. 국내 방방곡곡을 여행하면서 힘들게 생활을 영위해 가고 있는 서민들의 삶을 알게 되었고, 소설가, 시인, 화가, 종교인 등 평소에 만날 기회가 없던 각 분야의 최고봉들과 사귀면서 지식과 지혜를 넓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해직기간은 참으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과 사유를 가능케 해 주었던 소중한 기회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PP. 222-225

ㆍ해직교수 때 청와대 ‘어전회의’ 첫 번째 주자 강사 할 뻔도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묘해서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나로서는 해직기간 동안 오히려 그 어떤 때보다도 저술활동을 활발히 했다. ‘반주류의 경제학’, ‘분배의 경제학’이 그 때 나온 책들이다. 1980년에 출간된 ‘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이란 책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군인 출신 대통령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정 운영에 필요한 지식을 속성으로 습득하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그 한 수단으로 신간서적 가운데 화제가 된 책의 저자를 선정하고 청와대로 초청해서 대통령이 강의를 듣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런데 이 ‘어전강의(御前講義)’의 첫 번째 주자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의 저자인 나였다. 그때 나에게 연락한 사람은 청와대 이상주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아래에서 일하고 있던 C국장이었는데 서울대 법대 재학 당시 내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어느 날 C국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시내 모 호텔에 갔더니 바로 첫 번째 어전강의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물론 어전강의를 받아들였더라면 내가 억울하게 해직되었다는 이야기를 전 대통령에게 직접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터이고 이로 말미암아 복직이 빨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설혹 복직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전 대통령에게 부탁해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따라서 전 대통령에게 어전강의를 할 생각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것이다. 약 2주일 뒤에, 이번에는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노태우 씨 쪽에서 연락이 왔다. 아마도 청와대 어전강의를 한 사람들의 명단을 입수하여 자기도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학자들을 초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태우 씨 쪽에서 보낸 사람은 육사를 나와 서울대 경제학과에 학사 편입하여 나로부터 강의를 들은 K소령이었다. 그는 보안사령관 비서관이었다. 그러나 이 부탁 역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꽤나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PP. 226-228

ㆍ내가 ‘민족’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이유
경제학은 원래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 두 가지로 크게 볼 수 있다. 따라서 경제학을 제대로 하려면 주류경제학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경제학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변함없는 내 생각이었다. 나는 학문적 다양성을 위해서는 “서울대 경제학과에도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교수가 한 사람쯤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학과의 후배교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했지만, 완강하게 거부하는 교수들이 몇 명 있어서 정말 힘들었다. 과내에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안병직 교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결국 나 혼자서만 계속 주장과 설득을 해야 했다. 결국 내가 끝까지 버티어서 김수행 교수가 임용되기는 했지만, 그 후 김 교수가 정년퇴임한 뒤에는, 다시 정치경제학 전공 교수를 임용하지 않음으로써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정치경제학의 전통이 단절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나는 또 해직 기간 동안 앨프리드 마셜(Alfred Marshall)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책을 출판하기로 했으나 결국 책은 출판하지 못했다. 나는 1979년에 ‘마셜경제학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이를 더 보완하면 책으로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여러 가지 사회적 요구가 많아서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 보니 결국 책을 내지 못하고 일단 중단한 상태였다. 강원대 이병천 교수가 쓴 ‘학현 경제학의 한 해석’이란 글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즉 앨프리드 마셜은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의 완성자이자, 케인스에게 이를 물려주는 계승자(마셜 A모델)인 동시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비주류경제학자(마셜 B모델)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이 가운데 두 번째 모델을 많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마셜은 경제학에 대해 “부의 축적에 관한 연구인 동시에 인간에 관한 연구의 일부”라고 정의한 바 있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마셜은 경제기사도(經濟騎士道) 정신을 주장했고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cool heads but warm hearts)’을 가지도록 촉구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뒤 새뮤얼슨 등의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자들은 마셜의 이 두 가지 측면 가운데 ‘인간 연구’의 측면을 쏙 빼버린 것이다. 이것이 결국 새뮤얼슨의 경제학 교과서가 광범위하게 보급됨으로써 마셜의 두 가지 측면 가운데 한쪽은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나로서는 바로 이렇게 해서 빠져버린 마셜의 인간 연구의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정치경제학 외에도 경제발전론에 대해서 많이 연구했고, 특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뮈르달(K. G. Myrdal)을 자주 인용하기도 하고 영향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종속이론도 뮈르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뮈르달이란 사람은 원래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자이긴 하지만 미국의 흑인문제를 연구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보고는 자신이 그동안 했던 주류경제학에 큰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 뮈르달은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되고 제3세계의 빈곤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이것이 결국 종속이론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은 일단 마르크스 경제학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도 이를 교조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현실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민족’이란 개념을 그다지 중시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는 오히려 ‘계층’이나 ‘계급’이란 개념이 더 중요하다. 특히 여유가 있는 사람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 빈곤한 사람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핵심적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경우 ‘민족’ 개념은 그것이 가진 모호성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민족이란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 PP. 231-234

ㆍ학현연구실의 발전적 새 출범
1984년 9월, 서울대 교수직에 복직하면서 학현연구실 문을 닫을 생각도 했다. 그런데 주위에서 일단 연구실 문을 닫으면 다시 열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해서, 1984년 11월 서울대에서 가까운 관악구 신림동의 ‘시장 통’ 안에 있는 조그만 건물 2층으로 학현연구실을 이전하고 정식으로 연구자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재출범하게 된다.
당시 학현연구실 세미나에 참여했던 학자들은 주로 주류경제학의 현실설명력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비주류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우선 당시 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도하고 있던 석사, 박사과정 제자들이 많이 참여했다. 강남훈(한신대), 김견(기아자동차), 김기원(한국방송통신대), 김용복(서울사회경제연구소), 김윤자(한신대), 김형기(경북대), 박동철(현대자동차), 양우진(한신대), 윤진호(인하대), 이병천(강원대), 이재율(계명대), 이재희(경성대), 장지상(경북대, 산업연구원장), 정일용(한국외대), 홍장표(부경대, 청와대 경제수석), 황현기 (전 경기대) 교수 등이 그때부터 자주 세미나에 나왔다. 그 뒤 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제자들, 그리고 새로 서울대에서 학위를 받은 제자들도 속속 학현연구실에 합류했다. 그 주요 인물로는 강명헌(단국대), 강신욱(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강철규(서울시립대 명예교수, 공정거래위원장), 김대환(인하대, 노동부장관), 김태동(성대 명예교수, 청와대 경제수석), 김혜원(한국교원대), 남기곤(한밭대), 박복영(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순일(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 배영목(충북대), 신상기(경원대), 원승연(명지대, 금융감독원 부원장), 유재원(건국대), 윤건수(전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윤원배(숙명여대), 이근식(서울시립대), 이상철(성공회대), 이은우(울산대), 이정우(경북대, 청와대 정책실장,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이제민(연세대,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이진순(숭실대), 이채언(전남대), 장세진(인하대,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조우현(숭실대), 황신준(상지대)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PP. 234-236

ㆍ‘37년 6개월’ 서울대 교수 정년퇴임
1955년 9월 강사로 시작, 1992년 2월 정년퇴임으로 정들었던 서울대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굴곡도 많고 사연도 많았던 ‘37년 6개월’의 교수 생활이었다. 1980년 8월에는 잠시(?) 타의에 의해 강제로 4년간 해직교수로 지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퇴임 예행연습을 한 셈이어서 막상 정년퇴임 때는 별다른 큰 감흥은 없었다. 온갖 굴곡에도 불구하고 중도에서 좌절을 하지 않고 정년퇴임을 무사히 맞이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도 가졌다. 다른 교수 분들처럼 나 역시 정년퇴임 5년 전에 ‘화갑기념논문집’을 성대하게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정년퇴임기념논문집은 사양했다. 그러나 제자들의 권유로 비봉출판사에서 ‘경제민주화의 길’이라는 제목의 정년퇴임기념논문집을 냈는데, 이 책에는 14명의 제자들이 주로 경제민주화와 경제정의에 관해 쓴 글을 모았다. 이와는 별도로 서울대 경제연구소에서 내는 ‘경제논집’에서도 나의 퇴임을 기념하는 정년퇴임기념호를 발간했다. 1991년 12월에는 서울대 호암기념관에서 정년퇴임 기념식이 열려 많은 동료, 후배 교수들의 축하를 받았다. 1991년 12월 초의 ‘경제변동론’ 수업이 나의 마지막 강의였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고 이제 정년을 맞아 학교를 그만둔다는 이야기, 앞으로 걸어갈 길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 등을 담담하게 말했을 뿐이다. 나의 마지막 강의에 대해서는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서 여러 신문에 그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다. P. 253

ㆍ마셜의 ‘경제기사도(經濟騎士道)’ 고별강연
1992년 3월 31일, 서울대 문화관에서 ‘변형윤 교수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350석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교수와 학생이 참석했고 언론에서도 취재기자가 다수 참석했다. 나는 ‘앨프리드 마셜의 경제기사도에 관하여’란 제목의 고별강연을 통해 먼저 마셜의 말을 인용했다.

①부의 불평등은 현대의 경제조직이 갖는 중대한 결점이다.
②부유한 사람들이 공공의 복지에 관심을 쏟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은 버림받을 수밖에
없으며 사회적 재난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③중세의 기사가 사심 없는 충성심을 가졌던 것처럼 오늘날의 기업도 공공적 정신을
지녀야 한다…. - 앨프리드 마셜

그러면서 나는 “마셜이 이야기하는 경제기사도란, 고상하고 어렵기 때문에 한다는 즐거움도 포함되고 있다”고 방점을 찍어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학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마셜의 주장처럼, 나도 어렵지만 그동안 즐거운 길을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고도 밝혔다. 나는 일찍부터 모교 강단에 설 수 있었고 해직되었다가 다시 복직했으며 어쨌든 명예롭게 정년퇴임을 할 수 있게 되어 스스로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미 4년 동안 해직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년퇴임을 미리 준비한 셈이어서 별다른 불안은 없으며, 앞으로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작지만 아주 알찬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P. 254

ㆍ서울사회경제연구소의 창립
나는 정년퇴임 후에도 서울대 명예교수로 발령받아 ‘경제발전론’과 ‘경제발전론특수연구’ 등을 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구실이 없어져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교수휴게실이나 다른 후배 교수들의 연구실에서 쉬면서 “아, 내가 정말로 정년퇴임을 했구나!” 하고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자연히 내 활동영역은 학교로부터 학현연구실로 중심을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기존의 학현연구실을 확대, 개편하여 서울사회경제연구소를 창설하게 되었다. 학현연구실은 사실 내 개인연구실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이것을 더욱 공개적이고 공적인 연구소로 개편코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연구소 이름의 변화뿐만 아니라 회원의 확대, 재정문제의 해결, 연구소다운 공간의 확보, 사단법인화 등 여러 가지 노력이 필요했다.
사단법인이 되려면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이 회원 확보 문제였다. 내가 정년퇴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학위논문을 지도했던 제자나 조교 출신 중심으로 회원이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제 공개적이고 공적인 연구소가 되려면 종전과 같은 방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 전에는 주로 인맥 중심으로 연구실에 모였던 반면, 이제는 각자가 자신의 관심사와 맞아야만 참가하는 분위기여서 회원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재정 문제의 경우 서울대 상대 졸업생들이 기수별로 기금을 모아주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고 몇몇 뜻있는 제자들도 선뜻 도움을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기획재정부(당시 재정경제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초대 운영위원장인 강철규 교수(서울시립대, 공정거래위원장)와 학현연구실 마지막 운영위원장인 장세진 교수(인하대), 그리고 연구소 전임 연구원이었던 윤건수, 박동철, 김용복 박사 등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공간 문제는 뜻밖에도 제자인 수산중공업 박주탁 회장의 도움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서울대 상대 제자들인 이종태 회장(수국), 홍용찬 회장(우성해운), 이종기 회장(상영무역), 김동녕 회장(한세예스24홀딩스) 등의 도움도 잊을 수 없다. PP. 255-256

ㆍ경제적 약자를 위한 연구
사회 일부에서는 서울사회경제연구소 회원들의 연구 성향이 각양각색이어서 내부결집력이 약하지 않은가? 또 연구의 초점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등의 평가도 있는데, 연구소 설립자로서 회원들 사이에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모두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회원들의 다양한 배경이나 이념적 스펙트럼의 다양성 등은 우리 연구소의 원심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반면, 경제정의와 소득분배, 경제민주화 등의 목표는 우리 연구소의 구심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울사회경제연구소의 지향점은 전체적으로 볼 때 소득분배와 경제정의라는 큰 틀의 주제로 가다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경제적 약자를 배려하는 방향의 연구를 해왔다는 외부의 평가가 우리의 연구활동을 잘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소가 오히려 더 걱정해야 할 것은 다양성보다는 폐쇄적이라는 외부의 비판이다. 주로 서울대 상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모인 까닭에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대응해야 하고 연구소를 개방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최근 서울대 상대 졸업생이 아닌 다른 학교 출신들이 회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PP. 257-258

ㆍ‘종암’ 세대보다 ‘관악’ 세대가 더 진보적
서울사회경제연구소 회원들은 다양한 연령대에 분포되어 있지만 회원들의 연령에 따른 세대 간의 ‘지향점의 차이’도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서울 종암동에서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세대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여 졸업한 세대 사이에는 다소 이질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종암동 세대’에 견주어 ‘관악 세대’가 더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종암동 세대는 대부분 대학에 자리를 잡고 있고 따라서 우리 사회의 주류 혹은 주류 비슷한 위치에 있는 반면, 관악 세대는 아직 대학에 자리 잡은 사람이 적고 연구소에 있거나 강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들은 이념적으로는 진보적이면서도 현실의 여건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까닭에 때로는 현실에 부딪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이것이 서울사회경제연구소의 신규 회원 충원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몸담고 있더라도 결국 기본적으로 경제정의의 실현이나 경제민주화에 대한 생각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연구소의 틀 안에서 함께 연구하려는 기본 동인은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P. 258

ㆍIMF ‘내인론(內因論)이냐, 외인론(外因論)이냐?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 있을까. 1997년 말 한국경제는 심각한 외환부족으로 말미암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다. IMF는 구제금융을 해 주는 대신 강력한 구조조정정책을 요구하게 되고 이에 따라 한국경제는 유례없는 불황과 실업사태에 휘말리게 되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이래 한국경제는 몇 차례 경제위기를 겪었지만 1997년의 경제위기는 과거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위기였다. 한국의 경제학자라면 누구에게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건이기도 하다.
1997년 말 ‘도둑처럼’ 찾아온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외부(국제금융자본)의 음모 때문이라는 외인론(外因論), 내부(특히 재벌의 과잉채무)에 원인이 있다는 내인론(內因論), 기타 정책실패에 원인이 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역시 빚에 의존해 온 외자의존형 과잉투자가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즉 재벌의 행태에 근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외인론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우리가 과잉투자를 하지 않았더라면 외환부족 상태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1997년 11월에 외환보유고가 87억 달러였던 것이 11월 18일에는 39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외인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외국자본에 농락당하도록 빌미를 제공한 것은 재벌의 과잉부채, 과잉투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97년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이 우리 내부에 있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 역시 과잉투자의 본산인 재벌을 개혁하고 과잉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개혁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당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기업의 정리 과정에서 IMF 총재가 사실상 한국경제에 대해 ‘총독’ 노릇을 하면서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라고 불리는 일련의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국제금융자본의 이해관계를 철저히 대변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물론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PP. 265-266

ㆍ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당선과 IMF 극복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바로 이어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나는 15대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 쪽에 섰던 것은 사실이다. 그쪽에서 지지교수 모임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참가해 달라고 연락이 와서 승낙은 했지만 막상 모임에 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내 이름이 명단의 첫머리에 올랐기 때문에 밖에서 볼 때는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김대중 후보 지지교수 모임을 주도한 것처럼 비추어졌지만 실상은 나는 이름을 올린 것뿐이고 별다른 실질적인 구실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나중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욕(?)을 많이 먹었다. 말하자면 ‘정치교수’가 된 셈이다. 그러나 이때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대선 과정에서 실질적인 역할은 하지 않겠지만 내 이름은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고 응낙해둔 터여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김대중 후보는 한두 번 정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도 혼자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밥 먹는 자리에서였다. 1997년 9월 아니면 10월쯤이었는데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모임이 있었다. 참석자는 김대중 씨를 비롯한 정치참모들, 현역 국회의원 몇 사람, 그리고 김대중 씨를 도와주던 한신대의 이우정 교수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그저 밥을 같이 먹었을 뿐이고 특별한 이야기는 오고 가지 않았다.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당선되었다. 아마도 내가 수십 년 동안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했지만 지지후보가 당선된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한편으로는 무척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한국경제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IMF 경제위기의 충격을 극복해야 하는 짐을 김대중 대통령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러면서 정말 잘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바로 만난 일은 없었다. 일단 대통령에 당선되면 신분이 달라지기 때문에 일체의 연락이 끊어진다. 청와대 경호실을 통하지 않고는 사적인 연락이 불가능해진다. 대통령 당선 후 처음으로 김대중 씨를 본 것은 선거 후 약 1주일쯤 지나서 열린 당선 축하모임에서였다. 서울 서교호텔에서 열린 축하모임에는 지지자였던 교수, 목사 등 약 150명 정도가 참석했다. 김대중 당선자와 일일이 축하인사를 나누기에는 너무 사람이 많아서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 당선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지지해 주어서 당선될 수 있었던 데 대해 “고맙다, 앞으로 잘하겠다”는 간단한 인사말을 했다. 당시의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훗날 윤진호 인하대 교수가 “선생님으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한국 사회에서 주류가 된 셈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코멘트 한 적이 있다.
“비록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내 입장은 여전히 비주류요. 비록 내가 지지했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겠다는 내 뜻은 굽힐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김대중 씨 당선 후 새 정부의 요직 인사와 관련하여, 신문에서 여러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그 가운데 나도 여러 요직에 임명되는 것처럼 보도된 적이 있고, 특히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한 여러 직위에 내 이름이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나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막상 나한테 와서 이야기를 한 사람도 없었지요. 그저 내가 선거과정에서 김대중 씨를 지지했고 또 새 정부에 우리 연구소 출신 인사들이 몇 명 들어가니까 추측성 기사가 났던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에요. 기본적으로 나는 자리를 위해서 김대중 씨를 도와준 것도 아니고 아무런 야심도 없었기 때문에 김대중 씨가 당선된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사실 어떠한 자리를 맡아달라는 권유가 왔더라도 내가 거절할 것이라는 사실을 김대중 정부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약 1년 후인 1998년 10월 ‘제2의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제2건국위원회)’ 대표공동위원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나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정부의 고위직을 맡게 된 셈인데 그동안 여러 요직을 거절했던 내가 “왜 그 자리를 승낙했을까?”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냈을 것이다. PP. 269-271

ㆍ최초의 공직, 제2건국위원회 대표공동위원장
‘제2건국추진위원회’는 김대중 정부에서 국민의식 개혁을 위해 새로 만든 위원회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8·15경축사에서 처음으로 그 구상을 밝혔고 이후 청와대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조직 구상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가 9월 무렵에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있던 김태동 교수가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김 교수는 우리 연구소의 핵심 멤버이기도 해서 반갑게 맞이했더니 바로 제2건국위의 취지를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대표공동위원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대통령의 뜻을 전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표공동위원장 자리에 2∼3명의 후보가 검토되고 있었는데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의사를 타진하고 가능하면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김 교수가 1시간이 지나도 가지 않고 계속 설득을 하는 바람에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다른 일도 아니고 국민의식 개혁을 목표로 하는 위원회이고 나도 평소에 우리 사회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국민의식 개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어서 거절할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자꾸 내 이름이 이런저런 정부 요직의 후보로 거론되는 것도 싫어서 빨리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제2건국위는 대통령 자문기관이므로 상임직도 아니고 해서 교수로서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할 수 있는 성격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후보보다는 나를 위원장 자리에 임명하고 싶어 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의사가 확고하다는 뜻도 전해 들었다. 결국 상황을 보아서 대통령이 계속 그 자리에 나를 임명하기를 고집하면 “김 교수가 알아서 하라”고 반승낙을 해버렸다. 2∼3일이 지나서 내가 제2건국위 대표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발표가 났다.
당초 제2건국위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온 것은 1997년 말 경제위기 직후의 ‘금 모으기 운동’때부터였다고 한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당선자 신분으로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어떤 사람에게서 구한말 시대의 국채보상운동처럼 금 모으기 운동을 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가볍게 제안한 것인데 의외로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것이 해외에 좋은 이미지를 줌으로써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크게 힘이 되었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애초의 뜻은 좋았고 시도해볼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의 의식개혁으로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은 꼭 김대중 정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개혁정부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부에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나는 “고쳐야 할 것은 하나하나 고치겠다”고 다짐하고, 그렇게 해서 국민들의 의식과 행동을 높여가는 것도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위원회 운영에 들어가니까 애초의 내 생각과는 다른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우선 위원회가 순수한 민간조직이 아니라 반관반민 형태로 운영되었다. 행자부장관(현 행안부장관)이 기획단장이 되어 위원회의 실제 운영을 지휘했고 기획단 자체가 공무원들로 채워졌다. 사실상 관 주도의 위원회 운영이 된 셈이다. 여기서 관료들의 충성이나 경쟁이 벌어지게 된다. 국민의식 개혁이라는 목표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출세에 관심이 더 많은 정치꾼들이 대거 위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 시대부터 5, 6공 시대를 거쳐 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권력 주위를 맴돌던 인사들이 위원 구성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셈이다. 이것은 지방으로 갈수록 더 심했다. 자연히 국민들은 이 위원회의 성격이나 목표에 대해 냉소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보수언론에서는 제2건국위를 “영구집권을 위한 정치적 조직”이라고까지 연일 몰아붙였다.
제2건국위는 1년에 여섯 번 정도 대통령에 대한 위원회의 보고를 했는데 그때마다 대통령을 만났다. 그러나 실제 보고는 상임위원장이 했고 대통령은 이에 대해 격려를 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정치적 색깔이 있는 이야기나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과거 박정희 대통령 때도 평가교수로서 청와대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에 견주면 김대중 대통령의 스타일은 달랐다. 우선 박 대통령 때는 참석자들이 회의 내내 매우 긴장된 분위기에서 얼어붙는 상태였다면, 김대중 대통령 때는 아무 부담 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김 대통령은 보고내용에 대해 깨알 같이 메모를 하고 보고가 끝난 다음에는 평가나 격려말씀을 했는데, 그 전에 한 번 했던 이야기는 절대 되풀이하지 않는 데 놀랐다. 지난번 회의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깜빡 잊고 말을 못했던 이야기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많았다. 꼼꼼하고 기억력이 좋은 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특징이었다. 제2건국위에 참여하면서 많은 심적인 고통이 뒤따랐다. 신문에는 연일 위원회를 정치적 조직이라고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에 따르면 제2건국위는 의식개혁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정권장악 조직이며 영구집권을 위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워낙 거세게 언론에서 비판을 하니까 위원회의 활동도 자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여소야대 국회에서 위원회 예산을 계속 삭감하려고 해서 운영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거기다가 위원회 발족의 원래의 뜻이 흐려지고 정치적 야심을 품은 사람들이 설치면서 분위기도 안 좋아졌다. 나로서는 뒷맛이 씁쓸한 경험이었고 역시 정치는 가까이 할 것이 못 된다는 느낌만 재확인했을 뿐이다. 나로서는 위원회에서 정치적 색깔을 없애려고 노력했고 의식개혁 쪽으로 집중하려고 애썼던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로서는 위원장 임기를 한 번만 하고 끝낸다고 애초부터 약속했던 일이기 때문에 임기만료 2개월 전에 사직서를 내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그만두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학현연구실 및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출신의 경제학자들이 대거 정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김대중 정부에 참여했던 학현연구실 출신 인사들로서는 강철규(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 김태동(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이진순(한국개발연구원 원장), 윤원배 교수(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있었는데 사실 숫자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고 때로는 오해로 말미암은 보도도 많았다. 이들이 대부분 학현연구실 출신인 것은 맞지만 김대중 정부 참여는 모두 개인적인 자격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우리 연구소와 어떤 조직적인 관련을 가지고 참여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이들은 대부분 대통령선거 전에 김대중 씨를 정책 면에서 도와주었던 사람들로서 나중에 소위 ‘중경회(中經會)’ 멤버로 불리게 되지만, 사실 중경회라는 이름 자체가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 밤에 여의도에서 식사를 하면서 즉석에서 정한 이름이라고 하니까 그다지 결속력이 강했던 그룹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세상에서는 중경회와 학현연구실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중경회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선거과정에서 한두 차례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몇 차례 멤버들이 나에게 찾아오기도 했지만 나로서는 그냥 격려의 말 정도를 해 주고 그들의 주장을 경청했을 뿐이지 별다른 도움을 준 것은 없다. 아무튼 철저하게 개인자격으로 김대중 정부에 참여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연구소가 어떤 구속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 대부분이 과거 정권의 성장일변도의 정책으로부터 성장과 분배가 양립하는 경제정책에로의 전환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연구소가 지향하는 바와 성격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로서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에 참여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학현연구실 출신 일부 교수들이 김대중 정부에 참여하면서 언론에는 이때부터 ‘학현학파(學峴學派)’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정부에 참여하여 주로 성장우선주의 정책을 펴 왔던 서강대의 일부 경제학 교수와 그 제자들을 일컫는 ‘서강학파’에 대응하는 ‘학현학파’라는 의미에서 대서특필(大書特筆)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학현학파라는 명칭은 우리 스스로는 결코 부른 적이 없고 어디까지나 언론에서 흥미 위주로 붙인 명칭이다. ‘학파’란 어떤 동질적인 철학이나 이론으로 분류될 수 있는 학자들의 유파로서 예컨대 신고전학파나 케인스학파 등이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사실 우리 연구소 소속 회원 그룹을 ‘학파’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저 생각과 지향점이 비슷한 학자들의 ‘그룹’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차츰 이론을 개발하고 지향점을 분명히 해감으로써 미래의 어느 시기에 학파로 불려도 괜찮을 정도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헤겔학파’의 경우에도 좁게는 헤겔이 주도하던 잡지에서 활동하던 학자들을 일컫는 이름이었지만, 넓게는 헤겔의 이론을 지지하고 그에 의거해서 활동하는 학자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그 후자의 의미에서 우리는 학파라는 명칭을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희망하기는 좀 더 엄밀한 의미의 학파, 그야말로 철학과 이론을 공유하고 예컨대 학술지와 같은 활동영역을 공유하는 학파가 되었으면 한다. 많은 언론에서 정부에 참여한 학자들만을 가리켜 ‘OO학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대해서는 나로서는 반대의견이다. 묵묵히 연구현장에 남아 연구를 계속하는 학자들이 학파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부터 학자들이 정부에 직접 참여하는 것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름대로 포부를 가지고 참여한 것일 테지만 결과적으로 정치에 이용당하거나 혹은 ‘자리’에 대한 욕심으로 애초의 순수한 마음을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직 연구만을 통해 세상에 대해 발언했던 앨프리드 마셜을 본받고 싶다. 학자가 현실에 참여하고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길은 직접 정부에 참여하는 것 말고도 많이 있다. 예컨대 정부활동에 대해 감시, 비판하고 국회에 나가서 증언하거나 신문기고를 하거나 하는 것 등도 모두 간접적 형태의 참여라고 할 수 있다. 나로서는 이러한 형태의 참여가 학자의 본분에 더 맞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 이야기가 본질에서 벗어날 수도 있으나, 나중에 역시 연구소 핵심회원의 한 사람인 이정우 경북대 교수(노무현 대통령 정책실장)가 참여정부에 들어갔을 때는 격려한 적이 있다. 나로서는 이정우 교수가 자신의 출세욕 때문이 아니라 개혁정책을 실행코자 정부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해, 이는 이른바 ‘정치교수’ 혹은 ‘어용교수’와는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PP. 271-278

ㆍ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하게, 착실히
끝으로 ‘서울대 상대’에 이어 또 하나의 평생사업이 된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이야기를 하겠다. 학현연구실의 후신(後身)인 서울사회경제연구소는 사단법인 인가를 받은 뒤에도 서울 청담동, 서초동, 양재동 등에서 남의 건물을 빌려 셋방살이를 전전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연구소 소유 사무실을 마련하기로 결심하고 여기저기 물색한 끝에 광화문 근처의 오피스텔을 구입하게 되었다. 학현연구실 시절부터 계산하면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 집을 마련한 셈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고 교통도 편리해서 모두들 잘 마련했다고 해서 만족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연구소 회원들뿐만 아니라 서울대 상대 졸업생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물론 연구소 사무실을 비롯한 모든 재산은 나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사단법인 소유이고, 다시 말해서 우리 연구소 회원들의 공동소유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 회원들이 연구소 공간을 잘 지키고 활용할 수 있으면 나로서는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이사장 자격으로서 연구소의 다소 큰 방 하나를 쓰고 있는데 이제 슬슬 방을 비우고 연부역강(年富力强)한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이미 연구소 소장 자리는 후배 교수에게 넘겼다. 우리 연구소는 순수한 민간연구소로서 정부나 기업, 사회단체 혹은 그 어떤 정치세력의 영향도 받지 않고 오로지 회원들의 힘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연구소는 독립성과 학문적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연구소의 지향은 뚜렷하다. 연구소의 정관에도 밝혔듯이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경제구조의 확립방안을 연구하고 통일한국의 미래상을 그리는 것”이 우리 연구소가 추진해 온 변함없는 정신이며 앞으로도 이를 꾸준히 지켜갈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 연구소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우선 회원들이 참가하여 월 1회 월례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다양한 주제들이 발표되고 열띤 토론을 벌이곤 한다. 주제 자체는 다양하지만 역시 경제정의, 소득분배, 경제발전, 금융개혁 등이 가장 핵심적인 주제들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주로 젊은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세미나도 월 1회 개최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학술적 주제보다는 더 현실적이고 정책적인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 밖에 1년에 1회 정기 심포지엄이 개최되는데 이는 회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되는 행사로서 주로 그때그때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화두가 되는 주제들을 골라 발표, 토론을 하고 있다. 또 우리 연구소의 연구성과를 모아서 널리 알리기 위해 발간물도 열심히 펴내고 있다. 1년에 두 권씩 연구총서를 발간하고 있는데 벌써 33권이 넘어가고 있다. 또 매달 두 편씩의 논문을 닫은 워킹페이퍼도 발간하고 있다. 우리 연구소의 활동을 떠들썩하게 홍보하기보다는 조용히 내실 있게 연구활동을 계속해나가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 한국 경제에 관한 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학술단체, 연구단체로 그 구실을 계속해 갈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하게, 착실히 뿌리를 내려서 외부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연구소로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이런 방침으로 정부나 기업의 연구 프로젝트를 좇지 않고 꾸준히 학술연구를 계속해나가고 있다. P. 293-298

ㆍ집안 경제는 ‘빵점짜리 낙제생’
많은 후학들이 나의 개인사, 특히 집사람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집사람은 지난 2008년에 별세했는데, 집사람만 생각하면 몹시 미안하고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늘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30대의 나이에 서울대 상대 교무과장이 되었을 때부터 바깥일로 몹시 바쁘게 지내게 되었고 집에 손님이 많이 찾아와 손님접대도 많이 하는 등 집안생활이 무척이나 바쁘게 되었다. 이것이 집사람에게는 일종의 충격이 되었는지 이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이 조금 차도를 보이다가 다시 심해지고 하면서 거의 늘 몸이 아픈 상태였고 수술도 여러 차례 받았다. 병원에 그렇게 자주 다니면서도 암에 걸린 줄도 마지막까지 몰랐다가 겨우 3개월 남겨 놓고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이때는 이미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길어야 반년 정도 살 수 있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 입원했는데 그래도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에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노력했으나, 결국 입원한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종합진단을 1년만 일찍 받았어도 암을 빨리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회한이 남는다. 사실 나는 밖에 나가서는 한국경제가 어떻고 세계경제가 어떻고 하면서 떠들고 다니지만 막상 집안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빵점짜리 낙제생’이라고 이따금 집사람이 말하곤 했다. 그만큼 내가 가정경제에 무심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집사람은 일생에 걸쳐 남편만을 믿고 성실하게 살았다. 나에게 밖에 나가서 돈 벌어 오라는 소리는 단 한 차례도 한 적이 없다. 특히 사회적으로 이름난 자리에 내가 가는 것을 나보다도 집사람이 더 싫어했고 나에게 늘 자리를 거절하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남편에게 출세하라고 닦달한다지만 집사람은 이를 달갑지 않게 여겼는데 이것이 나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도움이 되었다. 어떤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내가 판단하기 어려울 때 한두 차례 집사람에게 의향을 물어본 적이 있는데, 일언지하에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잘라 말해서 사양한 적도 있다. 나는 외국에 나가도 절대 집에 전화를 안 할 정도로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했다. 내가 원래 유교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가치관이 좀 전통적이라고 할까 보수적이라고 할까 하는 점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보면 답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PP. 298-300

ㆍ경제학이란 인간의 연구다
현대경제학은 시장경제를 절대만능으로 여기고 이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물론 시장경제가 계획경제에 견주어 우월한 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만능은 아니다. 시장은 스스로의 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부가 이에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시장이냐, 정부냐”의 2분법이 아니라, 어떠한 방법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더 필요한가 하는 인간 중심의 시각을 가지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책 속의 추상적인 이론이나 모델에 머물지 말고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현실 속에서 실제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데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앨프리드 마셜이 했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셜은 그의 주저인 ‘경제학원리’의 첫 페이지에서 “경제학은 부(富)의 축적에 관한 연구인 동시에 인간(人間)에 관한 연구의 일부”라는 명언을 남겼다. 다시 말해서 경제학은 인간 중심의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P.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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